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연재를 마치며

 

지난여름 집결지의 언니들과 바다로 여름휴가를 떠났었다. 트랜스젠더 언니들을 포함한 12명의 여자들의 요란스러운 복장과 헤어스타일, 말투, 행동거지는 휴가지 휴양객들의 시선과 호기심을 몰고 다니기에 충분했다. 해수욕을 즐기고 수박을 잘라 먹으면서 뜨거운 낮을 보내고 한층 차분해진 밤을 맞이했다. 당시 성노동자 권리 운동을 하던 친구도 함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총명한 언니들 몇 명에게 성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다. 성노동자 권리 운동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 운동이 어떤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자 듣고 있던 한 언니가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리곤 이내 자신은 미국에 남편이 있으며 지금 그 남편을 만나러 미국에 가기 위해 ‘이 곳’에서 잠깐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당시에 언니는 왜 그렇게 뜬금없이 손사래를 친 것일까? 사실 오래 전 성노동, 성노동자 정치학에 나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역사를 긍정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들이 성노동을 수행하는 성노동자라고 막연하게 정의하며 일상을 영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여름휴가 날 밤의 에피소드 덕분에 나는 이들을 성노동자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연재 글은 이날부터 이어진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의 이 글이 실험적으로 아이디어를 던진다는 의미에서 불안한 시론이 되기를 바란다.

먼저 ‘노동자’, ‘성노동자’라는 말은 이 언니를 의식 고양할 수 있는 지칭이 아니었다. 언니는 ‘성노동자’라는 지시어를 ‘면전에서’ 듣고 자신의 상태를 낯선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창녀’, ‘갈보’라는 모욕적인 지칭은 당연하거니와, 심지어 ‘성매매 여성’이라는 지칭도 성판매 여성들 앞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타인에 대한 예의이다. 한 번도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적 없는 이들이 직업 자체를 근거로 이들을 ‘성노동자’라고 지칭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어디론가 이동해서 다른 조건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현재의 ‘일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이렇게 무례한 지칭을 퍼뜨려도 되는 것일까? 물론 ‘일시적’ 권리라는 말이 얼마나 요원한지 우리는 집결지의 수많은 나이 많은 언니들을 만나면서 진작 간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아직도 ‘멋진 왕자님 (사실은 돈 많은 할배)’을 만나 호강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이들이 누구인지 지칭하는 일이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이들이 특정 제도의 대상이었거나 대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민 사회의 폭이 두텁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운동은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강력한 국가 권력에 ‘가해자’들을 처벌해줄 것을 호소하는 데 집중해 왔다. 아직도 많은 여성 단체의 활동에서 ‘무슨 무슨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김은실(2006: 28-29)은 한국의 사회 운동, 여성 운동의 전반적인 문제로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 대중 일반과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정부 통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성들의, 혹은 성적 마이너리티들의 집단적 전락의 전략이라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을 향한 낙인을 거두라면서 ‘나’를 향한 낙인에는 왜 문제제기하지 않는가?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동생이 일을 그만두고 직업 교육이라도 받고 싶어 한다는, 한 언니의 SOS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성매매로 인한 피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성매매 피해가 입증되어야만, 성매매 피해 여성이어야만, 직업 교육에 대한 지원이 가능한 것일까? 결국엔 사회 영역의 문제이고 복지 국가로서의 국가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야, 조사를 해서 결과가 ‘합당해야’, 온정주의적인 손길을 내밀겠다는 국가의 태도는 내가 누구인지 조급하게 설명하도록 재촉하도록 하고, 결국 사회를 경직되게 만든다.

이런 결과로 여성 노동의 속성을 문제시하는 느긋한 움직임보다는 당장의 처벌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운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이들이 사실은 누구, 어떤 사람’이라는, 일시적인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 뒤따른다. 조급함만 거두어들인다면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을 감정노동자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을 성노동자라고 무리수를 두어 명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들이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서도 좀처럼 계급 이동을 하기 힘든 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 보자. 어쩌면 문제는 노동이 아니라 좀처럼 자기 경영이 불가능한 세상이 문제인 것 같다.

왜 언니들은 돈, 돈, 돈, 돈하면서 기둥서방과의 로맨스에 목을 매고 번 돈을 다 이들에게 갖다 바치는 것일까? 언니들의 삶의 조건에 도움이 되지 않을, 오히려 당장 해악이 될 발전과 성장이라는 ‘당파적’ 키워드에 홀려 보수 정권에 표를 몰아주는 것일까? 이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어쩌면 주목받지 않은 채 현재의 시간을 빨리 지나 ‘목표’의 상태, ‘꿈’ 상태로 미끄러지듯 진입할 수 있는 성공의 속도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모른 척 해주기, 하지만 지켜보기’ 전략인 것 같다.

조바심 내며 이들을 누구라 명명하지 말고, 사회의 곪은 부분에 대해 관찰하고 연대해서 공론화를 시작하자. 그리고 행여 생길 위험한 일들을 대비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주자. 이런 일들에는 분명 예산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조급하게 이들이 누구라고, 어떤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라고 성급하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겠지만, 운동 단체가 현장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담론을 생산하고 대중 운동을 하는 것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시민 사회 영역의 여유가 필요하다. 국가로부터 예산을 할당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안정적인 후원만 있다면, 조급하고 거친 언어로 세상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도 덜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 단체에서 언니들과 한숨 돌리면서 직업 선택권, 거주권에 대한 이야기도 해 보고, 우리 사회의 트랜스젠더 포비아를 효과적으로 비웃는 방법도 구상해볼 수 있길 바란다.

물론 삶이 고단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담론은 조급하게 생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특별법들이 만들어지도록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쓴 것이리라. 특히 성판매 여성들은 사회의 보이지 않던 영역에 있던 사람들이어서 이들에게 예산이 편성되고 많은 여성 단체들이 현장에 진입하게 되면서 기가 막힌 장면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예산의 효과는 꽤 놀라운 편이었다. 
 


2006년 9월 새로운 성매매 집결지에서의 활동 시작은 성매매 피해 상담소의 업무를 그대로 가져와 의료지원과 서비스를 제공한 일이었다. 이곳의 여성들이 온정주의적이고 시혜적인 법의 성격을 왜 모르겠는가? 사회복지 서비스의 수혜를 받으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불쌍한 인간이 되었구나. 나락으로 떨어졌구나’ 좌절하는 언니들이 있었다. 물론 자신과 연결된 사회의 끈을 확인하고 조금 안심하는 언니들도 있었다. 자신이 사회에서 완전히 내박차진 것은 아니란 종류의 확인을 거듭한 언니들은 ‘나보다 더 못 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부모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애들’을 도울 방법은 없는지 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예산의 효과가 굳이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에게만 지원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목표화이고, 낙인화, 계층화이다. 어쩌면 ‘어떤 국가’에서 살고 싶은지 사회 성원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때인지 모른다. 내가 사는 세상이 바뀌어야 이들이 사는 세상이 바뀌고 이들이 사는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사는 세상도 바뀔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이 사회에 퍼져 있는가?  



 

참고문헌  


김은실, “지구화 시대 한국 사회 성문화와 성 연구 방법”,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 동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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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2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한집안의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지기 위한 수단으로 순진한 누나들이 성노동자가 되었다해서 나름대로 이해도 받았지만 요즘은 왜 성노동자가 되었는지 그 이유가 일반인들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