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410일 금요일

처음 만남을 가졌다. 친구로서 만나는 수다가 중심이었지만, 책을 나누고 발족을 했다.

 

No. 1 파리는 날마다 축제_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_이숲

date: 2020410~

from the April book club이라고 적어놓은 책을 나누었다.

 

이스터에그의 옥탑방 같은 곳에서 나눈 한시간여의 대화는 H가 과연 이 과정을 잘 따라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진행되었다. H의 텅빈 눈.

없는 자존감이 더 내려가는 중이야

자꾸 나한테 실망을 하게 되네

너무 싫어서 나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하지

내 실체를 알면 너무 실망하니까

좀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야해

등등의 말들.

 

H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라는 말로 내가 독서모임을 이끌어 갈 것을 애둘러 표현했다.

 

2020515일 금요일

April book club 두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주제: 생각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

현실과 이상의 차이

꿈이 있다는 것과 필요성

절실함의 끝

과 같은 주제가 있었지만 이것은 주제라기보다는 H가 다 읽지 못했을 때, 읽기는 했으나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지 막막해 보일 때 사용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H는 모이는 날이 일주일 뒤로 미뤄졌던 덕분인지 다 읽어왔고, 자신이 생각해 놓은 것에 대해 이야기도 곧잘 했다. 그 이야기들은 내가 표시해놓은 부분과도 일치하는 많은 부분들이 있어서 우리의 대화는 1시간을 훌쩍 넘었다.

사실, 지난 달 첫 모임을 가지고 두 번 째 모임을 가지기까지

집중이 잘 안되네

책을 아직 잘 못 읽었다

너가 고른 책을 읽자

라는 식의 반응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소리 내서 읽고 있어

점차 나아지겠지

그러다가,

생각도 못했어

책도 못 읽고

일이 너무 많아서 집에 오면 기절했어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제법 의미 있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이 되었다는 것에 실로 감탄이 나올만한 상황이었다.

재촉하지는 않되, 책을 읽어오도록 이끌어주는 나의 역할은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소감: 241p 나는 그 모든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작가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상황적 팁을 얻었다. 헤밍웨이가 카페에서 뭔가에 홀린 듯이 글을 써내려 가거나 자신만의 상황적 방식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글을 쓰는 것. 일상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되는 것. 글의 그런 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글을 쓰고자 하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고, 무력감에 있는데 어떻게 헤어나올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읽어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나눈 이야기

 

12page [옮겨심기. 그런 경험을 글로 옮기기에 다른 어떤 곳보다도 적합한 자소가 따로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227p [겉장이 파란 공책 한 권, 연필 두 자루와 연필깎이, (주머니칼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대리석 상판 테이블, 코끝을 간질이는 커피 향, 이른 아침 카페 안팎을 쓸고 닦는 세제 냄새, 그리고 행운. 이것이 내게 필요한 전부였다.]

12p[상의 주머니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항상 글쓰기를 위해 공책과 연필을 가지고 다니고, 글을 쓰고자 할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꺼내서 글을 쓰는 역동. 무언가를 하고는 싶은데, 실제로는 하지 않는 역동을 가지고 있는 내게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 말이었다.

 

55page 대상을 설명하지 않고 설명하는 진실한 서술 방법.

[빛이나 질감, 형태 같은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는지 둘이 열심히 토론하던 것도 기억해요.]

나의 생각: 이것은 실제 심리평가보고서에서도 내가 자주 논하는 것이다. 진단을 진단이라고만 명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러한 진단을 가진 사람이 진단명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려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p170 [그는 자기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팔릴 작품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기 재능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p195

[며칠 후 스콧은 자기 책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표지가 요란했는데, 그 거칠고 상스럽고 야단스러운 모양이 무척 거북했다.]

나의 생각: 알라딘 서재에 그동안 써놓은 글들을 보고, 또는 글을 쓰면서도 이런 책을 읽었다고 한 줄 써놓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많이, 매번, 여러 번 든다. 책을 골라 읽지 않고, 그리고 고작 한줄 달랑 써놓기도 하고. 그러나 어떤 글에서는 나조차 감탄이 나오는 글들이 있다. 스콧 피츠 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실로 위대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글들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아 했다. 자신의 필모그라피를 모두 명작으로 채울 욕심은 없다. 명작은 있으면 된다. 생계를 위한 작품도 필요하다. 라는 그의 소신을 듣고. 내가 느끼는 부적 감정에 대해 흘려보낼 수 있었다. 나의 생각이 전환되었다. 글은 이처럼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 동안의 생각의 동굴 안에서 허우적대다 침잔하던 나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p 240 작가가 일인칭으로 쓴 단편의 내용이 대단히 그럴싸하여 사실처럼 보일 때 독자는 그런 사건이 실제로 작가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p 293

작가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좋은 글은 쉽게 파괴되지 않지만 비웃음을 당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책에 대한 총평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가깝게 느끼면서 읽을 수 있었고, 다른 작가() 스콧피츠제럴드)의 삶에 대해서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물론 헤밍웨이에 맞춰진 시점이기는 했으나, 도 매력있었다.

우리의 첫 책으로 손색이 없는 삶이 스며들어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ril book club

 

친구 H가 삶이 힘들다고 연락이 왔다더욱이 매일 노인분들이나 직장에서 함께 있는 사람들도직업적 기능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무료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이를 헤어나올 방법을 누군가가 만들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사실 누군가 만들어준다고 해도 쉽사리 나오기에는 너무나 현실의 우울감이 따뜻하다. 이 안락함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 H의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의 나도 돌아보게 되었고, 조금은 생산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힘들다는 이야기만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만남에 부적 감정이 든지 꽤 된 참이었다.

그리하여, 생산적 활동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시간을 생성하기 위한 북클럽을 하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평소 통화를 하지 않는 사이. 그런 관계가 전화를 오면 태세는 하나다. 받는 거다. 받기 꺼림칙한 상태에서 받는 상황도 있고, 의문을 가지고 전화를 받는 상황도 있지만, 보통 우리는 여러 가지 마음을 가지면서도 걸려온 전화에 응하게 된다.

이번 전화는 같은 동에 사는, 대학교에서 같은 박사 랩실이지만 함께 수업을 듣지는 않았던 애매한 관계의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만나면 어색하게 웃는 사이. 그런 사람이 만나면 신경과에서 일하고 싶으니, 신경과 심리실에서 자리가 나면 연락을 달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그 뒤 신경과 심리실에서 자리가 나서 연락을 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러고 약 1년여가 지나서 연락이 왔다. 이사를 간다는 것이다. 집에 위인전이 있냐고 물으며, 집에서 처치곤란의 비싼 아이 관련 물품들이 많아서 정리해서 주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원하는 날을 물어보고 그날 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물론 쓰잘데기 없이 1시간 이상 길게 수다를 떨며 친근감을 표하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은 당연지사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수다의 봇물이 터지는 것에 깊은 반성을 하지만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잘 참았다가 목요일쯤되면 나도 몰라 상태가 되면서 관계의 깊이를 생각하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한 날이 됐다. 선물을 사서 찾아갈 생각으로 연락을 했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라고 하더니 끊어버리는 것이다.

다음 날 문자가 와 있었는데

아이 숙제를 봐주는 중으로 화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전화가 왔더란다. 아이에게 자신이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며 미안하다는 것이다.

불과 몇 달의 나였다면 화가 많이 나도 겉으로는 괜찮다며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을 것이다. 이번에도 습관적으로 쓰다가 지우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 다 읽고 나서 주고 싶으실 때 연락주세요.”라고 답을 했다. 그러나 나의 답장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화도 상대를 보고 낸다. 내가 화를 낼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 담당 교수였다면 그렇게 화를 내며 전화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화를 낸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아이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화를 낸 것이다.

약속 시간이 됐는데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상대방.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집이 비싼 가격에, 그것도 집을 보지도 않고 제 때에 팔렸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던 것 뿐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꽤재재한 상태로 산어흥(가제)라는 음식점에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오전에 땀을 내며 아이들과 놀고 씻지 못한 상태로 음식점에 갔다. 남편이 고른 그 집은 이전에 남편과 둘이 한번 갔었고,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딸아이가 스파게티를 좋아한다. 갔더니 사람이 많아서 대기를 해야 했다. 9 테이블 정도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옆 가게의 강아지를 창문 밖으로 보고 있었다. 딸아이는 배고프고 피곤한지 강아지를 사달라며 떼를 썼고, 나는 안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다가와서 나를 거들었다. 그러나 한 명은 대기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다. 내가 물어볼 때만 남편이 확인했다. 내가 세 번 째 쯤 물어보니 대기가 지나갔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가게 점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가게를 여니, 점원이 나왔다. 막 우리 가족의 순서가 지나간 것이다. 그래서 못 들었다고 하니, 강경한 태도, 그리고 나를 훑어보는 눈빛과 함께,

가게 앞 대기판 맨 뒤에 다시 이름을 적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여태까지 기다렸는데, 다시 맨 뒤로 가서 기다리라니.....라는 생각에 당황스러운 눈빛이 되니.

여태까지 기다리는 사람들 안보이냐며 나를 무슨 무임승차하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내가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하자, 자신이 큰 소리로 여러 번 불렀는데 못 들은 것은 나의 잘못이니 맨 뒤에 다시 적고 처음부터 기다리라는 것이다.

화도 상대를 보고 낸다.

거기에 대해 남편은 기다리자, 어디 가서 먹냐 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 가서 돈까스를 먹자고, 다시 언제 기다리냐는 말로 자리를 떴다.

 

아침부터 계속 잠을 자다가 자신만 번지르르하게 씻고 나온 남편은, 꼬질꼬질하고 어디서 구한 옷을 맞춰 입고 온 사람을 보면서 종업원이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 씻고 깨끗하게 다니라는 말을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밀면, 돈까스, 볶음 우동을 시켜서 먹었다. 아이들은 시장이 반찬이라고 너무나도 맛있게 밀면을 뚝딱했다.

집에 돌아와 베란다 작은 풀장에 물을 받고 아이들을 씻기며 나도 머리를 감았다. 밖에 베란다에서 벌거벗은 거 다 보인다는 남편의 말에

당신이 그럼 좀 도와주던가라는 말을 했다. 그런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오늘은 화는 안내는 날인 그런 날일 뿐이다.

아무 말을 안 해서 남편이 몰라주는 것이라서 말을 해야 안다는 것은 실제 부부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말을 하면 잔소리이고, 말을 안 하면 몰라서 그런다는 것은 남편의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그냥 모른 채 자신만 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다.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말이 무색한 부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화를 낸 적이 없다. 마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도중 미친 손님을 만나도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대응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조금씩 태도의 변화를 해 나가려고 한다.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에 나도 기분이 나쁨을.

... 이번 산어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시는 가지 않는 방법밖에는. 그것을 염두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기분이 좋지 않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스파게티집 가면 안되나. 거기 물을 내가 흐린 것인가. 생각할수록 감정적으로 가는 날이었다. 글도 감정을 타고 있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를 읽었다.

2012년 대학원 선배들과의 트러블, 새 직장에서 계약직의 삶으로 살던 시기.

2012년에 나는 거기에 있었다.

 

시작이 매우 흥미롭다. 첫 한페이지가 몰입하게 한다. 마치 다음은 없다는 듯이 매력적이게 다가온다. 전형적인 정신증 case로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 시절 작가들이 유행하던 애매하고 모호하면서 그런 것들을 나열해야 그 시절의 작가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글들이 이어진다. 글에도 유행이 있나보다. 요즘의 글들은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솔직해졌다면. 2010년 초반의 글들까지는 작가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이 전개되어야 소설로 생각하는 것 같다. 2000년대 초 읽었던 박민규의 소설이 대표적이었다.

 

내가 김영하라는 작가를 아... 정말 글 잘쓰는구나 라고 느낀건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였다. 그 글을 읽고, 김영하라는 사람, 알쓸신잡에서 본 사람.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옥수수와 나로 만나게 되었다.

 

문체는 약간 유치하고 가벼우면서도 읽는 사람을 약간 부끄럽게도 하는 정도의 글. 자신의 이야기인 듯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소재. 그 경계의 어딘가의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서를 주제로 한 연구를 2년여 동안 안고 있다가 세상에 내놓게 되었는데, 첫 시작은 간단, 명료, 미약했습니다. 정의가 분분한 이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 한국적인 시각에서 정의를 내려보겠다라는 것이었죠. 그런 나의 첫 시작이 일반인들의 개념 형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원형적 접근을 통하여 용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정신적인 치료과정에서 용서의 개념을 적용할 때 발전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향후 스트레스 대처전략, 진단이나 제언, 치료 등의 영역에서 활용할 때 좋은 참고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라는 아주 큰 그림이 되어갔습니다. 다행히 게재된 시점에서 바라본 제 논문은 비교적 잘 마무리됐다는 생각이 드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연구를 하면서 연구자인 제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니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누군가가 내 앞길을 막으려 할 때, 평소엔 연락이 되다가 논문 이야기만 나오면 감감무소식이고, 주변에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것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올 때, 그 시간은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힘든 시간에도 인간은 참으로 놀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데, 실력이 되지 않아 논의할 수 없는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는 면이,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그렇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제 나를 옭아매는 사슬이 아니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입니다. 하루 사이에 나는 변화한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영원히 정의될 수 없으면서도 우리와 함께 흘러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용서는 나를 괴롭혔던 대상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동안의 끈적하고 쉽게 내려놓지 못했던 인간관계와는 사뭇 다릅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해 놀랐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동시에 좋은 성과물을 혼자서 해 낼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했습니다. 저는 성장했습니다. 용서는 그 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하고 난 이후의 상황, 내면의 변화가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의미를 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훌륭하게 대인관계 속에서 경험한 상처를 용서를 통하여 극복하였고, 갈등의 악순환을 발생시키는 고리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내게 소중하지 않을 뿐 미움,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논문이 게재되도록 막았던 그 사람의 부정적인 2년 동안 내 논문이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년 전에 썼다고 하여 그 논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준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2년 동안 값진 것을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용서의 내면화였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이보다 값진 일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수많은 용서의 효과를 검증하는 논문들 사이에서 굳이 제가 용서의 정의적인 측면을 바라보고자 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성장도 그 미약하고 간단하지만 명료했던 시작과 함께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들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겠지요. 그 일을 통해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다면, 당신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라면 멋지게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고생했어. 넌 모든 순간 멋졌어. 사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