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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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단편소설집이다. 흩어지지 않는 잔상이 오랜 시간 남겨지는 단편들이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는 사람이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탐욕스러울 만큼 집착하였던 그녀는 어떤 삶을 떠올렸을까.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식이 진행된 후 어머니와 오빠가 두 자매에게 보여준 폭력들은 언어와 물리적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상속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은 괴물스러운 형태로 가족집단을 흩어놓는다. "어머니와 하루걸러 싸우고 대들고 울고 엎드려 비는 일들이 반복되었고, 심지어 오빠에게 얻어맞아 병원과 경찰서에 가는 일까지 벌어진 사정" (236쪽) 어머니와 아들을 상대로 상속분 소송은 3년 후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들에게 남은 것은 어떤 상흔들일까.

술 취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당할 폭력을 짐작하면서 벌벌 떠는 강아지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학대의 사슬은 그러하다. 과거의 자신은 피해자이지만 미래의 자신은 가해자가 될 학대의 사슬이다. 학대받은 자신의 젊은 날을 보내야 한다. 죽음과 같았던 날들에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희망을 외치기 시작한다. 도망가지도 않는 그녀. 서두르지도 않고, 앞지르지도 않는 그녀. 홀로 서 있지 않을 그녀가 보이기 시작하는 <기억의 왈츠>이다.

어머니 앞에 엎드려 울며 다시 착한 딸이 되겠다고 빌고...

끝장 보자고 대들다 오빠에게 머리를 두들겨 맞고 쓰러져 240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가정의 모습을 마주하게 한다. 투영되는 그녀의 지난 일들은 감당하기 버거운 젊은 20대의 이야기이다. 어머니와 오빠는 두 자매를 상속재산 문제로 집에서 내친다. 모자의 단결과 두 자매의 외로운 싸움은 3년으로 간결하게 종결되지 않는다. 그녀와 여동생의 삶에 깊고도 깊은 상흔이 되어 여동생 부부는 그녀를 노부모 돌보듯이 챙기는 삶으로 연결된다.

두 딸들에게 어머니는 무엇을 남겼을까? 오빠는 두 여동생에게 어떤 폭력을 남긴 것인가. 이러한 가족들이 지금도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폭력과 학대에 홀로 서 있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어린 10대부터 젊은 20대까지 그렇게 홀로 싸우는 과거의 여성이 있다. 도망가지 않고 홀로 서 있지 않는 여성들이 되도록 힘을 주는 소설이다. 그 싸움에 이긴 수많은 여성들도 있다. 차별과 학대, 폭력이 가정에서 어떻게 자행되는지 떠올려보게 한다. 봉건적인 가정에서 딸들을 학대한 부모와 남성 형제들이 있다. 그들은 여동생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전혀 모른다. 자신의 인생에는 그러한 상처와 학대와 폭력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을 교육시키는 것을 아까워하는 부모, 학비와 양육비까지도 모두 청구하는 부모가 이 시대에도 있다. 대외적으로 남의 눈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교육시킨 부모는 아들보다 더 똑똑한 딸이 못마땅하다. 이 소설집에서는 그러한 부모가 있다. 봉건적 가정에서 성장한 오빠들이 보인다. 소설 속의 여성들이 곧 내가 된다. 모든 여성들의 삶에 존재한 부모들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 172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무력하게 좌절하지 않은 여성들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지만 홀로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야 한다.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사는 지금도 전쟁터와 같다. 집집마다 다른 역사들로 여성들을 학대한다. 자신의 존재가 있지도 않은 듯이 살아간 마리아가 되어서도 안된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소설 마리아의 인생은 아프게 전해진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살아있지만 누구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이다. 아파서 죽어가지만 그녀의 죽음까지도 아무도 알지 못하였던 마리아이다. 이름없이 존재감 없이 삶을 살아간 무수한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그러한 여성이 없기를 소설을 통해서 희망하게 된다. 누가 마리아를 이렇게 살도록 방치했는지 질문하게 된다. 봉건적 가정의 폭력에 노출된 어린 여자아이는 그렇게 흐릿한 존재로 생을 살게 된다.

끈질긴 온화함. 밀랍 가면 같은 표정을 고수했다 150 <깜빡이>

남편으로서 아내가 이렇게 잘 웃던 여자였던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1 <무구>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많이 웃고 죽자고 담배를 피워대고 겁없이 땅을 사고 했다는 것을. 144 <무구>

사람들이 막 미치는 게 보이니까, 막 던지고 막 주워먹고, 했다. 128 <무구>

저 가여운 부부도 미쳐가는 중일 거라던 현수의 말 137 <무구>

소설은 생각하는 힘을 준다.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 이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신앙인이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알기에 작가가 지속적으로 질문한 그들의 신앙적 삶은 허깨비처럼 보이게 한다. 실천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신앙은 무의미한 몸짓일 뿐이다. 율법적인 생활이 신앙적 삶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변화하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만이 신앙인임을 다시금 보게 하는 소설도 만나게 된다.

참회해야 할 생각을 끊임없이...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걸까. 88 <하늘 높이 아름답게>

그들은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해 그런 허튼소리들을 내뱉는 것일까. 113

딸들의 노동력은 가축이나 토지와 마찬가지로 그 생산성의 크기에 따라 가치가 매겨졌으므로, 맏딸에 비해 막내딸은 훨씬 더 열등했다... 숨어서 공부했고 숨어서 성당에 나갔고 숨어서 일을 꾸몄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도 숨어서 약을 먹고 주사를 놓았으므로 마리아가 죽을 만큼 아프다는 것을 눈치챈 이웃이나 성도는 아무도 없었다. 88 <하늘 높이 아름답게>

이혼한 엄마가 있다. 엄마의 기나긴 죽은 듯이 보낸 시간들이 딸을 통해서 전해진다. 딸은 엄마를 이해한다. 처음으로 엄마가 가출한 날. 엄마가 사라진 날이다. 그날 어린 그녀는 엄마가 죽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그런 느낌이 엄습하면 육체적 고통이 그녀를 짓누른다. 그러한 딸의 모습은 현재진행형이다. 엄마가 죽은 것 같다는 느낌은 그렇게 딸과 혼재하면서 괴롭힌다. 엄마가 곁에 있지만 그녀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게 한다. 그러한 딸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달라진다. 이혼 후 자신의 집에도 초대하고 딸을 위해 자신을 먼저 챙기기 시작한다. 언제나 타인을 먼저 챙긴 엄마이다. 엄마의 희생이 정답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딸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먼저 챙기기 시작한다. 엄마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준다. 그러한 시작, 출발이 소설을 통해서 전해진다. 참고 지낸 것이 정답이 아니다.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이혼이다. 그러한 여성들이 너무나도 많다. 죽을 것 같아서 이혼했다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진솔하다. 사랑하는 자식이 있지만 그녀들은 살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75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을 것 같다는 결혼생활은 또 무엇일까. 사회적 제도에 여성을 가두려 한다. 갇히지 않고자 움직이고 행동하는 여성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결혼이며 이혼이다. 결혼도 반대한 부모, 이혼도 반대한 부모가 소설에 등장한다. 가족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선택한 결혼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여성이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는 것이 이혼이었던 여성이다. 이혼 후 안정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삶을 지속한다. 전 남편의 재혼 소식에도 질문이 없다. 이유는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답변한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던 결혼생활이었음을 보여준다. 무관심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결과물이다. 그녀의 이혼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삶들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수많은 생각나무들이 여러 겹으로 가지치기를 하게 한 작품들이다. 단편소설들이라 쉽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없었던 소설집이다. 하나의 이야기 나무를 오랜 시간 생각하게 하는 인물들이며 사건들이다. 무엇도 가볍지 않았던 소설이다. 여성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며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달된 작품이다.

벌벌 떠는 강아지는 나의 과거 같았고, 술 취한 여자는 나의 미래 같았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생사를 가르는 모음 238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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