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문학전집 중단편소설 2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장편소설 12권, 중단편소설 10권, 연작소설 3권 등으로 이루어진 <이청준 문학전집> 중에서 주제별로 정리된 중단편집이다. 여기에 실린 중단편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의 작품들로 아마도 병신, 머저리라는 제목이 갖고 있는 뉘앙스와 관련이 있는 중단편을 모아놓았지 싶다. 두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 혹은 약자들의 이야기거나 아니면 내, 외적인 요인에 의해 억압받고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인간 군상을 그리지 않았나 싶다.
 일단 여기에 실린 주요 작품을 살펴보면,


 <아이 밴 남자>
 복어중독으로 부모님을 잃고 사팔뜨기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주인공. 그는 장의사 일을 하면서 늘 죽음 곁을 맴돌았다. 언제고 돈을 벌어 여동생에게 오빠 구실 한번 제대로 해보는 것이 꿈이었지만 여동생의 약을 먹고 자살해 버린다. 부지불식간에 닥친 그녀의 죽음에 그는 심한 복통을 일으켰고 이를 본 행인이 "허허 그럼 애라도 서는 모양이구료!"라며 농을 던지고 사라진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의 복통은 동생에 대한 증오와 안타까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연민이 어우러진 응어리가 아니었을까.

 <병신과 머저리>
 "형은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웠다. 언제나 망설이기만 할 뿐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였다."
 의사인 형은 수술 도중 죽은 한 소녀를 통해서 동료를 죽인 뒤에야 적진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6.25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괴롭혔다. 하지만 나는 형처럼 뚜렸한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쳐버렸다. 사랑하는 여인을 무책임하게 떠나보내고 광활한 화폭 뒤로 숨어버렸다. '머저리 병신'이라는 형의 욕설에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근원이 뚜렷한 아픔 이였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그 시작을 알 수없는 상처는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사회적 아픔과 내적 상처 사이의 경중을 놓고 벌이는 우리시대의 초상이 아닐까. 6.25와 같은 시대의 문제를 사랑이라는 개인의 이야기와 섞어 풀어낼 수 있는 이청준 님의 능력이 돋보인다.

 <등산기>
 서울 근교의 천마산을 오르는 부녀의 이야기다. 한때 산행 팀을 이끌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력이 떨어져 일행의 끝을 쉬엄쉬엄 따라가는 처지가 된 아버지. 그를 보는 딸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꼭 기행문이나 산행기을 적었다. 얼마 전에는 설악산 산행기를 토대로 소설을 써 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 순으로 나열된 풍경과 감상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스토리가 없이 밋밋한 글이 되고 말았다. 이청준 님의 <등산기>는 산행기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산을 오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산의 정경과 어우러져 극적인 사건 없이도 묘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물론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나왔기에 기행문이나 산행기와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만큼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이 단편집을 읽은 뒤에는 필사를 해봐야겠다.

 <낮은 목소리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버지의 가장 큰 반사회적 행동은 텔레비전 수상기 등록 없이 공짜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청료쯤으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등록받으러 나온 방송공사 직원을 텔레비전이 없다고 속이고 불법적인 시청을 계속해왔다.
무능하게 비춰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 혹은 세상의 온갖 '한탕'에 끼어들지 못해 겉돌았던 자신의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이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범생이 아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밖에도 보일듯 말듯 다가오는 한국식의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치자꽃 향기>, 조화가 갖고 있는 완전함과 비현실성을 으스스하게 다룬 <꽃과 뱀> 등 인간의 내면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여럿 등장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주어진 억압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 작가는 결국 허물어지고 비틀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불완전성, 그 속에 숨어있는 삶에 대한 갈구와 노력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십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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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 -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 뮤진트리 뮤지션 시리즈 2
그레그 브룩스.사이먼 럽턴 지음, 문신원 옮김 / 뮤진트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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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디 머큐리>는 "20년 동안 이루어진 인터뷰와 무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편집한 내용"으로 일반적인 평전이나 자서전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그러니까 그가 생전에 했던 말들을 모아 시간 순, 혹은 의미상으로 엮은 책으로 반 페이지를 넘지 않는 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여 음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내렸다. 당연히 대필 작가나 외부의 개입 없이 온전한 프레디의 목소리 많을 담아놓았다고 하겠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프레디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투박하고 꾸밈없는 그의 말에는 퀸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묻어 있었고 간간히 삽입된 화보에는 무대 위에서 화려한 퍼포먼스와 다양한 음대역이 울려 펴졌다. 마치 퀸 관련 영상이나 프레디의 생전 인터뷰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이런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었다. 퀸(Queen)의 공연실황까지 봤다면 프레디(퀸의 리드보컬)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을 것이다. 화려한 무대장치에 조명이 켜지자 4옥타브를 넘나드는 그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채웠다. 타이트하게 펼지는 퍼포먼스는 수만 명의 관객을 하나로 묶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군중은 프레디의 숨소리와 함께 웃고 울었다. 그는 무대 위에 선 하나의 우상이었다. 모니터를 통해 전해진 그의 강렬한 눈빛은 무료한 일상에 찌든 나를 충동질했다. "뭐해! 일어서. 움직여 봐. 뭐든 최고가 되어보란 말이야!" 라며 나를 충동질하는 것 같았다.
 그와 공유했던 20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친구를 통해 퀸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라이브앨범(Killer Queen)을 시작으로 각 앨범(LP)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동네 레코드가게부터 서면(부산) 뒷골목의 레코드점을 뒤지며 그들의 앨범을 하나 둘 사 모았다. 그리고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성스레 비닐 자킷을 열었다. 그러면 그 속에선 초콜릿 향이 솔솔 풍겨왔었다. 오래된 종이 표지와 플라스틱판에서 풍기는 시간의 냄새였지만 내게는 퀸의 채취라도 되는 듯 신성했었다. 편리라는 명목으로 사라져버린 LP의 추억은 AIDS로 사망한 프레디에 대한 기억과 어우러져 묘한 향수를 일으켰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에서는 마초로 똘똘 뭉친 모습과 함께 사랑에 목말라했던 내면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무대 위의 화려함만을 봤다거나 동성애자였다는, 혹은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다보면 그도 역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하지만 여기서는 그가 인간으로서 느꼈던 외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이들이 브래디의 겉모습을 사랑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내면까지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상당한 부와 명예를 쥐었지만 어느 것도 자신의 공허함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랑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럴수록 프레디는 더욱 외로워했다. 섹스와 파티, 대저택과 예술품, 사랑스런 애완동물로도 채워지기 힘든 사랑의 갈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연예인들이 그러하듯 스타의 이런 뒷모습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팬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특히 AIDS에 대해서는 많이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이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프레디 역시 AIDS로 사망(1991년 11월)했으니 그의 공포는 현실이 되어버린 샘이다. 그는 사망하기 하루 전에 AIDS에 걸린 사실을 알렸으니 그동안 얼마나 불안하고 초초했을까. 자신의 고통을 끝까지 감출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이 짐작된다. 젊은 날의 무절제한 섹스를 되돌아보며 자신을 추스리는 모습은 일반적인 시한부 환자와 다르지 않았다. 세계적인 스타가 병상의 환자로 무너지는 모습은 서글프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옮긴이의 말'에 소개된 프레디의 유서가 인상 깊다. 유서는 끝부분을 옮겨보면,
 "지금 소원이 있다면, 팬들은 부디 죽어 가는 나의 마지막 모습이 아닌 음악에 대한 나의 열정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거다. 언제 떠날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노래하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팬들을 위해서......"

 그는 떠났지만 여전히 퀸은 활동하고 있다. 존 디콘이 빠진 체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가 폴 로저스와 함께 퀸을 꾸려가고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프레디가 빠진 자리의 골은 상당히 깊었다. 그의 죽음으로 퀸은 반쪽 날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목소리는 여전히 퀸의 이름으로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각종 영화나 CF에 리바이벌 되고 있고 뮤지컬이나 스포츠 현장에서도 그의 노래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프레디의 목소리는 우리의 삶을 여전히 아름답게 채워놓고 있었다.
 God Save The Freddie...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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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학고재 산문선 16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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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우 님의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말한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끼고자 얼마 전에 구입한 책이다.
 번잡한 거리를 질주하는 버스에서 그의 한국미 사랑을 들었다. 과장된 몸짓이나 지나친 감상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 문화를 끌어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려한 기교나 무거운 비장함으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편안함과 적당한 무심함으로 그 주변의 사람들을 편하게 감싸는 우리의 문화를 소담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스산스럽고도 단조로운 정감’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최순우 선생의 글을 보면 유독 ‘스산하다’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사전에는 ‘몹시 어수선하고 쓸쓸하다’라고 조금은 어두운 면을 강조했지만 최순우 님의 썼던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무도 없어 썰렁하다는 말이 아니라 혼자 있는 호젓함을 즐기는, 능동형의 허전함 같다고 할까."
 (<스산스럽고도 단조로운 '달리기'의 정감>중에서)

 우리 한국의 미는 최순우 님의 해안이 있었기에 더욱 빛을 발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의 '문화'를 일반 대중의 것으로 친근하게 만든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최순우 전집>을 낼 수 있었던 다양한 분야의 노력 덕분에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도 존재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 문화에 대한 그의 노력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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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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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시 46분 15초. 고요한 사무실 한쪽 벽면에 걸린 아날로그시계는 여전히 바삐 움직인다. 15를 출발한 초침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20을 넘어가고 있다. 검은 바늘은 미세한 떨림과 함께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시간의 무한일주는 북적거리는 사무실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모니터에 머리를 처박은 체 타이핑에 열중하는 동료의 모습은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뒤지는 손길처럼 바빠 보였다.
 하지만 나는 멍하니 시계를 쳐다보고 있다. 그렇다고 4시 50분으로 정해진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할 일을 접어둔 체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듯 시간의 움직임을 주시할 뿐이다. 집으로 돌아간 들 육아에 지친 아내의 푸념을 들어야 했고 그 후에는 경쟁적으로 달려드는 세 명의 아이들과 씨름해야 했다. 그렇다고 집 이외에 딱히 갈만한 곳도 없다. 술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건강검진 후에 알게 된 몸의 이런저런 잔 고장으로 맘 편히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그저 집과 직장,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과의 연속이었다.
 시간의 테두리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초침은 우리들의 일상처럼 따분하게 느껴졌다. 안정된 직장과 매달 들어오는 적지 않은 월급, 편안한 아내와 건강한 아이들이 있었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은 언제나 가슴 언저리를 맴돌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근교산을 올랐고 저녁이면 땀을 뒤집어 쓸 만큼 인근 하천을 달렸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부드러운 고기를 썰기도 했지만 2% 부족한 현실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5시가 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동료들이 보인다. 부장의 눈치를 살핀 나는 적당히 일을 마무리 해 버렸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환한 빛덩어리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여기 취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결혼 전만 해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빅 픽처> 역시 이런 공허함에서 출발한다. 사진이라는 꿈을 접고 변호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선택한 순간부터 벤의 갈망은 시작되었다. 몇 만 달러의 거금을 들여 카메라를 사 모으고 세상을 찍어댔지만 그 허전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번듯한 직장과 단란해 보이는 가족,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채울 수 없었다. 벤의 옆집에 사는 게리 역시 사진을 찍었지만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늘 퇴짜만 당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간신히 생활하고 있는 게리에게 남은 것은 허풍으로 치장한 자존심뿐이었다.
 바로 그때, 벤의 일생을 한순간에 뒤바꿔 놓은, 자신이 꿈꿔온 미래와 안정된 현실을 역전시켜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벤은 자신의 아내가 게리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목격하고는 충동적으로 게리를 살해해버린 것이다. 5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잃게 된 벤은 변호사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사진사 게리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요트사고를 위장해 자신을 ‘죽여’버리는 대신 게리의 운전면허증을 위조해 그의 삶을 대신 살아간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조용한 산간마을로 숨어든 벤, 아니 게리는 사진을 찍으며 제2의 삶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그가 찍은 사진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거짓된 삶에 대한 불안감도 커져갔다. 급기야 우연하게 목격한 산불현장을 찍은 사진이 미국 전역의 여러 매체에 실리면서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누구나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시골의 한적한 아틀리에에서 그림에 몰두하는 화가나 글을 통해 인간의 회로애락을 표현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완벽한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놓쳐버린 '또 다른 삶'에 대한 아쉬움은 쉽게 잊혀지질 않는다. 한 번을 살다가는 유한한 인생이기에 더욱 미련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어쩌면 미지의 삶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이해관계와 속박에서 벗어나 새롭게 인생을 그려보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자신의 삶에 존재했던 수많은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그 도전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벤 역시 변호사로서의 성공보다는 사진사로서의 삶에 더 흥미를 느꼈다. 비록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젊은 날에 가졌던 희망을 다시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가족과 직장의 속박이 사라진 공간은 사진으로 대신했고 앤을 통해 식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도 되찾았다. 불안하게 출발했던 게리의 삶은 불완전한 벤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했다.
 나 역시도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들이 인정하는 편안함 대신 젊은 날을 휘감았던 열정에 빠져보고 싶었다. 한 가지 일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젊은 날의 열정을 찾고 싶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내면의 욕구에 충실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미지의 삶을 위해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럴 용기도 없을 뿐더러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가족의 갑갑함은 그 속에 숨어있는 포근함을 대신하지 못했고 획일적으로 반복되는 직장에서도 다양한 친목과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었다. 직장에서의 각박한 하루가 있기에 가정에서의 안식이 존재할 수 있듯이 안정된 가정이 있기에 경제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가족과 사회의 일부분이 되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재깍거리는 초침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상을 대변했지만 따뜻한 커피 한잔의 여유도 선사했다. 퇴근길에 만난 햇빛은 눈을 뜰 수 없이 강열했지만 이네 적응되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우리가 보는 달은 어둠의 이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살아보지 못한 삶은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지만 인간 욕심에는 끝이 없다. 설사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바랐던 삶을 선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생활이 온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마 또 다른 욕구를 찾아, 다시 새로운 삶을 갈구하게 되지는 않을까.
 어디를 가든 우리에게 맞춤된 인생은 없다. 상상 속의 날들을 꿈꾸며 삶을 허비하기 보다는 현실의 토대 위에 미래를 꾸며보는 것은 어떨까. 평범한 듯 지나가는 일상에서 더 큰 그림(Big Picture)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나 인생의 비상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덫에 더 깊이 파묻고 산다. 가볍게 여행하기를 꿈꾸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걸 축척하고 산다. 다른 사람 탓이 아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 탓이다. 누구나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경력, 집, 가족, 빚,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안전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제공하니까. 선택은 좁아지지만 안정을 준다. 누구나 가정이 지워주는 짐 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짐을 떠안는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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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스럽고도 단조로운 '달리기'의 정감


 금요일 아침, 축제가 있는 날이지만 아침시간은 상당히 호젓했다. 오후부터 시작하는 경시대회와 축제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 축제를 준비하는 선생님과 학생 몇 명만 눈에 띌 뿐이었다.
 나는 축제의 한 코너에 출연하기로 되어있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약속한 시간이 남아있기에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한잔 탔다. 검은 배경화면을 가리고 있는 커피 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차가웠던 아침공기가 달콤하게 데워졌다. 출근길 버스에서 보던 책을 편다.

 최순우 님의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말한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끼고자 얼마 전에 구입한 책이다.
 번잡한 거리를 질주하는 버스에서 그의 한국미 사랑을 들었다. 과장된 몸짓이나 지나친 감상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 문화를 끌어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려한 기교나 무거운 비장함으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편안함과 적당한 무심함으로 그 주변의 사람들을 편하게 감싸는 우리의 문화를 소담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스산스럽고도 단조로운 정감’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최순우 선생의 글을 보면 유독 ‘스산하다’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사전에는 ‘몹시 어수선하고 쓸쓸하다’라고 조금은 어두운 면을 강조했지만 최순우 님의 썼던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무도 없어 썰렁하다는 말이 아니라 혼자 있는 호젓함을 즐기는, 능동형의 허전함 같다고 할까.

 달리기도 비슷하지 싶다. 어떻게 달리든 결국에는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할 시간이 아니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결국에는 혼자서 달려야 하지 않던가.
 이번 수요일에는 여러 회원들(부산교사마라톤)이 모여 함께 달렸다. 녹색 잔디구장 위로 쏟아지는 라이트를 중심으로 시간을 달렸다. 달리기 방향으로 봤을 땐 시계 반대반향이니 시간을 거슬러 달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아무튼 타원형으로 휘감은 주황색 트랙 위를 끝없이 질주했다. 하얀색으로 구분된 트랙의 경계선을 따라 외줄타기를 하듯 뛰었다. 여덟 명의 회원들이 1, 2레인, 2, 3레인을 사이에 두고 평행하게 달려 나갔다.
 하지만 결국 모두는 혼자서 뛰고 있었다. 서로의 발은 보조를 맞추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각자의 심장은 자신만의 레인 위를 달리고 있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화려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만의 유희에 사로잡혀 오늘을 뭉쳤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여기에 모였다.
  ‘스산스럽고도 단조로운 정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더라도 모든 의미는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것,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오늘의 나, 지금의 나를 고스란히 홀로 감당한다는 것은 아닐까. 달리기라는 단조로운 반복을 통해 나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찾아보는 것,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정을 음미해보는 것이 최순우 님이 하고자 했던 스산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강당에서는 축제 연습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이번에 내가 맡은 코너는 학생 11명과 함께 수화노래를 하는 것이다. 일주일간의 연습으로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한 만큼 열심히, 즐기면서 임하고 싶다. 책이 그러하고 달리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럿이 오르는 무대지만 결국 나 혼자만의 무대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 2010/11/26
 교사마라톤( http://cafe.daum.net/marathongayaji ) 수요훈련(2010.11.24)의 후기를 대신해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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