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필사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게 6월이 장미의 계절일 수만은 없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글을 필사하게 되었다. 6월이 장미의 계절일 수만은 없는가. 6월에는 무슨 날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오늘이 그날이다. 광복한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터진 민족상잔의 아픔.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우리는 또다시 같은 민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맞물릴 만큼 오래됐다. 평화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은 왜 그다지도 불협화음을 자처하는가. 전쟁의 역사를 통해 인간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누군가의 위에 서야 한다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욕심은 유전으로 되물림되는 듯 하다.

 

인간은 신비롭다. 밝혀진 것보다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많고, 아마도 인류가 생존하는 내내 모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내 후임으로 들어온 자가 나의 우위에 서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내 위에 있지 못해서 상담을 받고 결국에는 상사와 모종의 합의로 나를 눌렀다. 내가 눌린 듯이 보이니 자신이 신이 된 것 같아 우쭐해 하며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은 누군가를 밟고 우위에 서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왜 그런 인자를 가지게 되었는지 조상의 흐름까지 상상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의 조상은 대대로 소작농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신분 상승을 할 기회가 생기게 된다. 그 때의 권력의 맛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거기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마음과 열등감이 대대로 유전되었을지도. 더 거슬러 올라가 원시시대로 설명해도 기조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6월은 장미의 계절일 수만은 없다. 전쟁은 사람들이 피비린내를 진동하며 싸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짓밟기 위해 행하는 폭력도 마찬가지다. 서글퍼할 사이도 없이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안 좋은 유전인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내 자식과 후손들에게는 폭력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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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부터 친구와 단둘이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그게 뭐가 독서모임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독서모임이다!!!!” 라고 말하겠다. 이 책의 독서모임 일원들처럼 이름있는 구성원들도 유명한 단체도 뭣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자신있게 The April Bookclub 이라고 외치겠다.

나이 서른 여덟에 모임을 시작해 1년을 잘 지내왔고, 나름 만족스럽다. 처음에는 책을 다 읽느냐 마느냐/너는 읽었네, 나는 안읽었네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다. 책을 사서 한 줄이라고 읽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세상임을. 물론 정해진 책을 온전히 다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어야지하고 생각만 한 채,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날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라딘에(지금은 매주 목요일로 생각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글을 올리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는 일은 단순히 읽는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 다른 일들도 잘 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준다. 이렇듯 북클럽(영화 제인오스틴 북클럽을 의미있게 보고, 책모임을 묵클럽이라고 말한다)은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해 우울한 자기를 생성하던 나의 내면을 채워주고 있다. 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보듬고 치유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는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오래된 빈집을 매일매일 고쳐나가는 일과 같다. 지치고 방치되어 있던 내 마음을 어떤 날은 정성을 들여, 어떤 날은 무심한 듯 하지만, 손을 놓지 않고 토닥여 주는 것. 그리고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내 마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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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기분을 표현하는 단어 네 개(오후의 글쓰기 과제)

     

기분을 표현하려는데 생각이 끼어든다. 기분과 감정이 무엇인지 개념 정의부터 하려든다.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그런 사고개입을 막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또 평소 내 기분과 오늘 내 기분이 짬뽕된다. 더 이상 오염시키지 말고 지금 내 기분에 집중해 보자.

 

오늘 내 기분을 표현하는 단어는 차분함, 억제된 화, 먹먹함, 위축.

 

표면적으로 오늘의 나는 차분하게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무탈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정해진 것을 나의 의지가 아닌 외부요인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고 여기면 화가 일어났다. 감정을 건드리는 시각이나 청각이 개입되면 마음이 먹먹해 지기도 했다. 회사 내에서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시선이 나를 위축시켰다.

 

이렇게 하루, 한 시간, 몇 분 안에도 내 안에 수많은 기분들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혀를 낼름거리지만,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구분도 하지 못한 채 휘둘리기 일쑤이다. 그런데 타인이 조절하지 못한 감정을 드러낼 때, 나의 반응은 어땠던가. 미친년 바라보듯, 개똥 피하듯이 대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도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는 그 기분의 소용돌이 안에서 헤매고 있었을 텐데.

 

왜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기분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지낼까? 내가 나의 주인인데 기분이라는 녀석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화를 내기도, 울음을 터뜨리기도, 우울해하기도 하는걸까?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마치 기분에게 내 안방을 내어주기라도 한 것 같아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걸 다시 바꿔 생각해보면,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었던가. 밥을 먹다가 멀쩡한 혀를 깨물기도 하고, 평소 잘 들던 컵을 와장창 깨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숨을 안쉬고 살고 싶어도 숨을 쉬어야 살고, 밥을 먹어야 살며, 잠을 자야 산다. 우리는 각자에 대해 주인이라는 명목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게 지키고 다독여주며 사랑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있다.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갖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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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서 내가 잘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지 못하게 칭찬을 받는다면, 그 말을 잊을 수 있는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 말을 곱씹지 않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이십대 후반에 근무하던 시골의 작은 병원에서 원장은 나에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그리고 몇 차례 글을 써온 후, 원장은

선생님은 수필을 쓰시면 잘 쓰실 거 같아요.”라고 강아지풀처럼 부드럽고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수필에 어울리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물론 이말은 독후감을 수필처럼 써왔다며 애둘러 표현한 것이겠지만, 나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0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성장을 멈추고 고단한 세상의 껍질을 쌓아갔다. 그러다 약 1년 전, 친구와의 독서모임을 계기로 다시 독후감과 수필이 결합된 글을 가끔씩 쓰고 있다.

 

이제껏 누군가가 내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뭐라도 계속 써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있다. 그래서 여러 번 글쓰기를 시도했지만 내리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굳은 마음으로 꾸준한 글쓰기에 성공하고 싶다. 그리고 이왕 쓸 거면 잘 쓰고 싶고, 잘 썼다는 칭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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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서

 

앞코가 뚫려 있는 5센티 높이의 베이지색 구두를 신은 뒤에, 연한 청바지, 블라우스, 카디건을 입고, 걸어서 출근했다. 평소 구두를 잘 신지 않아서 더 근사해 보인다. 약 이십 여분을 걸어 회사에 도착했을 때쯤, 구두에 닿는 엄지와 새끼발가락 부분에 아픔을 느꼈다. 통증은 점점 심해, 구두를 벗고 보니 진물도 난다. 보건실에 들러 밴드를 받아와 발에 붙였다.

퇴근할 때가 되어 구두를 신어 보니 발을 넣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걸음걸이에 신경 쓰기는 커녕 어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면서 고행 길을 걸었다. 집에 돌아오니 물집은 다 터져서 쓰라렸고, 벌건 속살이드러났다. 보기에는 참 편해 보이는 구두였다. 굽도 두껍고 굽 높이도 적당했다. 처음 발을 넣었을 때도 정말 편했다. 그런데 신은 지 이십 분도 안됐는데, 내 발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이 길이 꽃길 같아서 신나게 걷는데,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지 않음을 알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그 길로 묵묵히 걷는 것을 택한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면 미련스러울 만큼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행한다. 그렇게 버티다가 몸이 무너지며 고통을 알려줄 때에서야, 잠시 쉬어간다. 그때, 도착지에 가는 방법은 더 편한 신발을 신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선택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고통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나는 살아가는데 고통을 없애고 편리한 방법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미련스러워 보이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장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미래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 쉽게 변하지 않으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응원한다. 그 길 앞에서 위로를 하거나, 받지도 못하지만, 그들의 삶이 있어 세상이 빛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서툴러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내게, 사랑의 눈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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