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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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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슈테판 츠바이크][초조한 마음]을 읽고, 뭐지? 뭐야? 이건... [스토너]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왜이래. 그나저나 [스토너] 또 읽어야 겠다. [세상 끝의 카페] 다시 읽는데, 이전에 느꼈던 그 여운이 아니다. 그런데 왜 영문판을 기어이 사서 또 읽는 것이냐. 나란 존재는.

 

그래서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샀다. 그래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샀다. 이 마음의 연결고리, 손을 어찌해야 하는가.

 

2009년에 나온 책이어서 그런가? 책 표지 정말 뭥미. 그러고 보니 책을 출간하기 위해 디자인을 맡기고 견본을 받아보고 느낀 건 예쁜 책 표지이기보다는 책 제목이 잘 보이면 된다. 책 디자인은 예쁘다라는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의 표지조차 용납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글이 이렇게 빽빽해도 괜찮다. ? 내가 출판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딱 이만큼이다.

 

이 책이 돈키호테, 세르베투스의 이야기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 책을 샀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무모한 용기야말로, 내가 책을 집어 들고 마무리 할 수 있게 하는 힘. 나는 책을 집어들면 대충이더라도 끝까지 읽는다. 이것은 내 좋은 습관 중에 하나다. 말다를 하지 않는다. 내 손에 들린 책은 언젠가는 이렇게 서평이 쓰이는 신세가 된다. 그 언젠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독재의 열망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닌, 스스로가 독재자인지 모르는 독재자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나도 이리같은 왕이 되고 싶다. 폭군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는 절대 폭군이 될 수 없음을 안다. 독재자, 폭군은 이미 그렇게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미칠 듯한 분노라는 소제목에서 확연하게 느껴진다. 분노하면 어쩔텐가. 칼뱅에게 끝날 것을. [진리를 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아무도 어떤 신념을 갖도록 강요 당해서는 안된다. 신념은 자유다. 폭력에 반대한다.] 그렇게 외친들 독재자가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디에서도 진리는 통하지 않는다. 독재자의 말이 진리가 된다. 시대가 지나고 히틀러가 그러면 안됐다고 한들, 칼뱅이 그러면 나쁜 놈이라고 한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역사는 되풀이 될 뿐이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말이 너무 하찮아서, 연약해서, 힘없는 지금의 나 같아서, 평생의 나같아서 [싯다르타]에 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인생사 일장춘몽이지만, 나는 꿈속에서나마 자유롭고 싶다.

 

이 책은 세르베투스와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사람 칼뱅도 어떤 면에서는 독재자이고, 폭력을 저지르며, 그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 대해 폭력으로 짖누르고,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자를 처헝하는 칼뱅을 두고,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집단이 가지는 힘을 이용해 다른 의견을 가진 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심도있는 책이었다.

 

지금의 내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 소개를 할 때 내가 읽은 저자의 글은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감정의 혼란]도 괜찮다. 왜 감정의 혼란인지,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 어떤 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감정을 휘몰아치게 만들며 독자가 파국처럼 안게하는 마력이 있다. 그나저나 소개에 저자가 부인과 자살을 했다고 한다. 육십대에. 왜 이렇게 자살하는 작가들이 많았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옷에 돌을 넣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다자이 오사무가 배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지나가는 것 같다. [자살에 대하여]를 펼쳐야겠다.

 

요즘 HAI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점심시간 동안 부정적인 이야기 오물을 뒤집어 쓰기를 반복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모든 이야기를 지피와 재미와 동반자처럼 사는 삶을 세세하게 시전하는데, 나만 AI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가? 나만 아직도 이렇게 종이의 질감을 만지고 넘기면서, 밑줄을 그으면서 생각을 연필로 적으면서. 다 읽고 나서는 이렇게 글을 정리하고, 나의 생각도 정리하는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시원한 답을 듣는다기보다는 이게 맞는 거야? 하고 의심의 기술을 시전한다. 모르는 것도 뻔뻔하게 거짓된 정보로 이야기를 하기에 믿음이 가신지 오래 됐고, 심리상담을 왜 AI한테 하고 그것을 맹신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마치 종교처럼 신봉하는데, 나는 안 믿는다고 했으면 적당히 해야 하는데, 적당히를 모른다. AI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다. 책 제목을 말하고 그걸로 표지 예시를 만들라고 하면 한글도 제대로 입력이 안되서 깨지는 심지어 유료버전의 AI를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그런데 U도 일의 능률이 올라간 것은 AI덕분이다. AI가 생기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이들이 어떻게 AI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이 맹신하는 데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는 그 정도의 기능도 하지 못하기 때문다. 자신의 추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는 말로 들려서 짜증이 인다. 알고 사용하면 좋을텐데.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AI의 어린양들같다.

 

읽던 책이나 읽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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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정치

이 숭고한 유토피아의 이념으로 무장한 강철 같은 이념의 인간은 그것을 무섭도록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각했다. 25년간 정신적 독재를 펼치면서 칼뱅은 사람들에게서 가차 없이 모든 개인적 자유를 빼앗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이 경건한 폭군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친 온갖 요구들을 하면서 자신은 오직 사람들에게 참되게 살라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따라서 살라고 요구했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사실상 매우 단순하고 반박의 여지없이 분명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모든 독재청지는 하나의 이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이념은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에게서 비로소 형태와 색깔을 얻게 된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의심의 기술

 

과대망상에 빠져 줄곧 혼자서 모든 사람과 대적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망친다.

 

폭력행위는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므로, 폭력에 저항하는 싸움도 언제나 새롭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절대로, 지금은 폭력이 너무나 강하므로 폭력에 말로써 대항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핑계 뒤로 숨어서는 안된다. 필연적인 일이 지나치게 자주 이야기되는 법이 없고, 진실이 헛된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이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그 말의 영원한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 진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사람은, 어떠한 테로도 자유로운 영혼에 대해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비인간적인 세기에도 인간성의 목소리를 위한 자리가 있다는 사실도 입증하는 것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가장 가혹한 고통 속에서 산 채로 불태워 버리는 비인간적인 일을 저질렀던 칼뱅은, 이제 검열의 일방성에 힘입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범죄를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우리 뒤에서 마주 짖어대는 개들이 우리를 물 수 없게 되어 퍽 다행입니다.

 

비극적인 체념 속에서 부당함을 조용히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폭력에 의해 패배한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한 경멸감만이 폭력이 정신을 억누르는 모든 시대에 위안이 되었다.

 

당신들의 말과 무기는 당신들이 꿈꾸는 폭력정치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지배보다는 시대의 지배에 어울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강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권력과 무기 때문에 당신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른 권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곧 진리와 내가 무죄라는 느낌과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의 이름이다.

 

한번 폭력을 행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것을 써야 하고, 한번 테러를 시작한 사람은 테러를 더욱 강화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X가 떠오르네. 네가 가진 권력의 내면이 이렇다. 그래도 갖고 싶어 거짓에 둘러 쌓여 파묻히고 있지.

 

깊이 실망했으나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그는 자신의 일로 되돌아갔다.

 

명예로운 자는 극단적인 증오에 중독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쪽이든 당신의 행동은 아름답지 못했다. 당신이 주장한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해와 관용을 모르는 광신자

 

잘못으로 가득 찬 나쁜 책

 

칼뱅주의가 인류에게 퍼져나갈수록 필연적으로 이러한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특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책 한 권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나 자신은 거부감을 느낀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화나고 실패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렇게 낙담한 심정이 한동안 계속 남아 있다. 차라리 모든 발행본들을 다 사들여서 불태워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곤 한다. 참되고 공정한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모든 묘사가 혹시 내가 무게를 제대로 달아보지 않은 것이나 아닌지 훗날 양심의 고통이 되곤 한다.

 

기독교는 세계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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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싫을 때 읽는 책 - 마감과 고갈 사이에서 건진 스물네 개의 문장들
금정연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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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싫을 때 읽는 책

금정연

 

그의 첫 책을 사고, 뜻밖에도 너무나 신이 나서 한 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금정연의 책을 낙서하기 위해 산다. 읽으면서 반문하고 공감하고 어이없어하며 뭐라도 써서 훼손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안고 읽는다. 이 책은 그 맛이 많이 떨어지지만 관성처럼, 낙서한다.

 

[스무 살 무렵 내 꿈은 돈을 벌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꿈이 공산주의였네. 북한가. ... 그러면 무보수 노동을 해야 하는구나. 못가겠네.

 

[나는 기술 발전을 나의 소비생활로 반복하는건가?]-나는, 나의가 반복되는, 국문과를 나온 건 맞는건가?

 

[그래서 써야 할 책이 이렇게 많이 밀려 있는 것이기도 하고]-일감이 이렇게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다]-과대적이다. 내가 하는 게 왜 제일 어려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왜 계속 찡얼대. 글을 못 썼다. 한 줄도 못 썼다. 해야 하는 데 못했다.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어 필력이 줄잖아. 안타까운 사람아.

 

[알겠어. 내일은 아빠가 딱 적당하게 구워줄게.]-애초에 그렇게 해줄 생각이 없이 일단 뱉고 보는구나. 장담하지 못할 것을 왜 장담해. 인생 패턴이야. 위기 모면, 믿을 수 없는 말들의 향연.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내게는 시간이 없고, 그래서 빅셀의 책도 아직 읽지 못했다]-시간이 많으니까, 네가 이러고 살지. 글 속의 너를 좀 봐봐.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네가 시간을 없애고 있지.

 

나는 데드라인이 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너 작가는 데드라인이 있잖아. 그럼 해야지. 서평 마감이 코앞이라며. 왜 안해? 안 불안해?

 

[그러다 몇 해 전, 내가 쓴 담배와 영화라는 책에 달린 독자평 하나를 보게 되었다. 이 작가는 돈 받고 쓰는 주제에 왜 맨날 글쓰기 싫다고 징징대는지 모르겠다]-복에 겨워서. 언젠가 내가 쓴 서평도 작가의 책에 나오는 거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직장인들은 월급 받고 일하니까 불명하면 안되겠네? 하는 반문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열 받았구나? 그런데 직장인들이 너처럼 글에다, 책에다 불평해?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떠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아? 작가 너는 입장이 다르잖아. 그럼 너도 혼자서 불평해. 글에다 계속 반복해서 찡얼대지 말고.

 

[정확히 말하면 글쓰기를 대하는 내 태도가 변한 건 아니다. 다만 그런 마음을 티 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여태까지 티 많이 냈어. 지금까지 티 낸 것만으로도 넘쳐.

 

[나는 지금 내가 징징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게 모든 시대의 작가들, 최소한 아주 많은 작가가 해 온 문학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네가 그 축에 속하기는 하냐. 변명 그만!!! 퇴고하면서 지우지... 지우고 싶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런 글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내가 쓸 수 있고 또 서야만 하는 유일한 글이라고 믿는다]-이게? 이 정도가? ...

 

[가난할수록 비만일 확률이 높다는 수많은 연구 결과가 있다.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운동하지 않는 당사자의 문제인 양 단언하는 악마의 말은 가스라이팅이다]-그래? 가난할수록 비만이야? 아프리카에 못 먹어서 야윈 사람 봐라. 가난도 가난 나름이다.

운동안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게으르다고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운동해. 라고 한거야. 덧붙이지마. 가난할수록 정크푸드나 배달음식을 먹게 돼서 비만되는거야? 그래? 그것만 있을까? 이유 같다 대봐. 엄청나게 많지. 그러면 부자일수록 비만일 확률이 높다는 수많은 연구 결과도 있겠지.

 

[내가 쓴 글이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지닐까?]- 그거 생각하고 쓰는 거였니. 먹고 살려고 쓴다며.

 

[어느 순간부터 내 손을 얼어붙게 만드는 건 좀 더 근본적인 두려움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그것이다]-그런 생각 그만하고 그냥 써.

 

혹은 말하고 있는데 큰 따옴표가 과감히 생각되어 있는 거. 이런 식의 딴지가 포함된 낙서행위다.

 

책은 독서대에 올려놓고 봐야 잘 읽히고, 글씨는 책상에 놓고 써야 잘 써지고, 왔다 갔다 반복중.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을 읽으면서, 책에 반문의 반문을 제기하면서 생각의 소리가 맞닿으면서 불협화음도 내면서 읽었다.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 샀고, 작가는 [매일 쓸 것, 뭐라고 쓸 것]이 인생에 타협한 결과인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나름 짜임있게 일기라는 형식에 맞춰 다른 책들의 일기들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일기도 나타내면서, 읽는 이들이 읽을 만하다고 느끼게 하는 장치를 넣었다.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 즉슨, 이 책도 그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는 듯 한데, 아니올시다. 이 책은 제목이 다했다. 글쓰기 싫을 때 읽으면 안된다. 이 책 제목은 글쓰기 싫다고 징징대는 금정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징징대다가 변명하다가 징징대다가 합리화하다가 아무런 노력의 흔적없이 진짜, 인생에 타협한 글쓰기의 잔해를 남기는 것으로 마친다.

 

(null)

[나는 한 통의 전화를 해야 했고, 그게 나를 미치도록 두렵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을 전화는 전화가 아닌데도 말이다.

 

가끔은 돈도 내 걱정을 좀 해줬으면

 

구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잠깐 나온 사이에 글 하나 쓰고, 다시 구석에 몰려 있다가 또 나와서 잠깐 쓰고, 가끔은 구석에 반쯤 엉덩이를 걸쳐 놓은 상태로 눈물을 흘리면서 쓰기도 하고...

출판사:

45쪽 밑에서 3번째 [앗아 가] 버린다는 점이다

 

팔리지 않는 책.

 

좀처럼 일을 끝내지 못하니 늘 일이 많을 수밖에

 

애초에 책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다. 읽은 책에 관해 쓰고 싶었고, 나 역시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런 날이었다.

 

중요한 것은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병과 더불어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신은 내가 글쓰기를 원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내가 원해, 그러니 해야 하네.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나는 글쓰기를 원하는가?

 

정말로 내가 감동하는 책은 다 읽고 나면 그 작가가 친한 친구여서 전화를 걸고 싶을 때 언제나 걸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은 좀처럼 없다. J D 샐린저 - 얼마 전 그런 책 만났어. 부처님 말씀대로 살다보니

 

이건 어쩔 수 없다. 작가들이란 그런 존재다.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내글구려-바이러스를 안고 가야 하는 생물이며, 이것은 아무리 대문호의 경지에 오르더라도 떨어지지 않는 주박이다

 

한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문의 서평을 써서 인터넷 서점에 올리던 열혈 서평가였다-? 나는 아직도 그러고 있다. 지금 봐라.

 

즐거움이 없다면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그해 봄, 인생살이가 어지간히 고되고 내 신세와 전쟁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통 보이지 않아 막막해하던 때에, 나는 기차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유난히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내려갈 때는 멀쩡한데 가만히 서서 위로 운반되다 보면 감정이 북받쳤다.

 

상처 주기 싫어서 그냥 입을 다뭅니다. 게다가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남이 그은 밑줄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런 경험은 종이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요즘 대형 중고 서점에서는 밑줄을 너무 많이 그은 책의 매입을 거부한다고 하는데, 나는 헌책방을 구경하다가 순전히 누군가 책에 그은 밑줄이 마음에 들어 책을 구입한 적도 있다.

만남의 순간을 표시하는 것이 바로 밑줄이다.

읽어 넘기면 그만인 문장들에 줄을 그어 되새기고, 언젠가 다시 펼쳐 읽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작은 연필선 하나가 이토록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니,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해결책은 단호히 결정을 내리는 것밖에 없다.

 

어제 아침의 내가 파김치였다면, 오늘 아침의 나는 푹 익은 파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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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리커버)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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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숙제처럼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바로 산 지 꽤 된 책, 읽다 만 책. 끝을 보기를 기다리는 데, 따라가지 못하고 내 인생에 쓸데없는 것으로 채우고만 있다. 기다리고 있는 경애의 마음을 집어 들고 마무리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김금희의 소설 [복자에게]를 처음 접하고 ! 이렇게 쓰는 한국 소설가가 있구나싶어 가슴을 어루만졌더랬다. 이후 김금희라는 이름만 보이면 책을 샀지만, 불행인지 행운인지 거기까지였다. 감흥이 이는 책은 없었고, 심지어 실망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해야 했다. 과거로 회귀해야 더 나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생각난다. 그 뒤로 한참을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 마냥 써대는 소음에 질색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한참이, 아주 한참이 흘러서야 영영 돌아오지 않지만, 다른 길의 어느 안착점을 찾은 듯한 기분으로 [할머니는 죽었다]를 읽었던 때처럼. 김금희도 그런 날, 그런 시간이 오겠지.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너무나 찌질한 캐릭터들만 계속 나열하고 있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게 경애의 마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찌질한 상수, 찌질한 경애, 찌질한 찌질한 찌질한. 아웃사이더, 못난이.

복자에게를 쓰려는 복선으로 이 글을 받아들이면 될까?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가 될 거라고. 미성년자 시절에 술을 마시다가 화재가 나서 죽은 이들과 관련 있는 상수, 경애가 한 회사에서 만나서 이곳 저곳의 비리를 만나고, 그 비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이야기. 동시에 드러나지 않은 곳에 있는 각자의 삶의 역할을 현실로 가지고 나오는 것을 선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책을 집어 들면 우리는 언니라는 인물을 통해 이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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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추웠어요.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

 

그렇게 밀려난 자리에는 왜 하나같이 햇볕이 들지 않는 것인지, 앉아 있으면 정오가 왔는지 저녁이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알려주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흐트러지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를 포기한다는 것은 조금씩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아서

 

고통을 공유하는 일은 이토록 조용하고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

 

힘을 쌓다 보면 축적해온 모든 것들을 잃을 용기도 생겨나는 것일까.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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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은 아이 - 2019년 제25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51
김정민 지음, 이영환 그림 / 비룡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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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은 아이

김정민 지음

 

 

.... 뭘 말하는 거야? 이게 무슨 신여성이고, 주체성이고, 시대를 넘는 이야기야?

신분제도 속에서 젖어머가 되어 자신의 자식마저 내버려둔 부모가 아닌, 아이의 언니가 끝까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는 이야기.

말 그대로 발을 동동거렸지. 그랬어.

그게 왜 담을 넘은 거지? 동생 살려달라고 양반에 애원해서? 그게 결국 조선 사회의 당연한 모습이었어서?

뭔가 하나는 있을 줄 알았어.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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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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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글자 한글자 놓치면 끝나는 것 같은 책이 있다. 천천히 의미를 이해하며 읽으면 많이 남는 책이 있다. 신형철은 그런 글을 쓴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영화에서도 터무니를 찾아내어 전달한다.

 

survivelive에 대한 생각의 연속이었다.

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

나는 숨을 쉬고 있고, 살아있지만, 내가 살아있냐고 물었을 때 너는 없었다.

 

책을 읽고 나면 밑줄 그은 문장들을 조합하는 일을 하는데, 너무 많기도 하고, 문장 그대로 살아 있어도 될 것 같아 조합을 하다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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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위안.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낸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 먹는다. -지금 그렇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수락한 것은 내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한번 알게 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저항하는 일이 요즘의 내게는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젋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바로 그 믿음에 갇힌다.

 

자기가 편협함인지를 모르는 편협함에 대한 구역질

 

울어버려. 울어버려야 해. 안 그러면 너는 죽고 말아.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픔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왜 새벽에 위로가 되는 것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네 감정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모국어에도 역시 내 마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낯선 외국에서 살기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유창하게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말이란 그렇게 착착 준비되어 있다가 척척 잽싸게 나오는 것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한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 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들이 그의 체험적 결론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안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고통 가까이에 있어 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감히 그런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없어 못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이다.

 

비판과 풍자와 조롱.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대다수의 당사자들에게 부끄러움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선택받은 소수인 자신들에게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희망은 종신형

 

찬란한 햇빛, 아까워

마음껏 절망이라도 해야 살겠다.

 

사건의 충격, 진실의 무게, 응답의 울림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이들을 감옥에 처넣는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나라는 서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고 또 진행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라는 서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작가라고 믿는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서사의 흐름에 균열이 오거나 반전이 생기면 다시 쓰기를 해서 그 사건을 내 삶 안으로 통합해낸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이별을 겪고 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옛 노래 제목을 떠오리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이 그것입니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 그 무렵이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다.

 

지금도 촛대처럼 불타고 있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결과에 대한 예측이 과정에 영향을 끼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고 부른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우리에겐 희밍이 없지 않다. we are not without hope. have 동사가 아니라 be 동사다.

 

어떤 시인의 사회적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어떤 시인이 특정한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어떤 문화적 폭력의 은밀한 시작일 뿐이다.

 

토니 다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글을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시를 읽고 나서 나는 이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인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해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중의 착각일지라도, 이런 착각은 어떤 에너지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고, 정확하게 죽고 싶다는 것. 세상의 어떤 이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고, 세상의 어떤 이는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싶다. 그런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먼 훗날 우리를 정확히 죽게 할 것이다.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 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고, 그 결여 때문에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

 

타인을 부정해야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삶은 비극적이다.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짜리 편지라 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문어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싶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최약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독서로 여행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내게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보다는 읽지 못한 책에 대한 갈급이 언제나 더 세다. 그러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믿는 척하면서 안 믿고, 지는 척하면서 이기는 것.

 

대중친화적인 소설이나 영화라고 칭송되는, 그러니까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을 보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작품들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 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소비자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나는 거기서 지갑을 열어. 그리고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겨. 넌 원래 그렇잖아 라는 속삭임을 듣는다.

 

전달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전달하기 위해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과 형식을 동원하는 작품들은 대중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상업적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그런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 그것을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옹호하는 평론가들이야말로 실은 대중을 존중하는 이들이 아닌가.

 

다시 한번 우리를 믿어줘서 고맙다.

 

잘해보려고 미루다 결국 못 하게 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을 () 만나는 일도 그중 하나다. 만나기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이 있을까. 그냥 내일 아니면 모래 만나야 한다.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그 무엇도 이 일을 대체하지 못한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해맑은 슬픔

 

제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삶은 베어지지 않는다.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 둘 다 포기해버렸다.

 

말하지 않고, 쓰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최대한의 것을 이뤄내는 이들이다.

왜 이렇게 긴 글을 썼냐는 물음에, 짧게 쓸 시간이 없었노라고 대답한 지혜로운 작가가 누구였더라.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것.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마음산책 2013

 

이것은 숨 쉴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설이 아니라 수시로 깊은 숨을 내쉬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이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피학적 쾌감 때문에 나는 그만 진이 다 빠져버렸다.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일생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은 제한돼 있고 나는 이미 40년을 살아버렸다. 이제는 그럭저럭 읽을 만한 소설까지 읽을 여유가 없다. 이런 조바심 때문에 근래의 내 독서는 점점 강팍해지고 있다.

 

쓸쓸한 농담 같은 소설이다.

 

생명연습. 불완전한 생명인 인간이 완성 없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야 말고. 인간은 이상하고 인생은 흥미롭다.

 

윌리스는 자신이 윌리스라는 사실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했는데

 

저러다 문득 돌아보면 그 허무를 어찌하려나 함께 걱정했다.

 

도대체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못 되는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는 뜻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스토너가 죽어 이야기가 멈출 때까지 이 소설을 따라 읽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무의미에 이르는 병

의미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색하게 묻게 된 것은

어떤 질문은 그것을 간절하게 묻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조금은 달라지게 한다. 정말 나는 그렇게 되었다.

 

이번 약은 잘 들을 겁니다.

의사 말을 듣고

믿고 싶은 그 말을 믿고 나는 묻는다.

 

얼마나 잘 듣지 않았나

이불 속에 드러누운 나의 마음은

컴컴한 창밖 얼어붙은 얼굴을 들이미는 나의 고함조차

듣지 않았지 열어주지 않았지

 

내가 있어도 나는 빈 방

없어도 나는 나의 빈 방

 

앞으로도 나는 듣지 않을

빈 방의 나의 소리들

이 약은 잘 듣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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