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왕 범우고전선 2
소포클레스 지음 / 범우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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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고전을 읽으라고 할까? 그리고 고전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읽은 다음에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통하는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면서 이미 너무 많이 알려졌고, 분석되었고, 평가되어진 이 작품에 더 이상 새로운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지만...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오이디푸스 왕’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흔히 말하는 ‘비극’의 원형을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와 견줄 수 있는 비극이 꼽기 힘들 정도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따로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나 있을까?

너무 많이 듣게 되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읽게 되는 순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 고전인 것 같다.

 

삼부작이면서도 각각의 작품의 완결성도 뛰어나서 어떤 순서로 읽던지 작품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두 작품들도 부족함을 느끼기 힘들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현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작품과 같은 느낌도 들게 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어머니이자 부인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덮어버리라고 말하지만 꼭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불안감을 갖고 의문을 풀어나가고 결국 진실을 알게 되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들이 사건을 파고들면서 더욱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어 홀로 고독히 남게 되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결론과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후의 작품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또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끊임없이 ‘알지 못하고 그랬다’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항변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가게 되어가면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한다는 것이 독특한 구석이 있다. 즉, 그는 알려고 노력하고 알게 되어가면서 고통스러워진다. 아는 것이 힘이고 지식이 권력이라고 하지만... 그의 운명은 슬프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호기심으로 몰락하게 된다.

 

작품은 개인의 비극이면서도 보편적인 삶과 신뢰, 믿음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국가관 등 다양한 내용들도 함축되어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의미는... 읽어야지만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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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비유럽인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주은우 옮김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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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소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짧은 분량으로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표한 글인데,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읽게 되면 꽤나 충격적인(혹은 기독교도나 유대교도가 본다면 모든 것이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의 내용을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결부시켜 정치적인 맥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던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금 반복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세와 일신교’ 그리고 프로이트의 내면에 대해서도 짧지만 의미 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본인도 유대인이었던 프로이트가 어째서 유대교와 독특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내용으로 구성된 ‘모세와 일신교’를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유대인 사회에서의 시오니즘에 대한 입장 차이까지 짧은 내용이지만 종합적으로 분석을 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파헤치는 프로이트의 분석을 지금 팔레스타인의 문제로 사이드는 논의를 끌어와 앞으로의 점점 더 갈등이 심화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앞으로도 더욱 갈등을 야기할 것 같다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으며 글을 마치고 있다.

 

읽다보면 약간은 우회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문제와 국내 내부에서 벌어지는 역사에 시각 차이에 대해서 시사점도 던져주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것은 읽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읽는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것 같기 때문에 각자 읽어가며 자신의 시각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워낙 유명하면서도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자주 언급은 되고 있지 않는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를 읽은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사이드의 글을 통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짧지만 흥미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맥락 이외에도 ‘모세와 일신교’ 그리고 사이드의 논의에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근저에 깔려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동일한 결론을 찾아내고 있다. 즉, 정체성이랑 고정되고 일관된 어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나 이 책을 읽기 전에 ‘모세와 일신교’를 우선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너무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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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 세계의 고전 사상 7-001 (구) 문지 스펙트럼 1
에피쿠로스 지음, 오유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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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알려지기로는 ‘쾌락주의자’라는 식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방식으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본다면 그가 말하는 ‘쾌락’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그런 것과는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잠언들과 편지를 엮은 이 책은 단순히 ‘쾌락주의자’라는 식으로 평가하기 힘든 에피쿠로스의 사유를 엿볼 수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짧은 분량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나와 같은 짧은 지식으로 인해 읽고자 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도 부담없이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니체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몇몇 연구자들이 그의 글과 에피쿠로스와 일정부분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의 유사점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떤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며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니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을 통해서 어떻게 니체가 영향을 받았는지 조금씩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은 ‘쾌락’이지만 내용을 읽으면 어떻게 감정의 과잉을 자제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 있는 잠언들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접할 수 있을 것 같고, 그가 고통과 불안 제거하고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절제와 ‘지식’이라는 것에 한편으로는 이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철학을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게 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한 것은 아닐까? 라는 자조적인 질문도 하게 만든다.


초반에는 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잠언들이 수록되어 있다면, 중반부터는 그가 보낸 편지들로 내용이 채워져 있는데, 그 편지에 있는 내용들은 잠언과 유사한 삶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기보다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원자론과 자연학 그리고 천체에 대한 논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째서 그가 자연학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을까?

당시 시대의 철학자들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지금과 비교해서는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모든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찾아내고 있었고, 에피쿠로스도 다른 철학자들의 논의들과 자신의 차이를 지적하고 자신은 어떻게 삶과 자연 그리고 천체가 운행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했다는 것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서 내면의 안정과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외부에 대해서는 자연학과 원자론등의 과학적 지식을 통해 신에 대한 미신(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된다는 식의 생각에는 부정하는)에서 벗어나 우리가 보는 것 그리고 우주와 천체의 운행과 자연의 흐름을 적절히 이해하게 되어 행복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을 이해한다면 후반부에 있는 논의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자연으로 통칭되는 외부에 대해서 지식과 이성으로 미신을 걷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계몽주의’와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다.


다만, 그런 부분에서 아도르노의 시각으로 그를 본다면 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근대인으로 볼 수 있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지식이라는 것은 ‘지배’와 떼어놓고는 보기 힘들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부분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기에는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고, 단순히 쾌락주의자로 설명할 수 없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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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리학의 문제들 프로이트 전집 10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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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이번 저서에서는 ‘신경증’에 집중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의 다양한 사례들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기존에 갖고 있었던 신경증과 히스테리에 대한 입장을 수정 혹은 번복을 하고 있고, 말미에 있는 ‘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을 통해서 ‘불안’이라는 감정 혹은 정서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신경증과 히스테리 그리고 불안에 대한 논의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후의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던 모습에 비해서는 이번 내용들에서는 조심스럽고 판단을 보류하며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자신이 이전에 내렸던 결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깨달으며 논의를 마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심정으로서는 적절한 결론이 없이 뜬구름 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그만큼 초창기의 정신분석이 갖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모습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에 당연스럽게 반응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다.

 

신경증과 불안 증세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많이 어렵지만 다양한 관점과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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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결혼 - 기사, 여성, 성직자
조르주 뒤비 지음, 최애리 옮김 / 새물결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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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 학파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르주 뒤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저작들을 읽어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대담집인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정도만 읽었기 때문에 제대로 그의 학문적 입장과 논의에 대해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었다.

 

이번에 읽은 ‘중세의 결혼’도 그의 입장과 논의를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는 저작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중세 시대에 대한 시각과 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르주 뒤비는 중세 시대의 결혼에 대한 당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과 변화 속에서 중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갔고 그 시대의 중요 계급들은 결혼에 대해서 각자 어떠한 이해관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관계를 통해서 성직자 계급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을 통해서 보다 사회 질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하였고, 기사 계급은 자신들의 권력을 집중하기 위해서 결혼은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조르주 뒤비의 논의와 시각은 푸코라면 남녀간의 사랑과 성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사회를 관리하고 지배하려는 의도로 보았을 시각과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였다면 결혼을 통해 기사 계급의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의도라고 말했을 시각을 균형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르주 뒤비의 균형 잡히고 뛰어난 통찰력은 감탄하게만 만든다.

그리고 결국 위의 대립된 두 개의 입장이 타협하는 방식으로 중세 시대의 결혼은 하나의 사회 체제로 편입되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논의를 통해서 중도와 타협의 중요성을 역설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 이전에 두 개의 대립된 입장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나 서로의 시각이 대립되느냐에 따라서 타협의 결과물이 전혀 달라질테니까.

결론만 보고 타협의 필요성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개의 입장은 타협을 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기 보다는 서로의 입장과 충돌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가 적절한 방식을 찾아간 것이니까.

즉, 어떤 타협과 결론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어떻게 치고 받았냐가 더 중요할 것 같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이 나기 마련이다.

본인이 그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나 없냐는 둘째 문제이고...

 

그리고 그의 논의는 위에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라는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데, 일종의 도구처럼 다뤄지기만 했던 여성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며 새롭게 질문을 하고 있다.

중세 시대의 여성들은 삶은 마치 레비 스트로스의 저작에서 다뤄지는 미개 사회 여성들의 모습이나 존재감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러한 당시 시대의 남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조르주 뒤비의 시각은 중세 시대부터 수평적 가족관계에서 남성 중심의 수직적 관계로 변화를 보였다는 분석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부분은 중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야할 시각인 것 같다.

 

그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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