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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서의 만찬
아니타 존스턴 지음, 노진선 옮김 / 넥서스BOOKS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 대한 반항의 표현으로, 혹은 부모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이 한 마디를 사용해봤으리라. "나, 밥 안 먹어!!!" 생각해보면, 나도 꽤나 그런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것 같다. 물론, 부모님의 철두철미한 교육관(-_-)으로 인해, 그런 식으로 해서 내 요구가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지만 일단 부모님의 관심을 끌 수 있었으며 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대표되는 섭식장애(Eating Disorder)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에 그렇게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이 책을 그렇게 좁게 정의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한편 든다. 섭식장애 이면에 숨겨진, 여성들의 욕구와 내적갈등에 대한 신화적적, 정신분석학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분석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라나? 하지만,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들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과 섭식장애 사이의 연결고리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섭식장애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 중 어느 하나의 원인에 의해 섭식장애가 촉발된다고 하는 결정적 원인이 확인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그보다는 생물학적, 인지적,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섭식장애의 원인론에 대해 다측면의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아니타 존스턴은 여기에 "여성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부모의 부적절한 양육방식이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한 시도, 혹은 가족관계에서의 갈등적 요소 등은 이미 섭식장애의 원인을 설명하는 많은 입장에서 다루어진 주제였다. 아니타 존스턴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진화론적인(그래서 그리 학문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여성성"이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차이를 무시하여 여성 자신의 여성적 자아를 억압하고 파괴하려고 할 때 섭식장애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불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즘 같이 남녀가 평등함이 중요한 사회에서 본래적인 남성성, 여성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칫 지나친 경계나 즉각적인 반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타 존스턴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녀의 이야기를 확증이 필요한 진리로 받아들이거나 완벽한 거짓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경직된 신념을 잠시만 접어둔다면 큰 불편없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경험으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성과 논리의 역할이 중시될수록, 그 극단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과 직관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감정과 직관을 여성적인 힘으로, 이성과 논리를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저자의 이분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정직한 감정과 직관조차 이성과 논리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즉,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격하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정말 더 감정적인가 하는 점인데, 감정적이라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감정과 이성이 양극단에서 춤추는 저울추가 아니라면, 자신과 타인의 감정상태를 파악하고 소통하는 역량이 여성들에게 조금 더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무리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미성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감정을 파악하고 사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남자든 여자든)이 그러한 본능적 기질을 사회문화적 영향력 하에서 억압하고 부인해야 할 때 심리적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니타 존스턴은 이렇게 생겨나는 심리적 갈등이 어떻게 음식에 대한 이상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특히나, 거식증 환자에게서 거부되는 음식과, 폭식증 환자에게서 억제되지 않는 특정 음식에의 충동이 어떠한 숨겨진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밝히고 있다. 실제로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먹는 것과 실제적인 신체상의 배고픔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예에서, 심리적 배고픔(psychological hunger)이 그들에게 갖는 의미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책을 읽은 나의 느낌으로는 아니타 존스턴이 상당히 "여성적으로(그녀의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각국의 설화와 동화에서 은유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 함축성을 자신의 주장에 맞는 의미로 재해석하면서 그녀는 아마도 직관과 은유의 힘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그 가설로부터 도출된 명제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식의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면, 이 책이 상당히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전개방식과 결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 아니 확실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감정과 이성은 양극단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의 구분보다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억누르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상관없이,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가장 진실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건강하고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일 것이다. 역자는 책 말미에, 이 책을 딸에게 꼭 권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나는 아들 딸 구분없이 권해주겠다. 이성과 논리가 우뚝 선 이 시대에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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