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노동자 정체성에 대한 회의

 

6-2. 탈구 위치, 이동의 욕망

   
 

생각하건대 기지촌이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떠 있는 섬과도 같다. 뭍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섬, 섬이 섬일 뿐이듯 이곳 여자들은 양갈보일 뿐이다. 미군들의 일시적인 <하니>이면서 조국에서도 외면당하고 있으므로 그 이름으로만 불린다.
미군이 <의무가 아닌 권리>로서 주둔하므로 기지촌이란 섬은 순수한 한국이 아니다. 그러다가 철군이란 정치 해일이 밀려오면 순식간에 불모지가 되는 섬. 내가 처음 발을 디뎠던 운천이 그랬다. 미군철수 제1호 캠프 카이저가 떠나자 운천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여기저기 휴업 표지가 나붙고 클럽엔 널빤지가 X자로 못질됐다. 몇 백 명의 여자들이 민들레씨처럼 흩어져갔다.
뿌리가 없는 섬이므로 여기 사는 여자들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여자들이 기둥서방을 두거나 미국행을 열망하는 것은 섬의 허망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강석경 <낮과 꿈> 중


 


위의 소설 속에서 작가는 기지촌을 한국과 미국 사이에 떠 있는, 뿌리 없는 섬에 비유한다. 기지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 집결지는 관음증의 공간으로, 마치 섬처럼 음시된다. 붉은 불빛으로 상징되는 낯선 외관 때문에 그곳은 ‘일상’에서 떨어져 고립된 것으로 상상된다. 그리고 이 섬에는 뿌리 없는 성판매 여성들이 유배된 채, 타락한 삶 혹은 노예와 같은 삶을 연명하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 성매매 집결지는 섬이 아니다. 집결지 주변에서 성장하거나 살아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매매 집결지는 보통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하는 편이다. 성매매 집결지를 구획하는 경계는 오히려 상상적이고 상징적인 것이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을 가지고, 혹은 목적 없이 드나드는 그곳의 경계에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정도의 푯말이 유일하다. 그곳으로 출퇴근을 사람들도 있으며, 그곳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집결지에만 발이 묶여 있는 여성들이 아니다. 요새 추세가 그렇듯, 이곳의 여성들 역시 여러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학생 신분이기도 하고, 공장 노동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심지어 가상공간으로의 이동도 용이하다. 나도 그렇듯, 이들도 여러 개의 선택 가능한 정체성들을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선택한다.

기지촌은 어떠한가. 한국 기지촌들은 대부분 그 특유의 이국성 덕분에 관광 특구로 지정되어 ‘미국적인’, 때로는 국제적인 음식이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핫’한 플레이스로 회자된다. 기지촌의 성판매 여성들 중에도 특유의 문화와 외국 남성들과의 연애가 재미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이 동네를 드나들었다는 유입 서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소비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화폐 권력으로 계급을 모방하고 자신을 포장하는 일은 손쉬워졌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언니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하루빨리 이 동네를 뜨면 될 것이다. 여름휴가 때 한 언니가 계곡 물에 손을 씻으면서 “놀러 나왔으니 OO 동네 구정물을 다 씻어 버리고 놀아야지”라고 말한 장면이 기억난다. 언니 말대로라면 돈을 벌어 이 동네를 뜨는 것이 “구정물을 씻어 버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된다. 하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 좁은 한국 사회에서 ‘과거를 씻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은 ‘날강도 심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빨리 이 일 접고 새 삶을 살아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가슴에는 주홍글씨를 달고 사는 언니들의 꿈은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내가 활동하던 동네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몇 언니들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외국으로 데려가 줄 남성을 만나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꼽는 언니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들은 이미 미국, 남미, 유럽 등지로 결혼 이주를 했다. 아직 기지촌에 남은 여성들은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때로는 그것을 자신의 미래라 여기며 자랑스러워한다. 이들은 고된 일상을 매일 반복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판타지를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결혼 이주 욕망이었다. 언니들은 대부분 미국으로의 결혼 이주를 꿈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미국으로 이동시켜줄 마법 빗자루처럼 ‘다우니, 오스카 메이어 핫도그, 피넛버터, 젤로 푸딩, 원더브라, 블루베리 꿀’로 대표되는 ‘PX 물품들’이 자못 경건하게 소비되는 동네였다. 이 동네에서 미제가 욕망되는 이유는 이곳에서 구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미국 사람, 미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구매력, 파워에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의 브랜드, 즉 그것이 유통되는 미군 부대 혹은 미국이라는 공간성이 부착된 결과이리라. 물론 이러한 결혼 이주의 욕망은 “구정물을 씻어 버리고 싶은” 현실 부정의 욕망이기도 하지만, 이 동네에서 가슴 설레는 로맨스를 가능하도록 하는 현실 지속의 동력이기도 하다. 많은 언니들은 ‘미국 남자의 매너’, 이들의 ‘레이디 퍼스트 정신’에 감동했다고 말한다.    

 

 

 

   
 

이런 계통에 있는 많은 한국 여성이 미국인을 상대하고 싶어 하죠.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 남자들이 다소 폭력적이라 그래요. (중략) 미국 남자들은 다정하면 다정했지 여자를 못살게 굴진 않아요. - 산드라 스터드반트 외, <그들만의 세상>, 253쪽

 
   

  
라셀 파레냐스의 책 <세계화의 하인들>엔 로마와 로스앤젤리스로 이주해서 가사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돈을 벌어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감’은 세계화 속에서 자신들이 물화됨이 끝남을 의미한다. ‘고향’은 이들이 쫓겨난 장소이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불완전한 시민권이라는 탈구 위치를 끝내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저자는 여성 이주 가사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구성되는 탈구 위치(dislocation)-불완전한 시민권, 가족 별거의 고통, 모순적인 계급 이동, 무소속-야말로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이라고 한다. 이때의 탈구 위치는 제자리(location)로 가기 위해 필요한 위치가 아닐 것이다. 그저 탈구된, 어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이주민들은 필리핀 디아스포라 주체로서 상징적인 초국적 에스닉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동네 여성들은 이러한 탈구 위치를 오히려 한국 땅에서 경험한다. ‘좁은’ 한국은 자신이 ‘정숙한 부인’이 될 수 없는 공간이다. 이런 면에서 때로 친구들은 다 떠난 동네에 아직도 남아 있는 자신을 ‘루저’로 설명하기도 하고, 현재의 한국에서의 시간은 그저 미국에 가서 사는 것을 준비하는, 유예된 시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심지어 외국에 한 번 나가본 적 없는 여성이 “어렸을 때부터 왠지 ‘한국’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한국은 미국 사람과의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일단 안전하게, 미국 사람의 부인의 자격으로 미국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언니들도 많다. 하지만 미군 애인과의 현재의 로맨스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성의 경우도 ‘미국에서 자리 잡을 방법’으로 결혼을 약속한 미군이 아닌, 이미 미국에 정착해 있는 ‘아는 언니’를 꼽는다. “아는 언니가 미국에서 타투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는 언니가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와 같은 보다 현실적인 레퍼런스는 위태로워 보이는 이들의 로맨스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간절하게 공간 이동을 욕망하지만 여전히 성매매 공간과 연결이 되어 있다. 결혼하여 ‘지긋지긋한 이 동네’를 떠난 여성들일지라도,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자신의 친구가 있는 이 동네에 아이를 안고 온다. 이 여성들은 뿌리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 동네 역시 뿌리 없는 섬이 아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NFL 슈퍼볼 MVP로 선정된 한국계 혼혈 흑인 하인즈 워드가 큰 화제가 되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하인즈 워드 덕분에 그의 어머니도 덩달아 유명세를 치렀다. 이 어머니는 동두천에서 일하던 25살 때 주한미군을 만나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지 불과 1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억척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하인드 워드 어머니에 대한 전 국민의 칭송은 가족에 헌신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라면 여성들의 과거는 삭제될 수도 있다는, 관대함의 조건을 알려준다. 기지촌 출신 여성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진입해야 자신을 향한 공적 낙인이 비로소 삭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의 공간인 ‘먼 곳’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안전하게 진입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매매 집결지 ‘여기’, ‘이곳’은 인생에서 명백하게 과도기적 공간이라는 성판매 여성들의 미래 계획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에게 성공은 ‘여기’, ‘이곳’의 흔적을 지우고 떠나야 가능한 일이다. 성매매에서는 대체적으로 젊은 여성의 몸이 주로 욕망되기 때문에 성판매 여성들에게 성노동은 ‘한철 장사’이다. 이들의 노동 시간과 경력은 커리어로서 자원화되지 않는다. ‘밥벌이의 지겨움’ 혹은 고된 삶에 환멸을 느끼고 가정주부 신화나 꽃뱀 신화에 기댄 꿈을 꾸는 것이라 해도 이 공간을 떠나겠다는 ‘성공’ 욕망은 이들이 일상을 설렘으로 대면하도록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과도기적 공간에서의 ‘시간성’ 때문에 이 공간이 그들의 역사에서 의미를 가진 공간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1-02-07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인즈워드의 어머니가 TV화면에 나오신 걸 보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라면 아마 한국에 공식자리에는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것이 아무리 아들이 성공한 환영자리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