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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왜 오 년 전 그때의 나는 이 책의 내용이 이리도 나를 휘저으면서도 담백하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글자만 허공에 맴돌았을까? 읽으면서 너무도 내가 쓴 글같아서, 나이면서 당신인 그런 상태에서 읽었다.
옮긴이 이창실은 [보뱅의 글을 읽다 보면 때로 어떤 문장이 섬광처럼, 기적처럼 마음을 건드리고 가는 걸 경험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고, 작은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영롱한 터치의 글이건만 그리 읽기 편하지만은 않다]라고 한다. 옮긴이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번역을 한건지, 그런 의도를 알아차리고 기가 막히게 번역을 한건지, 나도 오롯하게 느꼈다. 외국의 언어와 감정과 생각이 한국어로 들어와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일은 멋지다.
밑줄 그은 부분을 정리하는데, 밑줄을 긋지 않은 부분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타이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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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부모와 춤추는 아이
시작과 끝은 동시에 주어진다는 걸 우린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에 안주하는 만큼 도덕적으로도 불편함이 없고 애정 생활이나 은행 계좌도 안전하다.
세상에 무엇 하나 보태지도 감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서 물러난다. 자신이 세상에서 물러났음을 안다. 무용한 인간. 실현의 가망 없이. 멜랑콜리는 사방에. 스토리도 생명도 없이 자라났다.
집은 보호막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첫 페이지부터, 첫 문장부터, 검은 목소리에 의해 집어 삼켜진 집이다. 독서는 끝이 없다. 독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혀 혹은 거의 쓸모가 없다. 어느 독서라는 빈터에서
이 목소리는 결코 과장하고 있지 않다. 너무 높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다. 적확한 목소리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차가운 물질. 죽은 언어를 캐낸다. 단지 살기 위한 분노다.
당신은 금요일 저녁에 책을 읽기 시작해 일요일 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이제는 책에서 나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 무용한 독서에서 유용한 거짓으로 건너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작을 읽은 다음이면 어김없이 왠지 모를 불안과 불편한 감정에 빠진다.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속을 읽을 것만 같다. 사랑하는 책이 당신의 얼굴을 투명하게 파렴치하게 만들어놓지는 않았는지. 그런 헐벗은 얼굴로는 행복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하고서는 길에 나설 수 없다. 잠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낱말들이 먼지처럼 햇빛 속에 흩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책을 읽은 뒤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두 문장 기억이 날까?
우리 입술은 언제나 너무 많은 소음을 담고, 우리 가슴속에는 언제나 너무 많은 것들로 넘쳐난다. 희미한 소리다. 피폐해진 내 삶 속에 온전히 존재하는 내 생명 탓에 고통스럽다. 그곳에 얼굴을 갖다 대고 식힌다.
그녀는 글을 쓴다-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이들. 난 폰에 오염되고.
황당한 의무감을 심어놓았던지,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을 놓지 않는다. 나쁜 남편을 버릴 수 없듯이 나쁜 책이라고 도중에 팽개칠 수는 없다.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간이 소진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예요-목, 금, 토, 일, 나흘의 내가 그렇다. 나는 이유도 모른채 읽는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그런게 작가의 삶이라면 슬프잖아. 풍요롭기만한 사람은 벙어리인가.
비가 몰아친 건 그다음 일이다. 눈에 띄지 않는 비, 시멘트와 돈 가루, 새 방마다 감도는 숨 막히는 공기-옷이 사고 싶을 땐, 필요한 게 아니고 인스타를 하릴없이 보다가 생기는 물욕. 옷이 사고 싶을 땐, 우선 책을 읽자. 나에게 물을 주고 그때 사고 늦지 않다. 어제 니트 3개 구매, 오늘 원피스, 치마, 반팔티, 반팔 남방 장바구니에 담음. 그리고 구매.
만사를 원상태로 봉하는 데서, 사회생활이라는 끝없이 반복되는 거짓과 하나 되는 데서 자신의 온전함을 찾는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추구하며 모두 거지가 되자는 건가.
쉴 새 없이 여행을 다니지만 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한 발짝도 전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상반되는 대상을 접해야 한다. - 익숙한 곳이 아닌 낯선 곳을 다니라는 말인가. 돈이 아닌 다른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건가. 여행을 가도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그 자리에 있으면 죽은 것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말라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다-새벽 1시, 2시, 3시, 나를 어둡게 물들이기로 작정한 밤. 잠을 자지 않는 밤.
더는 그럴 수 없다. - 대충 읽을 수 없는 책. 대충 읽으면 이 책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난해하지 않지만, 천천히 읽으면 마음으로 들어오는 글. 카페 밖 의자에 앉아 있고, 비가 두어 방울 그리고 더 떨어지는 매미 여름, 햇빛 여름.
-->그런데 옮긴이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외부의 소음과 사건들에 정신이 붙들려 있는 상태라면 발을 들이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 멈춰 서서 매 문장의 숨결과 향기, 떨림에 몸을 맡겨야 하는, 잦은 숨 고르기가 필요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