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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보라 - 1920년대 경성의 밑바닥 탐방
아카마 기후 지음, 서호철 옮김 / 아모르문디 / 2016년 2월
평점 :
배가 부르면 인간은 게을러진다.
배가 고프면 인간성은 황폐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다.
배고픈 자에게 지금 무슨 말을 들려준들,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배불리 먹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없으니까...
어쨌든 그날그날의 생활에 쪼들리지 않는 사람은 남의 일도 생각해 줄
여유쯤은 있을 테니까,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자기들의 세계 이외의 것도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배부른 자들이 배고픈 자의 괴로움과 애달픔을
좀 알아주었으면 하고, 이 책을 쓴다.
도시는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을 갖는다. 한편에는 우뚝 솟은 건물들, 차량과 인파로 붐비는 거리, 쇼윈도를 장식한 최신 유행의 상품들, 거리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볼거리가 넘치는 화사한 도시의 얼굴이 있다. 그것은 자연을 극복하고 이룩한 인공낙원, 곧 ‘모던’의 상징이다. 그러나 뒷골목이나 산동네, 다리 밑으로 대표되는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은 빈곤과 굶주림, 범죄, 유혹과 타락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빈부의 차이는 있을 테고 돈으로 사고 파는 쾌락과 만족의 뒷면에는 상품화된 노동과 성의 비참함이 있겠지만, 도시에서는 빛이 선명한 만큼 그늘도 더욱 짙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책에 대한 감상을 혹은 후기와 소개를 찾아보고 읽어보다가 알게 된 ‘대지를 보라’는 여러 가지로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해 보였기 때문에 무척 관심이 갔고, 그렇기 때문에 평소보다는 이른 시기에 읽어보게 되었다.
평소였다면 기억만 해두거나 나중에서야 그런 책이 있었는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기의 경성-서울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대지를 보라’처럼 독특하고 특별함을 보여주는 책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를 것이고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이런 내용을 다룰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어떤 과정 속에서 저자는 이름 모를, 지나쳤을 뿐인 삶을 살펴보게 되었을까?
저자는 일본인이고
기자 출신이며
극우까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우익에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되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우익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보다는 온정적이고 동정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도 생각과 관심도 궁금하지만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것 자체가 가장 궁금해지고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무관심하게 생각하고 지나쳤을 이야기들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고, 무척 이상하다고 싶을 정도로 관심과 (기자 출신 때문인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만 그런 궁금증과는 별개로 ‘대지를...’는 충분히 인상적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 당시의 풍경과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고 글자 그대로 “탐방”하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멀고 먼 과거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기도 하지만 읽다보면 옛 이야기도 아니고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되고 저자가 지켜보고 몰래 찾아가 보게 되는 모습들을 조금만 달리 생각하고 지금 시대에 맞게 생각한다면 그리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이 생소한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서글프고 고달픈 삶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삶이란 이처럼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그다지 달라지지도 않은 것 같다.
다만, 저자가 보려고 하고 있고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떤 학문적 관심이나 직업적인 사명 등이 아닌 (쉽게 말해서) 팔릴만한 이야기를 찾고 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저자의 관점 자체가 그런 식인지) 어떤 경우는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차별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내용들을 다뤄내기도 하는 등 전체적으로는 어떤 관점에서 아우르려고 했던 것인지 헷갈려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색 잡지에 실릴만한 싸구려 이야기도 있고 신문 사회면에 다뤄질 실태 보고와 같은 내용들도 있는 이것저것 관심이 가는 것을 제멋대로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번역자의 머리말처럼 “때로 그는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면서 ... 사회의 인식과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지만, 어떤 대목은 꽤 선정적인 흥미 위주의 읽을거리”를 생각하면서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흥미 위주의 읽을거리를 좀 더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면 저자의 호기심이 원래 그런 식이었거나.
분명한 것은 “저자와 이 책의 성격이 한 가지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복잡한 만큼, 읽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1920년대 경성-서울의 하층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이것 말고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다면 이런 내용이라면 탐사보도나 기획취재로 아주 나쁜 수준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기괴하고 엉뚱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책만 가지고 연구를 하다 보니 그 논의가 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엉뚱하고 기발한 방식이 오히려 좀 더 그 당시의 현실과 실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실마리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현실과 실상을 최대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학적으로 접근해야 할 대상”이 아닌 “인류학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과거에 속하는 낯선 사회로 치부”하는 시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성이라는 도시의 어둡고 그늘진 면에 주목하고 현장에서 하층민의 삶을 밀착취재해서 그 실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책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감으로 가득하고 현실감이 넘쳐난다.
“동정과 냉대 그리고 배제에 대한 분노보다는 기구한 신세에 대한 한탄, 가난함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신기하고 낯선 추하고 성적인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선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관음증이면서도 흥미롭기만 하다.” 그리고 그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낯선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개성 있고 독특한 방식으로 밑바닥의 삶을 훑어보는 저자의 관점과 방식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하게 만들지만 그러면서도 번역자에 대한 얘기 또한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온갖 자료들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의 부족한 부분을, 저자가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과 정보들을 소상하게 알려주면서 그 사실감과 현장감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번역자는 어떤 의미에서 공동 저자에 가깝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저자의 감각과 노력은 돋보인다.”라고 번역자는 말했지만 읽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번역자 또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과는 다른 사회구조와 성별분업, 권력관계가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고 두루 둘러보면서도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런 비참한 하층세계의 삶”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무자비한 자본주의와 함께 배후에서 이런 비참함을 빚어내는 결정적 모순이 식민지 지배라는 것을”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거꾸로 이런 생각도 해야 할 것 같다. 저자처럼 자극과 선정적인 방식은 아닐지라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꾸준히 지켜보고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걸 알려주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노력이 있기나 한 것일까? 혹은 그런 노력에 우리들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런 여러 물음 또한 떠올려지게 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저 생각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나 또한 무언가를 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