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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와 푸코에 대해 관심을 가졌듯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지만)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여러 저작들이 번역되고 있고, 주요 저서 대부분이 번역되어서(지젝 자신이 꼽는 자신의 주저 4권이 이미 번역되어 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은 있는 사람은 큰 어려움 없이 그의 논의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젝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상가들 중 한명이 된 것 같다.
‘현존하는 철학자들 중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슬라보예 지젝은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오해를 받으며 알려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라깡을 알고자 그를 찾게 되었었고 이로 인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는 히치콕과 수많은 대중문화를 통해서 라깡을 얘기하고 정리했을 뿐이고, 오히려 그는 라깡을 통해서 헤겔과 맑스 그리고 레닌을 얘기하고자 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끝없이 우회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고, 그렇게 우리는 그를 오해하며 그의 논의를 접하게 되었다.
라깡에 대해서 그리고 헤결과 맑스, 레닌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데리다와 같은 이들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며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지젝은 라깡을 얘기했지만 결국 헤겔에게 향한 철저한 헤겔주의자였고, 최근 들어서 레닌을 자주 언급하면서 적극적으로 레닌의 정신을 다시금 환기하고 그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고 얘기하며 철학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런 그의 입장의 변화 과정 속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세상을 예언하며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깃발 아래에서 세상을 바꾸자고 선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그가 의도하는 것은 비비꼬면서 얘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다시금 세상에 배회하도록 하려는데 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해서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고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정도만 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기 보다는 한번 읽어봤다는 정도만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이라 최근에 발표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발표하던 시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결론에 비해서 얼마나 달라진 입장을 갖게 되었는지 보다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수준에서 그에 대한 논의를 멈춰야 할 것 같다.
그는 이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현란한 글쓰기를 통해서 이 시대를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서 비판적 입장을 갖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촉구하고 있고, 더 대담한 생각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전처럼 라깡과 헤겔 그리고 맑스, 여기에 레닌을 더해서 그는 현재를 분석하고 전망을 논의하고 있는데,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종의 정세 분석에 가까운 내용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 좀 더 선명하게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간단하게 말해서 지젝이 쓴 21세기 공산당 선언 정도인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고,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 갖고 있었던 통찰력과 통렬함에 비해서는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분석으로 가득하고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 논의를 전하고 있다.
지젝은 진정한 2000년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9.11 테러와 최근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믿음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 허위와 거짓된 믿음으로 인해서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결국 그 믿음은 그가 항상 언급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이기적이지만은 아닌 선한 동기에 의해서 점점 더 상황을 악화되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방식과 형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고, 그 분석에 따라 그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과감한 혹은 이전의 맑스와 레닌의 결론을 반복한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안락함에 만족하기만 하고 있는 기존의 진보적 / 좌파적 입장을 갖고 있는 이들도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떨쳐내고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다시금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금융위기로 인해서 미국에서 취해진 다양한 경제적인 조치들과 중국에서 경제발전을 위해서 보이는 모습들에서 현재의 자본주의 / 사회주의 체제 모두 동일한 방식(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20대 80의 사회라는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과 지배가 이뤄질 수밖에 없고 이는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적 가치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푸틴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속물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세상은 더욱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다시금 공산주의라는 깃발 아래에서 합류하자고 독촉한다.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수동적이고 종속적이며,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배제된 자들을 위한 제도로 다시금 변화를 보여야 한다고 처방하며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언급하며 외부로 향하는 것과 전복시키는 방식이 아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재구성 혹은 일종의 체질개선과 같은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일종의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결론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 즉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이 곤궁하게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자본주의 제체를 공산주의 체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 같고,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이를 위한 분석과 결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하루 큰 변화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남들에 비해 별다를 것 없는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대담하고 과감한 제안에 조금은 갸웃거리게 되기도 하고, 실현 가능성(어쩌면 이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야 말로 지젝은 빨리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의 논의의 핵심일지도 모른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들려주는 하나의 제안에 대해서 한번쯤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레닌을 다시 말하고,
그리고 바울을 언급하는지 이 현란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선언에서 약간은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그의 저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전에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고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우선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