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치며

   

벌써 연재의 마지막이다. 허둥지둥 중언부언 달려온 길이라, 다시 처음의 질문 “도대체 여자들이 왜 남성만의 사랑이야기를 욕망하는지”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이 글의 뼈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팬픽을 위시하여 강한 성적 묘사를 포함하는 동성관계 표현물은 특히 ‘여성향(女性向)’이라고 불린다. 21세기의 부녀(腐女)들은 ‘썩은 눈을 가져서 미안해’라며 묘한 시선으로 낯선 이야기들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여기에서 이성애는 동성애로 대체되고, 모험은 애정으로 전환된다. 그 이유를 가부장적 남성 동성사회의 효과이자, 그 속에서 움트는 대항의 의미로 찾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문화적 수행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그에 대한 전면적인 예측은 역시 무리이다. 시각의 형평을 위해 여성들 사이에서 은밀히 통용되는 동성관계 표현물의 해악(?)을 말하는 목소리에도, 물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만 필자는 이러한 표현물이 대체로 서사적 측면에 보다 힘을 싣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다시 말해 정전의 뒤안길에서 여자들이 이야기와 맺어온 관계에서, 이 욕망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2000년 이후 팬픽을 생산, 소비해대는 일군의 여성들이 표출했던 열정이, 대중문화의 주체로써 로망스를 선호해왔던, 종종 삼류 작가와 저급 독자로 지목받았던 여성의 문화적 위치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특별한 관계를 성취하는데 종종 모든 재능을 집중시켰던 여성에게 사랑은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다름 아닌 수난이 존재한다. 동성애는 그런 점에서 불굴의 사랑을 달성하게 하는 기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위치되었던 여성이, 여기에서는 이 이야기의 장 밖에 놓이고자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이야기에는 언제나 생성되는 맥락들이 함께 자리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 입장에서는, 현실과 다른 환상을 주재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1인칭 시점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긴다. 이러한 자발적 소거는 팬픽을 읽는 여성에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 소위 그의 여자가 되는 상상과 꼭 맞지 않는 쾌락을 느끼게 되는 것과 관련된다. 이러한 남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그를 둘러싼 일정한 감수성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이제까지의 남/녀 구분을 뛰어넘는 위치를 획득한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성/남성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지속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팬픽 등속 동성관계 표현물이 산출했던 효과는 “내 남자가 아닐 바에야 차라리 게이여라~”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플롯 기반의 서사물이 컨셉 위주의 영상물과 반드시 같지만은 않은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데 근거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반영하지는 안되, 또 한편 변화를 추동해내는 이러한 서사는 언제나 있어왔다는 것이다. 몇백 년 전부터 긴긴 밤, 어떤 여성들은 누군가로부터 빌려왔던 언문소설을 필사했고, 어떤 여성들은 할머니-어머니로부터 내려왔던 전설 및 설화 등 구연했다. 이러한 이야기의 연쇄 속에서 여성들이 일정한 도덕, 규범, 이성 등에 보다 다른 감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여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잘 휘둘린다는 비판은 아마 일말의 진실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금지가 욕망을 낳는다고 할 때, 여성은 그 사회적 위치로 보아 보다 많은 것을 소망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원하는 이 ‘죄 많은 텍스트’들은 대개 소설이었고, 이 끝없는 이야기의 어느 곳에서 그들은 각기 다시 현실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을 얻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지금-여기의 동성 서사들은 엄존하는 이성애적 규율을 가볍고도 쾌활하게 지나치고 있다.

가능한 이야기와 불가능한 이야기, 이야기되지 못한 현실과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상상은 언제나 그 경계를 달리해왔다. 이 글은 물론 여성들의 남성 동성 서사 지향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무리를 하는 이 시점에 있어서 또 다른 쪽의 포문 역시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남성아이돌 그룹 중심의 팬픽은 2011년 현재 여성아이돌 그룹을 대상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바야흐로 (남성)장미물과 (여성)백합물이 동시에 진전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전자가 여성을 중심으로 향유된다면, 후자는 당연 남성들이 선호하겠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산술적 증빙이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그러한 판단 역시 남/녀 구분에서 나온 전도된 판단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지금의 걸 그룹 홍수는 비단 ‘삼촌’팬들 때문만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인데 ○○○에 끌려요~”라는 고백이 심심찮다. 더불어 기존 남성그룹 팬픽을 향유하던 여성들이 여성그룹 팬픽의 생산 및 소비에 뛰어들고 있기도 하다.

물론 B․L과 더불어 G․L 역시 국경을 초월한 취향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까지 비교적 마이너였던 이 여성 동성관계 표현물의 저변이 최근 단박에 확장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까지 활약하고 있는 여성 9인조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는 애초에 “남자들, 당신이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든 이 범위에서 벗어날 순 없다”라는 식으로 등장했다. 서로 다른 여성성을 조밀하게 배치한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이 성공의 주요인이었다. 그런데 소위 ‘소․시’ 팬픽에서 이들 9인은 ‘소녀’를 벗어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을 놓고 난만하게 벌어지는 커플링 과정에서 천사와 같다고 일반에서 추앙받는 ‘소녀’는 ‘묘하게 잘 생겼다'고 평가되어 오히려 남성성을 수행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녀들의 관계를 성적으로 묘사했을 때 오히려 삼촌팬들이 질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제 팬픽을 위시한 동성 서사는 남-남 뿐 아니라 여-여 관계에서까지 전개되고 있고,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적 실천에 여성 뿐 아닌 남성까지도 가세하고 있다. (물론 남성들에 의한 ‘소녀’관계 표현물 소비는 성규범의 변화와 상관없이 접근되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논점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여성 동성 팬픽에 여성 뿐 아니라 남성이 양적으로 보다 의미 있게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적할 만하다.)

각설하여, 필자는 이 연재를 진행하는 동안 우연히 모 채널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1979)을 다시 보았다. (주지하듯 이 이야기는 11살의 고아 앤이 독신 남매에게 입양된 후 일어나는 일들을 일대기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루스 모드 몽고메리 여사에 의해 1908년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으로 발표되어 전세계적으로 사상 최대 1억 부가 팔렸다고 한다.) 백여 년 세월을 통과한 이 이야기를 놓고 이번에 필자는 주인공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처음 들어가서 "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저에 관해 상상한 것을 들으시는 게 더 좋겠다"라고 말한 데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앤은 언제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하지만, 곧 자신의 특출한 상상력으로 그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는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이 현실과 이야기의 조응은 곧 앤이 상상으로만 가져봤던 ‘마음의 벗’ 다이아나를 실제로 사귀게 될 때 드러난다. 그녀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함께 읽으며, 또 상상으로 숲속에 자신들만의 집을 짓는다. 

 


<빨강머리 앤과 벗 다이아나>

 

이 일련의 과정을 분명 어렸을 때 필자는 여-여 사이의 당연한 우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본 앤과 다이애나는 "너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며 잠시의 이별을 놓고 사랑의 맹세까지 하는 등 꽤 달달해 보였다. 마무리에 와서 뜬금없이 이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두고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애초에 남-녀의 이야기였으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였더라도 분명 사랑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보다 구조화된 문화에 관한 이야기다. 케이블이기는 하나 국내 최초로 소개된 여성 동성애를 다룬 모 미국 드라마에서 한 매력적인 인물은 ‘섹슈얼리티는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광고처럼 그 물줄기가 콸콸콸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탈-이성애 중심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로 보다 촘촘하고 광범위한 망을 직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능치 않는 환경 속에서도 놀라운 이야기는 나타나고, 낯선 상상에서 더 나은 현실이 움튼다. 이성애 매트릭스에서도 게이다(gay-rader)는 작동한다.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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