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평점 :
익숙함에 길들여진 삶의 여정과 갑자기 찾아온 알 수 없는 열정을 멀리 보내지 않은 용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곰곰이 살펴보게 하는 소설이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신이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익숙한 직업, 삶을 갑자기 뒤편으로 넘겨버리는 단호함과 용기를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우연히 다리 위에서 마주친 여자가 남긴 이마 위의 전화번호 숫자를 지우지 않고 자신의 수업시간에 들어간 선생님에게 찾아온 사건들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의 저자의 글을 번역하면서 읽고 리스본행을 과감하게 감행하는 그의 선택에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자력을 느끼게 되면서 그동안 그가 꾸준히 구축했던 라이프 스타일에서 예측할 수 없는 리스본행 여행임을 알게 된다. 주인공인 선생님이 의심조차 하지도 않았던 그만의 삶의 구축을 흔들어 놓은 것과 발길이 향하는 리스본에서 그가 찾아간 책 속의 저자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하나씩 마주보게 되는 여정이 된다.
책을 집필한 저자는 의사이다. 출간을 한 사람은 그의 여동생인 간호사였고 파란병원이라는 건물을 찾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책의 저자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삶의 궤적을 일탈하는 용기,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단단한 안전한 궤도를 이탈하는 그의 여정에서 무모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이 보여준 태도와 말, 삶까지도 무의미한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전혀 다른 삶, 모양새로 살아가는 그들의 인생들의 아주 작은 단편적인 흔적이지만 그들과 나누는 대화, 그들의 기나긴 삶의 흔적들에서도 허투루 버릴 흔적들은 없었던 소설이다.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기억하느냐에 따라 깨닫는 것들도 무수히 많아진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단단한 갑옷 같은 하나의 사람이 갑자기 여행을 다녀와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의사의 모습을 회상하는 여동생의 이야기부터 살펴보게 된다. 그에게 일어난 일들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판사였던 아버지가 의사가 되라고 해서 의사가 된 인물이다. 귀족이며 조상들이 물러준 부를 유유하게 즐기며 살아간 귀족의 아들이다. 영특하여 평이한 아이들과는 달랐던 아이였고 장남이라 부모의 기대감을 충족시킨 아들이기도 하다. 아들의 영특함이 보내는 신호에는 판사인 아버지를 향한 분노까지도 감지한 아버지의 예리함까지도 놓치지 않게 된다. 서로가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을 선택하면서 글로 남긴 글에서 서로가 가졌던 감정들은 소설에서 멋지게 전해진다. 단단하게 기록된 글이지만 보관되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글들이 있다. 글에는 영혼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일상에서 만났던 인물의 내면까지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혼의 내면이 얼마나 응축되고 깊었는지 이해하면서 젊은 날 잘못 이해하고 말했던 그를 회상하기도 한다. 단면을 알고 전부를 이해한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 귀퉁이의 조각 같은 부분을 알면서 사람의 전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삶이 얼마나 많은지도 소설을 통해서도 알게 된다. 한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퍼즐 조각들을 맞추어야 했는지 보여준다.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책의 저자가 궁금해서 낯선 언어를 가진 도시를 향한 중년의 선생님의 과감한 선택과 용기, 여행길은 꽤 값진 여정으로 남는다. 철학자가 집필한 소설을 좋아하게 된다. 이야기로 만나는 저자의 세계와 가치들을 주워 담으면서 또 다른 저자의 책들을 읽고 싶다는 호기심을 자극받게 된다. 무더운 장마에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 소설이 함께해 주었기 때문이다. 멋지다는 말을 무수히 떠올릴 정도로 감탄하게 한 소설이다.
의사였던 중고책의 저자가 졸업식에서 연설한 글과 아브라함과 욥을 통해 신을 향했던 마음의 흔적들도 기억에 남는 글이 된다. 성서와 시, 단어와 언어, 침묵과 글, 책과 인생, 구속과 자유, 귀족과 소작농, 부자와 노동자, 비밀경찰과 저항운동, 고문과 남겨진 흔적, 법과 판사, 종교와 불경한 사제, 사랑과 욕망, 죄와 고백 등 무수히 많은 것들을 매만진 소설이다. 지금도 단단하게 구축된 수많은 것들이지만 의사가 제시한 의문들과 타인들을 무수히 살폈던 움직임과 마음들을 기억하게 한다. 가난한 암환자에게 보였던 선의와 악독한 인물을 살려낸 의사에게 가해진 혹독한 판결과도 같았던 의사 얼굴의 침세례는 사형선고와 같았음을 떠올리게 된다. 여동생을 살리고자 처치한 순간적인 판단과 행동을 괴물처럼 바라본 가족들의 모습도 기억하게 된다. 군중속의 외로움이 무수히 감지되는 인물이었다.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언어의 유희를 즐겼던 그의 시는 종교적인 부담감까지도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시의 자유, 언어의 자유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였는지도 보게 된다.
멈추었던 시간과 짧은 시간 속에서 긴 시간을 느끼게 한 여행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정지된 시간으로 멈추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짧은 시간 속에서 길게 만나게 상대적인 시간이 되기도 한다. 죽음은 갑자기 누구에게나 찾아오기도 한다. 아내의 죽음, 의사였던 중고책의 저자에게도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온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보게 된다. 복종하느냐, 관습을 의심하며 자유를 선택할지도 개인의 몫이 된다. 오래된 언어에 매료되어 살았던 중년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변화의 움직임을 하나씩 감지할수록 새롭게 전개되는 그의 시간들은 또 다른 가치로 남겨진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에서 언어가 사람들의 빛이라는 사실을 소설 전부에서 찾게 된다. 독재적인 친근함과 친근함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독이라는 글귀도 기억에 남는다. 더불어 이별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이라는 문장도 매료된다. 어제의 이별과 오늘의 이별에서 스스로의 편에 선 이별들을 상기해 본다. 소설의 여러 인물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별들도 하나씩 다시 주워 담는 시간도 가져보게 된다. 그들이 선택한 이별의 가치들은 빛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이별한 것들의 폭이 다양했음을 확인하게 되는 소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 평화를 찾는다는 것, 자신과 화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 보여준 작품으로 남는다. 태어나면서 구속된 것들과 기대감에 억눌린 것들이 많았음을 스스로 자각하면서 해방되는 순간을 스스로 찾아간 그의 여정은 독자들에게도 큰 획을 그어준 소설로 남는다.
용암과 같은... 영혼은, 자기를 억누르는 모든 압제와 요구를 태우고 쓸어버렸다... 그는 자신을 향한 모든 기대를 실망시키고 금기를 깸으로써 구제됐고, 등이 굽은 채 판결을 내리는 아버지와 야심만만한 어머니 부드러운 독재, 평생 숨이 막히도록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생으로부터 해방되어 드디어 평화를 얻었다. 스스로와도 화해했다. 향수병은 사라졌다. 이제 편안함을 주는 파란색과 리스본도 필요 없었다. - P5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