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E. H. 카 지음, 박종국 옮김 / 육문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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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로서의 ‘역사’는 가능한가?

―E. H Carr의『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I. 요약

 

제1장. 역사가와 사실

Carr는 19세기 역사학과 20세기 역사학의 차이점을 다루면서 자신의 논의를 출발한다. Carr에 따른다면, 19세기 역사학은 랑케(Ranke, Leopold von)의 실증사학(實證史學)이 wloq하던 시대로 사실숭배(事實崇拜)의 시대였다. 역사가의 임무는 오직 사실만을 존중하고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며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랑케는 주장했다. 그러나 Carr는 이러한 사실 숭배의 오류를 타함으로써 20세기 역사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Carr는 역사적 사실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재현이 아니며,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마침내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의 해석은 자신의 현재 입장과 가치관의 반영이므로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해석의 결합으로 성립된다. 바로 이것이 Carr가 생각하고 있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다. Carr는 자신이 제기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역사란 “역사학자와 그의 사실들의 상호 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답변을 제시한다. 이 답변이 Carr의 역사에 관한 정의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흔히 인용되고 있는 역사에 관한 가장 대중적인 혹은 ‘상식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제2장. 사회와 개인

Carr는 역사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는 사회 속에 놓인 인간의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고, 사회는 개인의 의도를 초월한 힘과 움직임을 나타내므로 역사가의 관심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역사가에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데, “역사가 자신이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사회에 속해 있으므로 그 시대, 그 사회의 정신과 가치로부터 영향을 받아 역사를 해석하기 마련이라는 것”과 “역사가의 연구는 항상 과거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현재 사회와 과거 사회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Carr는 역사를 과학이라 부르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다섯 가지 관점, 즉 ① 역사는 전적으로 독특한 것을 다루고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② 역사는 아무런 교훈도 가르치지 않는다. ③ 역사는 미래를 예언하지 못한다. ④ 역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⑤ 역사는 과학과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내포한다.

Carr는 이러한 논점을 하나씩 차례로 검토하는데, ①에 관해서는 “역사는 일반화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반론을 편다. 역사의 일반화의 문제는 ②와도 관련이 되는데, “일반화를 통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고 하고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에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확인한 경험적 사실 앞에서도 이미 충분히 논박이 가능하다. ③에 관해서는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을 일반화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반화를 하면서 역사가는 특수한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의 행동을 위해 타당하고 유용한 일반적 지침을 제시한다”고 Carr는 주장한다. ④에 대해서도 지식사회학의 논의에 기대어 “역사학을 포함한 모든 사회과학은 주관과 객관으로서의 인간, 연구자와 연구대상으로서의 인간과 관련되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을 엄격히 분리하는 인식론 자체가 이미 파산했다”는 주장을 편다. 덧붙여 자연과학 역시 관찰자의 주관 및 그가 속한 사회적 조건에 의해 실험의 결과가 항상 변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⑤에 대한 답변으로 Carr는 “역사가는 그의 문제 즉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신이나 초역사적 힘, 헤겔의 ‘세계 정신’,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등에 의지하지 말고 해결해야 하며, 역사는 말하자면 조커 없이 노는 트럼프 놀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4장. 역사에 있어서 인과관계

Carr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는 역사의 인과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의 연쇄를 선택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선택의 기준은 역사가 자신의 해석에 달려 있고, 어떠한 해석이 가장 좋은가 하는 것은 가장 유익한 일반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합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Carr가 말하는 일반화는 “모든 사건에 하나 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에 어떤 변화가 없는 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신념”으로 정의되는 역사결정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역사는 어느 모로 보나 우발적인 원인의 소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우연론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다루는 열쇠를 마련해주는 것은 바로 목적이라는 관념이라고 Carr는 주장한다. 역사에 있어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결부되고, 인과관계는 해석과 결부되기 마련이다.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Carr는 과학과 경험을 통해 역사의 일반화를 주장하고 이를 다시 제1장에서 도출한 테제와 연관시켜,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의 대화일 뿐 아니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미래의 목적들은 당연히 진보이며 과거의 사건들도 진보의 기록이다. 미래에 남겨진 또는 이미 과거 곧 역사에 기입해 놓은 진보라는 관념을 기준으로 하여 과거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의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Carr가 말하는 객관적인 역사학자란 사회와 역사 속에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 설 수 있는 능력 즉 미래에 시야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역사학자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란 ....... 오직 미래에 남겨진, 그리고 역사 과정이 전진함에 따라 발전하게 되는 그러한 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제6장. 넓어지는 지평선

Carr는 현대의 특징을 인간의 자기의식 발달, 즉 역사의식의 발달에서 찾는다. 현대인들은 이성의 확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는 과학, 기술,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전지구적으로 거대한 혁명이 일어난 시대이다. 역사학의 외부에 존재했던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등의)과 국민과 계급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II. 질문

 

1. Carr는 이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사람들만 하더라도 근대 혹은 후기 근대(탈근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너무나도 다른 인생관 및 세계관을 가졌지 않는가? 그들이 세계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우리와 현저히 다를 텐데, 어떻게 그들과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과거인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과거인들이 당시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의 코드를 결정했던 그들 삶의 의미체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Carr는 무작정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는데, 대체 어떤 코드를 통해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2. 그리고 대화란 대화에 참여하는 양자 혹은 다자가 상호 작용을 통해 상호 변화를 기대하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사실상 말이 없는 역사 속의 과거인들과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묻고 우리가 답하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Carr의 주장처럼, 어떤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갖느냐의 여부가 어디까지나 역사학자의 ‘해석’에 달린 것이라면, 역사학은 결국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학자가 과거의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과거의 사실은 이미 역사학자에 의해 전유된 사실로서만 존재하게 되며, 결국 역사가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닌가? Carr가 말하는 ‘해석’으로서의 역사라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실상 역사학자(인식 주체)에 의한 과거의 사실(대상)의 ‘지배’ 밖에 더 되는가? Carr가 말하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란 과거에 대한 현재(역사학자 자신)의 자문자답을 통한 과거의 ‘지배’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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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 최인훈 전집 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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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주체의 성찰적 변증법

―최인훈의 『회색인』읽기

 

 

1. 『광장』과 『회색인』

최인훈의 『회색인』은 1958년 가을부터 1959년 여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잡고 있는 텍스트로서, 『광장』이 발표되고 나서 2년 후인 1963년 6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세대』에 「회색의 의자」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광장』―『회색인』―『서유기』―『소설가 구보씨 일일』로 이어지는 최인훈 소설의 계열, 즉 짙은 자전적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계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최인훈 특유의 관념성이 비교적 정연한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과 그의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W시의 원체험이 상세하게 진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의 출세작인 『광장』에 쏟아졌던 숱한 주목에 비한다면 『회색인』에 주어진 관심은 상대적으로 초라한 편이었다. 물론 최인훈의 전체적인 저작들을 놓고 봤을 때 『광장』만큼 그의 소설세계 전반에서 서사화 혹은 사건화의 공력을 기울인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감행된 이명준의 분단현실과 남북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의를 제외하면 많은 결함을 보여준다. 주인공 이명준을 둘러싼 여러 이론적 공방에서 자주 거론되는 점이지만 인물이 가진 취약성은 이곳저곳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북녘의 아버지 집에서 아들에게 보인 일상적 체취가 혁명가의 풍모를 상실한 모습으로 부정되는 것은 단적인 예의 하나이다. 아버지를 향한 북한체제 및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준의 개념화와 비판들이 대단히 성급하고 예단과 논리적인 비약으로 가득 차 있는 만큼 남북현실에 대한 명준의 환멸이 가진 식민 잔재와 국가폭력, 도구화된 이데올로기적 양태에 대한 감상적인 반응이라는 점도 그러하지만, 여성에 대한 그의 퇴행적인 몸짓도 비이성적이기는 매 한 가지이다. 이러한 성급함은 『광장』의 단순한 결함이라기보다는 분단체제에 대한 비판을 단행하는 청년의 과잉된 감각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사건화에 주력하기보다 내면의 사유를 서술한 성과를 꼽자면 『회색인』은 『광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중한 작품이다. 『회색인』에서 제기된 문제의 범위나 사유되는 양과 질, 반성의 대범함은 『광장』에서 보이는 과잉된 행동, 논리적 비약, 심한 예단에서 벗어나 있다. 즉 『광장』에서 ‘남(밀실)이냐 북(광장)이냐’라는 민감한 선택지 앞에서 겪는 쓰디쓴 환멸과 포로석방 뒤의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채 제3국행을 선택하고, 이어서 자신만을 위한 광장이자 밀실인 바다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데서 확인되는 관념적 과잉상태가 빚어낸 자기파괴적 해결이 『회색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명인 ‘회색인’은 북녘 땅 고향에 가족을 남겨둔 채 LST를 타고 월남한 주인공 독고준이 남한사회와 계약을 맺으면서 현실과의 인식론적 거리를 두고 전개되는 미적 주체의 야심한 기획을 반영하는 상징어라고 할 수 있다. 별다른 서사의 전개 없이도, 이 작품은 내적 성찰의 치열한 자취를 모두 15장에 담아냄으로써 그 담론의 면모까지도 주목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작품에서 발견되는 인물의 내면이 가진 특질은 독서인이라는 주체의 회상, 미적 주체의 모색과 자기구원, 주체의 자기정립으로 이행된다. 뿐만 아니라 주체의 자기반영적인 서술의 양식은 이후 발표되는 『구운몽』, 『서유기』,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거쳐 『화두』에 이르도록 유효한 근원이 된다.

 

2. 이방인 독고준 ― 파행적 근대의 성찰적 주체

최인훈은 김현과의 대담에서 『회색인』은 『광장』의 이명준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서 쓰여 진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현의 설명에 따르자면, 『광장』에서 이명준이 떠도는 풍문에 만족치 않고 광장을 찾아 나섰던 인물이라면 『회색인』은 외부와의 모든 소통 경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자기만의 회색 의자에 앉아 현실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김치수는 『회색인』에 대해 ‘에세이적 글쓰기’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회색인』이라는 에세이 스타일의 이 이야기에는 사건을 위해 인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상념과 사변을 위해 사건이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사회적 현실 자체가 소설의 표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주인공이라는 개인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며, 또 그 주인공이 그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고, 그 수용의 영향이 대체 어떤 식으로 그의 주체 형성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소설의 전면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결국 최인훈이 이 소설을 집필한 기본적인 맥락은 1961년에 발발한 박정희의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시점(1963년)에서 1960년의 4ㆍ19를 미완의 혁명으로서 성찰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5ㆍ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함으로 인해 4ㆍ19가 비록 실패한 혁명이 되어 버렸지만, 4ㆍ19 자체는 자발적인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학생들ㆍ시민들의 열망의 표출이었고, 이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성찰성이 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색인』은 4ㆍ19을 계기로 근대적 개인의식 및 시민의식이 형성과 근대적 제도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사후적으로 추체험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근대성에 대한 역동적이고 양가적인 경험 속에서 근대적 현실과 자아에 대한 성찰성을 독고준이라는 인물과 그의 대척점에 서있는 김학(및 김소위 그리고 황선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 『회색인』을 주체론의 관점에서, 즉 근대사회의 성찰적 경계인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독고준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현실에 어떻게 응전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해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로 그의 발언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광장』과『회색인』그리고 『서유기』와 『구운몽』등의 초기 최인훈의 소설들에서 주인공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티프의 하나가 바로 ‘피난민의식’이다. 이 모티프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김윤식이 간파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최인훈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피난민의식’이 단순히 월북자 아니면 월남한 실향민으로서 갖게 되는 절망적인 패배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그의 소설에서는 정주민의 사유 방식과 대립되는 인식 지평으로서 탈주민의 사유, 이방인의 사유, 경계인의 사유가 등장하고 있다. 『광장』의 이명준도 그렇거니와 『회색인』의 독고준은 명백히 남북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남북 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거나 반성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자아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불안정한 생계의 조건에서 오는 일상의 불안만이 아니라 전쟁세대로서 겪게 된 민족의 분단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역사의 조건을 개인의 삶과 연관시켜 사유하는 주체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뒤 단독자의 위치에서 냉혹한 현실의 조건을 직시함으로써 분단과 전쟁을 거쳐 개발독재라는 돌진적 근대화의 경로를 밟고 있는 남한의 역사적 조건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주체적 개인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배경으로 처리되는 기본적인 사건의 서사를 우선 정리하고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독고준이 보여주는 사변과 발언을 통해 나는 그의 주체성을 분석해나갈 것이다.

 

3. 『회색인』의 서사와 구조

총 14장으로 되어 있는 『회색인』의 스토리적 서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텍스트 주요 화자―단, 4ㆍ6ㆍ8장의 화자는 독고준의 친구 김학이다―인 독고준은 회상 형식을 통해, 가족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함께 월남하여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던 중 아버지가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는 주체로 설정된다. 매부가 될 뻔한 ‘현호성’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당한 그는 노스탤지어에 젖어 완치될 가망 없는 부스럼과도 같은 ‘W시’를 그리워하지만 이제는 갈 수 없다. 그러던 중 독고준은 살고 있는 집의 주인 일가를 자주 찾아오는 ‘김순임’이라는 ‘왕국재림교회’의 여전도사를 만나지만, 그녀는 독고준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이 일이 있는 직후 독고준은 2ㆍ4파동 즈음, 월남할 때 가져온 짐 속에서 현호성의 공산당 당증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매개로 동반자적 공산주의자 현호성의 집에 들어가 생활한다. 8장에서는 김학이 ‘황선생’의 사변을 듣고 9장은 미국 유학 갔던 현호성의 처제인 화가 ‘이유정’과 독고준이 조우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장에서 독고준이 그 이유정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회색인』의 서사는 끝이 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색인』의 1장과 마지막 14장이 유사한 구조의 서술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1958년 어느 비가 내리는 가을 저녁에 독고준의 하숙집으로 그의 친구인 김학이 ....... 찾아왔다. .......

 

1959년 어느 비가 내리는 여름 저녁에, 독고준의 집으로, 그의 친구인 김학이 ....... 찾아왔다. .......

 

위와 같은 수미상관의 기법 사용은 작가가 서사의 결말에 와서도 서두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결말이 보일 즈음에 이루어지는 서두에 대한 재인식은 서사 전체에 대한 재분석이 요구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작가는 서사의 완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다시 서사의 흐름을 되짚어나가는 것이다. 이에 완결을 향한 서사의 흐름을 단절되고 그 종결을 유보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주제로서 성찰적 개인의 형상화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설적 구조를 사건의 진행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이 작품 『회색인』은 기존의 소설적 구조인 ‘처음/중간/끝’이나 ‘기-승-전-결’의 개념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다. 사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사변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나마 『회색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을 독고준이 현호성의 집에 살게 되는 경위이다. 독고준은 현호성의 노동당원증을 무기로 남한에서 이미 거물급 인사에 속하는 현호성을 위협해서 자신이 먹고 살수 있는 거처를 확보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사건도 독고준 자신의 관념과 사색을 지속시킬 수 있게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했다고 말함으로써 더 이상 어떠한 극적 사건으로도 진전이 되지 않는다. 즉 현호성과 독고준의 갈등이 심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고준의 말처럼 독고준이 현호성의 노동당원증으로 현호성을 위협한 사건은 사건 그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독고준의 사색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서 또는 이유정과의 만남을 예비하기 위해서 구성된 것이다. 또한 이유정과의 만남이라는 사건이나 이유정이라는 인물조차도 독고준이라는 한 개인의 상념과 사변을 심화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독고준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이다.

 

4. 독고준의 자아 기획과 주체화 과정

『회색인』의 독고준은 월남한 인물이다. 독고준은 귀향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귀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는 실향민이며 동시에 피난민이다. 정신적 뿌리를 잃고 삶의 안식처를 잃은 셈이다. 이로 인해 독고준은 상실감에 시달린다. 독고준의 인식적 방황은 집과 가족과 어머니와 고향을 잃은 상실감에 유해한다. 또한 이러한 상실감을 달래주기에 너무 거칠고 황폐한 서울이라는 낯선 타향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고향은 자아의 주체성을 성립시켜 줄 수 있는 이상향으로 간주된다. 결국 독고준의 고향 상실은 이상향의 상실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형식을 ‘선험적 고향 상실성의 표현’으로 명명했던 게오르크 루카치의 개념을 빌려, 소설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을 외부 세계에 대한 낯설음으로부터 생겨난 문제적 개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따르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세계가 행복하고 아늑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반항하거나 갈등을 겪는다. 그 결과 대개의 경우 광인이나 범죄자 등의 악마적인 성격을 지니거나, 사회의 보편적 가치 질서에 맞서는 이질적이고 소외된 인물로 나타나게 된다. 골드만은 루카치의 개념을 적용하여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 양식"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도 독고준은 전형적인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문제적 개인을 표상하고 있다.

친구인 김학이 돌아갈 고향이 있는 존재인데 비해, 독고준은 고향도 가족도 없는 존재이다. 그는 “가족이 없다. 그러므로 자유다” 독고준은 고향에 대해 짙은 향수를 느끼고, 급기야 제12장에서는 조부가 월북하기 전에 살았다는 P면을 찾아 간다. 그는 어떤 것도 본래의 고향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고향을 발견하지도 (혹은 고향을 새로이 발견하지도) 못하고 실향(失鄕)의 경험 속에 영원히 살아간다.

따라서 이제 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에고(ego)'이다. 독고준은 고등학교에서 대학 초년에 걸친 시절에 “민족의 일원도 국가의 일원도 그리고 가족의 일원이기도 전인 ’자기‘”를 발견했으며 “이 발견에 몸이 으스스하도록 감격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에고를 가꾸고 매끄럽게 다듬고 대뜸 눈에 뜨일 유별난 빛깔을 내게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는 물론 타인의 주목을 끌고 싶은 욕망,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이러한 인정에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독고준은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한다. 독고준의 이러한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가 여인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이다. 『회색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인들―W시의 여인, 김순임, 이유정―을 차례로 이동해가는 독고준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그가 그 여인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그의 존재를 거부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으며, 순종과 헌신이라는 특성은 무엇보다 그런 조건에 일치할 개연성 때문에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회색인』에서 독고준이 아버지 상실을 겪으면서 긴 회상을 거쳐 대면하게 되는 단독자의 현실이나, 김학을 지식의 추상성ㆍ가족적 혈연의식ㆍ동인들의 감상적 유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그의 형 김소위나 황선생 같은 인물들은 모두 주체의 정립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시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독고준의 경우 분단과 실향, 아버지 상실로 인하 피난민의 처지에서, 김학의 경우, 고향과 민족을 대상화하는 군인이라는 관점에서, 김학의 경우 병든 아버지와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한 자신의 학업과 사회 진보에 대한 열정에서 방황하는 처지에서 반성하는 주체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독고준의 경우, 경제적 계약과 사회문화적 계약의 분리는 그의 회상에서 드러난 현실과 허구의 분리를 변주하여, 누님의 전 생애를 건 삶의 도박이 봉쇄된 운명적 현실을 대리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들을 정초(定礎)하려는 해방된 몸짓을 보여준다.

 

........ 이향(離鄕). 나그네살이. 그리고 오랜 풍상 끝에 귀향. 객지에서 나그네 죽음을 하는 사람도 마지막 깜빡거리는 임종의 순간에 그의 눈알에는 어머니가 비칠 것이다. ....... 그러한 공향을 김학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없다. ....... 나의 고향은 나의 속에 있다고 믿게 된 인간. 그리고 그 ‘속’에서 소리도 없는 바람만 느끼는 인간. 이것은 고향을 잃은 자의 대상(代償) 본능이 시킨 속임수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실향민 아닌 이향인, 혹은 피난민 내지는 이방인, 나그네살이로 스스로의 삶을 규정하는 독고준의 내면독백은 고향만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와 국과와 민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도시적 인간, 망명지식인의 자기선언에 가깝다. 그는 더 이상 고향의 온기를 보존하지 않으려 하며, 가족의 혈연적 유대나 아버지의 권위를 빌리지 않는다. 그는 소년기에 겪은 배교자의 심문으로도 이데올로기의 허위와 폭력을 충분히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당증을 매개로 한 남한에서의 계약적 삶은 그대로 안주하기를 유보한 채 불모적인 남한 현실과의 정신적 응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함축한다. 독고준과 김학의 형, 황선생이 조망하는 남한의 불모성이란 분단과 전쟁, 서구적 근대에 대한 맹목성이 빚어낸 난민수용소와 같은 허구에 가까운 시대현실을 지칭한다. 결국 『회색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진 운명이자 거대한 아이러니로서 사회현실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주체의 치열함에 있다. 현실과 길항하며 드러내는 내면의 진정성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모든 조건들을 모색하며 열어놓는 서술에서 잘 발견된다. 또한 이 진정성은 그의 문학에서 남북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이념적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에 맞서서 힘겹게 마련해가는 개인 주체의 가치발견과 자기구원, 더 나아가 가족의 혈연적 유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적 차원마저 넘어선 주체 정립의 미적 기획을 예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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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박완서 소설전집 7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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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엄마의 말뚝」의 제1편은 화자인 ‘나’가 엄마와 할머니 손에 이끌려 ‘농바위 고개’를 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엄마는 아버지가 어느 날 심한 복통으로 괴로워하다가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아버지를 죽게 한 병이 대처의 양의사에게만 보일 수 있었으면 생손앓이처럼 쉽게 째고 도려내고 꿰맬 수 있는 병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그때부터 대처(大處)로의 출분을 꿈꿨고, 아버지의 3년상도 받들지 않고 오빠를 서울로 데려간 데 이어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고향이자 낙원과도 같았던 박적골을 떠나 대처인 송도(松都)로 향하는 길이다. 송도는 박적골과 서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통과지점이라고 한다. 서울과 송도는 모두 대처이고, 이는 엄마의 짧은 말, “봐라, 송도다. 대처(大處)다.”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대처는 당시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서, 박적골이라는 전근대적 공간에서 태어나 자라온 어린 ‘나’에게 이질적이다 못해 막연한 두려움마저 주게 된다. 바느질 솜씨 하나만 믿고 아들을 출세시키겠다고 집을 떠났던 엄마는 이번엔 '나'에게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며 '나'를 서울로 데려간다.

하지만 막상 엄마를 따라 ‘나’가 가게 된 곳은 사대문 밖의 현저동 산꼭대기의 단칸 셋방이었다. ‘나’는 엄마가 강요하는 도시적인 삶에 길들여진다. 군것질도 하고 땜장이 딸과 어울려 놀다가 의도치 않게 사고를 쳐서 안집 아저씨로부터 오빠가 봉변을 당하게도 만든다. 그 외에도 동네 이웃에 있는 감옥소 마당에서 놀다가 엄마에게 혼나는 등 엄마로부터 제한당하고 있는 ‘행동 반경’과 ‘교우 범위’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말썽을 부린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상것들하고 놀지 말라는 꾸중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서울서 '나'를 데리러 시골집에 내려왔을 때 보이던 그 ‘허영’과는 사뭇 다른 ‘긍지’로 비쳐진다. 바로 엄마가 배신한 온갖 과수가 있는 후원과, 토종국화 덤불이 있는 사랑 뜰과, 정결하고 간살 넓은 초가집과 선산과 전답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하시는 비록 동풍은 했으되 구학문이 높으신 시아버지가 뒤에 있다고 믿는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던 중 엄마는 '나'를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로 입학을 시키기 위해 먼 친척 댁으로 주소까지 옮기면서 ‘나’를 신여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해나간다. ‘나’는 엄마가 바라는 신여성이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알게 될 것 같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엄마의 극성스러운 행동 속에서 급체(急滯)인지 맹장염인지 걸린 남편을 굿을 해서 고치려다 잃고 층층시하와 봉제사의 의무와 안질에 거머리가 약인 무지를 떨치고 도시로 나온 엄마의 자식과 자유스러움에 대한 피 맺힌 원한과 갈망은 벅차고 뭉클한 느낌이 되어 전해 옴을 깨닫게 된다. 이후 셋방살이의 수모에서 벗어나려고 절치부심하던 엄마는 집값이 싼 이 동네에서 집을 살 엄두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결국 금융조합에서 융자를 받아 인왕산 마루턱에 있는 집을 샀다. 이사 간 날, 첫날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그 뒤, 우리는 해방을 맞고 문안 평지에 집을 장만했다. 엄마는 “그때에 대면 지금 부자가 됐지” 하고 곧잘 그때와 비교하곤 했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최초의 ‘말뚝’에 여전히 매여 있는 셈이었다.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의 기준인 “너무 뒤떨어진 겉모습과 터무니없는 높은 이상과의 갈등, 영원한 문밖의식”, 이런 것들로 해서 아직도 '나'의 의식은 말뚝을 가지고 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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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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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동창들과의 약속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비쳐보고 있는 화자인 ‘나’는 잠시 서울로 오게 된 자신의 내력을 회상한다. ‘나’는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하면서 지방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피난 시절 눈발 속에 웅장하게 서 있던 남대문의 '비장미의 영상'을 향수로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 남대문은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중학동 옛집이나 그 밖의 소녀 시절의 앳된 추억이 서린 서울의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강력한 향수의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지 달포가 넘는 동안 거의 매일같이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남대문을 볼 기회도 많았건만 번번이 딴데로 한눈을 파느라 남대문을 놓치고 만다. 그만큼 이제 서울은 남대문의 정기(精氣) 따위에 지배당하는 곳이 아니라, 급격한 근대화의 도정 위에 놓여 있는 분주한 시민들의 일상의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물질주의에 전도된 그 속물적 공간은 남편과 동창들이 펼쳐 보이는 위장과 가식으로 점철된 환멸의 무대이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지지리도 가난했던 피난민 시절에 딸을 양공주로라도 팔아서 가난을 면해보고자 했던 어머니의 그릇된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택한 길이었다. “양갈보짓을 해서, 딸을 그 짓을 시키지 못해 환장을 한 어머니를 만족시키기도, 누나는 굶건 말건 저희들 배만 채우려는 아귀 귀신같은 동생들을 부양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나’의 희생의 덕을 어느 누구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택한 결혼이었던 것이다. 시골에서는 부자라 일컬어지는 집에 서른이 넘은 신랑의 후취로 들어간 ‘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고, 결국 시앗을 보고 시집을 떠났다. 이혼이란 확실히 결혼보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못 되지만, ‘나’는 그 일을 자신이 선택했고, 생전 처음 어떤 선택을 행사했다는 데 기쁨을 느꼈다. ‘나’의 둘째 남편은 지방신문에 칼럼 따위를 쓰던 대학 강사였는데, 그의 글만 읽고 그에게 반했던 ‘나’는 행복을 갈망하며 그의 가정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마침내는 그의 아내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겁쟁이에 비겁하고 거짓말쟁이였으며 그가 쓰는 글과는 달리 그의 본심은 돈과 명예에 기갈이 들려 있었고, 지방 도시와 지방 대학 강사의 삶을 지긋지긋해하던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아내를 잘못 만났다며 구박을 일삼던 그와 결국 이혼을 하고, ‘나’는 T시에서 돈 좀 번 것으로 소문난 장사꾼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키워야 할 아이들도 없고, 이윤을 추구하는 게 떳떳한 본분인 장사꾼이라 대학 강사처럼 위선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그와 결혼을 한 후 ‘나’는 세 번째 결혼만은 성공한 결혼으로 자신의 인생에 남겨지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동창들과의 만남에서 “정말 세 번씩이나 개가를 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고 드러낸 ‘나’는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참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실 ‘나’는 학창 시절 유난히 부끄러움을 타던, 그 내부에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런 소녀였지만, 이제 ‘나’ 또한 자신이 개탄하는 세태를 살아가면서 변모를 겪어 간다. 그리고 이렇게 화자의 삶의 방식이 변모한 데는 전쟁 이후의 피폐한 삶과 그로 말미암은 윤리적 파탄의 상황을 초래한 자신만의 고통스러운 기억―불행했던 피난시절의 가족사와 세 번의 결혼이라는―이 밑그림으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동창들 중 가장 시집을 잘 가서 살아가고 있는 경희네 집으로 가게 되면서, ‘나’는 느닷없이 경희에게 경렬한 적개심을 느낀다. ‘나’는 마치 경희가 이 세상의 부끄럼 타는 마지막 인간이라도 되는 듯이, 지금이 바로 그 사라져 가는 표정을 봐 둘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듯이 초조해 한다. 모처럼 돌아온 부끄러움의 감정이 자신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자랑하며 상대적으로 ‘나’에게서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경희에 이끌려 그리고 그런 경희와 ‘나’의 인맥을 통해 “어떡하든 한 밑천 잡아 한 번 잘살아보자”는 남편의 욕심에 떠밀려 ‘나’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일어 학원이 있는 종로 일대의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일본인 관광객을 안내하던 여자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그 여자의 말로 인해 ‘나’는 부끄러움의 감각을 불현 듯 느끼게 된 것이다. 자신의 부끄러움의 통증을 자랑스럽게 감수하는 ‘나’는 별의별 지식을 다 가르쳐주면서도 정작 삶에 있어 ‘부끄러움’을 가려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것으로 소설이 끝이 난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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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게임 외 - 한국소설문학대계 61
오정희 외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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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나’는 연로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나’는 혼기를 놓치고 악성 빈혈에 시달리는 노처녀이며, 아버지는 위장을 반넘게 잘라 내고 정기적으로 인슐린을 주사해야 하는 삶에도 집요한 애착을 갖는 환자이다. 어느 날 문득 슬그머니 사라진 오빠로 인하여 '나'와 아버지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어머니는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오빠마저 가출해버린 집에서, 두 부녀는 오빠의 부재를 순간순간 확인하며 저녁식사를 한다. ‘나’는 생활 곳곳에서 오빠의 존재를 확인하며 놀라고 아버지 역시 하루에 열 번 정도는 우편함을 열어 보고 화투패의 운수를 떼면서 오빠를 기다린다. 공연한 기다림으로 서성대는 아버지를 '나'는 공범끼리의 적의와 친밀감으로, 그리고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배반감으로 지켜본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부녀는 습관처럼 화투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이 화투 놀이라는 것이 실은 뒷면만 보아도 훤히 알 수 있는 화투장을 갖고 하는 것으로서, 속임수임을 서로 알면서 벌이는 일종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날도 둘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늘 그러했던 것처럼 ‘저녁의 게임’인 ‘천끗 내기’ 화투 놀이를 시작한다.

오로지 아버지의 심심함을 덜어줄 목적으로 하는 무의미한 화투 놀이가 끝나자 화자는 아버지 몰래 조용히 집을 빠져 나와 어딘가로 향한다. 화자가 도착한 곳은 들판이 끝나는 곳, 바로 야산의 밋밋한 언덕받이의 주택공사장이다. 그곳에서 화자는 몇 번 관계를 맺은 바 있는 공사장 인부와 만나 ‘틀만 짜넣은 창문과 뚫린 지붕’만 있는 공간에서 ‘대팻밥과 각목토막들을 발로 지익지익 밀어 치워’ 놓고 정사를 벌인다. 남자에게 약값을 할 돈을 달라고 하지만, 그것을 화대를 달라는 요구로 알아들은 남자는 모레가 간조니 그때 오면 주겠다는 말을 하며 돈을 주지 않는다.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온 화자는 아버지가 눈치 채지 않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서, 책상서랍을 열고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는다.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의 실체가 드러나고 '나'는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과 만난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재수패를 떼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찬 방바닥에 몸을 뉘인 채, “스커트를 끌어올리고 스웨터도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리고는 “내리누르는 수압으로 자신이 산산히 해체되어 가는 절박감에 입을 벌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자위행위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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