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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작가의 3대 장편소설 중 하나인 작품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분위기를 읽고 있는 내내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다.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작가가 작품에 등장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의미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책장은 전혀 무겁지 않은 작품이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재미까지 주는 소설이지만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성향, 가치관들이 저마다 달라서 매우 상징성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왕족이 보이는 성향들도 놓치지 않고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속물이라고 말하는 자상하고 배려심이 많은 엘리엇의 삶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기억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가 왜 그의 많은 모습들과 그의 가치관과 마지막으로 남긴 말까지도 작품을 통해서 호흡했는지 놓치지 않게 한다.
이사벨의 엄마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은 도시의 기준에 맞춰 나름대로 그들을 날카롭게 판단했을 것이다. (130쪽) 난 지금 내 모습이 만족스러워요 (133쪽) 그녀가 미망인이 되어서 선택한 곳과 저택은 엘리엇과의 삶과도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의 관습을 중시했다. 딸의 결혼에도, 딸의 가치관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관습들이 딸에게도 투영되고 있다. 이사벨과 약혼자 래리와의 대립되는 의견들은 흥미롭게 읽은 내용 중의 하나이다. 이들의 결혼은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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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하고 돌아온 래리. 래리가 보여주는 모호한 모습들이 기억에 남는다. 동네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의 모습은 참전 후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카시지>, < 눈먼 암살자> 작품들이 떠올랐다. 위태롭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은 어떻게 삶을 지탱하는 방향을 잡아갈지 궁금했다. 래리가 선택하는 것들, 의문을 가진 것들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있을까? 래리가 보여주는 여정들과 과정, 기묘한 경험들, 스스로 선택한 다양한 결정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래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계기는 전쟁중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이 가지는 의문과 질문들은 신과 악, 불멸의 영혼으로 향하게 된다. 그 과정들에 그가 경험하는 것들을 만나보는 순간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별빛, 새벽, 고매한 영혼을 보는 순간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래리가 보고 경험한 것들은 잊지 않게 된다.
태어난 지역, 아파트나 농가, 어릴 적 하던 놀이, 민간 속설들, 먹는 음식, 공부한 학교, 좋아하는 스포츠, 읽은 시들, 믿는 신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한다. 12
고매한 영혼을 가진 여자라고 떠올리는 래리의 여인이 있다. 그녀가 보여줬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작품속에서도 만나보아야 한다. 래리가 왜 그녀만을 결혼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유일한 여인이었던 이유가 작품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사벨이 왜 래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않은 여인이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280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280
열정에 대한 대화 내용도 놓치지 않게 된다. 이사벨과 래리가 보여준 모습에서는 없었던 것. 그것이 바로 열정이라는 사실도 짚어보게 된다. 이사벨이 솔직하게 보여주는 많고 많은 내면적인 것들도 작품에서는 거침없이 다룬다. 그 누군가를 파멸하게 할 수도 있었고, 죽음에까지 가져다 놓은 그녀의 선택들을 이 작품에서도 만나게 된다.
소피의 목을 찌른 사람은 바로 너야 497
그땐 그 돈으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이 둘까지 키우는걸요. 230
가졌을 때 충분히 즐겼고, 이젠 없으니 그뿐이고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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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랑 결혼하지 않은 걸 후회하진 않느냐는 질문에 이사벨의 답변은 매우 인상적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우리가 놓치는 것들까지도 진중하게 질문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않았다면 ~될 수 있었을까?' 질문도 함께 해본다. 래리가 참전을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다른 삶이었을 것이다. 이사벨 부부가 파산하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도 작품은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에게도 고난과 불행의 순간들이 문득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단단해지는 내면을 마주하면서 성장해가는 자신들을 만나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렇게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호흡하고자 한다. 인생의 질문들을 어떻게 헤치고 가는 것인지 보여주고 있는 멋진 작품이었다.
어리석은 사람을 금세 알아보는 제법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다는 것 144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 463
인생을 허비하고... 깨닫고...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꿈을 걸었음을...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281
젊은 청춘들의 시체 더미가 작품에서도 이야기된다. 18세, 19세 광부일을 하는 인물에 대한 소개도 작품은 놓치지 않는다. 이 두 청년도 죽음이 예고되는 아슬아슬한 삶 속에 있는 광부들이다. 학교와 배움에 대한 의문과 갈증에 대해서도 래리를 통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래리가 질문한 것들의 공통점에 대해서도 그의 집필한 책을 통해서 찾아내고 있는 만큼 작품은 많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소설이 된다.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 되었던 <면도날>이었다.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렵다는 이유를 이 작품을 통해서도 만나게 된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시체 더미. 프랑스 군인
광부마을 거주집 아들. 18세. 19세. 광부
내키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하기는 싫었습니다... 선생님들이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들을 가르쳐 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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