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서의 만찬
아니타 존스턴 지음, 노진선 옮김 / 넥서스BOOKS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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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 대한 반항의 표현으로, 혹은 부모님이 들어주지 않으시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이 한 마디를 사용해봤으리라. "나, 밥 안 먹어!!!"  생각해보면, 나도 꽤나 그런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것 같다. 물론, 부모님의 철두철미한 교육관(-_-)으로 인해, 그런 식으로 해서 내 요구가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지만 일단 부모님의 관심을 끌 수 있었으며 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대표되는 섭식장애(Eating Disorder)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에 그렇게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이 책을 그렇게 좁게 정의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한편 든다. 섭식장애 이면에 숨겨진, 여성들의 욕구와 내적갈등에 대한 신화적적, 정신분석학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분석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라나? 하지만,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들의 90% 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과 섭식장애 사이의 연결고리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섭식장애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 중 어느 하나의 원인에 의해 섭식장애가 촉발된다고 하는 결정적 원인이 확인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그보다는 생물학적, 인지적,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섭식장애의 원인론에 대해 다측면의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아니타 존스턴은 여기에 "여성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부모의 부적절한 양육방식이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한 시도, 혹은 가족관계에서의 갈등적 요소 등은 이미 섭식장애의 원인을 설명하는 많은 입장에서 다루어진 주제였다. 아니타 존스턴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진화론적인(그래서 그리 학문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여성성"이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차이를 무시하여 여성 자신의 여성적 자아를 억압하고 파괴하려고 할 때 섭식장애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불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즘 같이 남녀가 평등함이 중요한 사회에서 본래적인 남성성, 여성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칫 지나친 경계나 즉각적인 반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타 존스턴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녀의 이야기를 확증이 필요한 진리로 받아들이거나 완벽한 거짓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경직된 신념을 잠시만 접어둔다면 큰 불편없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경험으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성과 논리의 역할이 중시될수록, 그 극단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감정과 직관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감정과 직관을 여성적인 힘으로, 이성과 논리를 남성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저자의 이분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정직한 감정과 직관조차 이성과 논리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즉,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격하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정말 더 감정적인가 하는 점인데, 감정적이라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감정과 이성이 양극단에서 춤추는 저울추가 아니라면, 자신과 타인의 감정상태를 파악하고 소통하는 역량이 여성들에게 조금 더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무리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미성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감정을 파악하고 사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남자든 여자든)이 그러한 본능적 기질을 사회문화적 영향력 하에서 억압하고 부인해야 할 때 심리적 갈등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니타 존스턴은 이렇게 생겨나는 심리적 갈등이 어떻게 음식에 대한 이상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특히나, 거식증 환자에게서 거부되는 음식과, 폭식증 환자에게서 억제되지 않는 특정 음식에의 충동이 어떠한 숨겨진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밝히고 있다. 실제로 섭식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먹는 것과 실제적인 신체상의 배고픔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예에서, 심리적 배고픔(psychological hunger)이 그들에게 갖는 의미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책을 읽은 나의 느낌으로는 아니타 존스턴이 상당히 "여성적으로(그녀의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각국의 설화와 동화에서 은유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 함축성을 자신의 주장에 맞는 의미로 재해석하면서 그녀는 아마도 직관과 은유의 힘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그 가설로부터 도출된 명제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식의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면, 이 책이 상당히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전개방식과 결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 아니 확실히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감정과 이성은 양극단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의 구분보다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억누르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상관없이,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가장 진실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건강하고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일 것이다. 역자는 책 말미에, 이 책을 딸에게 꼭 권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나는 아들 딸 구분없이 권해주겠다. 이성과 논리가 우뚝 선 이 시대에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 별점을 반 개 단위로 나눌 수 있다면, 4개하고도 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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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전통 문화들은 삶에서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매장된 달]의 이야기는 한 때 달빛이 매우 중시되던 시절, 여성적 특질이 인정받고 가치있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음을 환기시킨다.

  감정이 사고만큼 중시되고,

  직관이 논리만큼 대접받으며,

  '존재'가 '행동'만큼 가치있고,

  여행 자체가 목적지만큼이나 중요했던 그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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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인격 - 24개의 인격을 가진 한 남자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
캐머론 웨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그린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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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중인격장애(지금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불린다)는 정신장애 중 가장 신비롭고도 극적인 장애로 여겨진다. 히치콕의 고전물 '싸이코'에서부터 최근까지 다중인격장애를 다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만 봐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을 여타 동물과 구분짓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아(self)" 혹은 "정체감(identity)" 즉,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기에 이런 기능이 분열되어 여러 명의 자기 자신을 갖게 되는 이 병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다. 다중인격장애의 병리적 특성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일반인의 상식과는 어긋나는(그래서 신비롭게도 느껴지는)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서 이 병에 대해 지켜보거나 영화를 보는 일은 긴장감 있고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 병을 직접 겪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듯 자신의 상태가 신기하고, 자신의 삶이 영화같다고 느껴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게.

   어떤 직장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 직장에서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듯이, 어떤 질병이나 장애에 대해 생생한 정보를 듣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병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실제에서 다중인격장애를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다중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내리기까지의 어려움도 큰 데다가, 우울증처럼 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더욱 크다.

   캐머론 웨스트는 24개의 서로 다른 인격체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다중인격장애이다. 전형적이라 함은, 그의 발병원인과 그가 겪는 증상들, 그리고 치료절차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다중인격장애의 틀에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각기 다른 사람 24명을 만나거나 기억하는 것도 보통의 우리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자신 안에서 그 수많은 목소리들의 주인공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을 상상해보라. 그의 삶이 극적이긴 하지만, 영화나 소설의 그것처럼이 아닐 것은 분명하다. 남들에게는 쉽게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이 자신에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되었을 때, 과연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지....  더군다나 그의 해리장애를 촉발시킨 어린 시절의 끔찍한 성적 외상경험들이 중년이 된 그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끔찍한 일들을 겪으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작은 남자아이가 결국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밖에 없었던 그 절박함이, 스물 네 번이나 자신을 쪼개고 또 쪼갤 때까지 겪어야 했을 그 고통이 책을 읽는 내게도 전해져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처음에도 잠시 언급했듯이 "과연 자아(self)란,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하게끔 만드는 책의 주제 때문이다. 극단적인 장애의 형태를 띠지는 않더라도, 자기 자신의 통합된 정체감에 대한 고민은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과연 통일적인, 하나의 나 자신은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그런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내가 아는 나인지 내가 모르는 나인지. 캐머론 웨스트의 장애를 보면서 인간의 인간다움이 도대체 얼마나 복잡한 모습으로까지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가 장애를 극복해나가는 눈물겨운 노력들을 읽어나가면서 인간의 강함이 얼마나 위대한 힘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같은 흥미와 재미에 덧붙여, 많은 것을 남겨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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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5-0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4개의 서로 다른 인격체. 아....24명의 이름을 외우기도 어려운데, 24명으로 쪼개져서 살아야 하는 캐머론이란 사람은....도대체, 정말, 얼마나 절박한 상황들을 겪었을까요? 캐머론의 삶을 읽으면서 혹시 재미있을까봐 걱정이 되네요. 보관함에 넣었어요.^^

frost79 2006-05-0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읽으면서, 누군가의 실제 삶을 그저 영화처럼 소설처럼 흥미롭게만 여기게 되면 어쩌나 했는데.. 읽다 보니, 오히려 차라리 영화나 소설이었으면 싶더라구요..^^; 읽다 보면 마음아프기도 하고, 그의 상처에,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고된 노력에 감동까지 느껴지실 수도 있답니다. 전 그랬거든요~ 걱정말고 한 번 읽어보세요. ^^
 
비폭력 대화
마셜 로젠버그 지음, 캐서린 한 옮김 / 바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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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한 권의 책으로 인해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그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의 것이라면, 그럴 때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이 책이 정말 그랬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로젠버그 박사의 '비폭력 대화'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너무나 쉽게 쓰여져서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나도 임상심리학 박사가 쓴 대화법에 관한 책이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편견 내지는 선입관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종류의 이론과 기법이 소개되는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책을 읽어나갔었다. 하지만 곧,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 자체가 비폭력 대화법 그대로이다. 어떤 종류의 단계나 기법을 익힐 필요 없이, 그저 이 책 한권을 진심으로 읽는 것 만으로 우리는 비폭력 대화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로젠버그 박사의 글을 읽고 있으면 단지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해받고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토록 실천적인 책이 또 있을까....

 판단과 평가, 비난과 편견에 가득차서 서로에게 상처주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 우리 모두는 진실로 편하게 마음 두고 이야기할 곳 한 군데를 찾지 못한 채, 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지쳐가기가 쉽다. 그럴 때, 비폭력 대화법을 시작하라고 이야기한다. 상대방을 평가하고 비난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관찰하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때 나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서, 상대방에게 진심을 담아 부탁하고 요청하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나에 대해 비난하고 비판할 때, 그 말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 상처입고 분개하여 적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상대방에게는 어떤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있는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느낌은 무엇인지, 비판적인 말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요청이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서 쓰면 이해는 가지만 도대체 어떤 것인지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로젠버그 박사는 자신이 비폭력 대화법을 나누고 교육하면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례를 제시해준다. 보통 사람들(쉽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우리와 똑같은)이 비폭력 대화를 적용해나가면서 느끼는 놀라움과 감동을 책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

 내게 특히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자기비판을 자기연민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나 자신의 실수에 대해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은 결과적으로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결과만 가져왔을 뿐이다. 하지만, 실수를 나의 욕구와 느낌에 연결하는 자기연민의 방법을 알게 된 뒤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자기비판의 과정을 확실히 줄일 수 있었고, 좀 더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비폭력 대화"에서는 이 외에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 상대방과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들도 소개되어 있다.

 이런 류의 책을 대할 때 떠오르는 변함없는 질문은 "So What?"이다. 그래서, 무엇이 얼마나 바뀔 수 있다는 것인가?.. "비폭력 대화"를 알게 되면 확실히 바뀔 것이라고 장담한다. 학교에서 진행된 비폭력 대화의 교육은, 비록 6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졌지만 그들 중 많은 학생들이 실생활에서 비폭력 대화법에서 제안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변화하는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해왔던 사고방식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변화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학생은 실제로 비폭력 대화법에서 배운 것들을 상기하여, 큰 싸움이 될 수도 있었던 남자친구와의 말다툼을 막을 수 있었다고 얘기해주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제일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얘기하면서도, 사실 우리는 매순간 변화하는 우리의 느낌이나 욕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판단하고 평가하는 분석적인 생각들은 그리도 쉽게 자동적이다시피 해내면서, "그래서 지금 어떤 느낌인지", "그래서 내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는 잘 알지 못한다. 지금껏 숨겨져왔던, 혹은 피해왔던 느낌과 욕구를 발견하는 것은 때로는 감동적인 느낌을 준다. 비폭력대화가 훌륭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대화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이 대화법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사람의 욕구에 반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화한다면, 비폭력 대화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상대방과도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간결하고 쉬운 내용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책을 만난 것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여전히 비판적이고 나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비폭력 대화를 해나간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어렵고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그들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다. 이제부터의 삶은 이전까지의 삶과는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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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이인식 해설 / 김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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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일궈낸 천재들이나 혹은 완전한 반대편에서 범죄사에 길이 남을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들을 대하게 될 때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과연 저 사람들이 그토록 뛰어나게 혹은 악하게 된 것은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와 사회가 그 사람에게 미친 영향 때문인가?"

   인간이 타고난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선천적 존재인지 아니면 출생 이후의 양육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후천적 존재인지에 관한 질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한 주제였다.  비단 정치학,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의 전문분야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많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떠오른다. "내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지능의 결과인가 아니면 내 노력의 결과인가, 우리 아이의 부산한 성격은 내 양육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이의 타고난 성향 때문인가" 등등...  약 100여 년에 걸쳐 격렬하게 달아올랐던 논쟁의 결과물은, 격렬했던 논쟁만큼이나 명료하고 똑 부러지는 정답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내심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내용인 듯 싶다. 유전학과 생물학, 심리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인간이 인간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유전의 영향과 환경(양육)의 영향이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게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별 무리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유전학 분야에서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밝혀냈다는 소식은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말이다. 공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밝혀졌다고 해서 그 유전자의 존재가 그 사람의 공격성 정도를 결정짓는 결정적, 유일한 요인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다는 얘기이다.

   매트 리들리가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도 바로 이런 것들이다. 본성론자와 양육론자의 양편에서 들고 나왔던 강력한 주장들과 그에 맞서는 반대편의 주장들, 그리고 각 진영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수많은 증거들과 실험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저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리를 이분법적 관점에서 끌어내린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저자가 무엇을 주장하는가"를 살피는데 있지 않다. 왜냐면 결론은 이미 대부분의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본성과 양육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의 재미는 "저자가 어떻게 주장하는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자신의 연구가설을 증명하는 논문을 작성할 때 가장 중요한 절차 중에 하나는 관련개념들과 비슷한 가설에 관한 이전의 연구논문들을 살펴보는 리뷰( review)작업인데, 매트 리들리의 이 책은 "본성과 양육 논쟁에 관한 집중적인 리뷰"라고 보여진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간 이루어졌던 논쟁을 정리하면서 리들리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신의 주장(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밖에 없는...)을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반복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 얘기에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유인원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지능, 정신분열증, 결정적 시기, 학습,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이슈들을 각 장에서 다룸으로써 그러한 지루함의 가능성을 줄여준다. 또한 각 진영에서 전개되는 갑론을박의 논쟁들과 설계자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독창적인 여러 실험결과들은 적지 않은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인간의 성격 특성이나 지적 재능 등이 오로지 유전자에 의해서나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결론보다는 양측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결론은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또 다른 면에서는 걱정스럽기도 하다. 3만여 개의 유전자는 인간의 다양한 특성을 나타내기에 너무 부족한 숫자라고 말했던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이제 환경과 유전자가 주고받는 상호영향과 유전자의 발현가능성을 결정짓는 유전자 내부 체계에서의 수많은 조합가능성을 고려할 때 과연 어떤 행동의 발생요인이나 발현요인을 얼마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을지 말이다. 이 순간에도 나는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이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유전자와 내게 주어졌던 환경 중 어느 부분에 더 크게 기인하는지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책에 인용되었던 새러 홀디의 말대로 이분법 자체가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에게 상호작용이란 단어가 경험적 진리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 책의 원제가 "Nature via Nurture(양육을 통한 본성)"인데, "본성과 양육"으로 번역된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본성과 양육"은 언뜻 들었을 때 예전의 Nature vs. Nurture 를 떠올리게 하는데 말이다. 이분법을 쉽게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본성적 경향에 충실하기 위한 환경적 노력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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