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다가

반값하길래 질렀다..ㅎㅎ

 

요즘 동양고전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

 

참 이것 메이드 인 중국이지..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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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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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단 제목이 참 흥미롭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이 제목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두가지이다. 내가 몽테뉴를 잘 알지 못하고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 제목을 보면서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제목이 잀아적이여서 참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창한 '론'이나 '학'이 아닌 고양이를 제목으로 삼고 자신의 친근한 일상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몽테뉴라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아서 거창하게 철학이라기 보다는 삶의 에세이를 써내려간 사람이였다. 그리고 이 몽테뉴를 저자 솔 프램튼은 그의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다니면서 몽테뉴가 가졌던 삶의 흔적들과 고민들은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16세기 철학자인 몽테뉴의 저서 <에세>를 바탕으로 그의 삶, 취향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도 분석해 내고 있다. 그렇다고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친근하고 유려한 문체로 들려주고 있다. 나는 아직 몽테뉴의 관한 책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하다. 특히 이 책이 주로 참고하고 정리하고 있는 몽테뉴의 대표작 <에세>에 대해서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얼마만큼 몽테뉴에대해서 잘 드러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할수 없지만 이 책이 나처럼 몽테뉴를 몰랐거나 아직 <에세>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에세>로 가는 하나의 길목이 되어둘 것이고, <에세>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정리와 재현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매우 친근감있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 책만 읽어도 그가 어떠한 인물이였는지에 대해서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우아하고 현명하며 진지하고 사색적인 인물이였고, 일상의 비루함과 소중함을 함께 알고 있었던 사람이였다. 고전적이며 사색적인 인물이라고 할까.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는 16세기 프랑스로 그 당시 시대적인 풍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이 있었던 시대였다. 몽테뉴가 보기에 그 당시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 정신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만드는 사상이였다. 이러한 배경을 지나면서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고 특히 자신의 개인사에 있어서 불행한 일들을 많이 겪었기에 그는 진정한 회의주의자가 되었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불과 두달 만에 죽었고, 남동생은 테니스 공에 맞아 죽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 보에시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역병에 걸려 죽었고, 존경했던 아버지도 오랫동안 신장결석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러한 고뇌와 개인적인 불행은 몽테뉴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스토아철학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죽음 이후의 초월적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 삶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삶의 철학자가 된 몽테뉴는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으로 자신의 삶을 따라가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사유의 단상들을 길러올리고 그것을 기록하여 자신의 일생의 대작인 <에세>를 완성시켰다. 그 당시 근대적 철학사상이 문을 열기되었는데 특히 데카르티의 사상이 모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확실성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의 이상과 사물을 분리시키며 근대를 열어제쳤다면 몽테뉴는 시대적 주류 철학이였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오히려 확실성이 분리를 낳고, 그 분리가 폭력과 인간의 불행을 낳는다고 보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몽테뉴 사유의 위대함과 주류 철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보듬고 통합하는 삶의 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인간됨이 강하게 부각됨을 볼수 있었다. 이러한 친근하고 통합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바로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고양이를 보면서도 인간과 동물을 분리시키며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서 신비하게 섞여 서로에게 주체적 영향을 미치는 그의 통합적이고 따뜻한 사유 방식을 알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 주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이고 통합적 사유는 무자비하게 신대륙을 점령한 에스파냐인들을 비난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돈과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없었던 원시부족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는 것에서도 그의 사유는 잘 드러난다. 몽테뉴는 그 당시 유럽인들의 탐욕이 얼마나 크고 무자비했는지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그는 참으로 삶을 사랑하고 따뜻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포도주와 여행을 좋아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기록'에 집착했다. 매우 사소한 것까지도 적는 바람애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16세기의 자세한 분위기를 알수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는 확실성의 시대에 차이를 존중했으며 그 차이에서 오는 모호함과 불확실을 즐겼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는 21세기 사상의 단초를 엿볼수 있다.

 

저자 솔 프램튼은 계속해서 16세기 근데의 주류 사상가였던 데카르트와 몽테뉴를 비교하여 몽테뉴가 강조한 존재의 중요성, 자아의 중요성, 현재의 중요성, 일상의 중요성들을 계속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까 참 따뜻해진다. 몽테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친구로 삼기에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 몽테뉴가 신봉했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라는 회의론에서 벗어나, '철학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는 죽음의 철학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과 주체로서의 확실성을 담보로하는 '자아'가 아니가 개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참된 삶과 사유가 어떠해야 하면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늘 자신을 초월하는 곳에서 맴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자꾸 미래로만 향하도록 우리의 등을 떠밀어, 더 이상 자신에게 미래가 없을 경우에도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가 생각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현재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할 시간을 놓치게끔 만든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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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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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였다. 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과 탈근대의 철학의 위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주는 몇안되는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이다. 어떤 다른 철학자의 사상에 기대지 않은채 오직 홀로 사색을 통해서 스스로의 철학을 세워나갔던 스피노자는 어떤 이에게는 이단,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제치는 새로운 철학을 제공하는 선구자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써 부모님의 많은 유산을 거부하고 유대교의 신을 부정한 것으로 유대교에서 파문당하고 그뿐 아니라 유대교 신자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서 홀로 렌즈를 세공하며 스스로 철학을 했던 고독하면서도 독창적인 사상을 가진 철학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 '자연이 신'이라는 범신론적인 사상인데 단지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진술이 아니라 실존적인 인간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상으로 나는 풀이하고 있다. 모든 철학책이 그렇듯이 철학적 진술은 깊고 좁은 사유를 철학적 개념으로 풀어내기에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즉 철학을 현대적으로 적용하고 자신의 삶의 기술로써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 <눈물닦고 스피노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실천철학적 담론이자 적용서이다. 에티카에 적근하는 방식이 신선할 뿐 아니라 실용적이여서 철학의 현대의 삶에 기술이 될 수 있고 치유서가 될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공방 별난'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인문치료와 철학상담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젊은 철학자이다. 저자는 철학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치이고 상처받는 이들의 삶의 기술과 지혜를 가르쳐주어 스스로 헤쳐나가는 해법과 외부의 구조적 공격에서 오는 상처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철학이 줄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책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인문치료법과 철학상담의 가능성에 대한 결과물이다. <눈물닦고 스피노자>는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28살의 백수 김철수 군. 서울의 대학 철학과를 나오고 나름대로 스펙을 쌓기 위해서 어학연수를 다녀와 8년만에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근처 고시원에서 근근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삶이 절망스럽고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여자친구는 곧 떠날것 같다. 그래서 술마시고 늦게 들어와 화장실에 앉는순간 바로 앞 거울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거울이 열리고 스피노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철수의 시대와 스피노자의 시대가 시간을 넘어 연결되고 서로 1시간 동안 대화할 수 있는 창이 열린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철수는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자신을 스피노자라고 소개하는 한 남자를 통해서 삶의 고민과 어려움울 토로하기 시작하고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상담해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삶의 기술로써 철학의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극복해 나간다는 형식이다. 소설형식으로 되어있어서 읽기와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김철수는 삶에서 읽어나는 상처와 어려움을 하나하나 스피노자에게 털어놓는다. 불안증, 우울증, 피해망상증, 신경증, 강박증, 과대망상증, 도착증, 공황장애, 중독, 경계선 인격 장애조울중, 관계망상, 분열증, 공포증이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증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구조가 주는 정신적 질병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처방중에서 정말로 탁월하다고 생각되었던 방식이 있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전수하여 프랑스 심리치료서 펠릭스 가타리는 제도요법이나 분열분석을 만들어 내었다.

 

일반적인 심리치유자가 상당가들은 내면의 고통과 삶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너의 마음을 태도나 자세를 바꾸어라 그러면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이러한 전통적인 심리치유에 대한 방법에 무수히 많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도 내 마음을 바꿀수가 없어서 내 마음의 상처를 떠나보낼수 없어서 무수히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는데 단지 그냥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라고? 이러한 상담은 자기 안에 암덩어리를 자기가 잘라내라는 말과도 같이 들렸다. 전통적인 심리적 치유 방법적 진술인 이러한 말은 대단히 비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다른 방식으로 치유에 대한 방법을 말해준다. 그는 단지 마음을 바꾸라는 말하지 않는다.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므로 인간안에 있는 내재성을 바꾸라고 한다. 나는 스피노자가 말한 '내재성'이라는 개념에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인간은 단지 몇가지의 생각이나 태도를 바꾼다고 바뀌는게 아니였다. 안간의 내면안에 인격과 생각과 경험의 씨줄과 날줄이 오래동안 짜여지고 배치되어서 한 인간의 내면의 독특한 특성이 생긴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내면안에 짜여지고 배치되어진 독특한 특성을 바로 '내재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존의 철학자들의 방식과는 확실히 차별적으로 구별되는 개념과 인간변화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러한 변화의 방식은 당장 자신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애인과 헤어져 아파하고 있는데 단지 생각만 바꾼다고 마음의 태도를 바꾼다고 내가 치유되고 변화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애인과의 함께 오래동안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나의 내념에 하나의 내면성으로 짜여지고 배치된 내면성은 단 한순간의 다른 생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그 애인을 통해서 짜여진 나의 내면성을 자연스럽게 바꾸므로서 나는 변화되고 치유될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내면성'의 개념은 내가 볼때 인간에 대한 매우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생각이나 태도는 바꾸는 피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내면성을 구성하는 관계망과 그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외부를 바뀌어주어 그 외부로부터 인간의 내면성을 바꾸려는 시도인 것이다. 정말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한 하나의 생각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서 복잡한 내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것을 또한 스피노자는 '내면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철수가 스피노자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스피노자는 김철수에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 관계망을 하나의 영역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부드럽게 횡단하여 자신의 내면을 형성하는 힘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하면서 김철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외부의 관계망의 배치를 바꾸어 줌으로써 인간의 내재성을 변화시켜 고정된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망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내재적 이성'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철학적 치유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효율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환경과 외부의 영향을 받는 수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내재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환경을 함께 바꾸어주어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이 신'이라는 개념이 조금 이해가되었다. 스피노자의 이 진술은 종교적 진술이 아니였다. 그의 진술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써 인간을 이해해야하는 인간이해를 위한 진술이였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해했다. 아마도 그를 파문했던 유대교인들도 그를 오해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진술이 단지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치유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해의 진술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좀더 스피노자에게 다가간 기분이다. 이제 나도 스피노자를 만나볼 시간이 된 것 같다. 물론 화장실에서가 아니라 책으로 말이다.^^

 

종교든 돈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권력의 시선은 신체를 싸늘하게 경색시킵니다.그러나 사랑과 욕망이 신체를 부드럽게 만들지요. 일단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 대해서 신체를 변용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이 요구하는 하나의 신분, 하나의 이름, 하나의 인물로 전락하고 말지요. 모든 영역을 횡단하면 신체 변용의 역량은 상승하게 됩니다. 횡단은 이 영역과 저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죠. 옆방 사람과 경쟁자 관계로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친구, 형, 조언자의 관계를 넘나들어보세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는 변용 역량을 상승시켜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문제는 사라질 것입니다. '접촉하는 모든 영역을 횡단하여 존재라하!'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횡단은 변용을 일컫는 또 다른 말입니다." (p.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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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무엇인가. 제목이 다소 무겁고 어두운 주제임에도 나는 이 책을 보자마자 관심이 갔다. 평소 죽음에 대해서 미미하게 사고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문득 난 결국은 죽어야할 존재라는 인간의 최종적인 당위명제가 내 머릿속에 떠오를때면 그것이 나에게 무서움으로 다가오기 보다 뭔가 좀더 살아있는 이 현실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겠다는 무언의 어떤 각오들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거창하게 죽음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죽음이라는 찰라적인 순간이 길고 질긴 일생의 모든 순간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라는 어떤 사고의 실마리가 그것에 대해서 좀더 의미있기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최종적인 삶의 종착점이고 그것이 삶처럼 오래동안 지속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경험되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이생의 삶에 깊고 길게 드러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죽음을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때였던 것 같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선배형이 있었는데 죽기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날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 다음날을 시험기간이였는데 그 선배의 어머니가 선배를 깨우기 위해 들어갔다가 5분만 더 자고 일어나겠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5분후에 들어갔더니 죽어 있더라 했다. 내가 학교에서 그 선배의 소식을 들었을때 내 안에 묵직한 해머로 머리를 맞은듯한 깊은 충격이 왔다..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토록 현실의 삶에 큰 충격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리고 몇해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말할 수 없는 내 안에 그 죽음은 긴세월 트라우마를 남겼고 한동안은 도저히 현실이 아닌듯한 느낌이 들정도였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생각보다 가깝다. 모든 인간을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고 주변에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보다 이 현실에 그리고 각자의 인생에 죽음의 당위성은 언제나 깊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철학적 성찰이 나의 짧은 죽음에 대한 단상(短想)들을 좀더 풍성하게 해주리라 기대했다.

  

저자는 셀리 케이컨 예일대학 교수이며 예일대 17년 교양강의의 명강의라고 부제가 달려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죽음의 인문학적 성찰과 현재를 살아가면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함이 무엇인지를 알기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죽음의 인문적 성찰이라기 보다는 철학적, 논리적으로 죽음에 대한 여러 의견들에 대한 견해를 논리학의 형식에 따라서 저자의 판단을 서술해논 다소 지루한 책이였다. 저자가 서문에 대해서도 밝혔듯이 죽음의 사회적 인문적 의미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성찰이다. 그래서 내가 배우고자 기대했던 죽음에 의미를 깊이 있게 배우지는 못했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견을 저자가 하나하나 논리적인 판단에 따라서 참과 거짓을 가려서 자신의 견해 밝히는 다소 주관적인 책이였다.

 

일단 이 책은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다. 죽음을 당하는 대상은 바로 인간이기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결국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부분이 죽는 것인지를 논하면서 길고 지루한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논할 때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되는 두가지 인간론은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일원론은 인간은 하나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것은 육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저자는 이것을 인간은 오직 물질로만 이루어지 존재이고 죽음이란 바로 이 육체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물리주의(physicalism)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나는 저자의 기본 의도는 알겠는데 일원론 즉 인간이 육체로만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물리주의라는 용어로 대체 했을때 다소 논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라 물질주의(materialism)이라는 단어는 유물론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오직 물질만이 한 개체의 본질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충실할 것 같은데 물리주의라는 단어는 만물의 작동원리로써의 의미가 강하지 일원론의로써의 의미로는 부적당한 것 같았다. 저자가 특별히 이 용어를 썼다가 보다는 번역자의 문제인것 같다. 어쨌든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견해는 인간은 육체라는 일원론이고 두 번째는 다소 복잡한 이원론이다. 이 이원론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견해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서 인간의 영원의 존재에 대해서 길게 논의하고 있다. 인간은 전통적으로 영혼의 존재이고 이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이며 그래서 불멸한다는 영원불멸의 사상이 전통적으로 오래동안 내려온 인간에 대한 이론이고 이 이론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일원론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그리고 이원론에 대한 견해를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참, 거짓의 여부를 판단한다. 바로 이 책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 책의 표지에 죽음에 대한 논의를 보편적인 죽음에 대한 전통적 견해나, 종교적인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이성의 논리로만 의지해서 풀어나간다고 한다. 저자가 인간의 구성요소를 정의하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구성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가지인데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갈린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 하나하나 오직 논리적은 사유로써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간다. 저자는 일원론에 대한 견해에서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본다. 비록 정신은 육체적인 물질적 구성되는 다르게 구분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정신 또한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육체와 정신은 하나이며, 이것을 일원론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오직 인간은 육체라는 자신의 결론을 피력한다. 그 다음에 살펴보는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전통적인 견해는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에 대해서 논의해 나간다. 이원론의 견해가 전통적으로 오래되었고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기에 저자는 좀더 세분화해서 이원론에 대한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인간이 육체와 영원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이원론에도 몇가지 세분화된 견해들이 있다. 이것도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육체와 영원으로 구성된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어떠한 연결성을 가지고 연결되어있는지 아니면 육체와 영혼은 별로로 존재하는 각각의 인간 구성물인지에 대해서 논하면서 만약 죽음이 육체의 소멸이라고 한다면 영혼은 육체와의 연결성이 끊어지므로 결국 소멸할 것이고 영혼이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의 구성물이라면 육체가 소멸했을때 영혼은 비물질적 존재로서 어디에 머무르며 어떻게 증명되는지도 모르기에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은 결국 허구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저자 셸리 케이건은 인간은 오직 물질이며 단순한 물질이 아닌 좀더 복잡한 기계라고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까지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한 저자의 결론이고 그 이후로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과 자살과 삶에 대한 가치론적인 물음에 대해서 답해나간다.

 

후반부에는 전반부의 지루한 논리적은 진술이 그대로 이어지지만 죽는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가치, 그리고 죽음과 상반되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논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저자의 의도처럼 철저하게 철학적인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죽음의 가치에 대해서 논할때도 삼단논범으로 정의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는 죽음을 감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죽음이란 나쁘다고 할수 없다. 이러한 논리로 죽음의 무가치함을 반박하며 죽음은 인간에서 특별히 두렵나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 불멸하여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과 같은 인생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살을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나쁘다고 말하고 결국 삶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행복을 영위할 때 좋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오직 철학적 사유에만 의지하여 죽음을 풀어낸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인간이 풀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도 인간은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이어진 것으로 너무나 넓고 깊어서 인간의 이성이 닿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에 있다. 이러한 것을 오직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만을 의지해 이러한 주장은 비논리적이라 틀리고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이라고 맞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보다는 죽음에 대한 참, 거짓의 주장을 살펴 이것이 참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진술 방식은 인생을 논리안에 가두는 어리석은 판별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죽음이 삶을 말하고, 삶이 죽음을 말하기에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술할 때 인간과 역사와 현실과 사유와 계시가 모두 어우러져 통합적으로 논해져야지 단순한 논리적인 진술로 죽음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바닷물을 한손으로 쥐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길고 지루하게 죽음의 의미를 논하는 저자의 방식은 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의미로 보았을때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분석하여서 그 구성물을 쪼갤수 없으며 오직 신비한 타인으로써 바라볼때 그리고 존중과 존엄을 지켜주며 현실과 역사속에서 인간이라는 실존을 바라볼때 삶과 죽음의 의미가 좀더 깊이 있고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 셸리 케이건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논증은 빈약한 것으로 인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기에는 실패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논증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이렇다. 인간은 오직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소멸되는 육체기계이다. 영생은 증명되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오히려 해악이다. 자살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종식시키기에 옳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인간이 이생에서 스스로 책임지며 행복을 영위하는 것이 미덕인 존재이다. 이것이 저자가 길게 논의를 끌어간 결론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거창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좀더 의미있게 조망해줄때 죽음은 좀더 의미있는 인간의 종착점으로 그리고 한순간 순간 삶에 드리워져 있어서 유한한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종말로써 기능할 때 참으로 죽음은 인간에게 인생에게 유익한 실존적 종말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나거든 부디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p.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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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1-1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 불꽃나무님 서평 멋지네요 ㅋ
저도 저자의 논리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물론 죽음이 주는 가치는 오히려 삶을 더 값진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
최고 ~ ^^

불꽃나무 2013-01-16 09:38   좋아요 0 | URL
헤헤~ 감사합니다람쥐~^^
 

저번에 문학동네에서 100권 발간을 기념하여 여러가지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중 한가지가 세계문학전집이 나오는 것을 배경으로 사진응모전이 있었다.

마지막날에 우리집 서재에 있는 문학동네 소설 몇권을 배경으로 아내에게

부탁해서 부랴부랴 찍어서 제대로 보정도 안하고 카페에 올렸다.

 

우리나라 문학 대표 출판사답게 선물도 푸짐했다. 뜻밖에도 4등으로(5등까지 있는데 ㅋㅋ)

선정되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권을 받게 되었다. 오늘 도착했는데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그런데 한권이 잘못왔더라..

심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캔터빌의 유령'을 신청했는데 'P세대'가 왔더라.

오스카 와일드를 꼭 읽어보고 싶어서 교환해 달라고 요청해논 상태이다..ㅋㅋ

암튼 고맙습니다. 잘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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