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시간.건축
Sigfried Giedion 지음, 김경준 옮김 / 시공문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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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각형을 채울 필요는 없다)

 

 

 

읽기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들고 다니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던

2주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읽었으니 그 기간 동안은 고난의 행군을 하는 기분이었다.

행군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지그프리드 기디온의 공간, 시간, 건축은 건축-도시계획에 관한 온갖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는 저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분량도 만만치 않았지만(800) 그런 부담감과 부피로 인한 어려움을 제외한다면 무척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한 저작이다.

 

한번 읽는다면 여러 지식들을 접하고 얻을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간간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기도 하고 건축에 대한 기본지식도 없이 읽어나가서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훑어보는 식으로 읽어서 제대로 이해한 부분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인문학적 시선으로 건축과 도시계획 그리고 관련된 다른 분야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역시나 읽고 이해한 부분보다 넘겨짚게 되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저자인 지그프리드 기디온은 본문에서 다뤄지는 전통과 권위를 앞세우는 학문으로서의 건축(아카데미즘이라고 말하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고, 실제로 그런 입장에서 활동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쓸모없는 내용으로 가득하다고 말하겠지만 저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건축과 도시계획의 큰 흐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저작으로 기억될 것 같다.

 

기디온은 1960년대의 건축적-도시적 혼란에 대해서 말을 꺼내며 시작하고 있고, 산업사회의 발전 속에서 급변하고 거대해져만 가는 상황 속에서 건축-도시계획이 변화로 인해서 생겨나는 다양한 요구를 (현재까지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지금 상황에서 어떤 문제의식과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알려주며 시작하고 있다.

 

본문 곳곳에서 이런 고민들과 문제의식 그리고 다양한 질문들을 내놓고 있고 그에 대한 일정한-일관성 있는 대답을 내놓고 있기는 한데, 그런 질문과 대답들이 이전부터 다른 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통해서도 일부분 접하기도 했기 때문에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그동안 읽은 책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합의가 가능한 결론들도 접했기 때문에 그런 이해와 공감 속에서 읽는다면 좀 더 많은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지그프리드 기디온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 건축만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논의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고 있고, 그런 노력 덕분의 그의 생각이 좀 더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기디온은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우선 시선의 변화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새롭게 등장한 시선-공간 개념(투시도)을 논의하며 그런 시선-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것을 건축과 도시로 확장해서 살펴보고 있고, 다양한 건축물과 도시의 구성, 사회적인 측면을 검토하며 건축-도시의 변화를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유럽의 건축-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디온의 논의는 잠시 방향을 바꿔 건축을 위한 주요 재료인 철과 콘크리트를 다루고 있고, 재료의 변화-발전이 어떻게 결과물(건축-도시)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서 특히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에펠탑이었다.

 

여러 혁신가와 혁명가들에 대한 논의 이후 자본주의-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건축과 도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런 인식의 기초가 있어야만 지금 시대-사회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물과 건축의 흐름을 다뤄낸 다음 현대 건축의 선구자들과 유럽과는 또다른 방식의 발전-변화를 보여주었던 미국의 발전 과정(시카고를 중심으로)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고 하고 있다.

 

피카소와 큐비즘 그리고 미래파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선-공간과 시간개념이 현대 건축-도시에 어떤 영향과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 진보-개선된 건축-건설기술이 어떤 건축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논의한 다음 기디온은 흔히들 현대 건축의 5대 거장으로 불리는 이들(꼽히는 인물들이 다를 때가 많지만...)의 대표작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알바 알토

미스 반 데어 로에

이런 5대 거장과 함께 요른 웃존의 대표작들을 검토하며 현대 건축이 무엇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고, 어떤 요구들을 채우려고 하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묻고 있고 대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이후의 내용은 다시금 19세기 도시계획부터 지금 현재의 시대가 요구하는 도시가 어떠한 것인지, 어때야만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다뤄내며 끝을 맺고 있다.

 

도시계획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항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파리의 오스망에 대해서 상세한 논의가 있기 때문에 오스망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을 것 같다.

 

기디온은 다양한 검토 이후 나름대로의 결론을 찾아내고 있고, 그 결론에 대해서 충분한 공감과 동의가 가능할 것 같지만 그가 내세우는 결론에 대해서 지지와 반박을 고민하기 보다는 기디온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바로 지금 시대와 사회에 적용해서 새로운 대답을 찾아내는 것이 좀 더 생산적인 접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많은 도움이 된 책이었고,

앞으로도 생각을 이어갈 때 자주 떠올리는 책이 될 것 같다.

 

 

 

 

참고 : 20051106쇄인 책을 읽었는데, 너무 많은 오타와 실수(띄어쓰기와 같은)가 있어서 얼마나 정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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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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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특정한 학문적 영역에서만 다뤄지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학문들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단순히 학문에서만이 아닌 다방면의 영역에 새로운 시선을 그리고 생각의 방향을 움직이게 만드는 책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바라바시의 링크는 이미 출판한지도 꽤 되었고,

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다양한 검토와 논의들도 있어왔지만 여전히 바라바시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으로 알고 있고, 여전한 영향력만큼 링크는 인상적인 내용으로 가득하고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들을 좀 더 학문적-이론적으로 입증시켜줌과 동시에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인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바라바시 혼자서 네트워크 이론을 생각해내고 완성해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을 해주고 있으며, 기존의 몇몇 오류들을 바로잡아 새로운 가능성으로 향하도록 만드는데 큰 업적이 있기 때문에 관련된 학자들을 넘어서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고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 그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한 (일반인도 쉬운 접근이 가능하게 한다) 설명은 수학적으로만 설명했다면 자칫하다간 난해하게만 느껴졌을 내용들을 알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도록 만들어 네트워크 이론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고 좀 더 논의에 빠져들도록 만들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은 간단하게 말해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수많은 영역(사회학, 경제학, 인터넷, 신체구조 등등 물질과 비물질의 구분도 넘어서고 있다)에서 모든 것이 단순히 독자적인 형태나 독자적인 방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관계들을 통해서-관계의 그물망을 통해서 존재하고, 그 관련-관계를 통해서 이해되어야만 좀 더 효과적인 접근과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다는 논의라고 볼 수 있는데, 간단하게 들어서도 충분히 무슨 내용인지 이해될 수 있기도 하고 나름대로 개인마다 경험을 통한 설득도 가능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론-내용일지도 모르지만 바라바시의 논의를 접하다 보면, 우리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접근을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을 또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혹은 그동안의 상식-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들을 접하거나 예상 못했던 영역에서도 네트워크 이론의 논의가 들어맞는 경우들을 접하면서 생각보다 방대한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네트워크 이론을 통해서 좀 더 새로운 접근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다양한 사건과 사례 그리고 이야기들을 통해서 모든 것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지-그물망 속에 있는지 설명해주며 각각의 논의는 시작되고 있고, 되도록 논의들을 길게 이어지도록 만들기 보다는 짧고 간명하게 내용을 채우고 있어서 읽어내는 과정이 힘겹지 않도록 하고 있어 수학-과학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충분히 즐겁게 읽어낼 수 있도록 내용이 꾸며져 있다.

 

그물망처럼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고, 그 그물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물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할지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쉽게 알려주고 있는 링크는 어떤 목적과 목표 속에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서론과 최초의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런 접근이 어떻게 현재의 네트워크 이론으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기존의 입장이 무작위의 세계였고, 어떠한 질서도 없는 세계였다면, 그런 세계관이 어떻게 복잡함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세계관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그 시행착오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어렵기만 하고,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수학-과학의 이야기를 즐거운 이야기 묶음들처럼 느껴지도록 구성한 바라바시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바라바시 본인 또한 네트워크 이론에 막대한 영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글로만 대단한 사람이 아닌 이론적인 업적으로서도 탁월한 존재인 것 같다.

 

네트워크 이론이 적용 가능한 수많은 영역들을 간단하게라도 검토하면서 얼마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그러면서도 이론적 토대가 점점 더 튼실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에 대한 자부심도 깔려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내용이었고,

누구나 즐겁게 읽으며 여러 생각들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좀 더 많은 것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 그물망 속에서 무언가를 생각해보고 접근해야만 할 것 같다.

 

네트워크 이론은 단순히 일부분만을 바라보도록 만들지 않고 좀 더 다양한 관점과 시각 속에서 접근하도록 권하고 있고, 그 강권은 틀린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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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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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G. 제발트에 대해서는 (아마도) ‘아우스터리츠정도만 소개받았을 뿐 특별히 알고 있던 작품은 없었다. ‘아우스터리츠도 지나가다 듣는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작품처럼 기억날 뿐이라 제대로 된 앎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고,

약간은 호기심을 갖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고, 작품을 언뜻 들었던 기억만이 날 뿐이라(찾아 읽지도 않았었다) 제발트를 온전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준도 아니고 기억하고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트위터를 통해서 공중전과 문학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제목부터 흥미를 끌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분량이 크지 않았고, 강연회 내용을 토대로 한 글이라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답게 읽어가는 도중에도 이런 식의 시각을 보여주는 내용은 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무척 흥미롭게 읽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공중전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폭격,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있었던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대한, 종전 이후의 재건의 과정에서의 망각-잊음에 대한 여러 접근으로 가득한 공중전과 문학은 무차별 폭격에 대한 내용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기 때문에(이것 말고도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딱히 업는 것 같다) 그가 진행시키는 논의들은 신선하면서도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 무척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진행된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관한 언급은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에서도 접하지 못했었고, 그나마 하워드 진과 같은 진보적-양심적 학자 정도나 그 사실에 대해서 다뤘을 뿐이기에(하워드 진의 경우도 본인이 실제 폭격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논의했다는 점에서 분석적인 논의이기 보다는 경험에 근거한 감정적-공감에 의한 설득-논의였다고 볼 수 있다) 제발트의 다방면의 접근은 논쟁적인 부분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그가 지적하는 부분들을 통해서 여러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으로만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작이라고 볼 수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고 본다.

 

제발트는 엄청난 수준이었던 (독일을 말 그대로 초토화 시키려 했던) 무차별 폭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대해서 그리고 폭격으로 인한 참상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고, 그런 시작에 이어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했음에도 독일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침묵하기만 할 뿐이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를 분석하고 있다.

 

망각과 재건

 

제발트는 그 두 가지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과 어떻게 생각한다면 망각과 재건은 반성을 통한 극복으로 미화시킬 수 있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기억하지 않으려는... 그 기억을 지우려고만 하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회상에 대한 철저한 거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정신적 외상과 같은 그 기억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회피-기억의 공백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지를 고민하려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닥쳤던 피해를 말할 수 없다는 논리는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폭격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알게 된다면(파괴를 위한 파괴였던) 그리고 폭격을 실행했던 이들의 광기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무조건적인 침묵에 대해서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는 제발트의 입장을 어떤 식으로 평가해야 할지 조심스럽기도 하고 고민되기도 하는데, 그런 그의 대답하기 까다롭기만 한 지적과 함께 독일문학이 그것에 대해서 어떤 문학적 의견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논의까지 이어지면서 성급하게 어떤 대답을 내놓기 보다는 치열한 고민들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침묵에 대한 강요보다는 치열한 논의-논쟁을 통한 성찰이 좋을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찾게 되기는 하지만 불편한 기분으로 본다면 뜬금없는 논의라고 외면할 수 있을 제발트의 물음에 독일이 갖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종의 의도적-의도하지 않던 기억의 공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제발트의 문제의식은 조금은 잔인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요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치열함과 집요함이 보다 성숙한 시각을 갖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집요함이 어떤 식으로는 약점을 파고들고만 있을 뿐이고, 어두운 기억들을 끄집어내고만 있을 뿐인 악의적인-악취미일 뿐이라는 비판에 어떻게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그에 비해서 공중전과 문학과 함께 수록된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는 좀 더 복잡한 기분으로 읽게 되는데, 알프레트 안더쉬가 독일 문학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고, 그에 대한 제발트의 논의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도 애매하게만 느껴지지만 오직 제발트의 논의에 대해서만 얘기를 한다면 알프레트 안더쉬가 갖고 있는 (인간적으로서의) 이중성과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작가와 작품으로서의) 이중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야심과 함께 그 야심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결과물을(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스스로 토마스 만과 비교를 하려고 하니 그에 대한 평가는 야박해지게 된다) 독일이 갖고 있던 광기와 (제발트가 그것을 의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관시켜 생각하게 되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논의만이 아닌 알프레트 안더쉬라는 개인이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더해지면서 작가의 삶과 작품을 떼어놓고 생각해야만 할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생각해야만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혹은 그 부분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좀 더 논쟁적인 논의가-생각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옮긴이가 자세히 전체적인 내용과 적절한 결론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내용을 읽게 된다면 충분히 의도를 알 수 있고,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약간은 감춰져 있었고 다루기를 꺼려하던 것들이 꺼내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기도 하고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게 되기도 한다.

 

무능력...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알게 되는 기회였고, 흔치 않은 기회였다.

 

좀 더 이쪽 방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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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이기는 관계술 - 사람도 일도 내 뜻대로 끌어가는 힘
이태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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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라고 말하기에는 꽤 긴 기간 동안 인기를 끌고 있고 있는 자기계발서 혹은 실용서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거기에는 힐링-치유와 관련된 온갖 책들도 함께 포함시킨다면) 책들은 이제는 한때의 유행이나 흐름을 넘어서 하나의 장르나 분야로서 다뤄내도 충분할 정도가 된 것 같다.

 

그게 좋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서...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게 될 정도의 수준은 된 것 같다.

 

조금은 그 기세가 수그러든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꾸준히 소개되고 있고, 팔리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최소한) 한동안은 많은 관심을 끌게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책들을 그다지 읽고 있지도 않고 몇몇 책들을 선물 받아 읽게 되기는 했지만 딱히 관심을 갖게 되거나 도움을 얻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때때로 기억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읽어본 책들에 문제가 있기 보다는 우선 내 자신을 계발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 더 큰 원인일 것 같다. 

 

나를 바꿔야 한다거나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적기 때문에 그런 책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쉽게 읽히면서 읽는 동안은 재미나다는 점 때문에 손에 들어오면 곧장 읽게 되는 것 같다.

 

관계술에 대한 책인 이태혁의 ‘지면서 이기는 관계술 - 사람도 일도 내 뜻대로 끌어가는 힘’도 앞에서 말한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적의 분야에 어울리는 내용이고 그렇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내용들도 있고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어서 가볍게 읽으며 조금은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언제나처럼...

뒤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게 되기는 하지만 순식간에 그런 문제들을 잊게 된다는 단점도 있는 것 같다.

 

읽어내며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 반성하고 고치려 하지는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런 점인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 우선은 저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되는데,

저자는 (TV를 보는 적이 거의 없어서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유명 TV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것 같고, 나름대로 많이 알려진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것 말고도 겜블러(라고 이름을 꾸며도 결국 도박사다)로 지낸 적이 있다는 경력 때문에 흥미를 끌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다양한 경험들이 저자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여러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의 방법에 대해서 많은 얘기들을 꺼낼 수 있었지는 않았을까?

 

제목 그대로 저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술을 알려주고 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내용을 담고 있든 그 진심이 무엇이든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만남 보다는 자본주의-경쟁사회에서 얼마나 적절한 방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냉소적이거나 비난하는 입장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떤 현명함을 또는 지혜를 알려주고 있기도 해서 그런 필요에 의한 독서가 아니라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기도 할 것 같다.

 

우선은... 쉽게 읽혀져서 좋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과 (나름대로) 과학, 사회학, 심리학 등 이론적인 배경을 갖고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쳤다면 어떤 대응을 한다면 좋을까? 라는 질문 속에서 읽는다면 그걸로 충분한 독서가 될 것 같다.

 

다만, 그렇게 읽는다고 해도... 그리고 꽤 적당한 방법을 저자의 논의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해도... 막상 그 상황이 벌어진다면 쉽게, 알맞게 대응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일이라 그저 참고하는 수준에서 읽는다면 그걸로 된 것 같다.

 

나쁘지 않는 내용에 

흥미로운 부분도 있고

그걸로 제값을 하는 것 같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내 자신이 사람을 상대하고 관계하며 바뀌는 점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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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과 성서의 예언자들 - 아담에서 예수까지, 성서의 예언자들은 꾸란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최영길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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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꾸란을 만나기까지

 

꾸란이라고 불리기보다는 흔히들 코란이라고 불리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의 경전인 꾸란을 읽게 된 이유는 특별할 것 없다. 무슬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도 무슬림을 이해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서 읽고 싶었고, 읽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대충 훑어봤을 뿐이라 딱히 무엇을 읽었고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는지를...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읽기는 했으니... 나름대로 애써보긴 한 것 같다.

도대체 이런 걸 왜 읽으려고 했는지는... 꺼낼 말이 없다. 

그냥 읽어보고 싶어서 읽었을 뿐이다.

 

위대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통해서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신청을 하면 우편으로 한글로 번역된 꾸란을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구해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 언젠가는 구해서 읽어보겠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자주 찾던 헌책방에서 양장으로 제본된 꾸란이 있어 구입을 할까 망설이다가 다른 이가 먼저 손에 쥐게 되어서 또다른 나중으로 구하게 되는 기회를 미루게 되었는데, 결국 꽤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금 구하게 될 수 있긴 기회가 생겨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양장본은 호기심으로 구하는 사람이거나 익명으로 구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것이 아닌 실제 무슬림들에게만 제공되거나 이슬람사원-모스크에만 비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방법을 몰라서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만 싶다.

 

이것도 나름대로 알라께서 어떤 이유로 나에게 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일은 없지만.

 

2. 꾸란을 읽은 후

 

성경도 읽어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기억나는 내용이 없어서 읽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하기만 한데, 마찬가지로 꾸란도 3주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읽었는데(성경보다는 짧은 기간에 읽어냈다. 성경은 별 것 아닌 분량인데도 4주나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지루해서다. 난 아무래도 신을 믿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믿을 자격은 없는 것 같다), 1,300쪽에 가까운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분량 중에서 기억나는 내용도 없고 그렇다고 깊은 인상을 주는 순간도 없어서 그저 읽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허무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딱하기도 하다.

 

일종의 선입견처럼 꾸란과 성경은 크게 다를 것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알고 있었고,

구약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고, 예수 이후의 내용에서부터 무척 달라진다는 말을 마치 사실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꾸란은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구약과 신약 이후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어떤 일관된 이야기의 흐름을 담고 있기 보다는 알라의 말씀 혹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씀들이 가득할 뿐(물론, 그밖에도 예수, 노아, 모세 등등에 대한 내용이 반복해서 다뤄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이 갖고 있어야 할 믿음, 생활방식, 태도 및 기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들과 경험들 속에서 무슬림이 지켜야 할 덕목들을 나열한 느낌이 더 커서 읽어본 사람만이 어떤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는... 무슬림으로써 살아가는-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꾸란을 온전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고 일정 이상의 앎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읽은 사람들은 꾸란에서 구약과 신약이 좀 더 풍부하게 해석되고 논의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종교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있는데) 유대교-천주교-개신교들은 되도록 구약과 신약과 함께 꾸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클 것 같고, 반대로 무슬림 또한 꾸란을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을 읽는 것은 필수일 것 같다.

 

과연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인지 모르겠지만...

구약, 신약, 꾸란 모두를 읽어봤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데,

읽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모두 다 읽지 않는다면 무척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것이고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키진 못하겠지만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결국... 읽는 것으로 신을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신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것 모두를 읽는다면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모든 것을 읽어보기를 권하게 된다.

 

아마도 (본문이 아닌) 각주 어딘가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꾸란은(마찬가지로 성경도) 복음과 경고로 채워는 내용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반복해서 곱씹을 것 같기는 한데, 꾸란을 읽고 근본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읽기 전이나 읽은 다음이나 여전히 쉽게 이해되진 않고 있다(당연히 구약과 신약을 읽은 다음에도 유대교-천주교-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다).

 

여러 가지에서 꾸란을 읽는 기간은 좋지 않은 시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읽는 기간이 더 늘어지게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국 읽어냈고 읽어냈다고 해도 크게 깨달은 것도 이해가 커진 것도 아니라 실패한 읽음일 뿐이라 그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예상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한번 더 읽어볼 생각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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