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30만부 기념 특별 리커버)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쪽) 소설의 첫문장이다. 첫 문장이 너무나도 강열하게 시작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외동딸이 갑작스럽게 장례식을 준비하며 조문객들을 만나면서 떠올리는 아버지의 인생이 하나씩 펼쳐지기 시작한다. 화자인 딸의 존재와 아버지가 빨치산의 빨갱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면서 자신도 빨갱이의 딸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가난하게 살아온 긴 세월을 추억하게 된다. 노동과 가깝지 않았던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면서 농사를 지은 이유까지도 들려준다.

작은아버지를 장례식장에서 기다리지만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곁에서 죽음을 보고 말문을 닫았던 작은 아버지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다. 겹겹이 닫힌 이야기들이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찾아온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딸은 아버지를 새롭게 알아가게 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해하고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이지만 이 소설의 아버지는 더욱 베일에 가려진 한 사람의 인생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조문객이 많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진심들이 거미줄처럼 엮어진다. 진보와 보수라는 양쪽 인물들의 조화로움과 감시당하는 아버지와 보고하면서 살아온 긴 인생의 사상적 역사도 함께 술을 권하면서 이야기 나눌 정도로 대립한 것들이 무의미하게 흘러가게 된다. 딸의 눈에 들어온 부모의 혁명과 민중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하나둘씩 전해진다. 인간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모습들이 이야기에 등장한다.

사상 없고 신념 없고

(그쪽은) 순경 그만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소. 180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였다. (딸과 담배) 245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 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 169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비아냥거릴 자격이나 있었던 것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추모제. 노인의 눈빛은 젊은 나보다 더 형형했다. 148

목숨을 바칠 각오로 뛰어든 20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인다. 친일파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혼돈의 시대가 찾아온 나라이다. 연좌제로 직업 제한까지 당했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전기고문으로 사시가 되고 자식을 낳지 못할 만큼 당했던 고문과 처참하게 죽은 동지들의 최후의 모습까지도 아버지는 수없이 보고 살아남았음을 알게 된다. 곁가지처럼 벗어나가면서 누군가에게는 눈물 날 정도로 희망을 심어주며 응원도 해준 아버지이다. 격동의 시대, 분단의 아픔이 이제는 일상이 된 우리들에게는 잊힐 뒤편의 역사이며 인물들이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이 혼재하면서 살아간 시대의 이야기들에 점점 먹먹해지게 하는 소설이다.

죽은 사람의 몫까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독한 술을 매일 마셔야 하는 이유들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딸은 아버지를 죽은 이후에 이해하기 시작한다. 조소와 비아냥으로 점철된 세월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도 알게 된다. 인간적인 아버지, 이웃 할배인 아버지, 누군가의 아버지와 같았던 아버지, 동지의 아내와 함께 살아간 긴 세월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작은아버지의 등장과 작은아버지가 뒤따라와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준 순간의 이야기도 잊히지 않는다. 감당하기 힘든 시대의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긴 세월 술과 노동으로 견디어온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나라에 빼앗긴 어린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상과 혁명, 민중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대물림되면서 늪처럼 빠져들게 했는지 보게 된다. 결혼도 사랑도 자유롭지 못하였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된다.

소설 『오만과 편견』이 등장한 이유가 설명된다. 화자인 딸의 귀결이 이 소설과 상통하게 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온전하게 지탱한 것들이 없다. 무언가에 빼앗기고 상실된 이야기들로 가득해진다. 기우뚱한 신체만큼 구멍 나고 헤집은 이들의 이야기들이 무엇도 가볍지가 않다. 활짝 펼쳐진 아버지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례식장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먼지로 돌아가도록 도와준 딸의 움직임과 장소들이 그의 해방의 순간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감시당하고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며 차별당하였던 아버지의 사회주의, 빨갱이는 편견과 관습에 물들이지 않고 곁을 내어주면서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라는 말을 건네고 장래 준비를 하도록 응원하여 준 할배였음을 보게 된다. 화해하고 이해하는 딸의 모습도 소설의 진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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