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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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편의 단편소설들 중에서 『일 년』『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소설을 떠올려본다. 평이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엇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것이 최은영 작가만의 장점이 된다. 병문안을 온 큰아버지 부부의 통성 기도와 찬송가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남겨지는 흔적이 되고 어떤 큰아버지 부부였는지도 지긋하게 눌러서 흔적을 남긴다.

신앙인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큰아버지 부부이다. 대외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활동을 할지 모르지만 내면에는 정이 없는 종교인, 가족을 아프게 한 사람들임을 부각시킨다. 신약성경 말씀이 무수히 떠오르게 한다. 드러나는 종교적 활동이 아닌 마음을 살피시는 분의 음성과 말씀이 『일 년』소설을 통해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종교적 발걸음과 목소리보다도 마음을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가 소설에서도 등장한다.

그녀와 별다른 정이 없는 큰아버지 부부가 찾아와

통성 기도를 해주고 찬송가를 불러 줬다 88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88



사회생활의 고충이 전해진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빠서 겉도는 생활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일침도 작품에서 전해진다. 우리의 얼굴과 몸짓, 목소리들은 어떤 울림을 던지는 존재인지도 지긋하게 살펴보게 한다. 혐오스러운 존재로 사회적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지도 질문한다. 가해자가 되어서 웅장한 몸짓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존재는 아닌지 예리함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턴 제도, 계약직이라는 말의 근원과 의도부터 살펴보게 한다. 쉽게 정리 해고하는 제도가 이 사회에 정착하면서 젊은 청년들은 순응하면서 기업이 원하고, 자영업자들이 원하는 알바에 순종하는 시스템임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갖추어도 청년들은 쉽게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3년 차 사원과 1년 계약 인턴인 그녀와 다희의 이야기와 대화가 흐르는 소설이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다." (124쪽) 서로의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이들은 그렇게 비켜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지긋하게 바라보게 한다. 사회문제까지도 소설을 통해서 묵직하게 고찰하게 한다. 겹겹이 쌓여서 미묘하게 흐르고 있는 이 사회의 문제들을 뾰족하게 세워올리는 작품이다.

내가 회사에서 좀 겉돌았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왜 선배 잘못일 거라고 단정해요?

다른 사람들이 나빠서일 수도 있지. 109

회사 사람들의 얼굴, 목소리, 몸집...

그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혐의를 발견해냈다.

자기 속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109

다희라는 사람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113

기업에서 요구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갖추어도

좋은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세상 111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소설에서 기남의 부모는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키우기 귀찮아서 헐값에 다른 집에 치워버린 아들 없는 집의 여섯 번째 딸이다. 그집에서 식모로 성장하면서 무보수로 일한 여성이다. 자신의 존재를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기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부장제와 유교주의가 낳은 병폐가 전해진다. 키워준 집에 고마움을 느끼며 성장했지만 그들의 속내도 알게 되면서 더욱 큰 상처가 덧칠해지는 기남의 삶을 짐작하게 된다. 나중에 연락이 된 큰 언니와 친어머니의 생신잔치에서의 모습도 놀라움을 전한다. 버려진 딸아이를 만난 친어머니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람 가죽 쓰고서 무슨 죄를 받으려고 딸아이를 다른 집에 헐값에 치워버린 부모의 죄가 언급된다. 가장 추운 날에도 냉골 같은 기남의 방도 잊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용기를 내어 월급을 요구하는 기남의 외로운 의지도 기억해야 하는 소설이다. 어린 기남이가 느낀 깊은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분노는 기남에게 약이 되었다." (282쪽)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유교주의가 소설을 통해서 드러난다. 잊고 지낸 이 사회의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선명해진다. 『세 자매』 영화의 대사처럼 가해자들로부터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지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반복되지 않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여성의 인권이 유린되지 않도록 무참하게 지워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읽다 보면 무수히 작가 시선의 끝에 머무르게 된다. 전개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인물들의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악습과 관습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하진도 매만지는 작품에 매번 놀라게 된다. 악습의 견고함 속에서도 단단하게 목소리를 전하는 작가의 작품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이번에도 여러 번 작가의 작품에 푹 빠져서 천천히 읽은 도서이다. 아끼면서 조금씩 한 편씩 읽었다. 빨리 보내고 싶지 않은 작가의 소설들이었기에... 오랜 시간 곁에 쌓아두면서 꾸준히 읽었던 소설들이다. 마지막까지 감탄하게 하는 작가이다.

부끄러워해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운 것이라고 말하는 손자가 건네는 말과 함께 기남의 부끄러운 역사들이 열거된다. 기남의 부끄러운 역사들에는 우리의 할머니, 우리의 어머니, 우리들의 이야기가 녹아흐르고 있음을 보게 한다. 한국 사회의 여성의 역사가 어떻게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는지 보면서 수치스러운 역사가 멈추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된다. 이 시대 우리들의 딸들은 이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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