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의 여부는 표현의 정도와 공개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권김현영에 의하면, 1950~60년대에 여성의 3인칭을 무엇으로 부를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중 ‘그녀’라는 말이 음란하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저잣거리에 주인 없이 여자가 혼자 서 있는 것이 상상되는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한다. ‘동성애=음란’의 공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웹사이트 ‘엑스존’이나 영화 <친구 사이?> 그리고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와 같은 동성애 표현물에 대한 음란 시비 역시 성적인 표현의 수위가 높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동성애자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그러니까 정신병자거나 남의 돈을 갈취하는 악당이 아닌 평범한 이웃과 가족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음란하다. 나쁜 존재를 미화하고, 청소년들이 보고 따라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음란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성애를 무조건 음란하다고 보는 주장은 오히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쉽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음란하지 않다는 반박은 음란하지 않은 동성애자의 존재는 증명 가능하나, 한편으로 어쨌든 진짜 ‘음란한 동성애자’는 따로 있다는 여지를 슬쩍 남겨두게 된다. 실제로 이성애의 음란성과 같은 수준의 잣대를 적용하라는 동등함을 주장하게 되면서 대체 음란이란 무엇인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인지, 음란은 무조건 나쁜 것인지 등등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를 놓치기 쉬워진다.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곧 공평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실제로 ‘음란한’ 주체가 아니라 음란을 상상하는 주체가 훨씬 더 강자이기 마련이고, 상상하는 주체에 의해 무엇이 음란인지도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성애자는 음란하지 않다거나 혹은 동성애라는 행위를 변태적 성행위의 목록에서 빼라는 방식의 운동이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다. 이를 경고하는 대표적인 학자들이 데이비드 벨(David Bell)과 존 비니(Jon Binnle)다. 그들은 2000년도에 출간한 자신들의 저서를 통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동등이 자연스럽게 ‘정상’을 지향하게 되고 동성애자들이 정상적인 시민이 된다는 명목하에 이성애 중심의 규범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을 지적한다. 가령 ‘가족을 선택할 권리’라는 미명하에 동성애자도 결혼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사회적 다양성이 더욱 존중되는 것인 양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결혼한다고 해도 가족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 기반이며 바로 그 가족이 커플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한 사적화된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그 체계는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이런 협상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선량한 게이 시민(good gay citizen)’으로 길들인다는 것이다. 선량한 게이 시민이란, 이성애 규범적인 모델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동성애자를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나쁜 게이 시민(bad gay citizen)은 이에 동참할 의지나 능력이 없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 되고, 이들이 비시민의 영역 안에 놓이는 것도 당연시된다.
선량한 게이 시민이란 없다
사실 성적시민권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닌데, 서동진이 쓴 몇 편의 글과 레즈비언 시민권에 대한 연구발표회 자료집이 나와 있고,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에서 계속 활동의 화두로 가져가고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모두 입을 모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서구에서 진척된 이런 논의들을 참고하여 한국에서도 동성애자를 탈성애화하여 ‘선량한 게이 시민’으로 만들고자 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산지석이 나쁘지는 않지만, 근래의 논의를 보면 너무 앞서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도 든다. 특히 최근의 서동진의 글이 그러한데 그는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이미 ‘좋은 게이 시민 되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지레 예단하고 있다. 그는 ‘좋은 게이 시민 되기’라는 기획을 경계하며 서구의 보수화된 성정치 운동이 한국에도 이식되었다는 단언 아래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성적 위계로 볼 때 가장 열등한 성적 소수자는 ‘중년 노동자 계급 이성애자 남성’처럼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라며 “다양한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예의’와 ‘미덕’으로 간주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에서 게이는 이미 좋은 친구이자 시민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며 조롱을 던진다.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게이들이 실제로 있는가라는 논의는 둘째 치더라도 융숭한 대접이 있다 해도 ‘시민’으로서 받는 것인지 또한 좀 더 치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특히 레즈비언의 현실은 간과되어 있다. 일반적 논의에서 게이는 남녀 동성애자 모두를 총칭하는 단어임에도, 더 이상 남성 동성애자 중심의 논의를 지겹게 반복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서구의 논의를 소개하고 그에 근거한 비판들을 살펴보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함께 이성애자와 동등한 동성애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성정치가 부상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국가와 사회의 규제와 통치에서 벗어나 자율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다룬다. 정상적 시민으로 인정받으려는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하위문화를 스스로 부정하고 건전한 커뮤니티로 가꾸면서 동성 결혼을 평등권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이성애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동성애자들의 결혼은 이성애 중심적인 결혼을 오히려 강화시켜줄 것이며, 동성애자는 저항적 주체가 아닌 기존 사회의 순응자가 될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물론 한국도 신자유주의의 예외는 아니니 이에 어느 정도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국에서의 성적시민권 논의가 그렇게 노파심과 비아냥거림으로 가득 차도 될 것인가.
가령 50~60년대에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라고 밝혀지면 직장에서 혹은 군대에서 그대로 쫓겨나는 망신을 당해야 했고, 게이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경찰들의 습격을 받으면 그대로 잡혀 다음 날 신문에 이름이 공개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심지어 남성 간의 섹스를 금지하는 법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도 2003년에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불법적 존재에서 합법적 존재로의 전환이 운동의 중요 과제였던 서구와 달리 유난히 동성 친밀성이 강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동성 간의 성애를 오히려 우정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한국에서, 그리고 가족 관계가 사회적 위치와 너무나도 밀접한 한국에서 동성애자가 사회적으로 ‘시민권’을 획득한다는 것이 같은 수순을 밟게 될까. 오히려 이런 시각이 한국 동성애자들의 일상을 하찮게 만들어버리고 억압도 어설프게 중화시켜버릴 가능성이 있지는 않은가.
계급 문제와 정체성 문제가 헷갈리면 소수자를 단일화시킬 우려가 있다. 결혼, 가족, 군대, 시장, 세계화, 도시 공간, 그리고 친밀한 관계 등 모든 것이 역시 성적시민권과 관련된다. 이 모든 영역에서 동성애자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 벨과 비니는 동등한 권리 요구를 모두 동화주의 전략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구분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 요구는 현재의 차별에 대한 저항의 계기를 표현하는 방식일 뿐, 어차피 선량하고 좋은 이성애자 시민이란 개념도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 역시 선량하고 좋은 게이 시민이 될 수 없다. 일등시민으로 지내다 삐끗 잘못 헛디뎌 이등 시민으로, 비시민으로, 나쁜 시민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애, 동성애를 조장하다
아무리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고 문화적 이해가 넓어진다고 해도, 다시 말해 좋은 게이 시민이라는 환상이 유포된다고 해도 다른 시민을 나쁘게 ‘조장’할 의심을 받는 한 동성애자는 ‘시민’이 될 수는 없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바로 이 ‘조장 가능성’인데―동성애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조차 끝까지 못미더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동성애는 조장하거나 조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방영에 항의해 두 번이나 신문에 방송 중단을 요구했던 광고의 요지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비단 청소년 보호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전국의 구금시설에 수감된 이들이 보는 방송은 ‘보라미 방송’이라 하여 법무부 교정방송센터에서 관리하고 있다. 보라미 방송은 4월부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녹화하여 제공했으나, 8월 9일에 높아진 동성애 비중이 교화방송의 목적에 맞지 않아 중간 종영한다는 자막과 함께 방송을 중단했다. 지난 10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인권 단체들이 질의서를 보내자 법무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이성과 차단되어 동성을 집단으로 구금하고 있는 교정시설의 특수성에 비춰볼 때 수용질서 유지에 장애가 되며, 음란 등 미풍양속에 반한다고 판단되어 형집행법 시행규칙 제40조 제3항을 근거로 이를 중단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드라마에서 이성끼리는 흔히 나누는 키스신 하나도 동성 간에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임에도 미풍양속에 반하고 수용질서 유지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동성애가 매우 강력한 ‘조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나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구금시설 바깥의 사회가 이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는 건 이성 혼합 공간이기에 가능하다는 말일까. 금지의 사유로 내세운 ‘동성 집단 시설’이라는 특수성은 향후 동성애 관련 문화에 대한 검열 조치들을 군대와 학교 등 동성 집단 사회 전체에 적용시키는 잣대가 되지는 않을까. 공공시설에서 동성애 관련 드라마의 상영 중단은 우리의 공간이 얼마나 이성애 중심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제 공간의 성적시민권에 대한 논의와 분석으로 넘어가보자.
*
참고문헌
Bell·David·Binnie·JON, The Sexual Citizen: Queer Politics and Beyon, London and New York: Polity Press, 2000.
서동진, “좋은 게이 시민이 되어버린 동성애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제22호, 2010년 7월 1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