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까치글방 6
J. 호이징하 지음, 김윤수 옮김 / 까치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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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호이징하의 걸작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는 그의 또다른 걸작이자 중세 시대에 대한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인 ‘중세의 가을’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가 다루고 있는 ‘놀이’라는 주제로 인해서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즐기던 그리고 즐겼던 ‘놀이’를 통해서 인간 사회의 문화와 문명에 관한 광범위하고 풍부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호모 루덴스’는 흔히들 접했고 행했던 ‘놀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문화와 사회 그리고 삶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분석을 하고 있다.

 

호이징하는 우선 ‘놀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해서 상세하게 분석을 하고 있고, 그 분석 속에서 놀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린 시절의 장난들 정도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전반에 걸친 긴밀한 연결을 보이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흥미롭지만, 조금은 진지하게 듣게 된다면 황당한 의견처럼 받아들여지는 생각을 호이징하는 자신의 정교한 분석을 토대로 놀이가 어떻게 언어와 문화, 법률, 전쟁, 지식, 시, 철학, 신화, 예술 등과 연결되어 생각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놀이를 토대로 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고, 놀이에서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도 세밀하게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쉽게 납득되기는 힘들겠지만 일정 부분 수긍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의견은 치밀하고, 자신의 논리에 납득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그의 분석을 토대로 호이징하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점점 더 놀이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벗어나고 있는 각각의 영역들의 변화에 대해서 논의하며 이런 변화, 즉, 각각의 영역의 독자성과 독립과 함께 놀이가 갖고 있던 특성이 변질되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놀이의 천진함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이 퇴색하고 점점 더 부정적인 부분만 남게 되고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분석이 단순히 과거가 더 좋았다는 식의 복고적인 입장으로 바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의견일 것이고 자신의 분석과 그 분석에 따른 결론에 대해서 그는 합당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의견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중세의 가을’과 마찬가지로 ‘호모 루덴스’는 특별히 어려운 내용으로 이뤄지지도 않고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논의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호이징하의 글은 어쩐지 읽어나가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그의 글이 매우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별다른 판단을 혹은 다른 생각을 요구하지 않고 있던 또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되었던 것들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익숙하게 여겼던 것들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 것 같다.

 

‘호모 루덴스’도 이처럼 ‘놀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그의 놀이의 본질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영역에 대한 놀이의 영향까지, 어떤 부분이 읽기가 힘들게 느껴진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거나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던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읽기를 간간히 멈추며 그의 의견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 생기게 되었던 것 같다.

 

‘놀이’라는 생각 이상의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특성을 분석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방법을 토대로 분석을 하고 있고, 그리스 / 로마시대의 놀이에 대한 당시의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며 그들의 의견들을 토대로 자신의 놀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리된 입장에 따라 그는 고대 이후의 시대에서 놀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당시 시대에서 이뤄지고 있었으며 이전과 혹은 이후와의 차이를 보이게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호이징하는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놀이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기까지는 치밀한 분석을 보이고 있지만 중세부터 현대까지는 되도록 간략하고 단편적인 분석을 진행시키고 있다. 분석보다는 언급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정도로 깊게 파고들지 않고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는 놀이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분석은 자신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이후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또는 얼마나 변화를 보였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와 같은 사람은 그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수준이지 그의 분석을 토대로 다른 시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응용력이 뛰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는 그의 말미의 내용들에서 큰 아쉬움을 갖게 된다.

 

다행히 현시대의 놀이가 더 이상 놀이와는 다른 차원의 ‘스포츠’가 되었고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놀이 정신과 천진함이 어떻게 지금에 와서는 뒤바뀜과 진지함만이 남게 되었는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퉁명스러운 분석을 토대로 고대 이후의 시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게 될 것 같다.

 

그의 놀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시각과 그 놀이가 갖고 있는 특성과 본질에 대한 분석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그의 넓은 시야와 통찰력에 감탄하게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논의의 결과를 토대로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고 그 변화에 대한 그의 묵직한 비판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또한 그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놀이가 갖고 있는 긍정적이고 천진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그리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호이징하의 놀이에 대한 분석이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분석 이상의 혹은 분석을 토대로 한 별도의 연구가 그다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고, 그저 위대한 학자의 독특한 관심이었다는 수준에서 ‘호모 루덴스’가 다뤄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놀이에 대한 탐구와 함께 그 탐구를 통한 지금 시대에 대한 준엄한 충고는 이전에 비해서 보다 더 자신의 시대에 대한 그의 의견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수준의 분석을 누가 또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도 뒤쫓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이징하 혼자 모든 탐구를 다해낸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분석은 탁월하고, 통찰로 가득하다.

 

그저 ‘놀이’일 뿐인 것을

왜 이리도 진지하게 말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지함에 대한 호이징하의 예민함을 떠올리면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반응하게 되지만 ‘놀이’가 갖고 있는 천진함을 강조하기 위해 ‘호모 루덴스’라는 진지한 학문적 탐구를 보여주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하다.

 

그렇지만 글들을 다 읽게 된다면,

그리고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그런 비판을 위한 비판보다 조금은 더 생산적인 방식의 이해와 논의를 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호이징하의 논의를 다시 한번 되풀이 읽어보고 싶게 되고,

언제까지나 되풀이 읽게 될 것 같다.

 

 

 

참고 : 결국 놀이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호이징하의 결론은 철학적으로는 니체의 분석과 일정부분 연결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호이징하 또한 니체의 그리스 시대에 대한 분석이 갖고 있는 통찰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놀이에 대해서 그리고 니체와 그리스 시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호모 루덴스’는 연구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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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역사 - 개정판
하인리히 E. 야콥 지음, 박은영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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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는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며 접하고 있기 때문에 ‘커피’가 갖고 있는 신비로움에 대해서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것이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우리들 앞에 놓여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그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고, 대부분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커피를 접하고 있고, 마시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시사의 고전으로 통하는 ‘커피의 역사’는 조금은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혹은 무관심 했던 커피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저자는 문학적인 방식과 학문적인 방식을 번갈아 사용하며 독자들에게 커피의 기원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과 같은 일상음료가 되었는지를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며 접근하고 있다.

 

이슬람 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커피가 최초에는 치료제의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유럽에 어떻게 전파되게 되었는지 그리고 커피의 생산을 높이기 위해서 어떻게 강대국들이 자국의 식민지에서 생산을 하게 되었는지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커피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시대의 변화를 그리고 생활양식과 정치 / 사회적 변화를 들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국 커피는 치료제에서 지적인 자극을 불어넣는 영감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나중에는 그저 일상적인 음료와 상품이 되어 우리들 곁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과정을 때로는 세밀하고 때로는 역사적 변동의 중심에 놓여놓고 바라보게 된다.

 

결국 저자는 커피가 얼마나 그 사회 속에서 그리고 생활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였고, 여러 일화들을 뿌려놓으며 독자가 커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에 관심을 갖도록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미시사의 고전이라고 말하기에는 유혹하는 매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저자가 독자들을 고려해서 일부러 누락시키거나 내용에서 제외했을 것 같지만 커피에 대한 의학적 측면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인 효능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고 대략적인 효과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을 뿐이라 커피 자체에 대한 분석력이 떨어지고 있으며, 유럽으로의 전파 과정에서 각각의 국가들에 커피가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의 세밀한 분석 보다는 일화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미시사’라는 영역으로서 보기에는 치밀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커피의 유입을 통한 변화 속에서 커피가 어떤 위상의 변화를 보였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을 뿐이며, 20세기에 들어서 보다 대량생산이 되고 전세계적인 영향력의 변화와 함께 생산지에 따른 차이와 생산 과정에서의 차이 그리고 당시 시대에는 다룰 수 없었겠지만 생산 과정에서의 노동착취와 생산가격과 실제 판매가격이 갖고 있는 황당할 정도의 가격 격차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다뤄지지 못하고 있어서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작품의 처음과 끝을 연결되게 만들어서 보다 문학적인 방식의 구성을 갖도록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약간의 흥미를 유발할 뿐이지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느낌을 갖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처음과 끝을 연결하여 하나의 완성을 보이려고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약간은 부족한 내용에 아쉬움을 느끼기는 하자만 그래도 이런 미시사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고,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의 변화와 사회 및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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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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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칠 정도로 인상적인 제목인 페터 한트케의 ‘페털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몇 번 들어보았을 제목일 것이고, 제목만 기억날 뿐이지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을 법한 책이기도 할 것이다.

 

제목도 인상적이고,

분량도 짧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책을 펼쳐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짧은 분량임에도 쉽게 읽혀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글이 어렵게 읽히거나 번역이 잘못되지도 않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어렵게 읽게 된 이유는 아마도 글 자체가 매우 갑갑한 기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페터 한트케는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로도 유명하고,

언어학자가 쓴 소설처럼 생각될 정도로 지속적으로 언어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고 있고, 끝없이 단어들로 내용이 구성되도록 만들어서 글을 읽는다는 기분이기 보다는 단어들을 모은 하나의 덩어리를 읽는 듯한 기분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그나마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보다 이야기 구성에 신경을 쓴 작품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에 읽어나갈 수 있었지 만약 그의 초기작을 읽었다면 혹은 이 작품이 초기작과 같은 글쓰기였다면 아마도 책을 읽기 보다는 집어던지려고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표정한 느낌으로 건조한 시작을 보이고 있고,

그 시작과 함께 내용은 작품의 끝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가끔은 단락을 구분하여 조금은 숨고르기를 했으면 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구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주인공 블로흐를 비롯해서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는 건조한 느낌만 전달하고 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또한 대화라고 말하기 보다는 혼잣말과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하고 있다. 내용에서 뚜렷한 끊어짐을 만들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도록 만들어놓고 있어서 읽는 동안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고, 벽으로만 가득한 미로와 같은 공간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상사의 눈짓을 통해서 해고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대로 사무실에서 나와 정처 없이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블로흐에 대한 3인칭 시점을 갖고 있는 소설이지만 블로흐의 심리에 대한 집요한 묘사를 통해서 이 작품이 과연 3인칭인지 블로흐 개인의 시각인지 헷갈리게 만들게 되기도 한다.

 

블로흐의 정서적인 불안과 언어적인 장애 또는 정신적인 문제를 드러내면서 그의 심리를 그리고 그의 행적을 따라다니는 ‘페널티킥...’은 그의 불안한 여정을 쫓으면서 이야기는 혼란스럽게 흐르다가 갑작스럽게 살인이 일어나거나 시체를 발견하는 등 느닷없이 돌발적인 상황을 만듦으로써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엉뚱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블로흐가 극장으로 향하고 있고, 극장에 가서야 정신적인 안정을 얻고 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의 모습을 통해서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갑작스러운 사회의 변화 속에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전직 축구 선수라는 설정과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축구만 했던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도 결국 ‘독일의 재건’이라는 은유로 읽혀질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버림받게 되었다는 혹은 그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봄으로써 그가 사회를 그리고 세상을 겉돌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번역자의 경우는 이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있어서 이 작품은 생각보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블로흐는 지속적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혹은 만남을 위해서 전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있고, 만남을 노력하지만 그는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고 작품은 끝을 맺는데, 작가는 이 과정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을 통해서 읽는 사람을 압박하고 있고, 그 압박에 누구라도 제대로 된 대응을 보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에서 모든 사물을 뚜렷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대략적인 윤곽으로만 묘사를 하고 있고, 애매하게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분위기를 몽환적이면서도 폐쇄적으로 느끼도록 만들고 있는데, 마치 열기가 넘치는 사우나에 들어간 기분이고 더운 여름에 낮잠을 자다 악몽을 꾸게 된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만든다.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불규칙적이고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고 있고, 느닷없이 사건이 일어나거나 블로흐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거나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무시되거나 그가 다가가는 순간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부분적으로 카프카를 의식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러기에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언어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성격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페널티킥...’은 읽는 동안 질식할 것 같은 갑갑함만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더욱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뚜렷한 결론 없이 끝을 맺는 마무리로 인해서 읽은 다음에 들게 된 생각은 다시 한번 더 읽게 된다면 호흡곤란에 빠질 것 같다는 생각만 들게 되지만 분명 의미심장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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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계속된다 동문선 문예신서 294
조르주 뒤비 지음, 백인호 외 옮김 / 동문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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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학계의 거장 중의 거장인 조르주 뒤비의 회고록 ‘역사는 계속된다’는 그의 학자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얼마나 광활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어떤 시각과 생각으로 연구에 임해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알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회고록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잊을 수 없는 추억들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들에 대한 감수성 어린 회고 그리고 그동안 겪었던 온갖 별 것 아닌 경험들까지 산만한 구성으로 되어 있는 일반적인 회고록과는 달리 그와 같은 방식에 대해서는 조르주 뒤비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고, 그는 중세시대에 대한 탁월한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한명의 연구자로서 자신의 과거의 연구 과정과 성과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뒤돌아보고 있고, 그 회고와 재검토를 통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회고록이기 보다 그동안의 연구 과정과 성과에 대한 에세이처럼 느껴지게 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연구자로서의 길을 회고하며 앞으로 어떤 영역에 집중을 해야 할지를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연구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던 부분들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르주 뒤비는 국내에서도 마르크 블로흐(또는 블로크), 페르낭 브로델, 자크 르 고프와 같은 아날 학파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연구 성과가 갖고 있는 탁월함과 함께 방대한 영역에 대한 그의 결과물로 인하여 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자신이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방대한 연구 영역 중 관심을 갖게 된 주제와 지도 교수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주제에 맞게 어떤 자료(그는 ‘자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했는지 알려주고 있고, 그 과정을 몇 년에 걸쳐서 지루할 정도로 하나씩 채워가며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한국 대학원 과정과는 확연한 차이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본인으로서도 운이 좋았다고 자평하기도 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연구를 정진하였다는 점에서 본받아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이후의 내용에서는 교수 자격을 취득한 다음 어떤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의 연구를 진행시키게 되었는지와 관심의 폭이 넓어지면서 보다 더 다양한 영역의 연구자들과 그리고 그들의 결과물들에 어떤 영향을 받았고 그 주고받은 영향 속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에 대한 본인의 간략한 평가와 함께 어떤 영역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들려주고 있다.

 

조르주 뒤비는 학자로서의 영역에 한해서만 자기 자신을 회고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과연 그런 모습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조금은 실망스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연구 업적과 함께 그 과정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중세 시대의 고문서를 어떻게 해석했고 그 해석에 따라 어떤 분석을 해냈는지에 대한 사례까지 들려주는 그의 세심함에 감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미에서 앞으로 어떤 영역을 자신의 목표로 둘 것인지와 어째서 그런 목표를 갖게 되었는지를 들려주며 최근의 시대적 변화(컴퓨터의 등장, 대중매체의 활용에 대한 논의 등)에 어떤 식으로 활용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현재의 프랑스 대학 교육과정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함께 교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기본적으로 교수 사회가 갖고 있는 ‘봉건적’ 또는 ‘장인과 도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인데, 이 비판도 결국 과거의 영향에 따른 문제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구조가 지속성을 갖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와 그리고 아날 학파의 관점에서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르주 뒤비는 간결하게 자신의 그동안의 업적과 연구 과정을 들려주고 있으면서, 그에게 영향을 준 마르크 블로흐나 페르낭 브로델 등의 영향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 칭송을 조르주 뒤비 또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의 회고록을 읽게 된다면 이 의견에 대해서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리고 탁월한 연구자인지 확인시켜주고 있는 내용이다.

그는 담백하게 써내려가고 있지만 그 담백함 속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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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전예원세계문학선 셰익스피어 전집 1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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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셰익스피어는 명성에 비해서는 전반적인 작품세계가 다뤄지기 보다는 몇 개의 대표작만이 조명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실제로도 그의 4대 비극과 같은 작품들만 끝없이 출판되고 읽혀지고 있을 뿐이지 그 외의 작품들의 경우는 번역되거나 찾게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는 한명의 작가에 대해서 대표작만을 보고 판단하는 선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지 전반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관심은 갖게 되지 못한다는(혹은 안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뭔가를 읽을 시간이 많이 부족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읽을 생각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잘나가는 것들만 번역해서 벌어보겠다는 생각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셰익스피어는 그의 전집이 이전에도 출판된 적이 있었고, 얼마 전에도 출판되었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이나 걸작으로 분류되지는 않겠지만 꽤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인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평소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작품이었지만 우연히 손에 들어와 순식간에 읽게 되었고, 생각보다는 괜찮은 내용이어 만족스러웠다.

그가 간간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역사적인 인물이자 당시로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떤 관계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는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에서 ‘사랑’에 보다 집중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에서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결과물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도 큰 인상은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접근이 이미 다양하게 이뤄지기도 했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아무리 셰익스피어라고 해도 드라마와 같은 그들의 삶을 더욱 드라마로 만들어 내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워낙 유명한 인물들이라 그들의 삶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어서인지 그들의 비극을 놀랍거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얼마나 사실에 입각했는지 혹은 어디까지가 사실일지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조금은 몰입을 방해하는 것 같고, 그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결과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실제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창작의 한계 때문일 것 같다.

 

이 작품은 사람들에 따라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며 읽혀질지도 모를 것 같은데, 번역자의 해설대로 여러모로 큰 차이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연령대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관계가 일종의 불륜에 가까운 관계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같은 점에서 큰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를 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어쩌면 그런 차이 때문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비교를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의 사랑은 처음에는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결국 그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비극은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책무를 등한시하고 개인적인 감정에만 몰두했을 때 발생되는 비극일지도 모르고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이 과연 사랑인지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집착하는 모습,

어쩐지 자신의 끝을 직감적으로 예감하고 그동안 함께했던 부하들에게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는 앤토니의 모습 등이 인상적이었고,

오해와 거짓말 그로 인한 엇갈리게 되는 운명과 죽음은 이전에 보았던 셰익스피어의 이야기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으면서도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실제 삶과 교묘하게 이어지게 만들어 놓는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에 감탄하면서 결과물 자체는 신통치 않지만 완성도에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의 사랑에 애틋함이 상대적으로 덜 느껴지기 때문에 흥미가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들의 만남과 죽음까지의 방탕한 삶에 대해서 약간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는 쉽지는 않다.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은 모습을 그들은 보여주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그들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랑이든...

결국 사랑이다.

그 사랑에 누구도 뭐라 말할 자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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