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노동자 정체성에 대한 회의

 

6-1. 낙인, 시선 회피의 욕망

법의 영역에서 성노동을 비범죄화하는 것은 성판매 여성들이 갖는 위축감을 완화시켜주고 보다 안전한 노동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성노동을 비범죄화하는 것이 이들 여성들에 대한 낙인까지 제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집결지 내에서 발생하는 큰 문제는 성매매의 합법/불법 여부보다 사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 혐오감, 편견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유영철 사건이나 최근의 청량리 여성 살해 사건의 경우 명백한 이들에 대한 (혹은 여성에 대한) 혐오 범죄이다. 즉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이들을 합법적인 노동자, 노동자 계급으로 명명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성노동 비범죄화를 시도하는 것과 이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명명하는 것에는 당위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

현실의 문제와 관련해 비비아나 젤라이저의 <친밀성의 거래>에 흥미로운 사례가 등장한다. 저자는 경제사회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친밀함의 정도와 경제적 거래, 보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이를 위해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한 경제적 분쟁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례를 분석한다. 사례로 사용되는 친밀한 관계는 ‘산부인과 의사-환자’에서 ‘남자 주인-여자 노예’, ‘남편-아내’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다.

당사자들이 분쟁 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를 살펴보거나, 인간의 친밀함의 정도를 경제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법원의 판결문을 검토하는 것은 흥미롭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 책은 시장 그 자체가 결속을 유지하는 인간관계를 약화시킨다는 광범위한 가정에 도전하며, 시장 거래와 인간적인 관계 간의 상호 작용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대안을 제공한다.”라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사례는 유명한 매춘부 호건을 1944년, 50대 초반 남성 아미티지가 고소한 사례이다. 아미티지는 출장 중 호건을 만났고 그녀는 시애틀에서 아미티지의 ‘현지처’ 역할을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현금과 값비싼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청혼하면서 2000달러짜리 다이아몬드 반지와 호건이 운영할 호텔 구매 계약금 2500달러를 건넸다. 하지만 2개월 뒤 호건은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 아미티지는 법원에 가서 호건이 결혼 약속을 위반했으므로 반지나 계약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고소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증여는 ‘그들이 계획한 결혼에 대한 숙고 과정’에서 주어진 것들이었다. 그는 이전의 구애 과정에서 준 선물에 대한 보상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는 “호건이 숙녀다운 조신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매춘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밝혔다. 반면 호건은 “처음부터 호텔에서 그를 접대했다”며, 그는 결코 청혼한 적이 없고 그의 선물은 오직, 그녀의 사랑(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어졌다고 했다.

법원은 두 가지 이유에서 아미티지의 소송을 기각했다. 첫째, 호건이 ‘유명한’ 매춘부라는 사실을 법원이 확증했고, 둘째, 아미티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법원은 청혼을 받은 적 없다는 호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는 매춘부에게 남자가 청혼할 리 없다는 전제 때문이다. 즉 호건이 승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부인이 될 것이라고 가정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의 친밀한 관계는 누구와도 가능하지만, 제도적 영역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그럴 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내가 일하던 동네에서 제3세계 이주노동자 남성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여성의 소송이 기각된 일이 있다. 여성이 '강간 이후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강간 이후 용서를 구하는 가해 남성이 돈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은 이유'로 제시되었다. 이 여성은 결국 남성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다. 이 판결에는 강간을 당한 '보통의 여자'라면 경찰서나 산부인과로 갔어야 한다는 전제와 '매춘부는 강간당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작용되었을 것이다.  

 

   
 

성노동자라는 이름은 성산업 현장에서 성서비스를 제공해서 소득을 창출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사회적, 계급적 위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생존권으로서의 노동권을 당연히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생존권으로서의 노동권의 요구는 인권적 차원에서의 요구이기도 하다.
- 김경미, “성노동에 관한 이름붙이기와 그 정치성”, <성노동>, 여이연, 2007, 37쪽.

 
   

 

그들의 노동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성노동의 비범죄화와 관련이 있다.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 쉬운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의 노동은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넘어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노동을 비범죄화하는 것은 이들의 인권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지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을 거두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회가 성판매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법의 영역을 통해 전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들의 권리에 대해 고민한다면 이들의 시민, 거주민으로서의 권리를 확장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요구를 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을 성노동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이들은 현실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내가 활동하던 동네의 언니들은 외모가 매우 ‘화려한’ 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 '예쁘다', '여성스럽다'고 통용되는 느낌보다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좀 드세 보이는 이미지였다. 동네 언니들 특유의 스타일이 참 독특하다고 느꼈는데 외국인 남성들을 주로 만나는 언니들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언니들도 자신들과 스타일이 다른 나에 대해 늘 지적하며 옷을 좀 ‘신경 써서’ 입고 다니라고 충고했다. “더 깊게 파진 옷을 입어야 남자들이 좋아한다”, “옷이 너무 수녀복 같다”와 같은 여간해선 듣기 힘든 코멘트를 언니들로부터 듣곤 했다. 젊은 언니들은 까맣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피부를 까맣게 태닝하고, 몸의 커다란 문신이 보이는 깊게 파인 옷을 즐겨 입는 편이었으며, 나이가 많은 언니들 역시 까맣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대 화장 같이 짙은 화장을 즐겨 하는 편이었다.

이처럼 스타일이 ‘튀는’ 언니들과 병원에 갈 때나 택시를 타게 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연극배우, 연예인, 무당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간혹 “술집 나가요?”라고 무례하게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를 넘은 관심에 그냥 “네” 하고 넘길 것도 같은데, 이럴 때 언니들은 꼭 대답을 한다. 특이한 것은 대다수의 언니들이 자신을 “그냥 주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질문을 건넨 사람들은 언니들의 “그냥 주부”라는 대답에 더 증폭된 호기심을 드러내건만, -예를 들어, 남편은 한국 사람이냐, 남편은 무슨 일을 하느냐, 아이는 있느냐는 추가 질문이 이어진다- 언니들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시선을 덜 받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안 그러면 사람들이 무시한다”, “남편 없는 여자인 줄 알고 함부로 대한다”는 귀엣말을 덧붙인다.

언니들은 남들이 자신을 특이한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전략을 많이 사용한다. 물론 ‘패씽(passing)’되길 바라는 이러한 전략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 번 더 시선이 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행동이 그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공손한 태도가 그러하다. 병원 수납창구에서 무뚝뚝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수납원에게 과도할 정도로 공손하게 몸을 낮추는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과장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한 채 택시를 타고는 “그냥 주부”라고 대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언니들의 노동, 삶의 양식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처럼, ‘동네의 땟국물’을 지우고자 하는 일상의 노력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노동 공간, 시간 외에 어떻게 하면 ‘티가 나지 않을까?’ 고민하는 언니들의 노력에 ‘패씽’으로 응답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들 노동의 역사와 속성을 드러내는 작업과 이들을 ‘누구’라고 정의하는 일은 별개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례가 이야기해주듯이 우리 사회에서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자들에 대한 다양한 지시어, 이미지들에는 이미 성적 낙인을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낙인을 극복하는 일은 단순히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자들에 대한 낙인을 거두는 작업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들을 비하하는 말들은 집단으로서의 여자들의 위치, 존재, 삶의 양식을 비하하기 위한 말인데, 이때 여자들은 결과적으로 ‘이들’로 대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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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1-29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의 필요악.모순. 이슬람 남성들은 여성가족의 부정행위는 살인으로 징죄하면서 남자들은 3-4혼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