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촐라체(6440m),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쪽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미터 봉우리로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 8000m 이상의 고봉이 즐비한 히말라야에 자리 잡은 봉우리로 주변의 산군에 비하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 깎아지는 빙벽과 등등한 위세는 어느 봉 못지않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 “소설 <촐라체>는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이 촐라체 등반에서 겪은 조난과 생환의 경험을 모티프로 삼아 쓴 소설”로 박정헌은 박상민으로, 최강식은 하영교를 통해 다시 촐라체에 오른다.

“그것은 벽이었다, 차갑고 황홀한.”

그 차갑고 황홀한 벽에 선 두 젊음, 박상민과 하영교. 이복 형제인 그들에게는 순탄치 못했던 인생만큼이나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처럼 시린 히말라야의 빙벽을 고독과 거센 눈보라와 맞서며 올라섰지만 다리가 부러진 체 크레바스에 추락한 영교와 이를 지탱하려다 갈비뼈가 부러진 상민의 생사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라 했듯 인간 본연의 질문, 존재에 대한 물음이 촐라체 북벽과 함께 그들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박정헌, 최강식 님의 실제 조난기와 비교해봤을 때 그 중심 이야기가 상당히 비슷해 조난 다큐멘터리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또한 촐라체라는 평범하지 않은 배경과 자신의 생명까지도 장담할 수 없는 급박한의 상황에 묻혀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산을 통해 인간을 표현하려 했지만 한번 산에 꽂힌 시선이 좀처럼 옮겨지지 않았다고 할까. 작가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좀 더 새로운 전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전문적인 산악인이 아니기에 느끼는 난해함도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일반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에다 등반에 사용되는 전문용어가 뒤섞여 소설 속 위급한 상황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고, 이를 염려한 작가의 부가적인 설명 또한 상황전개에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오히려 소설의 허구적 설정보다는 박정헌, 최강식님의 논픽션(<끈>이라는 책으로 출판)에 더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인터넷을 통해 살펴본 그들의 조난기는 생과 사를 오가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촐라체라는 거대한 빙벽을 상대로 생의 끈을 끝까지 움켜쥔 박정헌, 최강식님께 박수를 보낸다.

- Epilogue
최근 참가한 독서토론회에서 박범신 작가는 산악소설로 읽지 말고 존재론적 입장에서 접근하라고 했지만 나의 산에 대한 개인적 흥미 때문인지 너무 전자 입장에서 읽은 게 아닌가 싶다.
아직 책 후반부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인간 내면의 두려움이나 본원적 존재에 대한 의문 등 놓쳐버린 이면을 음미하며 읽어봐야겠다.

- Epilogue 2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
시린 공기를 마시며 푸른 하늘과 하얀 설산을 걷고 싶다.
가픈 숨을 몰아쉬며 고산증의 두통과 맞서고 싶다.
걸음걸음에 일상의 찌든 때를 털어버리고 싶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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