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권은 국민에게서, 국민은 이성애에서

 

레즈비언은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2008년의 여름, 거리가 온통 촛불로 뜨거웠을 때 나도 그곳에 있었다. 1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그래서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정치인으로서 국회의원에 도전했던 최현숙 선거운동본부 사람들과 함께 동성애자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아래에 서 있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거대 야당의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꼴이 너무 기가 막혀 몇 년 전에도 똑같이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었지만, 그날의 기분은 좀 달랐다. 눈앞을 거대하게 가로막은 ‘명박 산성’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주변의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외치던 구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그 외침.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에 대한 호령은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국가와 국민(시민)이 맺은 계약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듯했다. 이전의 집회에서 늘 사과하라, 철회하라, 중단하라 등의 끝말만 명령체일뿐, 내용상으론 오히려 읍소를 해야 했었다면, 지금은 국민이라는 자격에 기반을 둔 채 집합적 권리를 드러내고, 위정자의 문제를 지적하며, 정책의 시정을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구호가 반복될수록 나의 목소리는 도리어 점점 작아졌다. 문득 혼란스러움이 덮쳤다. 나는 정말 이 공간에서 국민인가. 얼마 전 선거를 치르면서 숱하게 받았던 ‘레즈비언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그 의심 가득했던 질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해석될 수 있을까. 광우병 우려가 있는 쇠고기 수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정부에 항의할 때는 정치적 주체로서 국민임이 틀림없으면서도,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내세워지면 갑자기 탈정치화 되고 마는 것일까.  

서울 종로구의 출마자였던 최현숙 후보의 선거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후보가 소속된 당의 자유게시판에 넘쳐나던 우려들, 또한 지역구 당원들이 내놓던 선거 전략들,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유권자들의 반응에서 성 정체성에 관한 이슈가 선거 초반에 무명의 정치인에게 필요한 시선끌기용 이상의 것은 결코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동성애자도 끌어안는 진보정당의 이미지는 좋다. 하지만 동성애자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은 곤란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동성애자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좋다. 하지만 지역구 내 다수를 차지하는 주민들의 이익도 잘 챙길 통 큰 정치인이란 이미지도 가져야 한다는 식이었다. 가장 대처하기 어려웠던 입장은 레즈비언인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정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언뜻 이 말은 레즈비언이어도 괜찮다는 관용의 태도 같지만, 실상은 레즈비언이란 정체성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는 의미였다. 섹슈얼리티는 후보자의 사생활이지 정치적 주제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상대편 남성 후보들이 “가족을 돌보는 가장의 마음으로 지역구를 챙기겠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쉽게 ‘모두를 위한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역구 선거인만큼 주민들이 낯설어하는 레즈비언 후보가 아니라 유일한 여성 후보임을 부각해라, 유일한 진보 진영 후보임을 내세워라 등의 주문도 있었다. 동성애자임이 드러날수록 후보가 얼마나 용기 있고 당당한 인물인지는 강조되지만, (아마도 이성애자일) 다수의 유권자들을 대변하고 대표할 정치적 대리자로서는 멀어질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정체성이란 그간 살아온 삶의 조각이련만, 불과 몇 달 앞서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대기업의 사장을 몇 년 동안 역임했다는 경험이 경제를 살릴 능력으로 해석되는 것과는 달랐다.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의 궤적은 억압과 차별받는 약자로서 재현되지 않는 한 별다른 사회적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하기 어렵다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각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잊어버린 것이 있지 않은가.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고 해서 특별히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대표하거나 대변해왔던 것도 아니었음을.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될 수도 없고, 마땅한 정치적 대리자도 가질 수 없는 모순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음을 이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시민권에 대한 다른 상상

시민이라고 하면 도시 거주자란 의미가 먼저 떠오르지만, 여기서 시민은 국민과 유사하다. 시민권은 곧 성원권(membership)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는 일정한 영토와 그곳에 등록된 사람들로 그 구성 요소를 삼는다. 모든 시민은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 평등한 개인임을 전제하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시민권이 중요한 결정적 이유는 그것이 분배, 즉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분배’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민과 비시민의 구별은 분배의 기준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시민권의 역사는 끊임없는 포함과 배제의 투쟁 과정이기도 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담았지만, 프랑스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1948년에 남녀 평등한 참정권을 인정한 한국과 몇 년 차이가 나지 않는 1944년이다. 지독한 인종차별 국가였던 미국이 남북 전쟁을 통해 흑인 해방을 선언하고, 1870년에 흑인 남성들에게 형식적이나마 투표권을 인정한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백인 여성들의 참정권이 그보다 50년이나 늦은 1920년도에 법으로 제정된 것은 놀랍다. 물론 진정한 시민권 쟁취를 위한 흑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1960년대에야 어느 정도 결실을 맛보지만.

이쯤에서 문득 대한민국 시민의 자격 요건에 반드시 이성애자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를 심사하거나 증명서를 발급받아 오라는 절차 따위는 없다. 단지 부모가 한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 영토 내에서 태어났다면, 시민권 획득은 어렵지 않다. 동성애자 시민을 환영하지도 않으면서 특별히 까다로운 선행 규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애당초 동성애자의 존재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동성애자가 있을 줄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도 아닐 터이다. 만약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면, 이미 존재가 드러난 이상 뒤늦게라도 색출하거나 불법화했을 테니. 그렇다면 성별 차이나 인종의 차이, 출신 국가의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은 다른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따져보자면 이는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다시 말해,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인식의 부인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를 부인하는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이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바로 아프리카 우간다와 같은 경우다. 우간다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자국에는 동성애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천명하면서도 또한 동성 간의 성행위를 하면 최고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외국에서 빗발치는 인권 침해라는 비난은 ‘내정 간섭’이라고 거부하고, 이것이 우간다의 민족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또 반대로 가장 교묘한 사례라면, 앞서 예를 들었던 미국 군대의 ‘묻지도 말고 답하지도 말라’는 정책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세 가지 사례를 통해 그 복잡성을 들여다보자. 첫 번째 사례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본부 조직위원회가 발간하는 <민족의 진로> 2007년 3월호에 실린 “실용주의의 해약에 대하여”라는 기사다. 이 글은 “외국인노동자 문제, 국제결혼, 영어만능적 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등을 언급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비롯되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진단해 큰 논란이 되었다. 즉 범민련은 민족성 안에 동성애자라는 존재는 없다고 전제한다. 지금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외부에서 수입된 가짜 국민인 셈이다.

두 번째는 2010년 8월, 고국으로 돌아가면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이주노동자가 제출한 난민 신청을 서울고등법원에서 인정한 사례다. 법무부에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강제 출국을 시키려 했으나, 사법부는 동성애 처벌에 대한 공포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 정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란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외국인 동성애자의 난민 신청을 인정함으로써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인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우는 효과가 기대된다.

마지막 세 번째 사례는 차별금지법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특권과 차별을 없애는 실질적 법제도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출발했던 차별금지법은 입법 예고 과정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일부 종교인의 반대에 부딪치자 성적 지향을 비롯한 7개 항목을 차별 금지 사유에서 삭제했다. 법무부는 차별조장법이 되어버렸다는 비난 속에서도 법 제정을 강행했으나, 17대 국회의 회기 만료로 법안은 자동 폐기되었다. 이 지점에서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법무부가 동성애자에 대한 명백한 혐오를 드러내는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민들의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법무부는 뺀 것이 아니라 ‘기타 등등’으로 더욱 폭넓게 포함했다고 주장했지만, 입법 예고 당시의 법안이 거의 5년 가까이 준비하고 다듬어온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동성애자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는 것까지 처벌하는 우간다 정책도 아니고, 무엇이든 다 해도 좋지만 과시하지만 말라는 벽장 정책도 아니다. 이는 학교와 교회, 직장, 거리 등 공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민과 시민 사이의 차별에는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사 표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시민권의 자유로운 행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모든 시민이 똑같은 시민권을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인식의 범위가 어디까지일 것인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다투게 될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는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와 포함의 잣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먼저 시민권의 외부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시민권이 확장되려면 뻗어나갈 바깥부터 있어야 가능할 테니 말이다. 이제 질문은 동성애자로서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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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김현영,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겨레21>, 제702호, 2008년 3월 20일.
진보적 성정치 연구모임, <진보적 성정치―성적 시민권과 ‘퀴어’운동>, 진보적 성정치 연구모임 워크숍, 2007.
이재영, “동성애 바라보는 민족사적 변태?”, <시민사회신문>, 제8호, 18면, 2007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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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있어요 :)

이상중 2010-11-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별 금지법' 반드시 통과되어야 하는 법안임에도. 종교인들의 반대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변해버렸죠. 종교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수가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 가운데서도 이 법안을 온전히 통과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기억해주세요ㅋ

비로그인 2011-05-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매매,성폭력,성추행,성상납등의 성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은 우리사회의 이성애자 지도층에 넘쳐납니다. 동성애자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면 시민이요, 군복무를 마쳤다면 국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