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혁명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1
박윤덕 지음 / 책세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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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 더 이상 혁명을 말하는 시대도 아니고,

혁명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린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서 다뤄지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혁명은 역사가 되어버렸고,

박제-신화가 되어버렸다.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박윤덕의 시민혁명은 박제가 되어버리고,

학술적인 논의로서만 다뤄지게 된,

역사적인 한 시대를 말하게 될 뿐인,

혁명을 다시금 불러내려는 용감한 시도를 하고는 있지만 그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기만 하다.

 

단지, 나와 같이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해서 무언가를 생각해보고 싶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나 근대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시민혁명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고 하나의 느슨한 연관 속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끌게 되는 것 같다.

 

걸핏하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꺼내게 되고,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게 되기는 하지만 정작 혁명이 어떤 의미로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실제로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우리들에게 시대적으로 그리고 의미적으로 혁명이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고, 혁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 이후 시민혁명의 기원과 진행과정을 미국, 영국, 프랑스 혁명을 하나로 묶어서 각각의 개별적인 특성과 유사성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단순히 혁명에 대한 정의 이후 혁명의 시작과 진행과 종결이라는 전형적인 논의에서 조금은 벗어나 반복해서 혁명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 어떤 과정 속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논의가 간략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 관점으로 혁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갖고 읽게 만든다.

 

혁명의 끝자락에서의 분열과 갈등, 종결과 성과에 대한 논의에서는 혁명을 하나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으로서 혹은 과거의 역사로서의 혁명으로 논의를 완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하나의 완결로서 혁명을 다루기보다는 어떤 순환 / 주기로서의 혁명으로 이해되도록 의도하기도 있기 때문에 시민혁명을 좀 더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기를, 그 시대의 문제의식과 직접적인 행동 / 실천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기를 독촉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외침에 대해서 대부분의 독자들은 침묵하거나 아예 거들떠도 안 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떠들썩하게 외치지는 못해도 조용하게라도 혹은 말없이 저자의 의견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항상 그렇듯... 문제는 침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천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의미는 없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 또한 침묵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항상 부끄럽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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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피에르 리비에르 - 내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죽인
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 앨피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모든 것은 경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근 미셸 푸코의 저작들이 다시금 출판이 되고 있는데, 기존에 번역되었던 책들이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소개되지 않던 저서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미셸 푸코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많이 기뻐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미셸 푸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빨리 읽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많이 쌓여있고, 읽어본 그의 책들 중에서도 다시 한번 읽을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어서 새롭게 번역된 책들을 읽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최근 출판되고 있는 미셸 푸코의 다른 저서들은 강의록들이 대부분인데, ‘, 피에르...’ 는 강의록이 아닌 비공개로 진행된 세미나를 통한 결과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미셸 푸코의 논의만이 아닌 좀 더 다양하고 종합적인 시각과 논의를 접하게 되는 것 같다.

 

내용은 크게는 두부분으로 되어 있고,

좀 더 상세하게 나눈다면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피에르 리비에르가 저지른 사건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되도록 시간 순으로 정리한 내용들이고, 둘은 피에르 리비에르가 직접 작성한 수기이며, 셋은 사건과 수기에 대한 미셸 푸코와 함께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각자의 시각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짧은 논평들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5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사건에 대한 그 당시의 기록들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고, 논평들도 꽤 어렵고 조금은 난해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분량 자체가 짧기 때문에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으면 그냥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어나가면 그만이다.

 

사건에 대한 기록은 (지나칠 정도로) 무척 상세하고 다양한 자료들로 채워졌는데,

이런 기록들이 훼손되지 않고 보전되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게 되기도 했고,

사건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기도 하고 인상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흥미롭게 읽혀질 수 있었다.

 

사건에 대한 각 연구자들의 논평 또한 짧은 내용이면서도 무척 다양한 시각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사건 자체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펼쳐지는 상황들에 대해서 혹은 그 사건에 접근하는 시각과 관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고,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와 시대 속에서의 다양한 권력관계와 사회구조 및 법적절차와 정신의학에 대한 관심은 피에르 리비에르가 저지른 사건과는 무관한 것 같으면서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도록 논의가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이처럼 다양하게 그리고 폭넓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감탄과 경이를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한심함도 함께 느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나 (미셸 푸코의 말처럼 경탄하게 만드는) 피에르 리비에르에 의해서 직접 쓰인 수기인데, 읽어본 사람에 따라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수기를 읽으면서 그가 과연 그 시대의 평가처럼 미친 것이(광기에 빠진 것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헷갈려지게 될 뿐이었고, 그의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써내려진 글로 인해서 어떤 식으로도 판단하기가 어렵게만 느껴지게 되었다.

 

물론, 읽다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어지럽게만 느껴져서 미친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적절한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이런 난감함을 느끼기는 미셸 푸코나 다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런 난감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시각에 따라 피에르 리비에르가 저지른 사건을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말해낼 수 있는 다양한 논의들을 꺼내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다양한 시각과 논의들이 어떤 것에 대한 좀 더 다양한 관점을 갖도록 노력하게 만들 것 같다.

 

항상 그렇듯이 이해되는 것보다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고,

만족감보다는 좌절감을 더 느끼게 되는 독서였지만...

그래도 읽어내면서 무언가를 알게 되기도 하고,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희망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우울한 노력이 되고,

좌절의 연속과 패배감에 빠지기만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지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읽혀지지 않는 것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것 같다.

언젠가는 읽혀지게 되기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되기를 바라며 또다시 무언가를 펼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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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쥐
이은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뭔가 확실히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좀 더 깊이 파헤쳐 들어갔으면 해서죠...

 

 

개인적으로는 추리 소설 / 범죄 소설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 작가의 작품은 한편도 읽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한국 작가들의 작품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고,

단지 어떤 작가가 유명한지 혹은 어떤 작품이 유명한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피했던 것 같다.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이유는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의 쥐가 한국의 추리 소설 / 범죄 소설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어떤 영역 속에 머물러 있고 그 영역이 한국 추리 소설 / 범죄 소설 영역에서 주변인지 중심인지 등과 같은 작품 외부적인 점들에 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서만 논의를 하고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언제는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냐만은...

어쩐지 책을 읽었음에도 전혀 내용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과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미술관의 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통 추리 소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범죄 소설이라고 말하기에도 조금은 애매한 위치에 있는 작품인데,

특별히 특정 작품을 놓고 비교를 해가면서 미술관의 쥐'의 특징들을 말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조금은 느슨하게 추리 소설 / 범죄 소설의 영역을 생각하며 읽어내면 될 것 같다.

 

미술 작품들과

미술 세계

그 생소하고 미지의 영역을 통해서 미술관의 쥐는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고, 그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조금씩 들춰보고 파헤치면서 작가는 고상하고 순수하기만 할 것 같은 세계가 얼마나 지저분함을 감추고 있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미술관의 쥐는 범인이 누군지

어떤 음모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

무언가를 추리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려고 하기 보다는(문제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해결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작가는 그보다 미술계와 예술에 대해서 좀 더 현실적인 논의를 혹은 논쟁을 의도하려고 하고 있고 자신의 들려주고자 하는 주제의 중심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

치밀한 범죄와 그 범죄를 밝혀내기 위한 추리와 논리 그리고 반전과 뒤엎음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미술계와 예술의 지금 현재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두고 있고 논의를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

너저분하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

아는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미술계의 어두운 / 추악한 구석과 그 지저분함으로 뒤엉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있고, 대답을 찾고 고민하면서 지저분함과 그 뒤엉킴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이끌어내려고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르조네의 템페스타와 기타 미술품들에 대한 감상과 해석 그리고 분석은 하나의 재미로서만 이해될 뿐이고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결국 미술이 아닌 미술을 둘러싸고 인간들의 어떤 추악함인 것 같다.

 

미술관의 쥐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공백을 채우려고 하는 시도인 것 같다.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김준기가 실수로 잃어버린 미술관의 쥐라는 원고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계속해서 추측하고 예상하도록 의도하고 있고, 그 잃어버린 원고라는 공백 / 퍼즐을 맞추고 채우기 위한 각자의 영역에서의 시도들과 검토들로서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기도 하다.

 

자살이 살인사건처럼 되어버리고,

자살과 관련된 수많은 의문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김준기와 (그의 친구인) 양누리는 여러 숨겨진 의미들과 감춰진 진실들을 알아가게 되고 결론으로 향하게 되는데, 아쉽게도 그 결론으로 향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진행과정에 비해서는 너무 갑작스럽고 갈등과 충돌 그리고 폭발로 격렬하게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궁금함을 만들어내고 흥미를 느끼게 하면서도 정교한 / 치밀한 끝처리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사건의 진행 속에서 자살을 한 박관장이 과연 그런 수준까지의 치밀함이 가능했었는지를 혹은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지를 의문하게 되기도 했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조금은 납득의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이야기 진행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치밀함 /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우선은 들게 되는데,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읽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의 흥미로운 진행을 보이고 있어서 만족스러움도 느끼지만 미술관의 쥐가 기본적으로 살인과 납치 그리고 자살을 하나로 묶어서 어떤 거대한 범죄와 연관시키려 하고 있고, 그것이 미술계와 예술에 대한 논의까지 이끌어가려고 하는 의도가 조금은 지나친 포부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구성에 대한 만족과 흡인력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술관의 쥐라는 원고의 사라짐으로 생겨난 원고-공백을 통해서 모든 이야기와 각각의 인물들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구성되어지는 이야기 구조 자체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좀 더 직접적으로는 말한다면 라깡과 잃어버린 편지를 떠올리게 되기도 하지만 이런 떠올림이 적절한 것인지, 맞는 방식의 생각의 이어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기 때문에 조금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게 된다.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우선은 들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읽어냈을지 모르겠지만 아주 뛰어난 작품은 아닐지라도 여러 재미들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나쁘게만 볼 작품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추리 소설 / 범죄 소설 작가의 작품들에 대해서 흥미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아주 불만스럽게 읽지는 않을 것 같다.

참고 : 개인적으로는 본문보다 작가가 독자들을 위해서 덧붙여 설명한 에필로그가 더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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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6379320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는 그의 첫 작품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관한 심리를 무척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우리는...’이 남성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뤄지는 내용이었다면, ‘우리는...’은 여성의 시각에서 사랑과 관계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기본적인 차이일 것 같다.

 

왜 나는...’ 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이 있기는 한데, 그 차이들에 대해서 알랭 드 보통의 팬이거나 그의 인간관계 3부작이라고 평가되는 작품들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나 여러 차이들에 대해서 말할 것 같고, 나머지 일반적인 독자들이나 나와 같이 지루함 속에서 읽어낸 사람들은 발견하거나 찾게 되었어도 특별한 의미를 느끼거나 흥미를 갖지는 못할 것 같다.

 

사랑과 감정의 변화들을 무척 섬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그의 글이 보여주는 매력은 여전하고, 글을 통해서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그리고 감정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게 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놀라움과 매력보다는 지루함이 더 컸던 것 같고 불필요하게 길게 늘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 화려함 속에서 어떤 공허함도 느끼게 되었다.

 

사랑의 시작과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 엘리스라는 여성의 시각에서, 사랑에 대한 감수성 넘치는 그녀의 시각에서만 모든 것이 다뤄지고 있을 뿐이고, 그녀에 비해서 덜 감정적이고 무미건조한 존재로 다뤄지는 에릭은 일방적으로 관찰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점 때문에 읽는 도중 불만스러운 느낌도 들기도 했는데, 에릭이 실제로 엘리스에 비해서 그들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입장에서 어떠한 반박도 그리고 대응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의 시각과 글쓰기에 약간은 문제점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불만스러움은 에릭이라는 남성이 보이는 행동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나 또한 보이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연대 의식 때문에 이런 불만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평가되는 에릭에 대해서 애정을 느끼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은 사랑에 대해서 무언가라도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 감정의 변화와 떨림에 대해서 글을 통해서라도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알랭 드 보통의 글에 충분한 공감과 만족스러움을 찾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감정과 떨림에 대해서 이미 충분한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냉소적인 기분으로 읽었을 뿐이고 그래서인지 왜 나는...’이 담고 있는 사랑과 감정과 관련된 많은 논의들이 그저 한때나 느끼는 감정일 뿐이라는 퉁명스러움을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 감정과 떨림을 다시금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두렵기 때문에 혹은 그 기쁨과 고통 모두를 지나칠 정도로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예민하면서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기본적으로 너무 건조한 인간이라 우리는...’에 별다른 언급 자체가 귀찮게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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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945~2000
임석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7989073

 

 

 

임석재 교수의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은 분명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좀처럼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떠올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에만 즐겁게 읽었을 뿐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시 책을 펼쳐보며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긴 한데,

귀찮게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을 더위 탓으로 돌리는 요즘 분위기를 따라서 자기 자신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마냥 미루게 될 것 같다.

 

저자는 20세기의 미술과 건축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시간적인 구분으로 나누고 있고,다른 하나는 일종의 그 시대의 주된 정서 혹은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하려고 했는데, 그런 저자의 구분에 따라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1945~2000’ 20세기 후반기의 건축과 미술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2차 세계 대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건축과 미술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에 놓인 건축과 미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이후의 건축과 미술은 연관성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건축과 미술 둘 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지지부진한 발전과 한계를 돌파 /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록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는 주장과 함께 그것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상호보완적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며 이번 연구가 갖는 중요성과 의의를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기존의 각 분야별로 점차 분화되고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되던 상황에서 융합, 통합, 종합, 통섭 등을 주장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혀 다른 관점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 아닌 단순히 물리적인 / 기계적인 결합에 대해서는 충분한 경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근 다양한 결합과 관련성을 찾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의견을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1945년 이후의20세기 후반기의 건축과 미술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한계에 대한 지적이며, 그런 입장 속에서 어떤 변화와 발전, 도약과 (모더니즘의) 미완성의 완성, 극복을 모색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건축과 미술 둘 다 이전에 비해서는 다양하게 분화되고 좀 더 난해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저자는 그런 다양하고 복잡한 흐름을 최대한 정리해주고 있고 그런 다양하고 복잡한 흐름들 속에서 중요한 흐름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흐름들이 어떤 입장과 논리 속에서 이뤄진 흐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유럽과 미국의 건축적 / 미술적 관점과 흐름이 이전보다 좀 더 거리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런 다양한 내용들을 다루기에는 분량의(370) 한계 때문에 상세한 논의가 어렵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세부적인 논의보다는 몇몇 대표작들을 통한 대략적인 논의를 통해서 전달해주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고 다양한 흐름들을 보인 20세기 후반의 건축과 미술이기 때문에 그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저자는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혹은 알려지기 힘들었던 다양한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어 앞으로 20세기 후반의 건축과 미술에 대해서 좀 더 알려고 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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