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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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젓한 숲을 찾아 자리를 편다. 러시아제 7.62구경 드라구노프를 조립하며 오늘의 목표물을 생각한다. 망원렌즈에 초점을 조정하고 목표물을 확인한다. 노리쇠를 후퇴시켜 장전시킨 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호흡을 고른다. 휴~, 십자로 그어진 조준선에 목표물에 맞추고 죽음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탕!
 허공을 가르는 탄환이 십자로 그어진 목표물에 내리꽂힌다. 그리고 흩어지는 피. 피!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전문 킬러의 ‘죽여주는’ 이야기로 낭자해진 붉은 피를 보는 것처럼 자극적이고 감각적이다. 검붉게 눌어붙은 피를 보는 것처럼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 긴장감 속에 스며있는 위트가 이야기의 강약을 조절한다. 중국 액션 영화 같은 초반의 삼엄한 분위기는 글을 조이고 푸는 작가의 글솜씨를 타고 화려하게 살아난다.
 사실 김언수 라는 작가 이름을 들었을 때는 <밤은 노래한다>의 김연수로 착각하고 역사성 짖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날개지에 삽입된 저자소개에는 <밤은 노래하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김연수가 아니라 ‘김언수’가 아니던가. 그러자 뭔가 새로운 흥미가 발끈해졌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서평 역시 새로운 작가에 대한 기대와 칭찬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시작된 관심을 책을 읽는 내도록 가시질 않았고 화학반응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처럼 <설계자>의 강렬함을 배가 시켰다.

 래생(來生). 이것은 <설계자>에 등장하는 킬러의 이름이다. 중국식 이름 같기도 하고 유럽풍의 버터향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국적인 이름, 하지만 그 고상한 이름 뒤에 숨겨진 그의 행적은 무시무시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그가 죽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관심 밖이다. 그저 청부살인 브로커인 너구리 영감의 지시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돈을 받는 잘나가는 살인청부업자였다. 그는 단지 설계자의 면밀한 계획에 의해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변기에서 앙증맞은 폭탄이 발견되면서 평탄하던(?) 그의 일상에 변화가 생긴다. “과연 누가 자신을 노리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의 이유라도 알고 싶었던 래생은 트래커(설계자나 중간브로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일종의 정보원)인 친구의 도움으로 미토라는 여자를 추적한다. 얽히고설킨 미궁의 실타래같이 살인자와 설계자, 브로커가 뒤엉키며 더욱 혼란스러워지는데... 하지만 그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질수록, 그들의 머리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이를 지켜보는 우리는 더욱 즐거워진다.

 “나는 이 집 곱창을 먹을 때마다 신의 내장에 대해 생각을 해. 인간이 보지도 상상하지도 않는 신의 내장. 높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 안에 감춰져 있는 더럽고, 냄새나고, 추악한 것들 말이지 우아한 것들이 뒤에 감추고 있는 치사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이 뒤에 감추고 있는 추악한 것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 뒤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짓들. 하지만 사람들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필연적으로 내장이 있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려고 하지.” (p292)
 아름다움 뒤에 감추어진 난잡함, 그 혼돈의 길 위에 선 킬러, 90년대 유행했던 주윤발식 느와르나 암울한 미래를 리얼하게 그린 블레이드 러너,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현상범을 사냥하는 <카우보이 비밥>이 묘하게 겹쳐졌다. 하지만 말초적이고 자극적이지만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설계자들>에서 보여준 설계자, 브로커, 트래커, 청부살인자는 비일상적인 요소들로 가득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들의 현실 역시 그리 깨끗하지만은 못했다. 어제 저녁 9시 뉴스만 하더라도 벌써 몇 명이 죽거나 다쳤는지 모르겠다. 교통사고, 화재, 자살, 그리고 살인, 폭행, 강도, 강간... 하지만 이렇게 눈에 드러난 범죄는 오히려 양반이라고 봐야할까. 정치, 경제, 법의 힘을 등에 없고 이루어지는 온갖 부정과 악행을 부지불식간에 자행되었다. 정치인의 음흉한 미소 뒤에서, 기업가의 뒷짐 진 손을 통해서, 법이라는 합법을 가장해서 그들의 검은 속을 채웠다.
 소설이 소설 속 이야기로만 끝나야겠지만 그렇지 못할 것 같은 은근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마음을 깨끗이 정리해 줄 ‘설계자’는 없는 것일까. 일상과 허구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괴리감은 여전한 것 같다.
 엄청난 작가의 등장이라는 평가가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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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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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인근에 있는 대학 운동장을 달리면서 마라톤이라는 것을 해봤으니 시간으로 본다면 9년이나 된 샘이다. 처음 달렸을 때는 400m 정도 되는 대학 운동장이 왜이리 크고 넓게 보이던지. 헉헉거리며 한 바퀴만 돌아도 다리가 뻣뻣해졌고 나를 추월해가는 아주머니들의 씩씩한 걸음걸이가 괜히 얄밉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을 달리다보니 가쁜 숨도 안정되어 갔고 뛰는 거리도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리기에 조금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해 가을 부산 광안대로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의 10Km 미니구간에 출전했다. 갓 개통한 광안대로를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많은 달림이들의 '끈질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씬한 몸매로 바람을 가르는 아저씨도 있었지만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끝없이 뛰고 있는 아줌마, 할아버지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걷는 듯이 느릿느릿 뛰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그리 빠르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쉼 없이 움직이는 다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반환점을 돌고부터 한없이 무거워진 나에게는 주로 위의 모든 사람들이 황영조이자 이봉주였다.
 어쨌든 나는 그날, 처음 출전한 마라톤대회에서 한 번도 걷지 않고 끝까지 뛰어서 완주했다. 1시간을 훌쩍 넘어선 기록이었지만 결승점을 통과했을 때의 성취감을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았다. 힘들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한 번도 걷지 않고 완주했다는 뿌듯함이 목에 걸린 완주매달처럼 주어졌다.

 오늘은 동호회 사람들과 사직보조경기장을 뛰었다. 보름정도 쉬어버린 탓도 있고 추운 겨울인 점을 가만해 조금 천천히 몸을 풀었다. 쌀쌀한 날씨 속에 400m 트랙을 25바퀴를 돌았으니 10km를 뛴 샘이다. 손목에 찬 타이머는 1시간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9년 전 처음 달릴 때와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다. 달리는 시간이나 거리가 꾸준히 늘었고 동호회를 통해 달리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0km 단축코스 뿐만 아니고 21Km 하프코스도 주기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42.195km 풀코스를 달려볼 용기를 내기도 한다.
 복잡한 장비나 별다른 준비물이 필요 없고 남과 경쟁을 통해 승부를 판가름하는 스포츠가 아니기에, 편한 마음으로 시작한 운동이 이제는 내가 즐기는 최고의 여가가 되었다. 달리기라는 단순한 반복을 통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 묻혀버린 나를 끄집어낼 수 있었고 운동 뒤에 주어지는 휴식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달리기를 통해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하루키 역시 달리기를 통해 세상과 글쓰기, 혹은 글쓰기와 자신 사이의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글이라는 틀에 매몰되지 않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면서 동시에 오래도록 글줄기를 뽑아낼 수 있는 체력적 밑바탕을 만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순해보일 수 있는 마라톤이라는 운동을 통해 내면에 감추어진 욕구를 풀어내는 힘과 절제력을 동시에 단련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달리기에 대한 그의 철학인 동시에 그에 대한 마라톤 이야기다. 어디에서건 매일 10Km 이상씩을 달리며 자신을 훈련시켜 온 작가가 마라톤과 철인삼종경기를 통해 끝없이 자신을 단련시켜나가는 한 인간의 자화상인 것이다.
 문득 뜨거운 아스팔트나 비오는 운동장을 몇 시간씩 달려보지 않은 이들에게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을 전해준다는 게 인생의 커다란 해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은 아깝기도, 샘이 나기도 했다. 심장을 태우며 쏟아내는 진한 땀방울은 책상머리나 컴퓨터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인데 말이다.

 2011년이 시작된 지 얼마가 지났다. 올해는 42.195km의 풀코스를 달려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로에 있겠지만 달리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일 것이다. 격해진 호흡과 굵은 땀방울로 온전한 나를 껴안고 싶다. 달리기라는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 나와 마주하고 싶다. 아니, 나라는 존재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다. 그땐 아마도 하루키의 마음을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역시도 지구 어디선가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달리기를 하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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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커 (반양장) - 제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29
배미주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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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시간이 무한정 남아돌기 시작했다. 간병인으로 환자 옆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몰려오는 졸음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새로 장만한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손장난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인근 책방을 알게 되었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이 책을 골랐다.
 <싱커>라는 이름은 인터넷 서점에서 많이 들어봤었다. <완득이>와 같이 청소년을 주 타겟으로 한 미래 소설로 독자들의 평이 꽤 좋았었던 것이 기억된다. 그래서 언제고 한번 읽어봐야지 하면서 몇 달을 장바구니에 넣어뒀던 책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들에 밀려 읽어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타임킬링' 용으로 집어 들게 되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SF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등장했던 내용이다. 기후변화와 전쟁, 바이러스로 황폐해진 지구는 급기야 빙하기를 맞게 된다. 위기에 빠진 인류는 외계 행성에서의 생활을 위해 테스트용으로 만들어진 지하도시 '시안'에서 생활하게 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미마(주인공)는 '싱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시안 밖의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싱커란 뇌파 동조(Sync)를 이용해 신아마존(시안과 함께 만들어져 방치되던 밀림지대)의 동물이 되어볼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를 통하면 도마뱀, 박쥐, 사자 같은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미래를 다룬 책답게 미래의 유비쿼터스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유비쿼터스란 모든 사물이나 기기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초소형 센서(컴퓨터)가 옷, 책상, 출입문, 가로등 등 모든 물건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가령 옷에 부착된 센서가 사람 체온과 외부의 온도를 측정해서 옷의 발열 정도를 조정하고 이 정보를 이용해 건강을 체크해서 주치의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는 앞으로 펼쳐진 이런 첨단 사회의 일면이 과학이나 컴퓨터 교과서의 예제로도 손색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마치 내가 2080년의 시안(미래도시)에 와 있는 것처럼...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의 집중력과 스토리의 개연성이 조금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공상과학소설을 너무 이성적인 논리로만 보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미래'라는 키워드 속에 숨어진 상상력을 봐야하지 않을까. <제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헛말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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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개정판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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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비야                                                                                       

 한비야, 그녀가 우리 땅에 섰다. 전라도 해남에서 강원도 민통선까지의 도보여행을 통해 6년간의 세계여행을 마무리 지으려했다. 1999년 3월에 시작된 여행(49일간)이었으니 시간으로만 보자면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하지만 그 시간의 간극은 아무런 장애도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묵은지에서 느끼는 쌉싸래한 시간의 맛이 더해져 나를 몰아세웠다.

 처음엔 그냥 심심풀이용으로 집어든 책이었지만 그녀의 진솔함과 도보여행의 끈끈함에 이끌려 내쳐 읽고 있다. 그전에 읽던 책이 있었지만 잠시 미뤄두고서 그녀의 이야기 속에 다시 빠졌다. 사실 그녀의 책이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에 읽은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그녀의 매력에 푹, 함몰되어 허우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읽었고 몇 권을 더 주문해 지인들에게 선물까지 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과거 책들, 이를테면 6년간의 세계여행기를 다룬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나 오늘 읽은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인터넷으로 사놓고 미뤄뒀던 소설들도 많았지만,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던 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그런 오해를 말끔히 씻어버릴 수는 있었지만 베스트셀러 자체가 갖고 있는 획일적인 느낌이 싫었다. 더군나 그녀의 여행기가 나의 방랑끼를 다시 부추기지나 않을까하는, 약간의 질투심도 한 몫 했었다.
 그녀가 주목받기 시작하던 1990년대 말까지 나는 제법 많은 도보여행을 기획했고 그중에 몇몇은 실제로 떠났다. 해남에서 서울까지 도보와 자전거로 올라가려고 길을 떠나기도 했고 변산반도의 강과 산, 바다를 일주하기도 했다. 지리산의 능선에서 몇날 며칠을 지내기도 했고 울릉도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기도 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그녀와의 정면대결을 애써 외면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책이었는데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고 급기야 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잠시 읽고자했던 책에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방랑끼가 다시 동하기 시작했고 어느 틈에 나만의 보도여행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일단 그녀의 길을 따라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여행해야지. 책에 소개된 일지와 지도를 참고삼아 4개 구간으로 나눠 여름과 겨울, 이렇게 2년에 걸쳐 걸어가면 되겠군. 아들 녀석이 조금 크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보는 것도 좋을 거야. 참, 아들 녀석이랑은 울릉도 일주를 먼저 해보는 게 좋겠군. 그래서 걷는다는 것, 야영에 대한 재미를 보여줘야겠어."
 나는 이미 뜨거운 태양 속을 해치며 전국을 누비며 있었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산들바람을 쐬며 커다란 배낭을 내려놓았다. 밍밍해진 물을 마시며 가야할 길을 확인한다. 땟물이 눌어붙은 목덜미에선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알고 있다. 나의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번져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다시금 나의 배낭을 꾸리게 한다. 일상에 미뤄뒀던 일들을 작게나마 시작해봐야겠다. 아자!


 # 2. 여행                                                                                           

 그녀의 여행길은 대부분 혼자서 떠났지만 어디서고 혼자 있지는 않았다. 그녀를 알아보는 독자와 팬들도 있었지만 시골 촌구석의 할머니와 동네 아줌마까지도 그녀는 친구로 만들었다. 논밭을 매는 마을 할머니나 우연히 들른 매점의 아줌마까지도 그녀의 넉살에 이네 친구가 되었다. 친구뿐이겠는가, 기꺼이 하루 잠자리와 식사까지 대접(?)받는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와는 달리 몇 배는 두꺼워 보인다. 그녀를 모르는 초면의 사람도 몇 마디 대화만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여행은 풍경만 둘러보고 자신만 추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사람과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담아낸다. 그녀를 따라 다니다보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활하는 착각마저 들만큼 여행에서 오는 '외지인의 벽'이 없다. 겉만 훑고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곳의 삶에 녹아들며 하나가 되어 동화된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에서 여행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비야님의 모습이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존중과 겸손, 그리고 용기가 인상 깊다.


 # 3. 환경                                                                                          

 즐겁고 유쾌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와 악의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낯선 이는 그나마 봐줄만했다. 무분별한 개발로 파헤쳐진 산하와 관광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는 더 이상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훼손해버린 자연은 결국 우리들의 숨통을 죄여올 것이다. 근시안적인 환경의식으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 두시오"라고 외치는 좀머씨(파트라크 쥐스킨트의 <좀머씨의 하루> 중에서)의 절규 같았다. 가만히 놔두어도 스스로 자정해나갈 것을 왜 그리도 못살게 구는지. 자연에 대한 성급한 개발과 이로 인한 재난, 그리고 이를 복구하기 또 다른 개발... 이런 과정을 반복적인 거치면서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부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에는 자연형 복원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처음의 자연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상상 이상이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만 없다면 자연은 스스로를 지키며 정화시켜 나갈 것이다. 제발, 그대로 놔두자. 무슨무슨 사업이니 개발이니 하는 반자연적인 일들은 집어치우고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따라가자!


 # 4. 종교                                                                                          

 그녀는 천주교인이다. 비구니(여승)였던 할머니와는 달리 그녀의 식구들은 모두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상당히 수용적이다. 사랑이건 자비건 결국에는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중심에 둔 종교였기에, 이웃을 중심에 둔 사랑이고 자비였기에 종교의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이롱 천주교 신자'라는 말은 아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걸을 때나 쉴 때나 그녀는 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다. 그분의 사랑을 잊지 않았으며 모든 것에 감사해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교회든 절이는, 목사님이든 스님이든 모두 자기편, 아니 자신의 종교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비야님의 모습은 종교를 어떻게 믿고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교본 같았다.


 # 5. epilogue                                                                                                        

 "내 발로 직접 걸으며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가슴으로 직접 느낀 국토는 더 이상 지도 위의 한 조각 땅덩어리가 아니다. 그 땅 위에 있는, 거기에 뿌리내리고 사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정이 간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역시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그녀야말로 우리의 땅과 인간의 발을 사랑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그녀의 작은 걸음걸이는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축복하며 세계로 향하고 있다. 그녀의 힘찬 발걸음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비야 누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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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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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최고로 뜨고 있는 베스트셀러이면서 표절 문제로 시끄러운 작품이다. 덕혜옹주를 평생 동안 연구해왔다는 혼마 야스코(일본인)의 <덕혜옹주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를 표절했다는 것인데 최근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혼마는 <덕혜옹주>에 담긴 시를 비롯한 주요 내용들이 자신의 저서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권비영 작가는 <덕혜옹주>를 쓰면서 혼마 야스코의 책을 참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표절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내 글이 표절이면 모든 역사소설은 표절"이라며 역사적 사실은 누구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과연 어디까지가 참고이고 표절인지 모호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덕혜옹주>를 호기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묘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절과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선입견 때문인지 조금은 색안경을 끼고 봐지는 것 같다. 특히 독자가 느껴야할 감정의 몫까지도 서술해버리는 작가의 지나친 친절함은 글 읽기의 맛을 떨어뜨렸다.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무성영화의 춘사처럼 작위적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야기는 밋밋해지고 사건과 인물의 깊이 있는 묘사는 작가의 서술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작가의 개입을 좀 더 최소화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너무 방대한 느낌이다. 한일합방 이전 해인 1909년부터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하던 1962년을 중심에 두고 있으니 대략 50여년의 시간이다. 이 오랜 시간을 순차적으로 서술하다보니 사건이나 인물 모두 수박 겉핥기식으로 넘어가지 않았나싶다. 오히려 덕혜옹주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택해서 전체 인생을 회고해 보는 방식은 어땠을까. 아니면 다른 등장인물을 중심에 내세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이끌어갔어도 좋았지 싶다.
 소설은 쉼 없이 읽혔지만 별로 남는 것은 없었다. '베스트셀러'라는 명성에 비해서는 알맹이가 부실해 보였다. 술 술 잘 넘어간다는 몇몇 서평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작은 판형에다 넓은 줄 간격 때문이지 싶다. 인물과 사건이 중심이 되는 소설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보다는 내용에 대한 몰입도를 가지고 승부해야하는데 말이다...

 책에 대한 비판적인 말만 많아진 것 같다. 그렇다고 먼 이국땅에서 세상과 격리된 체 조국만을 바라봤던 덕혜옹주의 절규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신음소리는 매 페이지를 타고 쓸쓸하게 흘러넘쳤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힘없이 무너져 내렸던 조선의 역사를 덕혜옹주는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체념, 삶에 대한, 자신에 대한 체념뿐이었다. 왕족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려놓고서라도 그녀가 겪었을 이국땅에서의 서러움은 시대의 아픔만큼이나 서글펐다. (물론 앞서 말했던 작가의 지나친 친절함에 그 느낌이 반감되기도 했지만...)

 덕혜옹주는 실제로 1962년이 되어서야 귀국했다고 한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잊혀졌던 불행한 삶이었지만 그나마 한국 땅에서 마지막을 보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더 이상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위태롭고 나약해 보인다. 남쪽으로 내려온 귀순 가족이나 이국땅에 건너와 새 삶을 시작하는 다문화 가족, 동남아시아에서 온 취업 이민자들의 어려움도 여전하다. 우리의 덕혜옹주가 그러했듯 그들의 삶에도 보다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지 싶다. 세계 몇 위라는 겉모습보다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땅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


( www.freeism.net ) 문성만, 책, 글, 여행, 도서, 독후감, 감상, 서평, 여행, 트래킹, 캠핑, 도보, 글, 메모, 시, 사진, 일상,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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