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어느 커밍아웃을 위한 변명

지상파 방송 못지않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에서 한 명의 도전자가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자신의 나이와 이름을 밝힌 뒤 곧바로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라고 말했고 동성애도 똑같은 사랑일 뿐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가 합격했으면 사태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탈락을 했고 인터넷엔 그의 커밍아웃에 대한 온갖 반응으로 넘쳐났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 괜찮을지 걱정된다는 격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로 왜 오디션 자리에서 뜬금없이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냐, 동정표를 노린 것이냐, 관심을 끌고 싶냐 등의 비아냥거림이 많았다. 격려든 비난이든 그의 커밍아웃의 초점은 ‘굳이 먼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일을 말했다’는 것에 있었고, 자연스레 그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답한 입방아가 그 뒤를 따랐다.

솔직히 나 역시도 처음엔 그의 커밍아웃이 참으로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는 왜 커밍아웃을 한 걸까 궁금해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슈퍼스타 K>에 동성애자도 나온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만의 비밀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방송에 출연한 셈이 된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고 밝혀내려 한 사람도 없는데 ‘숨긴다’는 것이 성립될까? 아무래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흔하디흔한 이성애자로 별 의심 없이 간주되지 않았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쉽게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밝힌 것이라면 그런 ‘정확한’ 자기소개가 ‘굳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내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 일간지의 칼럼니스트는 <슈퍼스타 K>의 진짜 미덕은 긴장이 감도는 경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시대의 결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출연자들의 감동적인 여러 뒷이야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는 출연자들이 부모님 생존 여부부터 학창 시절 왕따였는지는 물론이고 같은 출연자들 중에서 누굴 좋아하고 있는지까지 모두 다 고백하는 장면을 매주 지켜보고 있다. 그러므로 <슈퍼스타 K> 도전자의 커밍아웃에 대한 비난은 부당하다. 어쩌면 그가 매우 사적인 섹슈얼리티를 폭로한 것이므로 가족 관계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남자 도전자가 여자 친구에게 우승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함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이성애적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해도, 이상형은 김태희라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과시한다 해도 결코 ‘뜬금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직접 말하기 전까지 그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선언도 없었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성애적인 욕망을 드러내면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를 이성애자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 역시 그렇게 간주될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성애자의 이성애자로서의 커밍아웃은 불필요하며 동시에 불가능하다.  


 

‘아무도 모를 일’이란 것의 정체

어느 도전자의 커밍아웃 소동을 되짚어보자. 사람들은 ‘네가 게이인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라며 지적했지만, 핵심은 동성애자라고 불쑥 ‘밝힌’ 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동성애’라는 특정 정체성이 밝혀진 데 있다. 또한 그의 고백이 충격적이었던 것도 그의 발언 자체가 지닌 폭발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좁디좁은 상상력의 한계 때문임도 자인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옆자리에 있는 친구가 갑자기 진지하게 “있잖아. 나 이성애자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결에 “누가 그걸 몰라?”라고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비해 동성애자는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 정말 맞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일이기에 마침내 발화(發話)는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몰랐던 것을 알고 좋아하기는커녕 기겁을 한다면 그건 아마도 그 정보가 차라리 몰랐으면,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의 거부감은 다시 말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며 궁금하지 않은 것을 알려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어쩌면 그 도전자는 예의바르게 허락부터 구해야 했을지 모른다. “제가 저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말해도 될까요?”라고…….

곱씹어보면 ‘아무도 모를 일’이란 참 무서운 말이다. 미국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서 폐지하겠다고 약속한 정책으로 미국 군대 내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ADT: Don't Ask Don't Tell)’라는 법이 있다. 동성애자의 군입대와 군복무를 허용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격렬해지자 당시 클린턴 정부는 이런 기발한(?) 타협안을 선택했다. 즉 동성애자인 것을 묻지도 말고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면 누가 동성애자인지 알 수가 없고, 그렇다면 동성애자의 근무 여부에 대해 논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부대 내의 누가 동성애자인지 대충 눈치로 알 수 있고 사적으로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그것은 절대로 ‘아무도 모를 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확실히 이 정책 이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복을 벗는 일은 감소했다. 이 법은 동성애자의 색출과 퇴출을 금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일부러 드러내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군생활을 원하는 만큼 지속할 수 있다. 그러니 확실히 예전보다 더 안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1993년에 만들어진 이 국방부 지침이 매우 교묘한 차별이자 억압이란 점에서 그동안 이 지침이 헌법 정신을 어기고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소송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가 아니라 ‘묻고 말하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커밍아웃을 할 권리를 달라는 주장이 아니다. (사실 커밍아웃을 할 권리란 말은 참 이상한 말이다.)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군대 생활을 하게 해달라는 주장도 아니다. (이성애자와 동등해지는 것이 고작 동성애자 인생의 최고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스스로를 부인하며 살지 않겠다는 것일 뿐이다. 미군 중위였으나 커밍아웃 후 최근 해임당한 한인 2세 댄 최(Dan Choi)는 자신의 행동을 ‘양심을 지키고 싶어서’라고 설명한다. 그러니 작금의 현실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동성애자가 군인이 될 수는 있지만 군인이 동성애자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슈퍼스타 K>의 커밍아웃을 떠올려본다. 그의 행동이 좀 엉뚱해 보일지는 몰라도 ‘말하기’를 택한 그의 행동은 분명 의미가 있다. 아무도 묻지 않는 건 아무도 듣지 않으려는 것이기에 그의 커밍아웃은 (그리고 본질적 속성상 모든 커밍아웃은) 저항적 행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말을 못하고 안하는 것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못 듣고 안 들으려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바로 그 말을 꺼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권력(power)은 고집불통 독불장군이 아니라 오히려 최첨단 유행을 이끄는 디자이너에 가깝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차별의 논리를, 억압의 기제를 매우 유연하게 바꿔나간다. 그것이 너무 딱딱해서 짓눌려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말캉해서 질식사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10년, 20년과 비교한다면 많이 달라지긴 했다. 이제 커밍아웃한 연예인도 있고 게이 커플이 등장하는 가족드라마가 방송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현재 동성애자는 한국 사회의 시민인가? 섹슈얼리티는 시민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한 명의 동성애자가 한 명의 ‘시민’으로 살 수는 있지만, 한 명의 시민이 한 명의 ‘동성애자’로 살 수 있는가?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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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몽 2010-10-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희망 2010-10-1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성애자로 살 권리... 미처 생각해보지 못햇는데 재미있네요^^

한채윤 2010-10-20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답글을 다는 것이 좋은건지...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댓글을 달아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라.. 감사의 마음은 표현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부족함이 있겠지만 계속 재미있게 봐주세요.

비로그인 2011-05-2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자신의 일과 남의 일을 구분짓고 사는데 누구라도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타인의 제재를 원하지 않는다. 부부간의 어떤 형태라도... 시민으로 살 권리는 출생에 있지 성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