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암스테르담』을 읽고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소설이라는 이 작품은 시대적 격동을 살았던 이들의 삶을 투영해준다. 사랑하는 두 부부에게 찾아온 이분법적 사고의 폭풍은 이들의 사랑의 중심점을 찾지 못하게 한다. 같은 이념을 가진 공동체였던 두 부부는 신혼부부였고 임신한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내가 경험한 일들은 적잖은 후폭풍으로 남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검은 개'라는 상징적인 어휘로 가족들에게 강하게 자리잡는다. 아내는 남편 곁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는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자녀들도 온전한 가족형태를 유지하지 않는 부모의 양육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자녀들이 더 이상 부모들에게 기대하지 않고 포기한 상태의 노부부의 결혼생활의 원인과 결혼생활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회고록 형태의 소설이다.



동지라고 호명되었다가 사위라고 부르는 장인어른의 굳건한 가치관의 맥락은 공산주의에서 시작된다. 사위가 살아가는 삶의 패턴에서 호명의 변화는 큰 의미를 가진다. 저명한 인사인 장인어른의 인생과 장모의 인생은 방향부터가 확연하게 차이를 이룬다. 노부부의 결혼생활은 팽팽하다. 한치의 느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절대로 함께 살수 없는 부부이다. 신을 거부하고 신을 믿는 경험들이 접점을 찾지 못하는 부부이다. 갑자기 어느 날 찾아온 기묘한 빛깔의 경험이라는 것을 장모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이다. 위급한 상황에 기도한 그녀가 경험한 것들과 그녀가 본 두 마리의 검은 개의 정체를 전해 들으면서 그녀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큰 물결이 된다.

사랑하지만 서툴렀던 부부가 노부부가 되어서도 자신들이 만든 경계선을 허물지 못하면서 삶을 정리한다. 이 부부가 인생을 낭비한 죄가 전해진다. 지성을 채운 이 부부에게는 각성이 부족하였음을 엿보게 된다. "지성이 세상을 밝히고 각성이 삶을 결정한다고." (은희경 소설. 중국식 룰렛) 서로의 지성은 양극으로 대립하면서 접점을 찾아보지도 못하면서 삶을 마감한다. 악이 내부와 개인, 가정에 존재하면서 아이들을 가장 고통받게 한다는 글귀가 선명해진다. 노부부의 결혼생활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자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화자의 누나의 결혼생활로 피해를 본 화자와 누나의 딸 샐리도 같은 피해자가 된다. 폭력적인 어른들의 결혼생활은 답습이 되면서 샐리의 결혼생활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프랑스 가족이 자녀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울지도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화자가 관여하는 장면도 어린 자녀가 피해자로 드러난다.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매만진 작가의 시선의 끝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악이 어떤 방식으로 모두에게 존재하는지 살피게 하면서 악의 나라를 향하고 잔혹함이 어떻게 많은 생명을 치워버렸는지도 소설에 등장한다. 수용소를 탐방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것임을 전한다. 쌓여있는 신발들과 악의 잔해물인 검은 개의 존재까지도 매만진다. 마을에서 쫓겨난 여인을 향한 이야기도 기억해야 한다. 술주정뱅이가 하는 말을 믿고 수군거리고 수치심을 준 마을 사람들도 잊어서는 안된다. 검은 개는 우울한 감정을 불러 세운다. 악행의 상징성을 부여받는다. 전쟁, 침략, 아들과 형제의 전쟁으로 인한 죽음, 영국을 향한 원망, 적십자에서 봉사, 동독과 서독의 통일 기대, 국제적 정세가 전해진다. 헝가리,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여러 국가들의 상황들을 살펴보게 한다. 장모가 프랑스 남부 시골에 정착하면서 홀로 생활한 이유와 자녀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노부부의 상황들을 들려준다. 적대적으로 서로를 판단하지만 사랑했던 노부부이다. 이러한 부부들과 가족 이야기는 낯설지가 않다.

악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고 있지. 개인의 내면에, 사적인 생활 속에, 가정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결과 가장 고통받는 건 아이들이야. 그다음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에 끔찍한 잔혹성이, 생명을 억압하는 사악함이 터져 나오고 ... 자기 안에 있는 증오의 깊이에 놀라는 거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 244

결핍과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있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화자는 부모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면서 성장한다. 누나의 삶은 너무 빠르게 기울었고 동생이었던 화자는 연애조차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게 영향력을 주는 누나가 된다. 노부부의 자녀들도 다르지가 않다. 부모는 존재하지만 자녀와 왕래하지도 않는 상황이다. 가족을 선물받았지만 온전하게 유지하며 보호하고 살피지 않는 부모와 어른들이 자주 등장한다. 악행은 너무나도 쉽게 물들인다. 아집과 폭력은 서서히 그들의 주줏돌을 무너뜨린다. 허물어져가는 가족들과 금이 가는 가족관계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늦지 않는 시점에 멈추어야 하는 악행을 모두가 멈추지 않는다. 가족관계에서도 전쟁과 사상 대립도 다르지가 않다. 어리석음과 광기는 역사와 사회 전반에 유유히 흘러넘친다.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들이 무엇인지 소설을 통해서 펼쳐놓는다. <이제, 곧 죽습니다>드라마가 전하는 강력한 주제가 생각난다. 책 『군중의 망상』에서 니체는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물지만 군중과 정파와 국가와 세대에서는 차라리 규칙이 된다." (45쪽)라고 전한다. 이 소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젊은 남자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인을 구하는 젊은 여자와의 만남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된다. 수용소가 휩쓸어버린 마을 사람들의 생명은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뽑힌 손톱의 일련번호, 쌓아 올려진 신발 무더기로 기억하면 되는 걸까.



혐오하는 감정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은 거대해진다.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비리와 정당화되는 폭력들이 비일비재하면서 당원들은 떠나게 된다. 미련하게 끝까지 기대하는 것과 노동자와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상가의 유토피아는 모순의 대명사가 된다. 실천하는 사상가가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사상가의 대표가 장인어른으로 기억된다. 반면 당원을 탈퇴하기 전의 장모는 장인과는 대조적인 실천적인 사상가로 기억된다. 폭행당하는 장인을 구해준 젊은 여자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아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확인하게 된다. 이해하고 포용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절실해진다. 사랑의 의미는 경계선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나의 것, 너의 것, 무수히 많은 구획들을 나눈다. 그렇게 어리석은 군중, 정파, 국가와 세대로 나뉜다. "추상적인 원칙들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모 준이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단기적, 실용적, 실현 가능한 목표들뿐" (243쪽)이라고 말하는 그녀가 있다. 어영부영 보낸 세월에는 노부부의 아집과 분노가 혼재한다.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어려운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팽팽한 싸움은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유럽 역사에서 선을 기대한다는 것과 망각을 거론하는 작가의 기나긴 고찰이 전해진다. 이들의 역사만큼 우리의 역사도 다르지 않기에 이 부부의 삶은 이 땅의 삶과도 연계하게 된다.

함께 살고 싶어하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부모. 악과 신의 존재를 믿었으며.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확신한 준은 버나드를 설득할 수도 떠나보낼 수도 없다는 걸 확인. 버나드는 준을 사랑했지만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그녀의 폐쇄적인 삶에 분노 242

망각은 비인간적이고 위험하며 기억은 끝없는 고문이 될 터...

이런 먼지와 홀씨로 뒤덮인 유럽에서

어떤 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