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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 윤한봉 회고록
윤한봉 지음 / 한마당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민선 6기 광주광역시장으로 선출된 윤장현(1949년생) 당선인은 5•18 당시 조선대병원응급실에서 시민(계엄)군을 치료했다. 그 이후 당선인은 5•18기념재단 창립 이사가 되었다. 저자는 2009년에 5•18기념재단 이사장이며 나의 고교 은사 윤광장님의 친동생이다. 또한 전 광주시의원 윤난실(지혜학교이사장)씨가 저자의 조카다. 모두가 광주가 낳은 운동가다.
저자(합수)는 70년대 이래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다. 전남대 재학 중인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주모자로 수배. 도피 중 '81년 4월, 동지들의 도움으로 화물선에 숨어 미국으로 밀항, 정치 망명자가 되었다. 해외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재미한국청년연합, 한겨례운동 재미동포연합, 해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하여 탁월한 조직가이며 운동가로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반전반핵 세계평화운동, 제3세계 연대운동에 헌신했다. 김재규 장군의 박정희 시해가 시작이었다면 저자는 광주민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였다.
저자는 뛰어난 '조직가'다. 대한민국을 넘어 미국에서 망명 정부의 투사처럼 처절하게 국내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도산 안창호 등과 버금가는 민족운동가였다. 20세기초 이태리계 이민자들이 그랬듯이 저자는 단신으로 밀항 망명한 가난하고 쫒기는 운동가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요주 인물로 지목했다. 특히 그의 불안한 신분속에서 자신의 투쟁 의지를 심어가는 노력은 물산장려운동처럼 아껴가며 합법화된 운동자금을 모으고 운영했다.
조국과 달리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고가 거의 없고 이민 온 시기가 달라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 경험이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지식의 정도, 사고방식, 언어구사능력, 정서 등이 천차만별인 청년들, 게다가 조국의 청년들에 비해 의식수준이 낮은 청년들을 상대하면서 저자는 당혹감도 많이 느꼈고 애로도 많이 겪는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해외 동포들의 운동 참여 동기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개인적이었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없는 한 조국 동포들의 운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 반해 동포들은 개인적 충격이나 감동 같은 운동 참여의 동기가 약화되거나 운동 과정에서 긍지와 보람을 못 느끼고 실망하거나 심한 비판을 받거나 갈등, 충돌 등을 겪게 되면 쉽게 운동을 중단하거나 포기해 버렸다.
윤한봉 열사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재산목록을 작성한 후 꼭 필요한 속옷, 고무신, 등은 포함한 20여 가지의 물건들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을 그의 동지들에게 다 주었다. 그의 재산목록 1호는 손목시계였고 2호는 만년필이었다.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빙과도 팔고 월부 책장사도 하고 포장마차를 운영했었다는 이야기 따위를 청년동포들에게 들려준 후 소득증대와 소비절약을 구호처럼 되풀했다. '93년 수배 해제되어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 광주에서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5•18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는 등 활동 중, 밀항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여겨지는 지병인 폐기종으로 힘겨워하다 2007년 6월 폐 이식수술 직후 합병증으로 타계 했다. 201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