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W. G. 제발트에 대해서는 (아마도) ‘아우스터리츠정도만 소개받았을 뿐 특별히 알고 있던 작품은 없었다. ‘아우스터리츠도 지나가다 듣는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작품처럼 기억날 뿐이라 제대로 된 앎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고,

약간은 호기심을 갖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고, 작품을 언뜻 들었던 기억만이 날 뿐이라(찾아 읽지도 않았었다) 제발트를 온전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준도 아니고 기억하고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트위터를 통해서 공중전과 문학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제목부터 흥미를 끌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분량이 크지 않았고, 강연회 내용을 토대로 한 글이라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답게 읽어가는 도중에도 이런 식의 시각을 보여주는 내용은 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무척 흥미롭게 읽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공중전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폭격,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있었던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대한, 종전 이후의 재건의 과정에서의 망각-잊음에 대한 여러 접근으로 가득한 공중전과 문학은 무차별 폭격에 대한 내용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기 때문에(이것 말고도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딱히 업는 것 같다) 그가 진행시키는 논의들은 신선하면서도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 무척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진행된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관한 언급은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에서도 접하지 못했었고, 그나마 하워드 진과 같은 진보적-양심적 학자 정도나 그 사실에 대해서 다뤘을 뿐이기에(하워드 진의 경우도 본인이 실제 폭격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논의했다는 점에서 분석적인 논의이기 보다는 경험에 근거한 감정적-공감에 의한 설득-논의였다고 볼 수 있다) 제발트의 다방면의 접근은 논쟁적인 부분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그가 지적하는 부분들을 통해서 여러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으로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작이라고 볼 수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고 본다.

 

제발트는 엄청난 수준이었던 (독일을 말 그대로 초토화 시키려 했던) 무차별 폭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대해서 그리고 폭격으로 인한 참상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고, 그런 시작에 이어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했음에도 독일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침묵하기만 할 뿐이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를 분석하고 있다.

 

망각과 재건

 

제발트는 그 두 가지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과 어떻게 생각한다면 망각과 재건은 반성을 통한 극복으로 미화시킬 수 있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기억하지 않으려는... 그 기억을 지우려고만 하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회상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정신적 외상과 같은 그 기억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회피-기억의 공백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지를 고민하려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닥쳤던 피해를 말할 수 없다는 논리는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폭격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알게 된다면(파괴를 위한 파괴였던) 그리고 폭격을 실행했던 이들의 광기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적인 침묵에 대해서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제발트의 입장을 어떤 식으로 평가해야 할지 조심스럽기도 하고 고민되기도 하는데, 그런 그의 대답하기 까다롭기만 한 지적과 함께 독일문학이 그것에 대해서 어떤 문학적 의견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논의까지 이어지면서 성급하게 어떤 대답을 내놓기 보다는 치열한 고민들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침묵에 대한 강요보다는 치열한 논의-논쟁을 통한 성찰이 좋을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찾게 되기는 하지만 불편한 기분으로 본다면 뜬금없는 논의라고 외면할 수 있을 제발트의 물음에 독일이 갖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종의 의도적-의도하지 않던 기억의 공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제발트의 문제의식은 조금은 잔인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요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치열함과 집요함이 보다 성숙한 시각을 갖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집요함이 어떤 식으로는 약점을 파고들고만 있을 뿐이고, 어두운 기억들을 끄집어내고만 있을 뿐인 악의적인-악취미일 뿐이라는 비판에 어떻게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그에 비해서 공중전과 문학과 함께 수록된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는 좀 더 복잡한 기분으로 읽게 되는데, 알프레트 안더쉬가 독일 문학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고, 그에 대한 제발트의 논의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도 애매하게만 느껴지지만 오직 제발트의 논의에 대해서만 얘기를 한다면 알프레트 안더쉬가 갖고 있는 (인간적으로서의) 이중성과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작가와 작품으로서의) 이중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야심과 함께 그 야심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결과물을(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스스로 토마스 만과 비교를 하려고 하니 그에 대한 평가는 야박해지게 된다) 독일이 갖고 있던 광기와 (제발트가 그것을 의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관시켜 생각하게 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논의만이 아닌 알프레트 안더쉬라는 개인이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더해지면서 작가의 삶과 작품을 떼어놓고 생각해야만 할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생각해야만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혹은 그 부분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좀 더 논쟁적인 논의가-생각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옮긴이가 자세히 전체적인 내용과 적절한 결론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내용을 읽게 된다면 충분히 의도를 알 수 있고,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약간은 감춰져 있었고 다루기를 꺼려하던 것들이 꺼내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기도 하고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게 되기도 한다.

 

무능력...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알게 되는 기회였고, 흔치 않은 기회였다.

 

좀 더 이쪽 방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면서 이기는 관계술 - 사람도 일도 내 뜻대로 끌어가는 힘
이태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부터... 라고 말하기에는 꽤 긴 기간 동안 인기를 끌고 있고 있는 자기계발서 혹은 실용서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거기에는 힐링-치유와 관련된 온갖 책들도 함께 포함시킨다면) 책들은 이제는 한때의 유행이나 흐름을 넘어서 하나의 장르나 분야로서 다뤄내도 충분할 정도가 된 것 같다.

 

그게 좋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서...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게 될 정도의 수준은 된 것 같다.

 

조금은 그 기세가 수그러든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꾸준히 소개되고 있고, 팔리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최소한) 한동안은 많은 관심을 끌게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책들을 그다지 읽고 있지도 않고 몇몇 책들을 선물 받아 읽게 되기는 했지만 딱히 관심을 갖게 되거나 도움을 얻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때때로 기억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읽어본 책들에 문제가 있기 보다는 우선 내 자신을 계발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 더 큰 원인일 것 같다. 

 

나를 바꿔야 한다거나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적기 때문에 그런 책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쉽게 읽히면서 읽는 동안은 재미나다는 점 때문에 손에 들어오면 곧장 읽게 되는 것 같다.

 

관계술에 대한 책인 이태혁의 ‘지면서 이기는 관계술 - 사람도 일도 내 뜻대로 끌어가는 힘’도 앞에서 말한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적의 분야에 어울리는 내용이고 그렇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내용들도 있고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어서 가볍게 읽으며 조금은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언제나처럼...

뒤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게 되기는 하지만 순식간에 그런 문제들을 잊게 된다는 단점도 있는 것 같다.

 

읽어내며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 반성하고 고치려 하지는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런 점인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 우선은 저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되는데,

저자는 (TV를 보는 적이 거의 없어서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유명 TV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것 같고, 나름대로 많이 알려진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것 말고도 겜블러(라고 이름을 꾸며도 결국 도박사다)로 지낸 적이 있다는 경력 때문에 흥미를 끌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다양한 경험들이 저자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여러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의 방법에 대해서 많은 얘기들을 꺼낼 수 있었지는 않았을까?

 

제목 그대로 저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술을 알려주고 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내용을 담고 있든 그 진심이 무엇이든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만남 보다는 자본주의-경쟁사회에서 얼마나 적절한 방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냉소적이거나 비난하는 입장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떤 현명함을 또는 지혜를 알려주고 있기도 해서 그런 필요에 의한 독서가 아니라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기도 할 것 같다.

 

우선은... 쉽게 읽혀져서 좋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과 (나름대로) 과학, 사회학, 심리학 등 이론적인 배경을 갖고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쳤다면 어떤 대응을 한다면 좋을까? 라는 질문 속에서 읽는다면 그걸로 충분한 독서가 될 것 같다.

 

다만, 그렇게 읽는다고 해도... 그리고 꽤 적당한 방법을 저자의 논의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벌어진다면 쉽게, 알맞게 대응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일이라 그저 참고하는 수준에서 읽는다면 그걸로 된 것 같다.

 

나쁘지 않는 내용에 

흥미로운 부분도 있고

그걸로 제값을 하는 것 같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내 자신이 사람을 상대하고 관계하며 바뀌는 점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꾸란과 성서의 예언자들 - 아담에서 예수까지, 성서의 예언자들은 꾸란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최영길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1. 꾸란을 만나기까지

 

꾸란이라고 불리기보다는 흔히들 코란이라고 불리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의 경전인 꾸란을 읽게 된 이유는 특별할 것 없다. 무슬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도 무슬림을 이해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서 읽고 싶었고, 읽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대충 훑어봤을 뿐이라 딱히 무엇을 읽었고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는지를...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읽기는 했으니... 나름대로 애써보긴 한 것 같다.

도대체 이런 걸 왜 읽으려고 했는지는... 꺼낼 말이 없다. 

그냥 읽어보고 싶어서 읽었을 뿐이다.

 

위대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통해서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신청을 하면 우편으로 한글로 번역된 꾸란을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구해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 언젠가는 구해서 읽어보겠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자주 찾던 헌책방에서 양장으로 제본된 꾸란이 있어 구입을 할까 망설이다가 다른 이가 먼저 손에 쥐게 되어서 또다른 나중으로 구하게 되는 기회를 미루게 되었는데, 결국 꽤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금 구하게 될 수 있긴 기회가 생겨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양장본은 호기심으로 구하는 사람이거나 익명으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아닌 실제 무슬림들에게만 제공되거나 이슬람사원-모스크에만 비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방법을 몰라서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만 싶다.

 

이것도 나름대로 알라께서 어떤 이유로 나에게 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일은 없지만.

 

2. 꾸란을 읽은 후

 

성경도 읽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기억나는 내용이 없어서 읽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하기만 한데, 마찬가지로 꾸란도 3주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읽었는데(성경보다는 짧은 기간에 읽어냈다. 성경은 별 것 아닌 분량인데도 4주나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지루해서다. 난 아무래도 신을 믿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믿을 자격은 없는 것 같다), 1,300쪽에 가까운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분량 중에서 기억나는 내용도 없고 그렇다고 깊은 인상을 주는 순간도 없어서 그저 읽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허무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딱하기도 하다.

 

일종의 선입견처럼 꾸란과 성경은 크게 다를 것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알고 있었고,

구약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고, 예수 이후의 내용에서부터 무척 달라진다는 말을 마치 사실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꾸란은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구약과 신약 이후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어떤 일관된 이야기의 흐름을 담고 있기 보다는 알라의 말씀 혹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씀들이 가득할 뿐(물론, 그밖에도 예수, 노아, 모세 등등에 대한 내용이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이 갖고 있어야 할 믿음, 생활방식, 태도 및 기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들과 경험들 속에서 무슬림이 지켜야 할 덕목들을 나열한 느낌이 더 커서 읽어본 사람만이 어떤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는... 무슬림으로써 살아가는-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꾸란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일정 이상의 앎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읽은 사람들은 꾸란에서 구약과 신약이 좀 더 풍부하게 해석되고 논의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종교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유대교-천주교-개신교들은 되도록 구약과 신약과 함께 꾸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클 것 같고, 반대로 무슬림 또한 꾸란을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을 읽는 것은 필수일 것 같다.

 

과연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인지 모르겠지만...

구약, 신약, 꾸란 모두를 읽어봤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데,

읽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모두 다 읽지 않는다면 무척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것이고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키진 못하겠지만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결국... 읽는 것으로 신을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신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것 모두를 읽는다면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모든 것을 읽어보기를 권하게 된다.

 

아마도 (본문이 아닌) 각주 어딘가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꾸란은(마찬가지로 성경도) 복음과 경고로 채워는 내용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반복해서 곱씹을 것 같기는 한데, 꾸란을 읽고 근본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읽기 전이나 읽은 다음이나 여전히 쉽게 이해되진 않고 있다(당연히 구약과 신약을 읽은 다음에도 유대교-천주교-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다).

 

여러 가지에서 꾸란을 읽는 기간은 좋지 않은 시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읽는 기간이 더 늘어지게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국 읽어냈고 읽어냈다고 해도 크게 깨달은 것도 이해가 커진 것도 아니라 실패한 읽음일 뿐이라 그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예상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은... 전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 4 : 생기론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 4
장용순 지음 / 미메시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01 위상학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62373358

02 은유와 생성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62881499

03 용해와 내재성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62881558

 

 

 

현대 건축과 현대 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들 또는 각각의 분야나 영역들이 어떤 (개별적인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유사성을 갖고 있고 상대방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를(혹는 보완시켜주고 있는지를), 어떤 (내용과 논의의) 변화들을 보였고 그 변화들과 차이들의 진행이 어땠는지를 (개별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면서도) 종합적으로 탐구하()(하고)있는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은 지금까지의 기나긴 모험의 마지막을 알리는 4권에서는 질 들뢰즈의 생기론을 중심으로 생기론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그 논의가 어떤 흐름 속에서 생겨난 논의인지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들뢰즈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부족하(기만 하), 그의 논의의 핵심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생기론에 대해서도 특별히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저자의 논의를 음미하며 읽어내기 보다는 겉핥기로 읽어냈을 뿐이라 충분히 이해하며 읽어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저자는 쉽게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생기론에 대한 논의였는지 생기론의 철학적 계보를 별도로 설명해주고 있어서 아주 읽어내기가 어렵지는 않았었다.

 

이후 저자는 생물학과 진화론, 그리고 현대 건축에서 생기론 적 사유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는 건축물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는데, 저자의 구분(과거의 건축과 현대의 건축, 전기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에 따라 각각의 영역들이 어떤 변화들을 보여주었고, 그 변화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과 유사성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인식 지평에서 생각을 이어가야만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무척 간단하게 말한다면 기존의 단순한 세계관이 아닌 좀 더 복잡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계관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과 그런 변화의 과정과 그 변화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로 채워진 내용이었는데, 마지막 결론에서 상호간의 영역이 어떻게 주고받을 수 있을지를, 새로운 가능성을 어째서 끊임없이 모색해야만 하는지를, 무언가에 대해서 끝없이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서 등 읽는 이에게 왜 그래야만 하는가? 에 대한 질문들과 함께 저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제시하며 또다른 질문을 제시해야만 하고 지금이 아닌 다음을 생각해 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더 넓게 본다면 일종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생각의 틀이 어떤 모양으로 이뤄져 있고, 그 틀이 각각의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멀찍이서 본다면 유사함 또한 찾아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지금 시대의 생각의 영역이 어떤 모양을 갖고 있는지, 그 밀접함과 차이 속에서의 가능성과 한계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아야만 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해해야만 하는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채워낼 수 없다는 좌절감만을 느끼게 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궁금증을 풀어가며 앎을 넓혀가고 싶다.

 

딱히 어울리지 않는 결론인 것 같지만...

이것 나름대로 근사하게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발행하고 있는 한국-국내의 (상대적으로) 젊은 연구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에 대한 결과물인 하이브리드 총서는 제목부터 시작해서 표지 디자인이나 내용 면에서 무척 색다르고 독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총서의 시작인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은 각각의 연구자들이 전혀 다른 분야이고 다른 방식의 연구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종잡을 수 없는 관심과 논의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해박한 지식과 앎의 추구 속에서 치열함 또한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사유의 악보가 하이브리드 총서의 개론서나 입문서로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의 악보를 접한다면 하이브리드 총서가 어떤 관심과 연구자들의 결과물들이 발표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사유의 악보는 저자가 기타리스트이며, 작곡가이기도 해서 무척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고, 제목처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악보 위에 저자의 다양한 사유들이 하나씩 써지면서 다채롭고 다양한 주제들로 내용은 채워져 있다.

 

사유의 악보는 저자가 이미 여러 방식으로 발표했던 원고들이 모여진 모양새이기는 하지만 미발표 원고들을 추가로 덧붙이고 있기도 해서 단지 그동안 발표한 글들이 모여졌을 뿐인 느낌은 덜하고 내용에서도 하나의 주제 속에서 온갖 것들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무척 다양한 시각과 내용을 접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반적인 인문학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때때로 조금은 실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기도 한데,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다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도 아니기 때문에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 각주를 통해서 성실하게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전달하려고 해서 어려운 내용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열심히 읽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다.

 

단호하게 어떤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여러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방식이라 뚜렷한 결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지 않게 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손쉬운 결론을 찾기 보다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고민의 이어감이 쉽게 논의를 따라가기가 어렵기는 했어도 더 공감이 되기도 했다.

 

워낙 다양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고

그 각각의 내용들에서 거론되고 논의되는 학자들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을 지나친 느낌이 들어 아마도 간간히 다시금 펼치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는 짜증 속에서의 되새김은 아닐 것 같다.

 

즐겁게 다시 펼쳐서 저자의 논의를 음미하게 될 것 같다.

 

 

 

참고 : 논의 중에서 저자는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고 추천하고 있는데, 그렇게 알려주는 책들 중 하나도 읽은 것이 없다는 것에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고, 이것 저것 읽고 싶은 책들을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