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노동, 성노동자 담론의 등장

  

   
 

남자는 내게 아프게 해달라고 계속해서 주문했다. 내가 남자에게 상처를 입힐까봐 소심하게 만졌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한 매춘부 인생 첫날부터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고객이 그렇게 원하니 그저 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달라는 대로 다 했고, 남자는 매우 만족해했다. 그 모든 짓을 다 하는 동안 남자는 내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만질 뿐이었다. 모든 것은 다 끝났다. 남자는 몸을 닦고 옷을 하나씩 꼼꼼히 입었다. 그러고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이제 자신은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며, 오늘은 너무 즐거웠고,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 -소니아 로시, <퍼킹 베를린>(프로네시스, 2009), 59

 
   

  

 

  

 

이 글을 쓴 소니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로 유학을 온 학생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갓 부모로부터 독립한 고학생이 구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결국 성매매 업소(마사지 숍)에 취직하게 된다. 취직 첫날 첫 손님을 만난 소니아의 위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성판매 여성들은 성구매 남성들과 성관계를 한다기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밀폐된 방 안에서 손님이 요구하는 다양한 일을 한다. 즉 성매매 현장에서는 여성의 시간, 몸, 성, 목소리, 노동력 등이 남성 구매자의 화폐와 교환된다.     

다방을 통해 커피를 시킨 남성들 중에 간혹 티켓을 끊어 자신의 집을 청소해달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여성의 시간에 가격을 매기는 티켓 거래의 특성상, 다방 종업원들은 제한된 시간 내 ‘무엇이든 다 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요구하고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일 중 주로 성을 이용한 노동, 성노동을 수행한다. 성판매 여성들은 손님이 없는 경우에도 노동을 하는데 가게 청소, 술 재고 파악 같은 일 외에 손님을 호객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다음 호에서 여성 노동의 속성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가사 노동, 감정 노동이란 말이 보편화된 요즘 이들의 노동을 노동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자원에서 소외된 많은 여성들이 성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해왔다. 차별적인 평가가 있어왔지만 이러한 역사를 부정하는 일은 여성들이 삶을 지속해온 생존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다. 타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직시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담론 속에서만 존재하는 박제화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담론과 이들의 삶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생겨서 이들은 점점 더 타자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들의 노동을 가시화하는 일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하면 성노동을 지속하며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노동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공론화하지 못한 채 자신의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티켓 다방은 한국 성산업 내에서 매우 열악한 업종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웬만하면 그곳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티켓 다방에 십대 여성들이 대거 진입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은 청소년 보호 담론에 의해 강하게 보호받으면서 노동 시장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고 있는 열악한 환경에서 환영 받고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1) 이처럼 특정한 안전망이나 법적, 담론적 테두리 아래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지의 문제는 특정 사회에서 누가 주권자, 시민으로 상정되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성매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타자화되어온 성노동을 지속하는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며,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로 개인의 노동이 유연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자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느슨해진 최근에 의아할 정도로 자주 목격된 일이 있다. 바로 이전에 비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보통 성매매 여성이라 부르던 사람들을 성노동자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만난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스트인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진보적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성노동자라는 명명을 사용했다. 이러한 호명은 더 이상 ‘성소수자’들을 ‘호모’라고 지칭하지 않는 것처럼, 세련되고 진보적인 의식과 입장을 반영하는 말이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성매매는 페미니즘 내에서 성적 폭력, 여성 억압의 극단적 형태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여성이 전담해서 수행해온 일들을 노동이라고 정의해온 여성주의 정치학의 맥락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성노동(sex work)을 수행하는 성노동자(sex worker)”2)라는 논의가 등장한다. 이는 이제까지 낙인찍히고 대상화되어온 성매매 여성들을 담론의 주체로 등장시킨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입장의 사람들은 여성을 피해와 보호의 틀에 가두는 전략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매매를 합법적인 직업으로 옹호하고 성매매 여성들의 행위성을 설파한다. 나아가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명명하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같은 맥락에서 반성매매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를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라고 규정해왔던 점에 주목하고 무엇이 인권인지, 인권 개념에 천착하는 논의가 등장한다. 무엇이 불법인지는 법이 규정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인권 침해는 오히려 법에 의해 자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들은 먼저 성노동을 가시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조세핀 호와 같은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성노동자들을 성적 전문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평가하기 위해 이들 여성의 노동 수행 능력을 가시화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한국에서는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된 이후 성노동(자) 담론이 일군의 성판매 여성들과 이를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가시적으로 등장했고, 이로 인해 기존의 반성매매 담론과의 논쟁도 촉발되었다. 법 시행 이후 여의도 등지에서 자신들의 생존권, 노동권을 주장하며 대규모 집회를 가졌던 성판매 여성들의 집단행동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노동자’라는 단어를 강하게 각인시켰던 것 같다. 이들의 입장은 성노동자들의 자율의지를 고려하고, 노동 환경이 더욱 열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구매자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아야 하며, 집결지 재개발 계획을 시정하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성노동자 담론은 성매매 정치학에서의 젠더 라인 외에, 노동자라는 호명을 통해 여기에 존재하는 계급 라인을 드러냈다. 성매매가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과 착취라는 점에는 동의하나 성매매 현장에는 성구매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성판매 여성들에게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노동(자)에 대한 불법화에 저항하고 그에 덧붙은 사회적 낙인을 제거하려는 입장”3)으로도 대변된다. 성노동자론 지지자들은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하는 데 기여한 반성매매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이미 성판매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의 음모가 스며들어 있다며 이러한 용어, 실천들에 전선을 긋고 성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에 대한 강조를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 글을 통해 성노동자라는 호명이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성매매 여성이나 성판매 여성 대신 성노동자라는 호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를 더 보장해줄 수 있는 실천일까? 이들이 노동자라면 이들을 통제하는 권력은 누구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일까? 명예 자본으로서의 가부장적 국가인가? 혹시 이러한 명명이 오히려 무엇을 더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다양하고 복잡한 질문들을 동시에 제시하는 이유는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응당 ‘성노동자’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진 최근의 성매매 정치학, 페미니스트 정치학에서 나타나는 인식의 점핑을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판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라고 자연스럽게 지칭할 때 동반되는 약간의 머뭇거림, 물음표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물론 나는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고백하는 여성들의 고백을 존중하고 그들의 용기와 씩씩함에 지지를 보낸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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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주희, <성산업 공간인 티켓 영업 다방 내 십대 여성의 일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2) 1980년 무렵 캐롤 리는 ‘섹스 산업’이란 명명이 성매매 여성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성노동 산업’이란 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때 성노동이라는 명명이 처음 정치적으로 고안되었으며 이는 곧 성매매 여성들의 행위성을 드러내려는 또 다른 페미니스트 운동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Carol Leigh, “Inventing Sex Work”, ed. Jill Nagle, Whores and Other Feminists, London: Routledge, 1997.
3) 오김숙이, “집창촌 여성들의 하위문화는 존재하는가”, <여/성이론>, 제18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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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qks 2010-08-2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난 호보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 같아요.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되짚어 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

조학선 2010-08-2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아픈심정으로잘일었습니다
생존을위하여인생관이다르거나또다른사정으로하는로동이기할가.......
아무던마음이너무아픈일입니다

비로그인 2011-01-2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어떤 노동에도, 타인의 성관리에도 전혀 마음은 없으나 그사람이 있으므로 내사람의 성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법과 권력에 의지할 뿐입니다. -결혼한 아내라는 여자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