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 一期一會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박물관에나 있을 옛 고서를 다루듯 조심스레 책장을 넘긴다. 책장 사이에 숨겨진 꽃향기가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말이다.
법정스님의 책은 나에게는 늘 경전 같은 존재였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게 느껴지거나 도시를 가득매운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찾아가곤 하던 지리산 같았으니 말이다.
그 시리고 푸른 자연의 품에 나를 맡겨본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나를 둘러본다.

이번 책, <일기일회>는 2003년부터 2009년까지의 법문을 정리한 것으로 길상사에서 행한 정기법회, 안거 결제, 해제 법문 등 43편이 실려 있다. 강원도 산골로부터의 어려운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내려온 스님은 대중들과 소통을 위해 작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머릿속에는 있지만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려준다. 그리고 점점 혼탁해져가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뼈있는 일침을 잊지 않는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선한 일 자체에 묶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버림, 진정한 선함이 아닙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스쳐 지나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덕이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늘 기억한다고 해서 공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에도 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버리고, 버리고, 그 버렸다는 생각마저 버리고 살라한다. 돈과 명예, 일에 대한 욕심, 남과 비교하는 과시욕이나 허영심은 벗어버리고 조금은 비워놓고 살라한다. 가득 채워 넘치기 보다는 허공까지도 모두 담을 수 있는, 텅 빈 충만을 갖으라 한다.
나의 어깨와 가슴에 짊어진 한보따리의 욕심이 부끄러워진다. 한 줌으로 시작된 욕심은 더 큰 집착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아쉬움과 후회, 한 뭉텅이의 생활 쓰레기만 만들지 않았던가. 비어 있음으로 풍만한 그런 여유를 누리고 싶다. 자유인이고 싶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나 신체적인 결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늪에 갇혀 헤어날 줄 모르는 데 있습니다. 과거에 갇혀 있기 때문에 현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순간순간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사는 것인데, 과거의 좁은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주저앉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지나가 버린 전행사 가지고 다시 되뇌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해지고, 현재와 미래가 소멸됩니다. 현재가 없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실, 그대로를 살라한다. 과거와 미래의 사슬에 얽혀 현실은 등한시한 체 있지도 않을 허상에만 집착한다. ‘지금’이 바로 최선의 미래인데 말이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다음에 해야지.’ 라는 핑계로 정작 중요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지금을 통해 미래를 봐야지 미래와 과거만으로 현재를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인데 말이다.


"기억하십시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입니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라고 말한다. 외부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본성의 일깨움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선한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 않던가, 하지만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본성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오염된 정신의 허물을 벗고 우리들 내면에 숨겨진 순수성을 찾아야 하겠다.

또한 좀처럼 보기 힘든 스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한미FTA에 관련된 이야기에선 “정신 나간 목소리”라며 스님 최고의 쌍욕(^^)까지 써가며 국가의 근시안적인 정책을 비판한다. 농심뿐 아니라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적인 관계를 무시한 체 무분별하게 개발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이런 행위들은 결국 자연재해라는 엄청난 대가로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녹녹한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게 되고 사소한 것에 흥분한다. 가족과 친구보다는 돈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툭하면 욕설에다 신경질이다. 몸은 현실에 있지만 마음은 먼 미래만 의미 없이 쳐다본다. 머릿속에 가득한 도덕적 지식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결국, 세상은 나만을 위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만 남게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핑계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스님의 법문이 더 가치 있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버려라, 현실을 직시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이젠 정신의 굶주림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겠다. 스스로를 둘러보고 자족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일기일회(一期一會),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을 소중하게 살아가야겠다.
오늘, 스님의 잔잔한 설법이 나를 뒤흔든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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