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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해방하는 아버지는 무던한 교육자가 아니라 고집 센 스승이어야 한다. 해방하는 명령은 협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주체에게만 절대적으로 명령한다.
참고 : 아래 글은 정돈되지 못한 글이지만 상세한 각주와 옮긴이의 말이 너무 자세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걸 읽어본 사람이라면 굳이 아래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크 랑시에르
그동안은 그리 알려지지 않던 자크 랑시에르가 갑작스럽게 국내에서 많이 언급되고 논의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흔하디흔한 유행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를 찾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소상히 알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그럴 능력이나 생각도 없기 때문에 그저 그의 저작들이 제대로 번역되어서 소개될 수 있으면 그걸로 그만인 것 같다.
랑시에르의 여러 저작들 중에서 ‘무지한 스승’이 유달리 눈에 띈 것은 아니다. 특별히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궁금하게 만들었고 관심이 가게 되어서 찾아 읽게 되었다.
그렇게 어쩌다보니 읽게 된 ‘무지한...’이지만 읽다보니 어쩐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 자주 떠올려지며 읽게 되었다. 그건 오로지 나만이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책 모두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얼핏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말에 조금은 납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랑시에르가 사사키 아타루를 알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사사키 아타루가 랑시에르를 알고 있어 자신의 논의와 유사한 부분을 언급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하나의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지만.
과연 사실일까? 라는 궁금함이 당장 들게 되는, 혹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라는 생각만 들게 되는 ‘무지한...’에서의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은 한편으로는 믿겨지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능했어도 그건 순전히 자코토만이 가능했고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지적 모험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 시대만이 가능했을 지적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패배적인 생각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알게 된다면 지금 현실에서 그런 식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동의를 하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다.
또한 자코토만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뜻은 그 지적 모험이 (쉽게는)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랑시에르의 말대로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게 된다.
지적 모험? 점잖게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파격적으로 말한다면 지적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우연 때문에 시작되었기는 하지만 ‘무지한...’에서는 일련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우고,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파생하고 하나의 연장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 관계들, 권력과 정치에 대해서까지 확장시켜서 생각해보게 만들고 일상에서의 앎과 생각에 대해서, 온갖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확장-확대시켜보게 되어버린다.
우연이었고 조금은 특별한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보다 더 전복적인 순간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코토의 방식이 그리고 랑시에르의 접근이 한편으로는 별 것 아니고 무척 알기 쉬운,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지를, 어떤 방식으로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그것이 갖고 있는 이상한 어려움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혹은 정확히 모르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앎은 항상 어렵기만 하다.
자코토와 랑시에르가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게만 느껴진다.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 설명하고 명령하는 것에 대해서
배우고 이해하고 익히고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
자코토는 랑시에르는 그 당연함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고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하지만 그 접근은 전혀 색다른 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파격적으로 느껴지고 생소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배우고 이해해내는 것을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말하려고 한다. 당연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게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해방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고 있고 평등과 의지를 알려주려고 한다. 전혀 접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다. 우연이 필연이게 되어버리게 만든다.
눈부시며 “가장 어려운 도약”이지만 그것은 반대로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방식의 도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코토와 랑시에르의 주장은 온갖 방식으로 비판받고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차이
우월
열등
이런 구분과 순서, 위계에 관해서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저항하고 진정한 해방을 말하려고 한다.
배우라
되풀이하라
모방하라
번역하라
문장을 뜯어보라
다시 붙여보라
해방을 위한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진리를 자코토와 랑시에르는 알려주려고 한다.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진리이고 해방을 위한 실마리일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위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위대한 표현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을 말하고 “평등을 입증”하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 “진리는 고독하게 자기를 의식하는 인간에게만 말을 건넨다”는 주장을 쉽게 물리치거나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곱씹고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좀 더 반복하며 생각해보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잊기만 할 것이고 무슨 말인지 되풀이하며 읽어내진 않고 다른 책들을 뒤적거리기만 하겠지만 자코토와 랑시에르가 말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전달하고 싶어지게 된다.
혹시 누군가가 이 사라지지 않을 진리를 다시금 말할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