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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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4%91%ED%98%81%EB%AA%85

 

 

 

 

이중혁명은 인간생활의 모든 측면을 변화시켜나갔다

 

 

 

1780년대의 세계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전쟁

평화

혁명

민족주의

토지

산업세계를 향하여

재능에 따른 출세

노동빈민

이데올로기 : 종교

이데올로기 : 현세

예술

과학

결론 : 1848년을 향하여

 

 

 

에릭 홉스봄

 

마르크스(맑스)주의 역사학사 중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에릭 홉스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균형 잡힌 시각과 (이런 상투적인 말을 굳이 꺼내야 하는 것도 우습기만 하다. 보수적인 입장의 역사학자들 중에서 과연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 꼭 좌파 혹은 진보로 분류되는 학자들에게만 균형이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일부분이 아닌 보다 큰 틀 안에서 논의를 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각-생각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릭 홉스봄의 혁명-자본-제국-극단의 시대 시리즈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시대를 알기 쉽게 정리를 해주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만이 아닌 (글자 그대로) 격변의 시대를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넓은 시각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고 있는 연구가 있을까? 라는 생각 속에서 감탄하면서 읽게 만든다.

 

물론, 홉스봄의 연구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홉스봄의 연구가 그 이전의 연구들에 비해서 획기적이거나 그동안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만을 다뤄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기존의 각각의 방식으로 진행된 연구들을 이중혁명이라는 틀 속에서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관점과 시도가 그동안의 방식과는 분명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그 당시의 시대를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뛰어난 방식으로 종합해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미 예전에 한번 읽어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너무 아는 것이 부족했는지 읽으면서도 몇몇 부분들은 어렵게만 느껴졌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리송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읽어내기가 편했고 좀 더 명료함과 저자의 폭넓음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1789년부터 1848년까지로 시기를 한정해서 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이라는 이중혁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역사적 사건과 흐름을 파악하려고 하고 있는데, 역사적-정치적-사회적인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일어난 변화-갈등들을 살펴보면서() 단순히 사건들이 이어짐이 아닌 이중혁명이라는 하나의 관점-틀 속에서 역사적 흐름을 다뤄내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역사만이 아닌 그와 관련된 세계적인 변화와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나고 너무 방대하게만 느껴지는 시대적 변화를 좀 더 이해하기가 쉽게 정리하고 있는데, ‘혁명의 시대의 목차를 보더라도 충분히 어떤 의도와 생각 속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며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고 이중혁명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모든 것들이 다뤄지고 있고 정리하면서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만이 다른 영역들(예술과 과학 등)에 대한 논의들도 있어서 좀 더 그 시대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홉스봄에 대해서 논의할 때면 항상 언급하듯이 사건만이 아닌 혹은 정치적 지도자에 대해서만이 아닌 민중들의 삶과 대다수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입장에서 그 시대를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역사학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이해를 보여주고 있고 그런 점들이 많은 사람들이 홉스봄을 특별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사건들의 나열만이 아닌 어떤 흐름을 이중혁명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있고 그 과정 속에서 사건들을 분류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인 입장인 것 같고, 그런 방식으로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홉스봄의 논의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동안 계속 미루기만 했던 홉스봄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가야 할 것 같다.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얼마나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의욕을 갖게 만든다.

 

근대사회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조금이라도 알아가고 싶다.

 

 

 

참고 : 읽으면서 자주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같은 분석과 입장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비교하며 읽게 된다면 많은 흥미로운 생각들이 생겨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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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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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6537&cid=43005&categoryId=43005

참고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1851&cid=40942&categoryId=32966

 

 

 

 

길가메쉬 서사시

 

아마도 중고등학교 수업에서 최초의 문명으로 수메르 문명에 대해서 배웠을 것이고(아마도 지금도 세계사 수업에서는 간단하게라도 다뤄지지 않을까?),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한 짧은 언급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더라도 세계사에 대한 수업을 조금이라도 접해봤다면 혹은 인류의 기원과 문명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라도 접했다면 수메르 문명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세계사에 대해서 그리고 신화에 대해서 그럭저럭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억하고는 있지만 기억만하고 있을 뿐이고 알고만 있을 뿐이지 딱히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이제야 읽게 되었다.

 

어쩐지 읽어도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읽기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역시나 읽으면서 흥미나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읽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말을 꺼내고 싶고,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정보-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오히려 길가메쉬 서사시 자체보다 더 큰 흥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오랜 기간 연구를 하면서 얻게 된 지식-정보를 알기 쉽게 그리고 재미나게 알려주면서 길가메쉬 서사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인류 문화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로서 어떤 식으로 전승되고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 이어짐 속에서 어쩐 변형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고 이해시켜주고 있다.

 

신화 그 자체보다는 신화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더욱 매력적이고 흥미롭게 읽혀지기는 하지만 신화 또한 기묘한 매력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사람들에 따라서는 지루하게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읽다보면 무척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저자는 여러 방식으로 길가메쉬 서사시가 이후의 신화-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주면서 좀 더 특별함을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어떤 기원이라는 것을 읽게 된다는 점에서 무척 경이로움을 간간히 느낄 수 있었는데,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느낄 수 있으면서 아울러 이 신화-서사시가 어떤 식으로 변형되고 이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면 좀 더 흥미를 느끼게 된다.

 

아직은 덜 성숙한 길가메쉬가 어떤 잘못들을 저질렀으며 어떤 식으로 친구를 얻게 되었는지, 무슨 모험을 했고 어떻게 친구를 잃고 죽음의 공포를 겪었으며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읽을 때는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기는 하지만 저자의 안내 속에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기원과 원형을 접했다는 생각에 그 옛날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를 남기게 된 것인지 궁금증만 커지게 된다.

 

신화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는 후반부의 논의에서 여러 해석들과 상세한 설명은 대충 읽게 되거나 쉽게 지나쳤을 부분들까지 다시금 되짚어 생각해보도록 함으로써 좀 더 신화를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구성은 무척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어떤 내용인지 어떤 식으로 발견되고 학자들에 의해서 파악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고, 이어서 직접 저자가 해석한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도록 해주고 있으면서 마무리로 다시금 이야기를 해석하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방식은 좀 더 이야기를 음미할 수 있고 생각해보도록 해주고 있다.

 

전체 이야기 중에서 빠진 부분들이 많아서 조금은 이야기 진행이 들쭉날쭉하게 느껴지지만 인류 최초의 신화-서사시라는 점 때문인지 어떤 이야기들과도 다른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신화에 대해서 그리고 서사시에 대해서 그 기원과 원형을 접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꽤 괜찮은 책읽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저자의 공들인 노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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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 전면개정판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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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에 대해서는 이름이야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특별히 읽을 기회도 그리고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었다.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고 어떤 생각을 말했는지는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읽을 것들도 많고 관심이 가는 것들도 많아서인지 프란츠 파농은 나중으로 미루기만 했을 뿐이었다.

 

어쩌다보니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게 되었는데, 일제강점기로 인한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후로도 여러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과거들로 인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갖던 중 흑인들이 어떤 식으로 식민지 시대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채워진 문제적 저작 검은...’에 갑작스럽게 관심이 들어서 찾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어내진 못하게 되었다.

 

난해하게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어쩐지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괜히 내 앎의 부족을 정당화시킨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고) 해방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 (흑인이지만 흑인에서 벗어난) 백인이 되고자하는 정서와 정신구조에 대해서 정신분석을 밑바탕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려고 하고 있는 검은...’은 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어떤 식으로 알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되지만 그걸 파헤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설명과 설득에서는 여러 문학 작품들과 특정 사례들을 통해서 논의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했듯) 설명해주려고 하고 이해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전체적인 맥락은 알듯하지만 그걸 제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읽어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앎의 부족과 이해의 부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기존의 해방에 대한 이해와 접근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의 접근이고 생소한 문제의식으로 지배를 다뤄내고 있는 검은...’은 해방되었음을 말하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 새로운 지배를 받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고 있으며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 어떤 방식의 이해와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여러 정신분석가들의 논의와 철학자들(현상학자, 헤겔, 칸트 등등)의 논의를 밑바탕으로 어떤 식의 왜곡과 오해를 통한 착각에 빠져있으며 새로운 흑백논리가 알게 모르게 당연하듯 우리의 정서-정신구조에 깊은 자국으로 남겨져 있는지를 밝혀내고 있는 검은...’은 누군가의 시선 타인과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좀 더 자발적이고 스스로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긍정하며 부정적 시선을 부정의 부정으로 반박해야만 할 것인지 깊이 있게 탐구하려고 하고 있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이해가 가능하지만 제대로 된 이해를 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특정 지역과 특정 인종 그리고 특정 사례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어서 이걸 통해서 한국 사회의 경우는 어떤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적용가능한 부분이 있을지 생각하면서 읽을 때마다 뭔가 길을 잃은 기분이 들고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마구잡이로 대입하게 되는 잘못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처지는 동일하지만 그 과정이나 지배 방식에 있어서는 분명 다른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인종적 차별과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부분이 많을 것이니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을지 조금은 난감하게 느껴지게 된다.

 

여러 인상적 논의들과 단호함이 기억나게 되고 철저하게 파고들려고 하는 그 방식에서 있어서는 감탄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논의들 자체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고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조금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식민지 시절의 다양한-교묘한 지배-차별들을 어떤 식으로 정치적 계급적 인종적 사회적인 접근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하는지를,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여전히 남아 있고 이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노력 자체가 더욱 인상적으로 기억날 것 같고 강렬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부족한 이해를 좀 더 채워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커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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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묻다 - 예술, 건축을 의심하고 건축, 예술을 의심하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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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진 건물들은 모여 도시를 만든다. 공간에 시간이 더해지면 장소가 되고, 시간에 공간이 더해지면 사건이 된다. 장소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사건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도시는 시간이 결합한 공간의 집합인 것이다. 도시는 역사의 필연을 갖고 있다. 그 역사는 건물로 증언된 시대의 목격담이다. 역사를 다시 동질성이 있는 사건들로 묶으면 시대가 된다. 건축은 그 시대와 사회의 목격자며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건축가 서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데, (그가 만들어낸) 건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책을 통해서 글로써 그를 알게 되었고 그 글-생각들이 마음에 들어 꾸준하게 그의 이름을 내건 책들을 찾게 된다.

 

강연회를 통해서 알게 된 건축가 서현이 강연 도중 작심을 하고 썼다고 말했던 건축을 묻다는 직접 책--생각을 읽어보니 그런 표현이 그리 과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한 자세로 건축을 묻고 대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 스스로 내린 결론과 입장에 대해서 이견이 있거나 반박하거나 덧붙여 말할 것들을 찾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만하면 충분히 깊은 고민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아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것들을 따져 묻고 검토하면서 어렵사리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무척 단순한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건축은 무엇인가?

 

어떻게 본다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무슨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할지 무척 난감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이어서 건축이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 또한 내놓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곤혹스러움을 안고 하나씩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의 질문은 어떤 대답을 찾으면서 새로운 질문도 계속해서 더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대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지만 어떤 대답을 찾을 때는 그 대답에 대해서 많은 확신도 느껴진다.

 

예술이 어떤 식으로 체계를 하나의 세계-세계관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는지를 확인하면서 건축 또한 최초에는 얕잡아 보였지만 점점 체계-세계-세계관을 만들면서 하나의 학문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는 과정을 신중하고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다.

 

건축가라는 직함에는 어울리지 않게 (혹은 무척이나 어울리게) 저자는 단순한 순수하게 건축에 대한 입장에서 검토하는 것이 아닌 철학적 사회적 역사적 검토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건축이라는 영역 속에서 건축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 건축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시도한다고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보다 알맞은 책읽기가 될 것 같다.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

니체

 

이런 이들의 생각을 차례대로 가져오고 있으니 쉽게 읽혀지진 않게 되지만 그래도 저자가 다루고 있는 물음과 답을 찾는 과정은 흥미롭고 충분히 인상적이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건축들과 현대의 건축들을 통해서 건축이 무엇인지 그리고 건축에서 (다른 분야와는 다른) 어떤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며 가장 큰 특징으로써 용도와 기능을 주목하고 있고 (나중에는 공간을 추가한다) 그것에 대해서 좀 더 깊숙하게 의미를 파고들려고 한다.

 

기능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드디어) 저자는 (조금은 익숙한 이름의) 현대 건축가들을 거론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자주 접해왔던 건축가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이런 건축가들의 특징과 건축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건축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기술과 직업, 재료의 변화 등등 시대적인 변화와 발전으로 인해서 건축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공간

 

저자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으로 건축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고 있고 여러 가지를 검토한 이후 조금씩 깨닫게 된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고 있는데, 건물과 건축에 대한 구분, 의미에 대한 고민, 사회적 존재 가치에 대한 이해로 생각을 확장시키면서 건축이 갖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고 대답을 내놓고 있다.

 

어렵게 읽게 만들고 조금은 서서히 고민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는 과정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고민에 대한 대답을 찾을 때마다 단호하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놓고 있다.

 

앞서 말했듯 그 판단과 생각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아주 흠을 잡을만한 잘못됨을 느끼진 않게 된다.

 

그 고민의 흐름에 충분한 설득을 느꼈기 때문일까?

 

건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고 고민어린 탐구를 하고 있는 건축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읽다보면-읽어보니 의미 있는 시도였고 흥미로운 과정이었으며 인상적인 대답이라고 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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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망각
김용진.박중석.심인보 지음 / 다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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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망각 : http://815.newstapa.org/#/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해진 것이다. 1808년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뉴스타파

 

독립언론 뉴스타파가 활동을 시작한 초창기부터 후원을 했었는데, 언론이 지금처럼 망가진 상황에서 대안적인 언론조차 없으면 정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후원을 시작했었다.

 

절박함을 느낄 정도로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뭐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하게 되었는데,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단한 행동도 아니었지만.

 

뉴스타파의 보도를 굳이 찾아보거나 건성으로 대강 제목만을 읽고 마는 한심한 후원자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큰 화제를 몰게 되는 보도를 접하거나 사람들이 뉴스타파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을 때면 후원하는 보람을 느끼게 되어서 더 좋은 활동을 지켜볼 수 있길 기대하게 된다.

 

가끔씩 어쩌다 저런 어이없는 모습을 보일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될 때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점점 그런 잘못들을 줄여가면서 더 좋은 독립언론이 되길 바라게 된다.

 

오랜 후원 때문인가?

 

뉴스타파의 이름을 내건 책을 발표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특별한 공지 없이 뉴스타파에서 책을 보내줘서 조금은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오랜 후원자들에게 순차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목부터 무거운 기분이 들었지만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무겁고 답답한 기분은 풀려지지 않았지만.

 

친일

 

친일에 대해서 한국 사회는 사회적으로는 명쾌한 부정적 입장과 잘못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라는 합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극우-수구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에 한해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등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해괴한) 입장이 있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친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명확하게 부정적이고 비난어린 시선이 대부분이고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온갖 방식으로 친일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고 다른 이유들을 들먹이며 어쩔 수 없음을 말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어왔다. 그보다 더 나쁜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예 그런 경우가 없었다고 은폐하고 부정하려는 시도 또한 많이 있어왔다.

 

이승만 정권에서 있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당했던 권력의 압력과 온갖 조직적인 방해와 폭력까지 동원한 철저한 은폐 시도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 같고, 그때 제대로 과거에 대한 진실과 폭로 그리고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친일에 대한 문제는 불거지게 되는 것 같고 그 관련자-부역자들이 지금 한국 사회의 중심에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있었던 시도들도 막으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제대로 된 청산과 정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해서 권력의 앞잡이가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게 되었으며, 자신의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같다.

 

특정한 개개인을 거론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이 충분히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인 구조나 잘못된 인식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친일에 대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충성하고 부역했던, 개인의 이기심을 위해서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서 밝혀내고 폭로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어려움들로 가득했는지 해방 이후의 한국의 현대사는 너무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사례들이 있었던 것 같다. 쉽게 찾아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지만, 많이 알려졌고 알 수 있지만 우리들은 삶의 고달픔 때문에 그런 내용에 대해서 많이 모르고 있거나 알게 모르게 모르려고만 해왔던 것 같다.

 

진실은 이미 있어왔지만 그 진실을 피하고만 있어왔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지 못하고 밝혀내지 못하면서 한국 사회는 발전해 왔고 가끔씩 과거를 되돌아보며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의 흐름의 시작점을 찾는 과정에서 친일에 대한 문제는 항상 거론되었고 그 계속되는 지적과 인식 속에서 친일에 대한 문제는 덮어지려고 할 때마다 다시금 꺼내지게 되었고 그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기만 했다.

 

역사란 그런 것 같다. 정상적으로 완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다시 다뤄지게 되는 것 같다.

 

친일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흑백논리의 입장에서 벗어나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애쓰는 또한 좀 더 성숙한 입장과 시각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친일과 망각은 그 시도부터 조사의 과정까지 분명 지금까지의 친일에 대한 접근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있고 밝음과 어둠 모두를 다뤄냄과 동시에 어떤 식으로 해야만 이 과거의 잘못을 지금의 시점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용서할 사람들의 생각보다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뻔뻔함에 답답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친일 청산이 어떻게 지금까지 엉망진창으로 진행되었는지에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진행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우선은 친일...’은 알려주고 있으며, 친일에 대한 옹호와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어떤 허황된 궤변을 내놓고 있고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지를 다뤄낸 다음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는 이들이 어떤 정신구조 속에서 그러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개개인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생각을 단순하게 손가락질해야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사실과 잘못된 기억을 어떤 식으로 바로잡아야 하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려고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순순히 잘못된 점들을 인정하고 뉘우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든 것들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하고 있다. 그 부정하고 불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이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한 가장 큰 문제점 아닐까?

 

친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제의식에 편승하려고(0 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그릇된 모습과 반대로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는 전후처리의 과정 속에서 어떤 방식을 보여주었는지를 비교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보여주었던 제대로 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정리가 어떤 식으로 문제를 계속해서 만들게 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점점 더 부풀어지고 커져가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친일에 대한 후손들에 대한 제대로 되지 않은 청산 혹은 진실 파악 덕분에 어떤 식으로 유리함을 얻게 되었는지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유리함이 어떤 식으로 대물림될 수 있었는지를, 후손들이 어떻게 이후의 삶을 혹은 직업과 사회적인 선택을 여러 직업적, 경제적인 혜택을 누렸는지를, 반대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들의 후손들이 어떤 식으로 핍박과 굶주림 그리고 빈곤에 허덕였는지를 악순환을 대물림 받게 되었는지를 비교하는 내용들을 읽을 때면 무거운 마음과 갑갑함 속에서 그들의 삶을 함께 추적하게 되고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 라는 생각만 들게 된다.

 

그리고 친일에 대한 문제만이 아닌 친일에 대해서 점점 관대한 시선을 갖게 하려는 조작들과 그런 시도들이 성공하면서 아무런 문제점을 점점 말하지 않게 되면서 그 이후에도 개인의 이득만이 앞세우고 있고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인식이 점점 더 팽배해지게-강해지게 된 사회적인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은 반박할 수 없고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점의 중심을 알려주는 것 같아 여러 생각들을 하도록 만든다.

 

친일...’은 지금까지의 친일에 대한 인식과 문제의식 그리고 여러 문제점들을 검토하며 지금과는 다른 시도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만 할 것인지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단순한 논리를 넘어선 세심한 논의를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새롭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단순하게 처리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라는 새로운 물음과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들의 삶과 사회에서 어떤 식의 고민이 필요할까?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고 누군가가 나서기를 바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결국 지금 이 사회도 친일로 가득했고 부역자로 가득했던 그 이후에는 독재에 순응했던 그때 그 시절과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고 조금이라도 더 자기 생각을 다듬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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