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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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라며 퉁명스럽게 반문하게 되는 제목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국내에서도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첫 번째 작품이고 최근의 작품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의 글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첫 번째 작품부터 그다운 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 작품이다. 또한 약간은 뻔하게 느껴지는 제목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해서 역시 알랭 드 보통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기도 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끝 이후의 새로운 시작까지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고, 그렇게 담겨진 내용 속에서 알랭 드 보통의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관심들(여행, 건축, 안정을 찾으려는 심리 등)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할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마련이고, 많은 부분은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소설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저 주인공의 독백과 대사 그리고 생각을 단상으로 적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고, 그 감정을 깊이 있게 음미하고 탐색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평가인 것 같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남성 주인공을 통해서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클로이라는 여성과의 관계와 그 관계로 인해서 사랑을 느끼고, 그렇게 느끼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다양한 상념들, 그리고 깊어지는 사랑과 관계로 인해서 변해가는 감정과 행동, 주변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내밀하고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고, 그 깊이 들여봄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들도 그동안 겪었던 사랑들 속에서 우리도 그와 그녀처럼 느꼈지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느낌들을 기억하게 만들고 다시금 환기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우연한 만남과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느껴지게 된 사랑

그렇게 다가온 사랑에 빠져 들어가는 과정들과

그 과정으로 인해서 더욱 깊어지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다양한 비유와 은유 그리고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통찰력 까지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그와 관련된 그리고 그로 인한 수많은 것들을 이 작품은 정교하게 담고 있고, 그렇게 담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뜨겁고 감미롭던 사랑이 얼마나 차갑고 고통과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하는지를 그 모든 것의 끝을 어떻게 향하게 되는지를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기도 하고 있다.

 

아름답기만 하던 사랑이 점점 이전과 달라지고, 그 달라진 사랑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과 함께 변해버린 사랑으로 인한 슬픔까지 따라가며 그 끝 이후의 새로운 사랑으로 향하는 과정까지 찾아가고 있는 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면서 사실적인 작품은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건조하게 사랑을 분석하고 바라보고 있기도 한 것 같다. 물론,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냉소하기 보다는 충분히 옹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지만 그 솔직함과 정교함에 조금은 거부감을 갖게 되기도 하기 때문인지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선호하게 되지도 않고 매도하게 되지도 않는 것 같다. 사랑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목적이 성공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경험했던 사랑이 좋은 결말을 맺었던, 그렇지 않던 사랑이든...

어쨌거나 사랑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랑일 뿐일 것이다.

 

모든 것에 관심이 시들어지는 요즘이기 때문인지 이렇게 사랑에 대해 충실한 분석을 하고 있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품의 재미보다는 지루함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루한 마음에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작품을 작품으로서 읽기 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보며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 보다는 잃은 것들을 읽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내용이고 흥미로운 글이라는 생각보다 짜증스럽게만 만드는 것 같다.

 

 

 

참고 : 알랭 드 보통이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고, 흔히 말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그 지식과 교양 중에서 유독 맑스(마르크스)에 대해서만 오해를 하고 있거나 지나치게 혐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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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상형문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6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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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그동안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과 새로운 다짐, 이와 함께 도시와 공간 그리고 (항상 강조하는) 시대의 상형문자에 대한 김석철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의 상형문자’는 건축가 김석철이 보았을 때 한국만의 건축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루’와 ‘정’에 대해서 논의하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새로운 건축적 변화를 보이지 못한 한국 건축의 낙후성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새로운 건축에 대한 제안과 과거와 현재,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여 미래를 제시하고자 하는 그의 시각은 조금은 유럽적 결과물들에 많은 영향 아래에 놓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조심스럽게 바라보아야 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귀를 기울여 하는 의견이라는 생각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얼마 안 있어 삶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느껴지는 허탈감과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조금은 더 뭔가를 이루고 떠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여러 죽을 고비를 겪는 도중에 얻게 된 몸과 마음의 상처들이 그의 글을 통해서 느껴지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때로는 슬픈 감정을 그대로 써낸 글은 가볍게 써낸 것 같으면서도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해내고 싶은 것과 해낼 수 있는 것들의 간극을 줄이려고 하고 있고, 그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천년의 도시를 방문하고 도시의 건축들을 바라보며 하고 있다.

 

한국의 ‘루’와 ‘정’의 특색을 논하며 한국의 지식인과 지배층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고, 그 비판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논하기도 하고 새롭게 한국의 그리고 건축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이의 등장을 염원하기도 한다.

 

한국의 ‘루’와 ‘정’이 중국과 일본과의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 보다 세부적인 논의를 들려주기 보다는 간략한 제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의 건강 상태가 그런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하기에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루’와 ‘정’을 발전시킨 결과물에 대한 간단한 언급과 함께 그는 다시금 중세의 도시를 거닐며 자신이 가장 뛰어난 능력을 그리고 통찰력을 보이는 도시에 대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고, 한국의 도시들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과 필요한 것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것을 고려해야 할지를 언급한다.

 

상세하게 논의하기 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그의 좋지 않은 건강 상태로 인해서 간략하게만 언급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핵심적인 것들만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김석철의 글은 건축가로서의 글이기 보다는 감수성 있는 문학도의 글과 같은 느낌으로 항상 자신의 글을 썼었고, 이번도 여전히 그의 냉정한 시선이기 보다는 감수성 높은 글로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 바라보도록 만들게 한다.

 

그가 거닐었던 도시들을 한번 돌아다녀보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가 보았던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식으로 바라보게 될지 궁금하게 되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아마도 그 어느 곳도 향하지 못할 것 같다.

 

말미에 그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발표한 취임 연설과 그의 20 - 30대 시절의 스케치들은 전체적인 분량이 적어 조금은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서 삽입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가장 영감어린 시절의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회이기도 한 것 같다.

 

인문학자가 아닌 건축가로서의 글에서 어지간한 인문학자 이상의 통찰력과 시대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글을 읽은 분발하게 만들기도 하고, 좌절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참고 : 개인적으로는 책의 ‘가격’에 대해서 불만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공간의 상형문자’는 예외로 해야 할 것 같다. 사진자료가 많고, 종이나 표지 등에 많은 신경을 썼으니 가격이 높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생각이면 이렇게 많은 오타가 있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한번이라도 세심하게 읽었다면 이정도로 많은 오타가 발견되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오타에 대해서 문의하기 위해 방문한 홈페이지는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글도 게재할 곳이 없어서 어디다 문의조차 할 수 없으니... 기분만 상하게 되는 것 같다.

 

오타와 누락된 부분에 대한 의견은 이곳에 남긴다.

 

초판 1쇄 발행(2009년 3월 1일)된 출판본임

 

1. 104페이지 위에서 11번째 줄 ‘5.17’은 ‘5.16’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함

2. 112페이지 밑에서 4번째 줄 ‘셰익스피어만 한 작가가...’에서 ‘셰익스피어만한 작가가...’ 로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생각함

3. 129페이지 밑에서 8번째 줄 ‘이스트 강와’는 ‘이스트 강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함

4. 120페이지 밑에서 5번째 줄 ‘르 코르뷔지에’에 대해서 ‘건축가 찾아보기’에 그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는 표시가 있는데, ‘건축가 찾아보기’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음

5. 224페이지를 보면 인명 순서가 산소비노, 스카르파, 팔라디오, 스카모치 순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순서는 106페이지 산소비노, 팔라디오, 110페이지 스카르파, 115페이지 팔라디오 순서로 되어 있으니 순서에서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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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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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현존하는 문학비평가들 중 가장 탁월한 비평가이며 이론가로 알려졌고, 최근 국내에 방문하기도 해서 국내에도 많이 알려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 맑스(마르크스)주의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좌파 / 진보적인 입장의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고 그 외의 사람들도 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뛰어난 비평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명성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을 읽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특별히 어떤 것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미루고 있다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저서 중에 속하는 ‘성스러운 테러’를 접하게 되었다.

 

번역자의 말대로 그의 이론적인 저작이 아니라 요동치는 최근의 정치 / 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일종의 해석과 입장을 담은 글이기도 하고, ‘테러’라는 하나의 정치적인 그리고 죽음을 통해 삶을 만들어 내려는 절박한 행위에 대한 그의 급하게 써내려간 변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테러’라는 것이 고대부터 존재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이고, 그것이 단순하게만 볼 수 없는 복잡하고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논의로 시작하고 있고, 이 논의에 이어 곧장 고대 디오니소스에 대한 언급과 정신분석, 수많은 영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의 논의를 보다 다양하게 만들고 폭넓게 확장시킨다.

 

그는 이런 다양한 분석을 통해서 최근의 ‘테러’에 대한 이미지(복면, 이슬람, 자살, 비행기, 참수,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 이라크, 폭탄, IRA, 아일랜드, 저격 등등등)가 일종의 오해이며 시대 순으로 분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테러’라는 것이 얼마나 절박함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테러가 마치 이성적이지 않고 야만적인 행위인 듯 논의되고 있는 최근의 분위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성과 광기 그리고 문명과 야만이라는 구분이 확연한 것이 아닌 자의적인 구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내부와 외부

죽음과 삶

이성과 광기

 

이와 같은 확연한 것들이 실제로는 모호한 구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우리들에게 그 구분의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경외감, 존중, 숭고 등 익히 접했던 논의들을 다시금 꺼내들어 우리가 어떤 것들을 잊었고 이와 같이 망각하게 된 것들을 다시금 기억해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서 테러의 폭력성을 말하기 이전에 서구 세계와 근대 자본주의가 보여주었던 폭력성을 우선 말해져야 한다고 하고 있고, 지금 보이고 있는 폭력성과 지배와 권력욕이 공허만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고 그 공허는 허무일 뿐이며 모든 것을 망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전제 속에서 숭고와 자유 그리고 순교, 허무주의, 자기희생에 대해서 논의하며 지배하려는 이들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고 함으로써 결국 허무 속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과 죽음으로써 삶을 모색하는 이들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와 그 선택이 갖고 있는 정치적 / 철학적 입장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통해서 반복되기만 하고 있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테리 이클턴의 논의는 정교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게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고 있다. 다양한 문학작품들과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연구자들의 논의들을 잘 빌려오고 있고, 기존의 자신의 논의를 연장시키기도 하고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고,

시대에 대한 그의 의견 표명이기도 한 것 같다.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어떠한 제안은 내놓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제시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동조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의견대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많은 것들에 큰 오해가 있고,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보학적인 논의까지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그의 분석이었고, 시도였던 것 같다. 지나치게 논의를 복잡하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분석과 해석은 꽤나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의 다른 저작들도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은 읽을 기회가 적은 것 같다.

 

 

 

참고 : ‘염오’라는 말은 생소한 느낌이 든다. 별로 접하지 못한 단어인데, 다른 사람들은 자주 접했던 단어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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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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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푸코에 대해 관심을 가졌듯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지만)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여러 저작들이 번역되고 있고, 주요 저서 대부분이 번역되어서(지젝 자신이 꼽는 자신의 주저 4권이 이미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은 있는 사람은 큰 어려움 없이 그의 논의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젝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상가들 중 한명이 된 것 같다.

 

‘현존하는 철학자들 중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슬라보예 지젝은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오해를 받으며 알려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라깡을 알고자 그를 찾게 되었었고 이로 인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는 히치콕과 수많은 대중문화를 통해서 라깡을 얘기하고 정리했을 뿐이고, 오히려 그는 라깡을 통해서 헤겔과 맑스 그리고 레닌을 얘기하고자 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끝없이 우회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고, 그렇게 우리는 그를 오해하며 그의 논의를 접하게 되었다.

 

라깡에 대해서 그리고 헤결과 맑스, 레닌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데리다와 같은 이들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지젝은 라깡을 얘기했지만 결국 헤겔에게 향한 철저한 헤겔주의자였고, 최근 들어서 레닌을 자주 언급하면서 적극적으로 레닌의 정신을 다시금 환기하고 그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고 얘기하며 철학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런 그의 입장의 변화 과정 속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세상을 예언하며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깃발 아래에서 세상을 바꾸자고 선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그가 의도하는 것은 비비꼬면서 얘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다시금 세상에 배회하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고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정도만 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기 보다는 한번 읽어봤다는 정도만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이라 최근에 발표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발표하던 시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결론에 비해서 얼마나 달라진 입장을 갖게 되었는지 보다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수준에서 그에 대한 논의를 멈춰야 할 것 같다.

 

그는 이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현란한 글쓰기를 통해서 이 시대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서 비판적 입장을 갖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고, 더 대담한 생각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전처럼 라깡과 헤겔 그리고 맑스, 여기에 레닌을 더해서 그는 현재를 분석하고 전망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종의 정세 분석에 가까운 내용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 좀 더 선명하게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간단하게 말해서 지젝이 쓴 21세기 공산당 선언 정도인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고,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 갖고 있었던 통찰력과 통렬함에 비해서는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분석으로 가득하고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 논의를 전하고 있다.

 

지젝은 진정한 2000년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9.11 테러와 최근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믿음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 허위와 거짓된 믿음으로 인해서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결국 그 믿음은 그가 항상 언급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이기적이지만은 아닌 선한 동기에 의해서 점점 더 상황을 악화되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방식과 형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고, 그 분석에 따라 그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과감한 혹은 이전의 맑스와 레닌의 결론을 반복한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안락함에 만족하기만 하고 있는 기존의 진보적 / 좌파적 입장을 갖고 있는 이들도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떨쳐내고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금융위기로 인해서 미국에서 취해진 다양한 경제적인 조치들과 중국에서 경제발전을 위해서 보이는 모습들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 사회주의 체제 모두 동일한 방식(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20대 80의 사회라는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과 지배가 이뤄질 수밖에 없고 이는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적 가치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푸틴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속물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세상은 더욱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깃발 아래에서 합류하자고 독촉한다.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수동적이고 종속적이며,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제도로 다시금 변화를 보여야 한다고 처방하며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언급하며 외부로 향하는 것과 전복시키는 방식이 아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재구성 혹은 일종의 체질개선과 같은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일종의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결론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 즉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이 곤궁하게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자본주의 제체를 공산주의 체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같고,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이를 위한 분석과 결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하루 큰 변화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남들에 비해 별다를 것 없는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대담하고 과감한 제안에 조금은 갸웃거리게 되기도 하고, 실현 가능성(어쩌면 이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야 말로 지젝은 빨리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의 논의의 핵심일지도 모른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들려주는 하나의 제안에 대해서 한번쯤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레닌을 다시 말하고,

그리고 바울을 언급하는지 이 현란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선언에서 약간은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그의 저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전에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고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우선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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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김석철 지음 / 해냄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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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책을 고를 때는 인문학이나 소설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조금씩 건축이나 공간에 관한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가고 있다. 관심은 갖게 되었지만 관련 전공도 아니었고 어떤 것부터 읽어야지 체계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 뭔가 끌리는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으면서 관심을 채우고 있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그렇게 구한 책들 대부분이 관심을 채워주었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알게 되어가면서 관심이 수그러들기 보다는 점점 더 높아지게 되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 같다.

 

그렇게 접하게 된 책들 중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알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건축가 김석철의 글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일반적인 건축가의 글들이 전문적인 느낌만 들고 건조할 것 같다는 생각을 쉽게 무너뜨리면서 큰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도 그의 저작 중 많이 알려진 작품이고, 건축가로서 그리고 한명의 인간으로서 그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지만 그렇게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혹은 만든 이후에 대한 감정들에 많이 집중하고 있고, 그가 바라고 생각하는 건축과 서울에 대한 생각들에 집중하고 있다.

 

대부분의 글들이 논리적인 설득보다 감정적인 자극을 우선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의 궤적을 회고하는 인상적인 서문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여러 방식을 통해서 발표한 글들이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갖고 논의하기 보다는 각각의 글들을 비슷한 유형에 따라 묶어서 구성하고 있다.

 

하나의 에세이와 같은 느낌이 드는 글들이 많기 때문에 조금은 전문적인 글을 찾던 사람들은 실망스러운 기분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이런 글을 통해서 관심을 갖게 된 분야를 조금씩 접근하게 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게다가 다양한 분야 그리고 형식의 글들이기는 하지만 건축가 김석철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신념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와 내용들로 인한 산만함은 적었었다. 다만 그저 회고하는 것 같은, 그리고 회한에 빠진 것 같은 느낌만 드는 글들에는 좀 더 생각을 채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돈된 글이기 보다는 간략하고 급하게 써낸 메모나 단상과 같은 느낌이다.

 

그가 고대 도시들을 거닐며 느낀 감정을 담아낸 글들과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는 세계 각지의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느낀 글들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들과 관련된 일화들과

실제 설계 과정 속에서 겪은 다양한 고난과 허가를 받기 위한 과정까지 하나의 경험담일 것이고 무훈담인 내용들로 이뤄져 있고, 하나의 완성된 건축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정들과 타협 그리고 정치적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이 이런 내용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거창한 제목에 비해서는 일종의 수필이나 감상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장인 ‘꿈꾸는 한강’에 담겨진 내용을 통해서 건축가 김석철의 도시에 대한 시각과 서울과 한강에 대한 지금까지의 개발에 대한 비판과 앞으로 어떤 개발과 개선 그리고 서울이 천년의 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모색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들에 대한 그의 언급은 하나의 예언과 제안일 것이고, 그 예언 / 제안이 조금은 대담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검토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글이기도 하겠지만,

한명의 건축가에서 도시를 기획 / 계획하고 미래를 제안할 정도로 그의 시각이 그리고 역량이 높아졌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 자주 언급하는 ‘이 시대의 상형문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이 현실로 이뤄지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의 커다란 도전에 대한 하나의 결과물은 제시된 것 같다.

 

건축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50대가 되었다며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한다는 새로운 다짐과 같은 글들이었는데, 책을 발표한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 이런 다짐이 얼마나 실제로 이뤄졌는지 궁금하게 된다. 곤혹스러운 질문이기는 하겠지만 나름대로 이뤄낸 것들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했을 것이고, 해냈을 것 같다.

 

통찰력과 제안 그리고 고민으로 이뤄진 글들에서 좋은 교훈 그리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건축가로서의 위상이 어떠한지 그리고 어떠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멋진 글들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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