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노동 비범죄화의 의미

 

다방에서는 ‘뉴 페이스’의 존재가 매상을 좌지우지한다. “OO 다방에 새로 온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 동네 아저씨들은 ‘뉴 페이스’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차 배달을 시킨다. 이 아가씨 덕분에 이 다방은 한동안 매상이 오른다. 물론 이렇게 다방에 새로 온 아가씨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내 ‘오래된 아가씨’가 되어 손님으로부터 “아직도 이 동네에 있냐? 지겹다”는 ‘농담’을 들어야 한다. 다방을 중심으로 남성은 ‘정주자’이면서 고객이고, 여성은 ‘이주자’이면서 서비스 제공자이다. 많은 여성들이 ‘뉴 페이스’가 되기 위해 지역을 자주 옮겨 다닌다.

하지만 내가 활동하던 지역에서 클럽 여성들은 ‘정주자’이고 남성 고객들이 ‘이주자’이다. 미군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남성들이 이용하는 이 지역은 성판매 여성들의 지역 이동이 비교적 적은 동네이다. 동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언니들도,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주했던 언니들도, ‘문제’가 해결되면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 ‘실패’하면 이 동네를 다시 찾아온다. 이 동네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는 언니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좀처럼 동네를 이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면 “한국 남자보다 외국 남자가 낫다”, “나는 외국인 전문이다”, “경기가 죽어 있기는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다” 등의 다양한 답변을 내놓는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동네에서 터를 잡고 일하며 살아온 언니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법적인 존재들’이다. 이전 시대의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나 2004년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에 의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불법적인 존재들’인 이 동네 언니들이 늘 주눅 들어 지내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나 구청의 단속을 피해 온 나름의 노하우도 있고, 심지어 간혹 클럽 골목을 지나가는 젊은 경찰들에게 “놀다 가”라며 농치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동네에서 ‘진짜 꼴통’으로 불리는 한 언니는 동네에 경찰만 들이닥치면 길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오줌을 누면서 나름의 시위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한 동네에서 터를 잡고 삶을 지속하면서, 자신을 ‘불법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와 경찰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이 여성들은 누구인가? 이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2004년에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일부 활동가들은, 성매매는 결국 가부장적 착취의 문제이므로 성매매에 연루된 여성들은 모두 강제적으로 연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캐슬린 배리의 “자유로운 노예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상징적이다. 성매매에 있어 강제냐 자발이냐의 구분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여성들도 결과적으로 가부장적으로 종속된 것이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는 이들의 일상에 너무 큰 편견의 무게를 부여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일상 속 자신의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평가, 보상을 통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다. 이에 대해 타인의 시선이나 자본주의에 너무 매몰되었다고 비판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성판매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을 일상적으로 의미화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만족스러운 보상에 대해서 “좋은 기회였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었다”라며 자신의 역사를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방지법은 성산업에서의 노동을 종결하고자 하는 여성들, ‘배운 게 성매매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다른 노동의 기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산’을 배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강제’라는 (모호하기 때문에 느슨한)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성매매 여성’이라는 경험적이고 일시적인 정체성을 정책 대상 범주로 구성해내서 성적 위계의 하위에 있는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공감의 정서를 작동시켰다. 국가가 이 여성들의 어려움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법은 홍보가 잘되어 있다.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에서 인신매매적인 착취의 고리를 발견할 때, 그 고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공식적으로’ SOS를 칠 수 있다는 정보력을 갖게 되었다. 이것 역시 ‘예산’의 효과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자발적인’ 성노동을 통해 생계를 지속하고 있는 여성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 노동을 피해로 이야기하거나 불법화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들은 피해자가 되거나 불법적인 존재가 되면서 이들이 노동으로 영위해가는 일상과 역사가 손쉽게 ‘가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성매매 집결지로 대표되는, 이들이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공간이 ‘없어져야 할 곳’, ‘정화되어야 할 곳’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이들은 일상에서 안정과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구청, 경찰, 미군 당국 등으로부터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일상과 노동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의존된다. 언제 우연히 돈을 많이 벌게 될지, 언제 우연히 단속을 맞아 그 돈들을 다 날리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이 불법 노동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다툼이 벌어져도 상대방은 “경찰서에 가자”라며 호기를 부린다. 상대가 ‘저런 식으로’ 난동을 부릴 때면 ‘마음이 넓어서 져주는 게 아니라 더 손해 보기 싫어서 져주는 쪽’을 택하게 된다. 실제 성판매 여성들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공간 내에서 남성 손님과 문제가 발생할 때 그것에 직접 맞서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신이 ‘져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 손님을 끌고 경찰서 갔더니 이전의 다른 문제 때문에 오히려 이 여성이 구속되었다는 사례와 함께 “괜한 호기로 인생 그르치지는 말라”는 경고들이 성매매 집결지를 떠돈다. 이런 상황이 일상적이니 이들은 자신의 안전망을 사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계의 모양새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는 기둥서방들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리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성판매 여성들은 섹스 노동을 통해 수입을 벌어들이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입이 그녀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노동은 최소한 이들에게는 당분간은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는, 가치가 있는 노동이다. 이들은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노동 스킬을 더 계발해서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많은 혹은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자 한다. 예를 들어 이들은 단골을 만들어내기 위해 물리적이고 감정적인 노력을 하며, 같은 수입이라면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자 한다.

이태원 클럽의 한 여성은 생리 중인데도 일수 빚을 갚기 위해 섹스 노동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이 ‘성실하다’고 읽어내주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동네의 평판을 무엇보다 신경 쓰는 이 언니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은 성실한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이며 실천이다. 우리가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평판에 신경을 쓰듯, 이 언니 역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좀 쉬면 안 되겠냐는 나의 질문에, 일수 빚은 신용을 담보 삼아 얻어 쓰는 것인데 그렇게 중요한 신용을 잃을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언니의 선택은 자신의 유일한 안전망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이는 차라리 일수업자에게 신용을 잃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일화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높은 이자를 받는 불법 대부업은 신고하면 되지 않아?”라고 묻는다. 법대로라면 일수업자를 대부업법 위반으로 신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동네 언니들에게 부당한 모든 것들에 대응해보겠다는 포부로 법전을 뒤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언니들에게 일수업자를 문제 삼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래도 나 힘들 때 돈 빌려준 사람은 일수업자뿐이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노동 수행에 있어 강제냐 자발이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개인을 둘러싼 여러 조건과 맥락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특정 노동이 여성의 지위를 개선해주었든 아니든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노동을 수행해왔고, 이들의 노동은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추동하는 동력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현재 성판매 여성들 역시 현실에서 성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성매매 현장에서의 통제권을 쥐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의 노동과 이들의 존재를 최소한 불법의 영역으로 내몰지는 말아야 한다. 착취와 폭력, 억압의 고리에는 젠더 권력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폭력에 각을 세우고 이러한 것들에 대항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과, 법의 영역에서 이것들을 단죄하는 것은 다르다. 김은실은 외설성을 검찰에서 조사하는 것이나, 여성의 성과 관련한 문제를 모두 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떤 면에서 유사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1) 현재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 대중 일반과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정부 통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의 성을 법정으로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전에 이 이슈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에 대해 동의하고 다시금 질문하고자 한다. 일단 이들의 노동을 비범죄화하고, 이들의 역사와 일상에 기대어 우리는 어떤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가? 
 


 



1) 김은실, “지구화 시대 한국 사회 성문화와 성 연구 방법”,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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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1-2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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