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신은 환자이니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 사회 의료화, 젠더 규범화

 

3-2. 의료로 구성하는 일상생활: 정신병원과 세균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정기 건강 검진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건강 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어 구체적인 과정은 잘 모른다. 대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아기 고양이가 결석이라는 만성병에 걸려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결석이 처음 발생했을 때, 한 달간 처방 사료와 물약을 먹여야 했고, 한 달 후 재검을 받으러 가야 했다. 의사는 검사 후 건강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결석이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으니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의 아기 고양이에게 비록 결석 증상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건강 상태는 의사의 검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내가 간 병원은 상당히 괜찮은 병원이고 그 의사도 괜찮은 분이라, 불필요한 진료를 받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동반종과 사는 사람이라면, 일부 동물병원의 부당한 진료비를 겪은 적이 있으리라). 다만 건강을 정기적으로 검진하고 의료적 수치로 확인해야 하는 과정은 꽤나 심란하다. 개인의 몸은 자신이 관리하지 않는다. 개인에게는 자기 몸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건강 검진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한 방법으로도 소비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건강 검진은 의료화라기보다는 보편적 복지로 여겨지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의료가 일상에 스며드는 방법이다.

근/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는 의학이 보증하는 건강을 기준으로 삼으며 살고 있다. 위생과 청결은 의무 사항이며, 기본 예의로 재구성되었다. 건강에 강박적인 사회에서 아프다는 것은 큰일이다. ‘우리’는 아플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아플 권리는 없다. 건강은 자기 관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해야 하고 아파서는 안 되며(라디오에서 젊은 것들이 아프고 감기에 걸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광고를 들은 적이 있는지?) 회사와 경제 성장에 지장이 없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의 건강 규범이다. 푸코는 20세기 후반 들어 “원할 때 필요할 때 아플 권리”, “일을 중단할 권리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하지만(276),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플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건강 강박은 개인의 몸을 어떻게 관리할까?  

 

정신병이 없는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으로 진단받고, 정신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다른 병원에서 정신병이 없다고 진단받은 이 실험은 상당히 유명하다.

  

정신병원은 많은 사람을 임의로 구금,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오랫동안 악명을 떨쳤다. 그 악명은 지금도 유효하다. 앞서 클라이스트가 정신병원을 견학하고 쓴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정신병원은 전통적으로 사회에 위협인 존재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의사가 정신병으로 진단한 이들부터 범죄자, 노름을 한 사람, 고아, 빈민, 성노동자 등이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 정신병원은 사실 그 시대의 공공/사설 구금 시설이었다. 그리고 구금된 이들 중 일부는 그 시대의 섹슈얼리티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자위를 한 사람부터, 퀴어/호모섹슈얼리티, 성노동자 여성,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은 여성, 마녀로 지목된 여성 등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받았고, 구금되었다. 혹은 카미유 클로델이나 나혜석처럼 재능이 너무 뛰어나 남성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은, 즉 남성 권력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진 이들이 구금되기도 했다.   

 

이 이미지는 영화 <체인질링>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크리스틴 콜린스는 아이가 유괴되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경찰은 극적으로 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되돌아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콜린스는 경찰 수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경찰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 공공에의 위협이란 명목으로 콜린스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이미지 출처:
http://wolfpack.tistory.com/entry/%EC%B2%B4%EC%9D%B8%EC%A7%88%EB%A7%81 2010.11.01. 접근

 

정신병원에 갇힌 이상 출감하기란 쉽지 않다. 위의 동영상에도 잘 나와 있듯, 강력한 저항은 난폭한 행동이자 사회에 위협과 불안을 줄 수 있는 폭력 성향으로, 사색은 멍한 상태로 취급되었다. 자신이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입원을 하는 순간, 퇴원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물론 퇴원하는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유순한 몸으로 의료 권력이 주장하는 규범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하면 된다. 19세기 정신병원은 유순한 몸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쓰기도 했다.
 
베들럼에서 대를 이어 근무했던 먼로(Dr. Monro)라는 의사가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표했는데, 그 방법이란 1년에 한 번, 이른 봄에 행하는 ‘사혈’이었다. 사혈 치료 뒤에는 1주일에 한 번씩 구토나 설사를 유발하는 약을 먹이기도 했는데, 빈혈과 공복으로 환자를 허약하게 만들어 좀 더 쉽게 다루기 위한 방편이었다. (난동을 부리는 환자를 체벌하기 위한 목욕탕도 있었다고 한다.)(나카노, 192)
 
모든 병원에서 이와 같은 처방(!)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많은 병원이 구속복을 입힌다거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 구금을 하거나, 물세례, 채찍질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고문 방법으로 입원자를 길들였다. 의사가 관리하기 쉬운 몸,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 충분히 유순한 몸이 될 때에야 비로소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스트가 묘사한 것처럼, 유순한 몸이 됐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신병원이 만든 유순한 몸은 유순하되 규범적이지 않은 몸이었다.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다. 퇴원을 하더라도 특정 코드를 통해 정신병원 경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든 것이다. 범죄자가 구속되면 몸에 문신을 새겨 공공시설에서 옷을 벗는 순간 누구나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이나 퀴어에게 낙인을 찍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순하되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의 유순함을 만드는 것, 이것이 정신병원을 비롯한 구금시설이 만드는 몸이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13계단』.
이 소설의 몇몇 등장인물은 손목시계가 수갑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시계를 차지 않는다. 이 습관은 타인의 구금 경력을 파악하는 단서로 쓰인다.
이미지 출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8657

 

물론 이 시대, 병원에서 살아 나간 사람이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적어도 “18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병원에서 살아나간 사람들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병원에 죽으려고 들어갔”다는 점에서 “병원은 사실상 ‘영안실’”이었다(푸코, 282). 의료 기술이 그나마 발달했다는 19세기도 마찬가지다. 마취술과 해부학이 발달했어도 그것은 늘 죽음을 동반했다. 사실 의료 실천은 생명을 살리는 실천을 지향함에도 늘 죽이는 실천이었고, 이것은 의학의 역사에서 익숙한 현상이다. 많은 치료 기술은 그것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죽음을 양산했다. 물론 그렇게 죽은 이의 상당수는 빈민층에 속하거나 범죄자였거나 정신병원에 구금된 이들이었다. 1832년 영국은 “해부학 법”을 만들었는데, 빈민층이 이 법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했다면 의사는 동의한 이의 시체를 해부학 실습용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Doyle, 24). 물론 당시 빈민층 중에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서류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서명했다. 그리고 이 법은 외과 의학과 해부학 기술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학은 언제나 지식의 발달이라는 명목으로 지배 계급을 제외한 이들의 목숨을 실험 대상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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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계단 책 주문했어요. 함 읽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