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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식 위원: 지금 저도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초등학교 1학년인데 850만 명의 부모들이 잠재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적이 지금 총칼을 들고 내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 지금 부작용이 있니 없니, 이것은 제가 볼 때는 이 절박한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무기를 가질 수 있다면 전자 발찌도 좋고 화학적 거세법도 좋고 또 열람 · 공개 제도도 좋고 다 한번 해보는 겁니다. (……) 물론 신중하게 접근해야 되겠습니다마는 너무 또 이렇게 조심조심 하다가는 세월이 다 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법제사법위원회 2009, 14-15)
◯ 최●국 위원: 이것보다는, 화학적인 거세보다는 차라리 물리적 거세하는 게 어떻습니까? (……) 이렇게 복잡하게 할 게 아니고 물리적 거세를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 진술인 한●훈: (……) 만약에 원하지 않는데도 그야말로 강제적으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체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제사법위원회 20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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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라는 명목의 개입은 사회를 보호한다는 명목, 가해자 개인을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사회와 개인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개인에 대한 공격을 유발한다. 질병(disease)이나 병고(illness)에 대한 의료 진단은 그 병을 앓고 있는 개인을 향한 혐오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화학적 거세의 부작용은 이의 다른 판본이다. 화학적 거세라는 낙인찍기는 신체형, 나의 말로는 신체표지형이다. 신체형이 몸에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곤장과 같은 형식이라면, 신체표지형은 누가 봐도 그가 범죄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벌이다. 화학적 거세 혹은 성충동 약물치료는 범죄를 병리화하고, 가해자를 치료하여 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가해자를 더욱 두드러진 존재로 만들 뿐이다. 오히려 이를 통해 혐오 폭력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의 몸은 호르몬 투여를 처방 받은 후 ‘여성형 외형’으로 변한다. 그리고 가해자가 출감 후 사회생활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의 바뀐 외형을 통해 그가 성폭력 가해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혐오 폭력이 발생한다면 그 폭력은 성폭력 가해자를 향한 폭력일까, mtf/트랜스젠더 여성을 향한 폭력일까? 화학적 거세 조치를 받은 이와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 mtf/트랜스젠더 여성은 피상적으로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나는 mtf/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로 오인되어 폭력 피해를 겪을 상황을 우려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성폭력 가해자인 줄 알았다는 명분으로 트랜스젠더 혐오 범죄가 증가하거나 혐오 폭력을 정당화할까 봐 불안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두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이 둘은 다른 것이며, mtf를 비롯한 트랜스젠더는 범죄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하고 싶지 않다. 역사가 증명하듯, 둘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결국 기존의 규범성, 소위 ‘정상적인 몸’이라고 불리는 이상(理想)만 강화할 뿐이다. 구분하면 할수록 트랜스젠더는 비규범적인 존재라는 ‘편견’만 강화할 뿐이다. 구분 짓기를 하기보다, 나는 화학적 거세라는 신체표지형이 무의식적으로 욕망하는 것, 정말로 처벌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즉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투여와 성폭력 가해자의 화학적 거세의 다른 맥락을 읽기보다, 나는 신체표지형의 욕망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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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글은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인터뷰 기사에 달린 것의 일부를 직접 캡처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는 나도 참가했기에 기사 링크를 걸고 싶지만, 나만 참가한 것은 아니라 생략했다. 이런 댓글은 퀴어 관련 기사에 지금도 여전하다. 혐오 발언과 혐오 폭력을 표현의 자유로 이해하는 한, 이런 댓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근대의 세균설을 통한 인간 생활의 관리와 통제는 이제 우리 사회의 일상 실천이다. 세균의 가시성 확보는 의료 통제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는 세균설의 2010년 판이다. 가시성의 확보를 통해 막연한 공포, 누가 범죄자인지 누가 비규범적인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공포가 아닌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공포를 생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비규범적인 존재는 규범적인 존재와 명백히 다르다. 이들은 결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 규범적인 존재에 섞여서도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프렉쇼나 정신병원처럼,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초석이 된다.
민족국가/국민국가는 규범적인 형태의 남성-몸을 시대의 이상이자 자연 질서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비규범적인 몸은 국가와 사회에 위협이라고 비난하며 분명한 구분을 시도했다(Mosse, 75). 지배 규범은 비규범적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그의 훼손된 몸”(Mosse, 79)을 통해 “사적인 악덕을 폭로”(Mosse, 76)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언제나 몸을 통해, 피부 표면에 드러나는 어떤 특징을 통해 인간을 구분해왔다. 화학적 거세와 같은 신체표지형은 이런 구분을 용이하게 한다. 신체표지형은 별도의 검사나 신분 조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상대의 몸을 보면 곧 바로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
신분 증명의 역사는 몸을 구분하고, 차이를 발명하는 역사기도 하다.
따라서 화학적 거세의 부작용은 이 법을 통해 신체표지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주요 수단이다. 부작용은 그 자체로 화학적 거세법이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처벌이다. 부작용을 통해 성폭력 가해 남성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구축하는 또 다른 축은 자명하다.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지 않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남성은 곧 성폭력 가해를 하지 않는 남성이며, 가해자와는 달리 사회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남성이라는 신화다. 즉 성폭력 가해를 하는 남성-몸과 성폭력 가해를 하지 않는 남성-몸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체표지형의 효과다. 성폭력은 낯선 사람보다는 가족이나 친인척, 이웃 사람 등 낯익은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훨씬 많음에도 화학적 거세법은 이 사실을 은폐한다. 법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는 다른 몸이며, 그 몸은 트랜스젠더처럼 이 사회의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외형을 갖춘 존재가 된다. 아울러 성폭력은 매우 특수한 사건일 뿐 일상에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몸을 “표지하고 표지되도록”(marking and being marked)(Sullivan, 556) 하는 화학적 거세법의 기본 전제다. 이 전제에 따라 지배 권력이라는 폭력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남성’은 자신의 행동을 폭력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다. 아니, 항변할 필요가 없다. 문제가 있는 존재는 이미 그 외형을 통해 단박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형벌로서 화학적 거세는 결국 단순한 성욕 감퇴나 예방을 지향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존재로 분류되던 이에게 화학적 거세 조치를 함으로써 괴물스러운 몸만들기를 지향한다. 원래 비규범적인 존재의 경우, 외형을 통해 즉각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규범적이라 여기는 존재와 구분이 잘 안 되니 시각 경험으로 즉각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성폭력 가해자일 수 있다는 인식, 성폭력이 발생하는 복잡한 맥락, 규범과 비규범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이해를 차단한다. 대신 두드러진 몇몇을 규범적이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 성폭력 발생의 권력 위계를 소수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린다. 아울러 ‘여성화’를 통해 트랜스젠더 혐오나 비이성애 혐오의 대상이 되도록 하여 규범과의 완전한 단절을 시도한다(트랜스젠더 여성이 성폭력 가해자로 오해받아 혐오 폭력을 겪을 때, 사람들은 폭력 가해자를 비난하겠는가, 트랜스젠더 여성을 혐오하겠는가? 아니, 이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기는 할까?). 차이의 규명은 곧 동질성의 확보라는 점에서, 화학적 거세법 제정은 규범적인 남성 범주를 (재)정립하고 이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이 모든 노력은 ‘비규범적인 몸은 그 자체로 이미 처벌이자 형벌의 대상이며, 불행 그 자체’라는 이해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기에 가능하다.
화학적 거세법의 효과성과 실효성은 바로 이것이다. 법을 시행한다고 해서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시행령이 제정되고 적절한 시행 규칙이 생긴다고 해서 성폭력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화학적 거세법을 시행한 후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몇 퍼센트 줄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법을 공표함으로써, 비규범적인 존재와 규범적인 존재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불안을 완화하는 것이 이 법의 실질적인 목적이다. 비규범적인 존재와 규범적인 존재는 분명하게 다르며, 행여나 구분할 수 없다면 화학적 거세법과 같은 형식의 조치를 통해 가시적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 표명을 입법이라는 형식으로 실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이미 괴물스러운 존재로 불린 이들은 여전히 비규범적인 존재로 살겠지만, 규범적인 존재로 불린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안정적인 토대로 만들 수 있다.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지 않은 ‘나’, 화학적 거세 처분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는 ‘나’는 위법한/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규범적인 존재라는 차폐막을 칠 수 있다. 그리고 화학적 거세법은 비규범적이라고 여기는 존재의 차이를 지우는 용광로가 된다. 이 법에 투사된 욕망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