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독점자본 까치글방 43
해리 브레이버맨 지음 / 까치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을 분석한 가장 탁월한 저작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브레이버맨의 ‘노동과 독점자본’을 읽어야 할 때 읽지 못하고, 읽어야 할 시기가 많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 논의와 분석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읽다보면 약간은 추가할 내용들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 부분들도 찾아내게 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내용은 지금 시점에서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동과 독점자본’은 대부분의 자본주의 비판 및 맑스(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의들이 철학적이거나 정치와 경제학적 혹은 그 외의 문화적인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던 ‘노동’에 대한 분석을, 맑스가 ‘출입금지’가 표시된 문을 열고 들어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보아야 한다는 바로 그 현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분석하고 있다.

 

브레이버맨은 그렇게 맑스 이후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던 실제 노동이 행해지는 바로 그 과정과 현장을 쳐다보고 있고, 그의 분석은 맑스의 분석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 환경과 관계를 어떻게 과거에 갖고 있었던 입장을 유지하며 변화된 현실에 맞게 새롭게 보아야 하는지 논의하며 자신의 분석을 전개시킨다.

 

그는 우선 맑스의 논의에 따라 노동과 노동력에 대해서 정의내리고 있고, 그 정의와 함께 노동에 대한 관리의 등장과 관리가 필요하게 된 배경인 분업의 등장 그리고 관리를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효율화와 과학화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 관리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방식인 테일러주의의 등장과 확산에 대해서 논의하며 어떻게 테일러주의가 각광을 받게 되었고, 그 효율적 관리로 인해서 얼마나 노동이 보다 더 높은 생산을 위해 보다 무자비한 착취의 대상이 되며 관리자에게 즉, 자본에게 순응하게 되는지 분석하고 있다.

 

이런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와 통제 방식인 관리와 함께 또다른 노동자에 대한 통제라고 볼 수 있으며 생산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인 기계의 등장에 대해 브레이버맨의 논의는 이어지고 있고, 기계의 등장과 이로 인한 대량생산화로 인해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더 힘겨운 조건 속에서 노동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기계와 대량생산으로 인해서 기존에 비해 보다 노동이 단순화 되면서 과거에 비해 숙련도가 부족해지고 많은 노동자들이 더욱 더 하나의 소모품처럼 다뤄지게 되는지 분석하고 있다.

 

경쟁에서 독점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자본의 지배의 확대는 보다 더 많은 분야에서 노동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증가한 사무노동자는 기존의 생산노동자와 근무 환경과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임으로써 그들의 존재가 전혀 다른 노동자로서 다뤄지게 되었지만 브레이버맨은 결국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고용된 이들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사무노동 또한 테일러주의의 효율적 관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지 못하고, 사무 / 생산노동 모두 노동의 질적 향상보다는 하락만을 보인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마지막 장을 통해서 노동계급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을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논의는 앞의 입장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브레이버맨은 기본적으로 맑스의 분석틀을 받아들이면서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보다 관계와 양상이 변한 환경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시각이 필요하다는 입장에 따라 자신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노동자는 점점 더 기계가 되어가고 있고, 인간이라는 존재적 특수성 또한 사라져가고만 있을 뿐인 자본주의 환경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괴로울 뿐인 세상을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개선보다는 악화만 되어가는 근무 / 노동환경에 대해서 그는 논의하고 있는데, 그의 논의로 인해서 보다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에 대한 분석과 관심이 높아지게 되기는 했지만 큰 개선과 변화를 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분석의 탁월성에 비해서는 변화된 모습은 아쉽기만 할 뿐이다.

 

단순히 ‘노동’을 분석한 내용이기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양식 그리고 양상에 대한 수많은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분석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고, 분석의 탁월함과 함께 생각지 못한 다양한 논의를 보여주어 인상적이었다.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하고 있는 노동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면 단순히 읽고 감탄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겠지만, 과연 어떤 실천을 보여야 할지 곤혹스럽게 되기도 한다.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고, 좀처럼 찾기 어려운 해답이겠지만 그럼에도 답을 찾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이다.

 

 

참고 : 브레이버맨은 지속적으로 노동자 중 여성에 대해서 별도로 논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건 당연한 분석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자주 접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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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치는 2011-11-2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온글이면 출처를 밝히셔야,,,

배군 2011-11-28 15:24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입니다.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제 블로그에 제가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어디서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확인하신 것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3648486
 
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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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작품들 중에서 모든 이들이 가장 칭송하는 작품으로는 아마도 ‘픽션들’을 꼽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칭송하기 보다는 난해하다는 말만 하게 되지만 아마도 이런 불평은 내 읽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남들은 다 환호하는데 혼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얼핏 본다면 ‘픽션들’은 단편소설들을 읽는 것 같지만, 보르헤스는 소설을 썼다고 말하기 보다는 매우 엉뚱한 방식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소설에 대한 생각을 글로 / 소설로 정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글쓰기와 하나의 쓰기 방식에 대한 시도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들려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문학 이론이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이론적인 내용을 소설로 혹은 이야기 방식으로 써내려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런 생각에 대해서 ‘픽션들’을 아주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이 시도는 실험적이고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기존에 그와 같은 시도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이런 시도를 보였던 사람이 이미 존재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르헤스가 보여준 시도가 그와 비슷한 시도를 보인 혹은 보였던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다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열광을 불러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1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과 2부 ‘기교들’로 나눠져 있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1부가 보다 대담하고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입장을 소설을 통해서 들려주고 있다면, 2부는 보다 소설의 형식 안에서 자신의 방식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즉, 1부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소설의 형식으로 써냈다면, 2부는 소설 속에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이 더 부각되어 있는지에 따라서 전혀 읽는 과정을 통해 다른 느낌과 재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주 언급했듯이 보르헤스는 허구와 진실을 뒤섞어 모호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자주 사용하는데, 기존에 발표했던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이미 존재하는 글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글을 써내는 방식이었다면, ‘픽션들’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존재하지 않는 글을 토대로 자신만의 글을 써내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기존의 글들을 통한 하나의 재구성과 다시 쓰기에서 머물렀어도 그는 충분히 뛰어난 작가이고 새로운 시도로 다뤄졌을 것이지만,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용하고 채우며 새로운 글을 써내려간다.

 

어쩌면 이는 그가 점점 더 눈이 멀어져가게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가 써낸 글들이 갖고 있는 강렬함이 너무 큰 것 같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듯이 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픽션들’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공백과 공허를 에워싸고 채움으로써 공백과 공허를 숨기려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그 허전함은 강조된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밖에도 항상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 방식과 탐정 및 범죄소설의 이야기 방식을 가져오는 등 온갖 방식과 시도를 종합하고 있는 ‘픽션들’은 모든 차이들이 모호해지고 확연한 경계를 겹쳐놓게 만들고 있다.

 

이 황당할 정도의 새로운 시도를 때로는 능청스럽게 또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듯이 그는 써내려가고 있다.

 

처음에도 ‘픽션들’을 읽었을 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했었고, 세 번째 읽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글에 감탄하기 보다는 뭘 말하려고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읽게 만들고,

그를 흉내를 내도록 만든다.

 

그게 그의 가장 탁월한 업적일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글쓰기의 시도에 면죄부를 안겨주었으니까.

글쓰기를 통해서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그는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그의 글을 읽는 방법은,

그가 글을 통해서 만들어낸 미로를 즐기고 즐기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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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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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어내는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충분히 각오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고,

어렵다기 보다는 난해했다.

 

어쨌든 다 읽어냈어도 도대체 뭘 읽었는지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그의 철학적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저서이며, 그의 다양한 문제의식의 원형을 혹은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차근차근히 관심의 흐름을 보여주게 되는지를 예측할 수 있을 기념비적인 저서일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서 딱히 반박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리라 생각되고, 이미 다각도의 검토가 이뤄진 푸코이기 때문에 ‘광기의 역사’에 대해서도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그렇게 담겨져 있는 논의들의 주요 내용과 논의를 통해서 나타난 수많은 쟁점과 논쟁들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혹은 찾아본)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며, 알고 싶은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고, 그렇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점점 더 읽혀지기 보다는 읊어지게 되어만 갈 것이다.

 

중세 시대에서 시작해서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고전주의 시대까지의 기간 동안

 

‘광인 / 광기’를 통해서 어떻게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하나의 ‘정신적 질환과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다양한 의도에 따라 받아들이게 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왜곡된 인상과 관심 속에서 ‘광인 / 광기’를 대하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는 ‘광기의 역사’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었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와 진실과는 매우 다른, 실제 일어났고 벌어졌던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하나의 인식의 변화를 두텁고 복잡하게 논의하고 있다.

 

푸코의 논의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문학적이고 풍부한 표현이라고 말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복잡하고 현란한 표현들 때문에 읽던 도중에 무엇을 읽고 있는지 헷갈리게 될 정도로 산만함을 느끼고 있었고, 이번도 마찬가지로 가뜩이나 난해한 논의를 양파껍질도 아닌데 실컷 벗겨내도 핵심에 다가가는 느낌이 들지 않고 모호하기만 했고, 해답 없는 수수께끼처럼 뭔가 풀어내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기 보다는 새로운 문제 앞에 놓이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풍부한 표현과 다채로운 분석을 통해서 보다 많은 것들을 담아내려고 했던 의도이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푸코의 ‘광기’를 통해서 엿보는 사회적 그리고 개인의 심리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변화와 분류 / 체계화 그리고 분할 등 그가 ‘광기의 역사’에서 다룬 수많은 논의들은 하나의 작품 속에서 논의되고 있으면서도 이후의 그의 문제의식이 이 논의들에서 어떤 변화와 적극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는지를 생각해가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읽어가는 과정이 더욱 더디고 괴로울 것이다.

 

푸코는 중세 시대의 배제의 근원인 ‘나병’이 갑작스럽게 잠잠하게 되어가면서 새로운 배제의 대상으로 ‘광기’가 부상하게 되었는지를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검토하고 ‘광기’에 대한 인상이 어떻게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변화로 인해서 발생되는 ‘배제’의 대상이 되는 ‘광기’의 정의와 기준 그리고 그 정의 및 기준의 변화와 ‘광기’라는 것 자체가 갖고 있는 모호함으로 인하여 그 대상이 어떻게 부랑자 및 실업자 그리고 통틀어 비이성자 혹은 비행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의 규칙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까지 ‘광기와 광인’의 대상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그렇게 분류에 포함되었다가 어떤 사유로 제외되었는지를 논의하며 사회적인 필요에 따라 대상이 그리고 정의와 기준이 변하고 그 정의와 대상과 기준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논의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 말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광기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항상 그랬지만 자신의 논의를 쉽고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게 글을 써내기 보다는 복잡하고 아리송하게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의 자체를 이해하기에도 벅찬 인물이고, 이해를 할 것 같다는 느낌만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광기’를 통해서 일종의 정상과 비정상의 분할선이 형성되고, 그 분할선 혹은 경계선의 변화와 함께 그 변화 속에서 어떻게 비정상에 대한 사회적인 입장과 입장에 따른 대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대응의 변화를 분석하며 푸코는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에서 보여주었던 ‘광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 당시에는 확연한 분할이 이뤄지지 않던 구조에서 어떻게 뚜렷한 분할과 경계가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그리고 그 뚜렷한 선긋기로 인해서 ‘광기와 광인’이 때로는 더욱 모호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보다 세밀하게 분류되기도 하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광기 그리고 광인’이라는 대상과 정의가 얼마나 그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 요구에 따라 변화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광기’를 통해서 생산되는 인식구조의 변화와 지식체계의 형성 그리고 정신의학 등 하나의 지식의 생산과 함께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가부장적 성격 그리고 다양한 함의에서 하나의 함의로 논의가 축소되는 과정까지 푸코는 단순하게 생각되었던 그리고 그동안 어둠 뒤에 가려지고 있던 ‘광기와 광인’을 통해서 그 어둠을 들춰내고, 그 폭로로 인해서 우리가 그리고 근대성과 이성이 감춰두고 밀어내고 있었던 수많은 어둠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광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안에 대한 변화 속에서 대감호가 어떻게 고전주의 시대에서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광기와 광인’을 바라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별다른 차이 없이 보았던 ‘빈곤’과 ‘범죄’가 그 경제적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종교적 / 윤리적 / 의학적 관념의 변화와 등장 속에서 기존의 ‘광기와 광인’과는 별도의 존재와 의미로 취급되고 시각을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결국, 푸코는 어떤 의미에서 ‘광기’를 ‘광기’로서 바라보기 보다는 항상 시대의 한계와 관심 속에서 ‘광기’를 바라봄으로써 ‘광기’가 오해가 되고 왜곡되기만 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왜곡에서만 존재했던 ‘광기와 광인’들이 어떤 관심과 오해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 왜곡으로 인해서 그들이 얼마나 고통과 배제를 겪었는지 바라보고 있다. 즉, ‘광기와 광인’에 대해서 뚜렷한 정의와 기준 그리고 대상을 파악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광기와 광인’이 어떻게 에워싸이고 포위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으며, 그 둘러쌈과 정의내림 그리고 하나의 사회적 틀에 끼워 맞춰지며 단 한번도 광기가 광기로서 다뤄지지 못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감시와 처벌’이 감옥이라는 배제의 공간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가 그리고 주체가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논의하는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면, ‘광기의 역사’는 그 공간과 사회적 틀에 어떤 존재들이 채워졌었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워낙 널리 알려진 저작이기도 하고,

난해함으로 악명 높기도 하기 때문에 읽어내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읽어서 큰 기대 없이 보았고, 그 기대 없는 읽음으로 인해서인지 읽어가며 보다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었다. 물론, 워낙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간신히 읽었다는 기분만 들지 뭘 어떻게 읽었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 얼마나 잘 파악했는지에 대한 자신도 없다.

 

지나치게 무더운 여름에 이걸 읽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무모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 : 간신히 다 읽었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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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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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37951

현의 노래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41364757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를 꼽으라면 김훈을 빼놓고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꼽혀진 작가들 중 그와 같이 여전히 솜씨 좋은 글을 써내고 있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 영향력이 있다는 작가들은 이미 노쇠하여 영향력만 갖고 있을 뿐이고 명성만 남겨져 있을 뿐인데, 김훈은 그런 이들과는 달리 여전히 자신의 글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하는지

일정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날카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면서 다양한 문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논쟁도 만들어내고 있는 일급 작가인 것 같다. 이는 그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떠나서 인정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김훈의 ‘역사소설 시리즈’로 불리는 작품들(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만 읽었을 뿐 다른 에세이와 소설들은 읽어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해서 폭넓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그의 글이 보여줄 수 있는 진면목이 위의 세 소설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에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큰 차이를 갖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이 써낸 가장 빼어난 글들은 저 세 개의 작품들 중 어딘가에 담겨 있을 것 같다.

 

김훈의 역사소설이 갖고 있는 특성은 항상 암울한 시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모색하는 인물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각각의 소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시기가 다르면서도 동일한 이야기 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김훈의 소설이 갖고 있는 이런 특성이 점점 더 한국의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와 긴밀함을 갖게 되면서 그의 작품이 단순히 소설로서만 읽혀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그의 사회적 발언으로 또는 작품 속 모습과 실제 사회의 모습을 연결한 해석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런 폭넓은 평가와 해석에 대한 김훈 본인의 반응은 처음에는 침묵이었지만 조금씩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논의를 아예 차단하고 싶어서인지 김훈은 ‘남한산성’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 소설을 오로지 소설로서만 읽어야 한다고 전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요구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 쓸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본인부터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게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어는 서문에서 자신의 글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듯이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에 관한 내용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순신에 대해서 얘기를 하듯이 자기 자신을 얘기하던 작품이었고,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가 보여주었던 절박함에서 조금은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은 그의 이런 하나씩 뭔가를 더 담아내고 있는 글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더해짐이 그의 글이 더 빼어나게 되어간다는 뜻은 아니다.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 보다는 ‘현의 노래’와 닮은 이야기 진행을 보이고 있다. 우선 ‘칼의 노래’와는 달리 1인칭의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있고, ‘현의 노래’처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김훈은 기본적으로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밑에서 위를 보거나,

밑에서의 혹은 밑으로 부터의 삶을 바라보는 경우가 적은데, 이건 아마도 신문기자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기본적으로 그의 시각이 갖고 있는 특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야기는 임금과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임금의 곁에서 두 개의 길을 얘기하는 김상헌과 최명길 그리고 김상헌과 최명길의 주변에서 각자의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서날쇠나 김류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남한산성’은 지속적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그리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임금은 끝없이 신하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현명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고, 심란함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고만 있다. 신하들 중 김상헌과 최명길을 중심으로 대립된 의견을 내세우게 만들어서 임금으로 하여금 그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김상헌의 눈을 통해서 김훈은 임금도 신하도 아닌 그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인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있다. 그는 서날쇠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력과 생존력 그리고 부지런함에 대해서 감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떠한 명예도 자긍심도 없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추하게 보이게도 만들고 있다. 어떤 모습이 진정한 모습인지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물론,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보여주듯 임금과 김상헌 그리고 최명길에게 놓인 벗어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은 서날쇠와 같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택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조정에서 명나라를 섬기든 청나라를 섬기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오히려 겨울이 지나 봄이 왔을 때 제대로 농사나 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반복된 삶에서 임금과 김상헌 그리고 최명길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김상헌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으면서도 작품에서는 그걸 더 밀어붙이지는 않고 있다. 임금도 김상헌도 그리고 최명길도 자신들의 모습에 회의적이고, 덧없음을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할지를 끝없이 서로에게 묻고 있고, 각자가 찾아낸 길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살아 있다는 것에,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안도하고 있고,

그 살아남았음으로 인해서 이후를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결국 김훈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남아 있든 그 살아남음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김훈의 글은 다른 이들의 글과는 달리

굉장히 힘이 있고 남성적인 느낌을 갖게 하면서도 고립감과 지침을 느끼게 만드는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어디가 어떻게 그런 느낌을 갖게 하냐고 묻는다면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읽다보면 그런 기분을 갖도록 하는 글을 쓰고 있다.

 

마치 노쇠한 야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글이다.

그리고 그런 글을 통해서 김훈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생존에 대한 그의 의지에 찬 글들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어떻게 맞는지를 혹은 자신의 생각과 어떻게 어긋나는지를 얘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글은 작품 속 인물들처럼 항상 포위되어 있고,

그 두터움을 벗어나고 싶은 듯이 느껴지게 된다.

물론, 이건 순전히 글을 읽은 다음에 느끼게 되는 감상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도 누구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남한산성’은 김훈이 원하지는 않겠지만(혹은 간절히 원하듯이) 2000년대 초의 한국사회와 연결되어 설명해야만 할 것이고, 단지 소설로서 읽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읽든지 그건 읽는 이의 자유이다.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평가를 하고 해석해낼 것인가?

끝없이 ‘가야할 길’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 속 인물들처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으로 읽음으로써 자신만의 ‘남한산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이 맞는 길인지 틀린 길인지는 누구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국내에서 활동하는 중견 작가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김훈은 많은 대중들에게서 호감을 얻고 있고 그리고 좋은 완성도의 글을 써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본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한국 사회에 어떠한 물음을 던져놓고 있다.

 

그를 옹호하든 비난하든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 :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작품 속 서날쇠나 나루와 같은 인물들은 전부 양반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인이고, 그중에서도 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순 한글로 된 이름을 사용한고 있다. 서날쇠의 경우 한자 이름이 있지만 그냥 한글로 된 이름으로 말하고 불리이고 있는데, 실제 조선 시대에는 어떻게 서로에 대한 이름이 알려주고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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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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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몇 번이나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읽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글은 잘 읽혀지면서도 어딘지 제대로 읽혀지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글의 번역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글이 갖고 있는 특징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꿈결 같고, 몽롱한 기분이 엿보이는 그의 글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문학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흐름의 끝자락에 있을 것이고,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보르헤스의 첫 번째 작품인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아직 ‘픽션들’과 ‘알렙’이 담고 있었던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그렇게 탁월한 작품들에 비해서 보다 더 흥미를 갖게 만들고 있고, 접근하기도 편하면서 그가 어떤 글쓰기를 모색하는지 더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 더 애정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과 함께 ‘칼잡이들의 이야기’를 선호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런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보르헤스의 글이 갖고 있는 매력 중 하나는 그의 글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움과 함께 다른 작가와는 다른 대놓고 누군가의 글들을 인용하고 참고했다는 흔히들 말하는 ‘다시 쓰기’인데, 이것은 단순히 다른 책을 인용하고 간략하게 정리하거나 담백하게 만들고 이야기에 개입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글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이야기 자체가 새롭게 되어버리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미 읽었던 글들을 다시 접함에도 다시 접한다는 생각보다는 엇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글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의 글이 갖고 있는 매력과 탁월함은 여러번 반복해서 칭찬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게다가 그의 글은 한번 읽게 된다면 자기 자신도 그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고 읽는 이의 참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는 큰 차이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위대한 문호의 글들이 읽고 감탄하고 경이감을 갖게 만들기만 한다면, 보르헤스의 글은 그와 같은 감탄을 연발하게 되기보다는 한번 직접 글을 써보도록 만들게 한다.

 

이미 보르헤스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많이 이뤄졌기 때문에 별도로 논의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글을 단순히 하나의 분석과 평가의 글로서 그리고 그가 영향을 주었던 온갖 철학적 흐름에 대한 하나의 원형으로서 읽게 된다면 그건 보르헤스가 원하는 방식은 아닐 것 같다. 그저 그의 글을 글로서 읽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고, 충분히 그의 글을 즐긴 다음에 그러한 다양한 입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소설을 철학적 입장에서 혹은 분석적 차원에서만 읽게 된다면 그게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나? 더군다나 이처럼 흥미진진한 소설을 앞에 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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