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칼의 노래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37951

현의 노래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41364757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를 꼽으라면 김훈을 빼놓고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꼽혀진 작가들 중 그와 같이 여전히 솜씨 좋은 글을 써내고 있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 영향력이 있다는 작가들은 이미 노쇠하여 영향력만 갖고 있을 뿐이고 명성만 남겨져 있을 뿐인데, 김훈은 그런 이들과는 달리 여전히 자신의 글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하는지

일정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날카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면서 다양한 문학적 그리고 사회적인 논쟁도 만들어내고 있는 일급 작가인 것 같다. 이는 그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떠나서 인정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김훈의 ‘역사소설 시리즈’로 불리는 작품들(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만 읽었을 뿐 다른 에세이와 소설들은 읽어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해서 폭넓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그의 글이 보여줄 수 있는 진면목이 위의 세 소설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에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큰 차이를 갖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이 써낸 가장 빼어난 글들은 저 세 개의 작품들 중 어딘가에 담겨 있을 것 같다.

 

김훈의 역사소설이 갖고 있는 특성은 항상 암울한 시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모색하는 인물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각각의 소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시기가 다르면서도 동일한 이야기 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김훈의 소설이 갖고 있는 이런 특성이 점점 더 한국의 시대적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와 긴밀함을 갖게 되면서 그의 작품이 단순히 소설로서만 읽혀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그의 사회적 발언으로 또는 작품 속 모습과 실제 사회의 모습을 연결한 해석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런 폭넓은 평가와 해석에 대한 김훈 본인의 반응은 처음에는 침묵이었지만 조금씩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논의를 아예 차단하고 싶어서인지 김훈은 ‘남한산성’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 소설을 오로지 소설로서만 읽어야 한다고 전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요구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 쓸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본인부터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게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어는 서문에서 자신의 글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듯이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에 관한 내용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순신에 대해서 얘기를 하듯이 자기 자신을 얘기하던 작품이었고,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가 보여주었던 절박함에서 조금은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은 그의 이런 하나씩 뭔가를 더 담아내고 있는 글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더해짐이 그의 글이 더 빼어나게 되어간다는 뜻은 아니다.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 보다는 ‘현의 노래’와 닮은 이야기 진행을 보이고 있다. 우선 ‘칼의 노래’와는 달리 1인칭의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있고, ‘현의 노래’처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김훈은 기본적으로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밑에서 위를 보거나,

밑에서의 혹은 밑으로 부터의 삶을 바라보는 경우가 적은데, 이건 아마도 신문기자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기본적으로 그의 시각이 갖고 있는 특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야기는 임금과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임금의 곁에서 두 개의 길을 얘기하는 김상헌과 최명길 그리고 김상헌과 최명길의 주변에서 각자의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서날쇠나 김류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남한산성’은 지속적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그리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얘기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임금은 끝없이 신하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현명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고, 심란함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하고만 있다. 신하들 중 김상헌과 최명길을 중심으로 대립된 의견을 내세우게 만들어서 임금으로 하여금 그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김상헌의 눈을 통해서 김훈은 임금도 신하도 아닌 그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인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있다. 그는 서날쇠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력과 생존력 그리고 부지런함에 대해서 감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떠한 명예도 자긍심도 없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추하게 보이게도 만들고 있다. 어떤 모습이 진정한 모습인지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물론,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보여주듯 임금과 김상헌 그리고 최명길에게 놓인 벗어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은 서날쇠와 같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택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조정에서 명나라를 섬기든 청나라를 섬기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오히려 겨울이 지나 봄이 왔을 때 제대로 농사나 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반복된 삶에서 임금과 김상헌 그리고 최명길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김상헌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으면서도 작품에서는 그걸 더 밀어붙이지는 않고 있다. 임금도 김상헌도 그리고 최명길도 자신들의 모습에 회의적이고, 덧없음을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할지를 끝없이 서로에게 묻고 있고, 각자가 찾아낸 길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살아 있다는 것에,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안도하고 있고,

그 살아남았음으로 인해서 이후를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결국 김훈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살아남아 있든 그 살아남음으로써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김훈의 글은 다른 이들의 글과는 달리

굉장히 힘이 있고 남성적인 느낌을 갖게 하면서도 고립감과 지침을 느끼게 만드는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어디가 어떻게 그런 느낌을 갖게 하냐고 묻는다면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읽다보면 그런 기분을 갖도록 하는 글을 쓰고 있다.

 

마치 노쇠한 야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글이다.

그리고 그런 글을 통해서 김훈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생존에 대한 그의 의지에 찬 글들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어떻게 맞는지를 혹은 자신의 생각과 어떻게 어긋나는지를 얘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글은 작품 속 인물들처럼 항상 포위되어 있고,

그 두터움을 벗어나고 싶은 듯이 느껴지게 된다.

물론, 이건 순전히 글을 읽은 다음에 느끼게 되는 감상이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도 누구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남한산성’은 김훈이 원하지는 않겠지만(혹은 간절히 원하듯이) 2000년대 초의 한국사회와 연결되어 설명해야만 할 것이고, 단지 소설로서 읽으려고 한다면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읽든지 그건 읽는 이의 자유이다.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평가를 하고 해석해낼 것인가?

끝없이 ‘가야할 길’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 속 인물들처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으로 읽음으로써 자신만의 ‘남한산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이 맞는 길인지 틀린 길인지는 누구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국내에서 활동하는 중견 작가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김훈은 많은 대중들에게서 호감을 얻고 있고 그리고 좋은 완성도의 글을 써내고 있다. 게다가 그는 본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한국 사회에 어떠한 물음을 던져놓고 있다.

 

그를 옹호하든 비난하든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 :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작품 속 서날쇠나 나루와 같은 인물들은 전부 양반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인이고, 그중에서도 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순 한글로 된 이름을 사용한고 있다. 서날쇠의 경우 한자 이름이 있지만 그냥 한글로 된 이름으로 말하고 불리이고 있는데, 실제 조선 시대에는 어떻게 서로에 대한 이름이 알려주고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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