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이인식 해설 / 김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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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일궈낸 천재들이나 혹은 완전한 반대편에서 범죄사에 길이 남을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들을 대하게 될 때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 "과연 저 사람들이 그토록 뛰어나게 혹은 악하게 된 것은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와 사회가 그 사람에게 미친 영향 때문인가?"

   인간이 타고난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선천적 존재인지 아니면 출생 이후의 양육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후천적 존재인지에 관한 질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한 주제였다.  비단 정치학, 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의 전문분야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많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떠오른다. "내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지능의 결과인가 아니면 내 노력의 결과인가, 우리 아이의 부산한 성격은 내 양육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이의 타고난 성향 때문인가" 등등...  약 100여 년에 걸쳐 격렬하게 달아올랐던 논쟁의 결과물은, 격렬했던 논쟁만큼이나 명료하고 똑 부러지는 정답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내심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내용인 듯 싶다. 유전학과 생물학, 심리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인간이 인간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유전의 영향과 환경(양육)의 영향이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게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별 무리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유전학 분야에서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밝혀냈다는 소식은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말이다. 공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밝혀졌다고 해서 그 유전자의 존재가 그 사람의 공격성 정도를 결정짓는 결정적, 유일한 요인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다는 얘기이다.

   매트 리들리가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도 바로 이런 것들이다. 본성론자와 양육론자의 양편에서 들고 나왔던 강력한 주장들과 그에 맞서는 반대편의 주장들, 그리고 각 진영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수많은 증거들과 실험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저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우리를 이분법적 관점에서 끌어내린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저자가 무엇을 주장하는가"를 살피는데 있지 않다. 왜냐면 결론은 이미 대부분의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본성과 양육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의 재미는 "저자가 어떻게 주장하는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자신의 연구가설을 증명하는 논문을 작성할 때 가장 중요한 절차 중에 하나는 관련개념들과 비슷한 가설에 관한 이전의 연구논문들을 살펴보는 리뷰( review)작업인데, 매트 리들리의 이 책은 "본성과 양육 논쟁에 관한 집중적인 리뷰"라고 보여진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간 이루어졌던 논쟁을 정리하면서 리들리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신의 주장(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밖에 없는...)을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반복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 얘기에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유인원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지능, 정신분열증, 결정적 시기, 학습,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이슈들을 각 장에서 다룸으로써 그러한 지루함의 가능성을 줄여준다. 또한 각 진영에서 전개되는 갑론을박의 논쟁들과 설계자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독창적인 여러 실험결과들은 적지 않은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인간의 성격 특성이나 지적 재능 등이 오로지 유전자에 의해서나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결론보다는 양측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결론은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또 다른 면에서는 걱정스럽기도 하다. 3만여 개의 유전자는 인간의 다양한 특성을 나타내기에 너무 부족한 숫자라고 말했던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이제 환경과 유전자가 주고받는 상호영향과 유전자의 발현가능성을 결정짓는 유전자 내부 체계에서의 수많은 조합가능성을 고려할 때 과연 어떤 행동의 발생요인이나 발현요인을 얼마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을지 말이다. 이 순간에도 나는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이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유전자와 내게 주어졌던 환경 중 어느 부분에 더 크게 기인하는지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책에 인용되었던 새러 홀디의 말대로 이분법 자체가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에게 상호작용이란 단어가 경험적 진리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 책의 원제가 "Nature via Nurture(양육을 통한 본성)"인데, "본성과 양육"으로 번역된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본성과 양육"은 언뜻 들었을 때 예전의 Nature vs. Nurture 를 떠올리게 하는데 말이다. 이분법을 쉽게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본성적 경향에 충실하기 위한 환경적 노력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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