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등령

여행지 : 비선대, 마등령, 공룡능선
여행일 : 2009/07/15~17
사진첩 : 공룡능선을 넘어서
참   고 : 설악산 지도


설악산 입구에서


1

지루하게 펼쳐진 돌길을 하염없이 오른다.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돌들이 흙길에 뿌리를 내리고 흩어져있다. 아무렇게나 틀어박힌 돌멩이 같았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이 수월하도록 넓은 면이 위쪽으로 향해 가지런히 놓여있다. 등산로 정비사업 등을 통해 기본적으로 정리를 했겠지만 무엇보다 오랜 시간, 이 길을 지나다닌 수많은 사람들의 힘겨운 걸음걸이를 통해 다져졌으리라. 한두 명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몇 세대의 손을 거친, 자연과 시간이 빚은 투박한 골동품 같아 정겹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감상이 흐르는 땀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방울은 두 눈을 따갑게 찔렀고, 발부리에 걸린 노란 돌멩이 위로는 암회색의 땀방울이 가득했다. 또한 첨단의 등산복도 빨랫줄에 걸린 물먹은 수건으로 변해 버렸다.

금강굴 갈림길을 지나면서 점점 가팔라진 길은 그 강도를 높여만 갔다. 아직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도 못했는데 수통의 물은 반이나 비어버렸고 마른 숨은 더욱 거칠어졌다.
목을 축이며 한숨 돌리자 그제야 주변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엄청난 바위 절벽이 우리 위에서 내달리고 있었고 등 뒤로는 수많은 암봉들이 군락을 이루며 능선에 박혀 있었다. 거대한 무기고를 메운 예리한 창날들처럼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막연하게 떠돌던 설악산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 같다. 아마도 수만 년에 걸친 자연의 침식으로 오늘의 모습을 이뤘으리라. 홍수나 산사태와 같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성된 지형과는 확연히 구별되어 보인다.

숨을 고르며 능선을 향하지만 저 위를 쳐다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무겁게 발길을 잡아끄는 오늘 일정도 그렇거니와 사선으로 구불구불 뻗어 올라간 길에 막혀 돌과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리라. 능선이 가까워졌을 때,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하늘빛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한 바가지의 땀을 더 흘린 후, 걷기와 쉬기를 수십 번쯤 반복한 뒤에나 만나게 될 마등령을 생각하며 앞사람의 발자국만 무심히 뒤쫓는다.

공룡능선과 대청봉



2

사실 오늘 우리가 오를 곳은 공룡능선이다. 설악산의 척추 같은 존재로 마등령에서 신선봉까지의 5.1Km의 암릉구간을 말하는데 외설악과 내설악을 나누는 기준인 동시에 속초시와 인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마치 공룡의 기괴한 등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어쩌면 오각형의 등뼈가 인상 깊었던 스테고사우루스를 연상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에 공룡이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알려지기 시작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기에 공룡능선이라는 이름 역시 최근에야 붙여진 듯 보인다.
아무튼 마등령은 공룡능선을 타기위한 시작점이자 종점이 되는, 기준점 같은 곳으로 어찌 보면 오늘 산행의 진정한 시작은 마등령부터인 샘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리 지쳐버렸으니 오늘 일정을 잘 소화할 수 있을 지부터가 걱정이었다. 함께한 산악회 회원들에게 폐나 끼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두 달 전, 다음 산행을 설악산 공룡능선으로 잡았을 때에는 그 이름에서 오는 기대감과 함께 약간의 걱정도 있었다. ‘공룡능선은 타야 산을 탄다’고 말 할 수 있다는 한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의기투합은 했지만, 막상 일정이 잡히니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산이 갖고 있는 우직함과 성실함, 꾸준히만 오르면 어떤 산이든 오를 수 있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즐겁게 산행준비를 할 수 있었다.

산행 준비는 오래전에 넣어둔 배낭을 꺼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창 산을 돌아다닐 때 준비해 둔 텐트, 침낭, 버너, 코펠과 함께 고이 포장된 체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을 배낭을 펼쳤다. 대학교 첫 산행, 지리산 첫 종주 때 샀으니까 20년은 된 녀석이다. 빛바랜 낡은 배낭이지만 그 어깨끈에는 나와 함께한 우리 산하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리라. 여기에 침낭과 쌀, 카메라, 스틱 등의 준비물을 주섬주섬 챙겨 넣고 오래전에 담가 놓은 술도 하나 찔러 넣었다. 산도 좋지만 거기서 즐기는 한 잔의 술도 빠질 수는 없는 일 아니던가. 2박3일의 일정만큼이나 40리터의 배낭도 산행의 기대로 꼭꼭 눌러 담았다.


3

부산에서 설악산에 이르는 거리였으니 어지간히 멀리도 온 샘이다. 설악동 여관촌에서 하루를 쉰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배낭을 정리했다. 어제의 숙취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오늘의 기다란 산행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일행의 활기찬 기합소리에 정신을 차려본다.
“자, 출발 합시다.”
이어 산행대장님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알지요? 오늘 고생 좀 할 겁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됩니다.”
어깨를 내려누르는 배낭의 묵직함보다 그 말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긴장된 첫발을 내딛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로 이어진 길은 신작로처럼 부드러웠다. 널찍한 길에 시원하게 뻗은 적송(소나무)들은 좌우로 도열한 체 우리를 맞이했다. 이렇게 웃으며 숨 쉴 수 있는 것도 다 이 산소탱크 덕분이리라. 산을 가득 메운 적송의 붉은 기운이 등산객의 기운을 북돋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계곡 소리는 가까워졌고 길은 더욱 좁아졌다. 비선대를 보고자 몇 번을 올랐던 길이라 낯설지가 않았다. 십여 년의 시간은 흘렀지만 자연만큼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것 같다. 모두가 그대로인데 내 옷자락만 시커멓게 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자연의 푸른빛으로 내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버렸으면 좋겠다.

계곡을 끼고 20여분을 더 걷자 쏴- 하는 물소리가 비선대에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바위를 미끄러진 물줄기는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둥근 못을 만들었고, 이를 호위하듯 지켜선 장군봉과 선녀봉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언제 봐도 우람한 장군봉과 선녀봉은 설악산을 지키는 최고의 수문장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여기로 계속 올라가면 천불동계곡을 거쳐 양폭산장, 대청봉까지 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측으로 빠져 마등령으로 올라갑니다. 준비됐지요? 여기서부터가 진짭니다. 찬찬히 올라갑시다.”
말을 끝낸 산행대장님의 말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우리는 계곡을 건너 우측으로 뻗은 경사로를 힘차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등령 가는 길



4

마등령, 웬만한 산을 훌쩍 뛰어넘는 1200m 높이의 고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이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은 그 양을 가늠할 수 없었고 배낭을 짊어진 등허리는 축축함을 넘어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깊은 심호흡으로 기운을 차려보지만 눈앞을 가로막은 돌계단은 발길을 쉬 놓아주질 않았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수통마저 야속하게 느껴졌다.
비선대를 떠난 지 두 시간이 지났을까. 느려진 걸음 왼편으로는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험상궂게 늘어선 공룡능선이 보였다. 능선을 이루는 다채로운 형상은 최면이라도 거는 듯 나를 끌어당겼다. 아름다움 속에 숨어있는, 올 테면 와보라는 식의 거만함이 절로 묻어났다.
“공룡능선, 이 길을 올라 저곳에 가야한다!”
몇 번을 중얼거렸는지 모르겠다. 눈앞에 펼쳐진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는 주술사라도 된 것 같았다.

문득 능선을 올려다보자 울창한 수목 사이로 하늘빛이 보였다. 이는 급한 산사면을 거의 다 올라왔다는 의미인 동시에 지금부터는 조금 수월한 능선 길을 걷는다는 것이리라. 긴 심호흡과 함께 발걸음도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설악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죽어도 준치라 하지 않던가. 한고비를 넘었다고 해서 모든 길이 수월해질 수는 없는 법. 급한 불은 한풀 꺾었다지만 진대봉을 돌아 산 허리를 타는 길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다리에 쌓인 피곤과 층층이 쌓인 허기는 내 발걸음은 더욱 잡아끌었다.

한참을 걷자 저만치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지도에 표시된 샘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느 오아시스보다 반갑게 다가왔다. 돌 사이를 흐르는 크지 않은 물줄기는 우리의 갈증과 땀을 식히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서 시작된 몇 방울의 물이 모여 시내, 계곡, 바다를 이루리라. 소소한 일상의 위대함이랄까.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물방울이 모여 산을 찾는 이들의 목을 축이고, 백두대간의 수목을 우거지게 한다. 그리고 바다로 흘러 우리 생명의 근원을 이루었다. 나에게 흘러든 생명수는 전신을 흐르며 세포를 일깨웠다.
걷고 쉬기를 반복하며 기나긴 걸음을 옮긴다. 늦은 걸음 때문인지 앞서 간 일행도 보이질 않고 길과 나무들만이 내 주위를 맴돌 뿐이다. 이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홀가분하고 여유롭다. 깊은 심호흡으로 설악산은 모두 내차지가 된다.

산허리로 뻗은 철재계단을 오르며 얼마쯤 쉬고 있는 사이, 저 위의 선두는 이미 마등령에 도착한 것 같았다. 마지막 힘을 지그재그로 꼬인 계단에 모아본다. 잭이 콩나무를 타고 오르듯 신중한 걸음을 옮겼다. 오를 때는 얼마 되어 보이지 않던 계단도 뒤를 내려다보자 아찔하게 다가왔다. 차가운 난간을 움켜쥔 손아귀에 마지막 힘을 불어넣는다.
넷, 셋, 둘, 하나,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수풀에 가려있던 하늘빛이 일순간에 쏟아진다. 계곡을 휘감으며 올라온 산바람 역시 뜨거워진 땀방울을 식혀준다. 마등령, 너무 가팔라 산턱을 어루만지며 올라야 된다는 마등령에 섰다. 비대해진 몸과 땀에 쩔은 배낭을 지탱하느라 뻣뻣해진 다리를 이끌며,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 같은 심장박동을 진정시키며 그곳에 올랐다.
저 멀리로는 한낮의 대기에 탈색된 연푸른색 대청봉이 보인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백두대간의 능선은 고개를 들고 하늘로 비상하는 봉황처럼 웅장하다. 그 밑으로는 주식차트의 꺾은선그래프 같은 공룡능선이 날을 세우며 달려온다. 설악산의 안과 밖을 나누며 촘촘히 박혀있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다.
이곳 마등령은 한 고개로서의 의미보다 공룡능선의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오늘의 땀과 노력이 헛수고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단지 공룡능선에 오르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앞으로도 어려움은 많겠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잘 해 내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길을 나서자. 뒤로 보이는 풍경만이 모두가 아니듯 더 높은 곳을 찾아, 더 먼 곳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나자. 스테고사우루스의 등뼈를 따라 설악산을 올라보자.
아직 갈 길은 멀다지만 새로운 출발선에 서자 힘이 솟구친다. 모든 길에는 마침표가 있겠지만 거기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었기에, 다시 길을 나선다.

공룡능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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