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사실 강신주라고 하는 철학자의 글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의 강의를 들어본 적도 없다(철학을 좋아하고 철학책을 즐겨읽는 편이지만). 알라딘 신간리뷰 때문에 처음 이번에 읽어 보게 되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오늘날 유난히도 잘 ‘팔리는’ 작가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저자 강신주가 김수영을 해석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그건 단연코 ‘단독성’과 ‘자유’이다. 저자는 특히 3장과 4장에서 단독성을 중심으로 김수영의 생애와 작품을 해석하고 있고, 6장부터 마지막 10장까지는 반복해서 김수영이 추구했던 자유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가 새로움을 지향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새로움을 추동하도록 한 동력은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한 집요한 이상이자 이념이었다. 과거의 낡은 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는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영이 이런 강인한 이념을 한시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p.115)

 

아하. 그렇구나. 김수영은 단독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녔던 시인이었나 보구나. 이건 그 어떤 김수영 해석자나 연구자들도 잘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 저자의 해석이 흥미로웠다. 김수영이 추구했던 단독성으로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자.

 

단독성은 글자 그대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이다. […] 이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모든 개체나 사건들이 다른 것과 교환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 맺을 수 있을까? 그래서 들뢰즈는 ‘일반성’과는 다른 ‘보편성’(universality)의 원리를 제안하다. 그것은 지극히 단독적인 것만이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p.117)

 

강신주는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리고 벤야민과 라시스의 사랑을 예로 든다. 두 커플 각각의 단독적인 사랑이었지만, 동시에 두 커플의 사랑에는 사랑의 보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계속 읽어 나갔다.

 

사실 시인, 혹은 모든 예술가는 들뢰즈의 새로운 도식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살아 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 시인은 단독적인 삶을 통해서 인간적 삶의 보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것은 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시를 완성했을 때, 시인은 보편적인 시를 완성한 것이다. […] 김수영은 단독성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태든 자신이든 간에 모든 것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독성’을 집요하게 추구했기 때문이다. […] 진정한 종교나 진정한 시는 타자의 단독성, 혹은 타자만의 고유한 내면을 향해 열려 있어야만 한다. (pp.117-118)

 

여기까지 읽고 나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이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강신주가 단독성으로 번역하고 있는 들뢰즈의 singularité는 국내 철학계에선 일반적으로 ‘특이성’, ‘단독성’, ‘고유성’, ‘독자성’ 등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왔다. 특이성이건 단독성이건 고유성이건, 어쨌든 그 의미가 중요할 터.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세계 및 그 삶의 모습을 해석하는 키워드로 적용하고 있는 들뢰즈의 단독성이 정말 이런 방식으로 적용되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오랜만에 들뢰즈의 책들을 책장에서 꺼내 저 개념에 대해 논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게 됐다(솔직히 이렇게까지 하면서 알라딘 리뷰를 쓰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철학 전공자도 아닌 입장에서 감히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은 고정된 본질을 가진 실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변용을 통해 생성중인 ‘순수사건’이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의 용어를 빌려 어떤 경우에는 ‘주체 없는 개인화’는 또는 ‘엑세이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강신주가 김수영을 단독성의 화신이라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런 것, 즉 사람이나 주체, 사물이나 실체에 관한 개체화 양식과는 매우 다른 형태의 개체화 양식이다(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pp.241-243 참조). 


다시 말해, 들뢰즈의 단독성 또는 ‘단독적인’(singular)은 보통 다수(plural)에 대립되는 ‘개체적인’ 대상이나 인물과 관련된 그런 의미로 쓰이는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강신주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런 방식의 단독성은 일반성/특수성 도식에 입각한 사유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그와 달리 들뢰즈의 단독성은 개별적이지만 일반에 포섭되지 않는 예외적인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통해 완성된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은 타자와의 차이, 비존재와의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가 그 자체로 차이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갈무리, 2004, pp.299-300 참조). 물론 이 차이는 표상들에 의해 분류되고 정리되기 이전의 차이들, 즉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즉자적 차이들이다(이종영, 『정치와 반정치』, 새물결, 2005, p.63 참조).  


좀더 자세한 이해를 위하여, 들뢰즈가 단독성(특이성)에 관해 직접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려 한다.


하나의 어떤 생명을 구성하는 특이성들 또는 사건들이 그에 대응하는 정해진 한 생명의 우연한 일들과 공존한다. 하지만 이때 특이성들 또는 사건들은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모이지도, 나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개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심지어 특이한 생명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어떠한 개별성도, 특이한 생명을 개별화하는 그 어떤 다른 동반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아이들은 그들 모두가 서로를 닮음으로써 개별성이라는 것을 거의 지니지 않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그들은 미소, 동작, 찡그린 얼굴과 같은, 주체적인 성질들이 아닌 사건들을 지닌다. 말하자면 순수 역능인 내재적인 생명이, 고통과 연약함을 뛰어넘은 지복이기까지 한 내재적인 생명이 아주 어린아이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보여주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것들은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내재성의 평면을 채우는 한에 있어서, 또는 엄격하게 보면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것들이 선험적인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한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비결정을 떨쳐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것은 결코 경험적인 의미의 비결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재성에 대한 결정 또는 선험적인 의미의 결정 가능성을 나타낸다. (들뢰즈, 「내재성: 생명」,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p.515)


나는 들뢰즈 자신의 특이성(단독성)에 관한 고유한 개념화가 강신주가 부연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이라고 하는 식의 그런 상식적인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본다. 강신주가 설명하는 식으로 단독성을 이해한다면, 그건 그냥 개(별)성과 아무런 차이를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로서의 단독성은 무수한 매개들을 거쳐 형성된 개인의 개별성과는 전혀 다른 층위, 즉 이데아가 아직 개체 속에서 구현되기 이전의, 즉 선험적인 장에 속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개인화 이전의 자아, 주체화 이전의 자아이며 스스로 지각할 수 없는 자아인 것이다. 주위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과 식별이 되지 않는 자아 말이다. 그런 들뢰즈의 섬뜩하기까지 한 비인격적이고 비주체적인 차원의 단독성 개념을 가지고 와서 김수영이란 인물을 단독성, 아니 다른 누구와도 다른 자신이라고 하는 매우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개(별)성을 욕망했던 인물로 그려내는 강신주의 작업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김수영을 한 명의 자유분방한 리베르탱(libertin)으로 그려내는 저자의 화려한 필치에 감동도 많이 받게 되고, 또 김수영의 인간적인 면모도 새롭게 알게 되어 재밌기도 했지만, 철학적인 개념을 진술하는 대목에선 계속해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영이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또 실제 시인으로서의 삶도 그러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그런 상식적인 차원의 이야기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굳이 맥락과 잘 맞지도 않는 들뢰즈의 단독성 개념을 끌어들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철학의 엄밀한 개념을 상투적으로 적용하면서 일상과 철학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한편으론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들뢰즈 철학 및 그 윤리학의 급진성(비인칭적/비인격적 익명성으로서의 주체론에 기초한)을 너무 단순하게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덧붙여, 이 책에선 지나치게 김수영에 대한 찬사와 정당화 일변도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은데,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김수영이 정말 들뢰즈적인 의미의 단독성을 가진 비인칭적 주체에 관한 대명사로서 김수영인지, 아니면 강신주라고 하는 인물의 자아이상(ego ideal)인 동시에 이상적 자아(ideal ego)인지 계속해서 의문스러웠다. 다시 말해 강신주가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상징적 위치이자 규범이며 가치로서 김수영으로 지칭되는 어떤 관념, 저자의 용어대로 하자면 인문정신이 결국 김수영이라고 하는 대단히 문제적이고 복잡한 역사적 인물에게 (그 인물을 우리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여 문제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정해진 답으로 제시하는) 무비판적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런 강신주의 자아이상으로서 발명된 김수영이 결국 강신주에게 있어선 타인들이(혹은 독자들이) 그렇게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강신주 바로 자신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김수영과 어떠한 거리두기도 없이 김수영을 인문정신의 화신으로 그려내는 이유가 나로선 이해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시종일관 반복해서 김수영을 따라서 우리는 단독성과 자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어떻게 그런 단독성과 자유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데, 그것은 김수영이 저자의 자아이상이자 이상적 자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김수영은 강신주의 또다른 자아로서 김수영인 것이다. 그러니 애써 이 책에서 김수영과 강신주를 구별할 필요도 없고, 강신주를 넘어 김수영에게로, 김수영을 넘어 들뢰즈적인 단독성의 세계로, 혹은 인문정신의 자유로운 주체로 가는 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 같다(비판적 거리두기의 상실! 곧 감상주의로의 투항!). 그저 이 책을 통해 강신주가 재현한 김수영(혹은 강신주의 또다른 자아)이 아닌 미지의 다른 김수영을 만나고 싶다는, 그래서 강신주가 포착하려는 개념으로 쉬이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김수영의 시를 다시 읽고 싶다는, 그런 새로운 자극과 충동을 강하게 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역설적인 의의를 발견했다.   


나로서도 이 책을 읽고 김수영의 시와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에 대해 참으로 새로운 관심(의 의욕)을 갖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샌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정의와 도덕이 자본과 만날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는 내내 샌델이 인용하는 수많은 사례들 앞에서 먼저 그의 성실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고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었을까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이 제기하는 쟁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샌델의 저작들, 가령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나 『왜 도덕인가?』를 읽은 사람, 혹은 샌델의 하버드 강의 동영상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제목만 봐도 샌델이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부제는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이다. 시종일관 유지되는 중심적인 문제의식은 “시장화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시장화(혹은 상품화)로 인해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폐해는 무엇인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 폐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된다. 첫째는 불공정성(또는 불평등성)이고, 둘째는 (가치 또는 도덕적 선의) ‘부패’ 또는 ‘타락’이다. 샌델이 시장화(상품화)의 폐해를 불공정성과 부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제기된 두 가지 문제의식, 즉 ‘정의’와 ‘도덕’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이르러 마침내 “시장”, 더 정확히는 “자본”의 문제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종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는다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시장지상주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낸 삶의 방식,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위기를 전세계에서 수집한 사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나 매번 조금씩 다르게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겐 시장지상주의와 같이 그 의미 전달 방식에 있어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차라리 훨씬 ‘추상적인’ 어떤(?) 단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더 친숙할지 모른다. 시장지상주의라는 협소한(?) 혹은 소박한(?) 표현으론 도저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들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을 터. 그 단어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명칭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폭력과 야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그 이름. 바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그러고 보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이상하리만치 잘 사용하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고, ‘시장화’니 ‘시장지상주의’니 또는 ‘경제화’니 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선 너무나도 소상하게 밝혀내며, 그 여파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 토론을 제기하지만, 정작 샌델은 그런 시장(지상주의)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시장화나 경제화 같은 용어들이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용어라 할지라도, 거기엔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법률, 사회적 관습 등을 포함하는 각종 제도나 국가의 정책,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신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더 나아가 미셸 푸코와 통치성 학파의 연구에 따르자면, 신자유주의는 일련의 이론적 원칙들과 사회-정치적 실천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각 개인을 자본주의적 주체로 구축하는 복잡한 주체화의 테크놀로지이며 지식과 정서를 아우르는 합리성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사회적 주체성 형성의 관점에서, 즉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특권적인 주체생산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목도하는 후기 근대의 다양한 주체성의 형상들이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 혹은 통치성과 불가분한 것임을 의미한다.1)

 

예컨대 샌델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를테면 우정이나 인간의 장기(臟器), 어린 아이들, 명예, 대학 입학허가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시장화에 반대하는 논리의 주된 근거를 공정성과 부패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을 살펴보자.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살펴보려면 이 두 가지 논쟁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시장 교환은 시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항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농부가 굶주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자신의 신장이나 각막을 팔겠다고 동의할지 모르나 정말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불공정하게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 공정성과 관련한 논거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동의, 좀 더 정확하게는 공정한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동의이다. 시장을 이용한 재화 분배에 찬성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시장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다양한 재화를 주어진 가격에 팔지 말지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157~158쪽)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가? 물론 샌델은 그런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패에 관한 반박은 다르다. 이는 시장의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특정 도덕적 ‧ 시민적 재화는 사고파는 경우에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된다. 부패에 관한 논쟁은 공정한 거래계약 조건이 성립됐다고 해서 충족되지는 않는다. 평등한 조건과 불평등한 조건 아래서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는 동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 평가와 교환 때문에 변질되었다고 여겨지는 재화의 도덕적 중요성에 호소한다. […] 부패 논쟁은 재화 자체의 특성과 재화를 지배하는 규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공정한 거래 조건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힘과 부에 불공정한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157~159쪽)


샌델은 공정한 또는 평등한 거래계약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고서, 다시금 그 조건 하에서도 여전히 시장화로 인한 도덕적 위기는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델의 질문은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나가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정한 계약조건을 가정하면서, 시장 안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부정의나 불평등성,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착취’와 ‘계급적대’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고, 공정한 계약조건 속에서 재화의 본래적 사용가치가 왜곡되고 부패하는 문제로 건너뛴다.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물건은 그것의 쓸모(사용가치)가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능성(교환가치, 즉 상품가치)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모든 물건의 교환가치는 화폐 속에만, 그리고 그 물건의 사용가치는 상품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은 샌델이 말하는 식으로 시장지상주의사회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윤리적인 시장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공정한 계약조건’이라고 하는 샌델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싶다. 나는 시장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접근도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시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다는 것, 경제의 영역엔 그 나름의 윤리가 있겠지만, 그 윤리는 우리가 비시장의 영역에서 찾아왔던 그런 윤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윤리라는 것, 따라서 시장, 자본주의, 경제학, 그 어디에 대해서도 우리는 ‘윤리적 정당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애초부터 시장의 성립과 그것의 작동방식이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어떻게 거기서 공정함이나 평등함을 기대하며, 억지로 공정함과 평등함을 가정한 뒤에 다시금 재화의 가치의 부패를 논한단 말인가? 경제의 영역은 결코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인간이 선해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경제는 사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발상, 즉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발명하여 그것을 통해 경제적 이성의 전횡을 제한하고 통제하려 한 것이다. 사회적인 것이 과연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별도의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 문제를 여기서 다루긴 어려우니 일단 원래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데 자발적으로 계약한 주체들의 실천이 정말로 실천 그 자체로선 아무 문제가 없는 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생존 기회를 발견하려는 고투 가운데서, 그런 계약을 자발적으로 그러나 사실은 체제가 규정한 틀 안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즉 생존을 우선시한 전략적 타협의 일환으로 계약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계약이 체제가 설정한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주체의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선택이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체제 내지는 사회가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다시 말해 체제의 질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것일 때 비로소 자발적인 것, 즉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런 자유의 행위(act)를 선택한 주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 주체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윤리적 선택, 그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얻게 되는 체제의 질서 바깥이란 곧 사회적/생물학적 ‘죽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이를테면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개개의 노동자들은 자기계발과 자기향상을 위해 노동 이외의 여가시간까지 모두 희생하여 자신에게 끊임없이 투자하고, 스스로의 비용과 편익을 철저하게 결산하며 삶을 관리해나가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살아간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노동자들의 이러한 자기계발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인적자본으로서 노동시장 안에서 높은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는 체제의 질서를 내면적으로 규범화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계발이 과연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체제에 의해 주체의 외부에 설정되어 있던 선택지의 조건을 주체가 벗어나는 순간, 그/그녀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죽음’이 아니고선 현재로서 이 체제의 바깥으로 완벽하게 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배치하고 규정해놓은 ‘삶의 자리’를 우리는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부자유한 조건 속에서의 자유이다.

 

따라서 그런 위험이 뻔히 전제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제 안에서 주체들의 자발적인 계약이란 전혀 공정하지도, 전혀 평등하지도 않은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시장에 대한 도덕적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러한 우리의 삶의 조건, 즉 과거에만 해도 비시장 규범에 지배받던 삶의 영역들에까지 시장원리가 파고든 오늘의 현실이 과연 정의롭고 선한 것인지 부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질문은 앞서 내가 말한 이러한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제도적 차원의 메커니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 분노를 넘어 

 

샌델은 차마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그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의 관점에서 간단히 정리한다면, 그것은 곧 시장의 논리를 사회 전체에 공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법적 개입을 통해 제도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국가 개입의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그 체제 내의 개인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수단으로서, ‘경쟁’이라고 하는 시장의 제일원리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접합’시킴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방식의 통치양식인 것이다. 요컨대 시장경쟁의 원리를 사회 전면에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전에 없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상품화가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사회의 시장화란 결국 자본이 국가를 통해 새롭게 구축한 통치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비판이론가 하버마스 역시 샌델보다 수십 년 앞서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병리성의 본질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테제로 요약한 바 있다[물론 푸코도 자신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을 통해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포괄, 즉 정부(통치)에 의한 시장원리의 전면적 증식에 대해 말했다]. 그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들 사이의 합리적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유지되어온 또는 그렇게 유지되어야 할 생활세계는 이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하는 체계 논리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그 결과 문화, 사회, 인격이라고 하는 생활세계의 구성요소들이 파괴되며, 결국 문화적 의미상실, 사회적 규범들의 정당성 훼손, 개인의 인격성 파괴, 사회적 관계들의 물화(物化), 경제적 배제, 인간의 자기 소외 등이 나타난다.2)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복지국가에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후기자본주의적 통치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가 샌델의 시장지상주의 테제보다 훨씬 분석적으로 가치 있는 이유는 적어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켜버린 체계를 말함에 있어, 그 체계의 하위범주에 시장만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킨 체계는 경제체계와 행정체계,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관료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체계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 속에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한 이중적 체계가 생활세계로 침입하여 그것을 식민화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식민화는 시장의 단독적인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시장이 국가를 통해, 혹은 국가와 더불어 관철시킨 것이며, 이는 복지국가의 시대나 복지국가의 위기와 더불어 등장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나 본질적으론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복지국가의 시대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견인한 주된 요소가 국가적 관료제였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엔 시장의 경쟁원리라는 것일 뿐. 물론 우리로선 국가의 억압적 지배보다 자본의 달콤한 지배가 더 강력한 지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모두 넘어서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획이 요청되는 것이다.   

 

샌델의 책이 주는 많은 교훈과 장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 읽고선 우리 시대의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늠하긴 어렵다고 본다. 그건 시장지상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바꿔 읽을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다만,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계약조건의 불공정함이나 도덕적 가치 판단의 부패를 넘어) 우리 삶의 위기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이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을 탐구하려는 자극과 동기를 제공해준 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주

1)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0); 사카이 다카시/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서울: 그린비, 2011).


2) 위르겐 하버마스/장춘익 역,『의사소통행위이론 2: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서울: 나남, 2006).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6-19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9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 외 지음 / 자리(내일을 여는 책)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곡된 신학과 성서해석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한국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의 철학 - 이야기는 무엇을 기록하는가
노에 게이치 지음, 김영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다시 보는 안병무의 ‘이야기구원론’

 

일찍이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예수사건의 전승모체」(1984. 10)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전승주체와는 달리 (현존하는 마르코복음의 원자료가 되는) 예수사건전승의 모체(母體)가 오클로스(οχλος) 곧 민중이며, 이들이 사용한 전달의 방식은 변증이나 논증의 언어가 아닌, 이야기 곧 유언비어의 형태였다는 놀라운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안병무의 논의의 출발점에는 마르코복음이라고 하는 텍스트가 글이 된 것은 어느 작가(혹은 공동체)의 창작물이거나 독자적인 기록물이 아니라, 이미 민중들 가운데서 오랜 기간 구전(口傳)되던 민중의 이야기가 채록된, 이른바 ‘구술문학(oral literature)적 텍스트’라고 보는 견해가 확고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1960년대 초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에게 영향을 받은 미디어 생태주의자 월터 옹(Walter J. Ong)이 성서텍스트의 구술성에 대해 주목할 만한 논지를 편 이후, 서구 신약학계에서는 베르너 켈버(Werner Kelber), 조안나 듀이(Joanna Dewey), 데이빗 로즈(David Rhoads), 피터 보싸(Pieter Botha), 크리스토퍼 브라이언(Christopher Bryan) 등이 1980-90년대에 마르코복음의 구술성과 기술성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을 제출하였다.[각주:1]

마르코복음이 독자(reading audience)가 아니라 청중(listening audience)을 위해 쓰인 텍스트,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예를 들어 시장 바닥이나 저녁 모임, 혹은 회당 모임 자리)에서 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낭독하기 위하여 만든 구술문학의 일종으로서, 현장에서 연행을 통해 드러나는 시학적 요소들을 강하게 담지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주장은 현재 신약학계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클로스를 통해 마르코에게 전승된 예수전승의 형식적 특징이 이야기체 더 정확히 말해 유언비어였다는 안병무의 통찰이 갖는 중요한 함의는 예수 사후에 민중들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실질적인 중심에는 하느님/예수의 초월적인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오클로스들이 그들 당대의 고난 속에서 과거 예수와 함께 경험했던 사건과 그의 말씀들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를 ‘이야기구원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통한 구원사건의 추체험(追體驗)은 민중이 예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안병무가 제시한 마르코복음의 이야기구원론은 ‘예수사건은 후대에 어떻게 역사화되었는가’ 나아가 ‘성서는 어떻게 쓰여졌는가’라는 신학적·역사학적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된다. 안병무는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사건에 관한 역사적 보고들을 절대불변의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오클로스를 위시한 원시그리스도교운동의 지지자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무수한 시선의 복합체, 즉 ‘이야기의 집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구원사건의 이야기론에는 이미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기초로 성립된 종래의 서구 근대 역사비평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뛰어넘는 이른바 ‘이야기로서의 역사’, 혹은 ‘역사로서의 이야기론’이 내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병무는 현존하는 마르코복음의 텍스트 안에서 예수 말의 주된 청중이자, 기적의 목격자 또는 수혜자이며, 나아가 하느님나라 선포의 수혜자로 그려지는 그 무명의 사람들 곧 오클로스들이 최초 예수사건의 담지자이자 마르코복음의 저자에게 예수사건을 전승한 전달자이며, 마르코적인 해석자였다는 주장을 통해 복음서에 관한 새로운 역사학을 썼다. 마르코복음서의 예수 전승이 유언비어의 형식을 띠고 있었으리라는 그의 통찰이 갖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전승의 내용과 성격이 전승집단의 정치적 조건 및 실존적 상황을 강하게 반영하여 재구성된 기억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1980년 광주’의 기억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는지를 보면서 안병무는 유언비어라는 예수 이야기의 전승을 착안했던 것인데, 이와 유사하게 예수 수난사 전승 속에는 예수 사후에 예수의 민중들이 경험했던 당대의 실존적인 상황이 반영되어 예수의 수난에 대한 공감적 기억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평화적인 갈릴래아 시대에도 예수는 활동의 초창기부터 적대자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서술된 것(마르코 3, 6)은 저들의 실존적 상황을 노출한 것이며, 바로 그런 상황의 유사성이 저들에게 큰 공감을 일으켰고 위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이야기는 유언비어로 활성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를 공감적으로 기억했다는 것은, 그 기억의 내용 안에 ‘기억되는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이들의 현재 삶’이 들어 있다는 것으로서, 기억은 기억하는 이와 기억되는 이의 소통의 결과가 되는 셈이다. 기억하는 이들이 오클로스이고 이들의 공감 아래서 유언비어 형식으로 마르코복음의 저자에게로 예수 이야기가 전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사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계층적·민족적 좌절의 구조와 그것을 탈출하려는 계층적·민족주의적 욕망과 꿈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각주:2]
 


2. 안병무와 더불어 노에 게이치를! 


이상에서 검토한 대로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를 통해 드러난 안병무의 ‘이야기구원론’ 및 ‘이야기역사론’을 관통하는 핵심에 ‘이야기’의 개념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이야기’라고 하는 개념은 안병무 뿐만이 아니라 서남동이나 김용복 같은 다른 민중신학자들에게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각주:3]

민중신학의 이야기 개념을 다듬어 나가는 데 참조할만한 유용한 책이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의 저명한 과학철학자 노에 게이치가 쓴 『이야기의 철학』이 그것인데, 이 책은 과학철학을 중심으로 언어철학, 현상학, 해석학, 역사철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이른바 ‘이야기로서의 역사’ 혹은 ‘역사로서의 이야기론’를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 또는 ‘이야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하기’ 행위가 멈추지 않는 한, 역사에는 ‘완결’도 ‘종언’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수정된 역사철학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발표한 「역사는 끝났는가」(『내셔널 인터레스트』, 1989)라는 논문을 출발점으로 하여, ‘역사의 종언’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 벌어졌었다. 이 논문에서 후쿠야마는 ‘대문자의 역사History’는 종언됐다고 선언한다. 지금까지는 기원과 텔로스를 갖는 역사관이 지배해왔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근거해 천지창조에서 구원의 완성까지를 그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나라’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을 갖는 유럽적 역사철학이 주도해왔던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렇게 ‘대문자의 역사’의 허구성이 밝혀진 지금, 역사는 무엇인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답변을 역사기술에서 ‘이야기의 복권’을 촉구하는 데서 찾고 있다. 대문자의 ‘역사’가 종언을 고한 이후 ‘기원과 텔로스의 부재’라는 황량 장소에 서 있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이야기하기’라고 하는 언어행위를 통해 역사를 내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와 이야기는 결코 대립하는 관계에 있지 않다. 역사적인 기억 없이는, 즉 이야기되거나 쓰여진 기억 없이는 실재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3). ‘이야기하다’ 또는 ‘쓰다’라는 인간적 행위에 의해 비로소 실재적 역사가 성립한다. 그 ‘이야기하다’라는 행위를 ‘이야기행위’라고 부른다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이야기행위를 통해 인간적 시간 속으로 포함되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역사’는 인간의 기억에 근거해서 이야기되는 내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라고 하는 『헤겔 독해 입문』(Introduction to the Reading of Hegel)의 한 문장을 실마리로 삼아 논의를 펼쳐나간다.

저자가 제기하는 이야기의 역사론 혹은 역사로서의 이야기론이 안병무의 예수역사학에 던져주는 해석의 빛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기’를 통해 해석학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역사의 반(反)실재론). 역사과정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의 시점으로부터는, 기억을 통해 ‘세계를 지금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이외의 방법이 없다. 해석학적 재구성 이전의 조작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과거 즉 초월적인 ‘과거자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다. 기독교신학에서 이러한 초월적인 과거자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양식사비평이 발견해낸 케리그마일 것이다. 케리그마는 공관복음의 모든 예수 기억을 케리그마의 시각에서 처리해버림으로써 예수사건의 역사성을 탈각시켜버렸다. 태초에 케리그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예수사건이 있었다고 하는 안병무의 유명한 테제를 떠올려보라.

둘째, 역사적 사건(Geschichte)과 역사서술(Historie)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전자는 후자의 문맥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역사의 현상주의). 역사는 사건임과 동시에 역사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결국 역사적인 이야기는 실제의 역사적 행위나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경험적 공감에 의해 예수에 대한 기억이 재구성될 수 있었다고 하는 안병무의 마르코복음 형성론에 이미 이러한 역사의 현상주의가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역사서술은 기억의 ‘공동화’와 ‘구조화’를 실현하는 언어적 제작(Poiesis)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로 바꿀 수 있을 텐데, 마르코복음 연구를 통해 안병무 역시 역사란 결국 ‘기억하는 것’(상기)에 다름 아님을 갈파했다고 볼 수 있다. 노에 게이치의 주장대로, 과거는 ‘상기(想起)’라는 경험양식을 떠나서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상기는 단순히 과거를 한 번 더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경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경험들과 결합되고 구조화, 공동화되어 기억된다. 기억되고 상기되는 것은, 정확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해석학적 변형과 해석학적 재구성이 이루어진 과거인 것이다.

넷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축적된다.” 다시 말해 과거는 기억되어 현재 경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습관이 되어 현재의 행동을 제약하고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역사는 언제나 미완결이며, 어떠한 역사서술도 개정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역사의 전체론).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역사의 수행론(Pragmatics)). 역사적 사건과 역사서술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통일성이 우리의 언어행위로 뒷받침되고 있다면, 역사인식에 있어 우리가 ‘이야기’의 외부에 위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외부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시간의 영역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그것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시선’에 위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이것은 민(民)의 이야기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대로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은 민중신학의 이야기론이 이룩한 인식론적 성과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유용한 책이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비교적 평이하게 쓰여진 책이니 만큼 민중신학 저작들과 함께 놓고 읽어 나가면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적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 웹진 <제3시대>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1. Werner Kelber, Oral and Written Gospel: The Hermeneutics of Speaking and Writing in the Synoptic Tradition, Mark, Paul, and Q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Joanna Dewey, “Oral methods of structuring narrative in Mark”, Interpretation 43(1989) 32-44와 “The Gospel of Mark as Oral-Aural Event: Implications for Interpretation", in E. McKnight and E. S. Malbon (ed), New Literary Criticism and the New Testament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145-163; David Rhoads, “Performing the gospel of Mark”, in Björn Krondorfer (ed), Body and Bible: interpreting and experiencing biblical narratives (Philadelphia : Trinity Press, 1992); P. J. J. Botha, “Mark's Story as Oral Traditional Literature: Rethinking the Transmission of Some Traditions about Jesus”, Hervormde Teologiese Studies 47(1991) 304-331; Christopher Bryan, Preface to Mark: Notes on the Gospel in Its Literary and Cultural Setting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참조.

2. 김진호,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 김진호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서울: 삼인, 2006) 96-97 참조.

3. 서남동의 경우는 『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된 「두 이야기의 합류」, 「민담에 관한 脫神學的 고찰」, 「민담의 신학-反神學」에서 ‘이야기’를 독자적인 민중신학의 주제로 다루고 있고, 김용복은 『한국민중의 사회전기: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운동』에 수록된 ‘민중의 사회전기’를 주제로 한 몇 편의 글들에서 사회사적 의미로 확대된 이야기 개념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경제적으로 볼 때 세계화(globalization)란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 유통, 소비 그리고 자본의 투자활동 등 여러 가지 경제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특히 금융 세계화가 초래한 모순이 198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금융위기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2008년 들어 그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초대형 금융공황으로 귀결되었다. 작년 가을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發 금융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 과연 정당한가를 재고하는 계기를 확실히 제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비판적 재고들조차도 우리의 일상과는 다소 멀게 느껴진다는 데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명명하고, 또 그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금융 세계화나 노동시장의 유연화에서 찾는다고 해서 우리가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행위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떠한 제도나 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정치적 선택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가 추상적 이슈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넘어 각자의 심리 속에서 구체적 느낌으로 전환되어 전달되어야만 한다. 결국 우리에겐 좀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다시 말해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이슈들을 매개하는 삶의 기반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바로 그런 점에서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이라고 하는 미국 출신 사회학자의 작업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세넷은 일찍부터 글로벌하고 변화무쌍한 새로운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저작을 발표해왔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그의 저작들, 『현대의 침몰: 현대 자본주의의 해부』(일월서각, 1982), 『살과 돌』(문화과학사, 1999),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문예출판사, 2002), 『불평등 사회의 인간존중』(문예출판사, 2004)에 이어 올해 2월에 번역 출간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원제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흔들어 놓고 있는지 풀어내면서 퇴출 공포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잘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우리가 무엇인가로 인해 불안할 때 이는 우리가 그 불안함의 대상에 관해 알고 있는 것, 어떤 두려움을 유발하는 지식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불안은 오히려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할 때, 왜 자신이 그것의 타깃이 되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불안은 주체가 알지 못할 때, 즉 그가 믿고 있던 신념, 환상, 지식 등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무언가가 불안을 일으킨다면 이는 무엇보다 그 무엇이 지식으로 통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넷이 말하고 싶은 바도 결국 그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파편화되고 불안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지식 속으로 통합할 수 없는 무엇, 지식에 저항하는 무엇, 그 수수께끼 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물론 이러한 불안은 그 수수께끼가 단순히 주체의 무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겨냥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불안의 제거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그 실재적인 대상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불안에 의해 지시되는 어떤 위험에 대한 방어기제가 우리의 삶을 사실상 더욱 피폐하고 힘겹게 한다는 점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가 불안스러워 하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세넷은 이 책에서 그 불안의 근원을 세 가지 주제의 측면에서 조사한다. 1장 “관료제의 변화”는 새로운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 제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관료제의 붕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지금의 세계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논제를 통해 개인이 삶을 서사적으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가 ‘녹아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정 부문의 유연한 조직들에서 예전 사회자본주의 하의 관료제의 제도적인 틀은 붕괴되고, 새로운 조직에서는 새로운 권력 지형이 생겨나고 있다. 조직의 중심부는 관료제의 중간층을 대폭 없애고 조직의 주변부를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통제한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은 제도적 권위를 회피하게 되고, 결국 사회적 자본도 낮아진다. 하여 새로운 조직과 제도의 노동은 근대적 부르주아 노동윤리의 두 요소, 즉 보상의 지연과 장기적 관점의 전략적 사고라는 틀을 해체해버렸다. 인생 설계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시점에서 특권을 갖고 있는 상류층과 그렇지 못한 서민 계층 간의 불평등은 심화된다. 
 

2장 “능력주의와 퇴출의 공포”는 사회에서 퇴출되고 뒤처질 것에 대한 불안감이 ‘기능사회’에서 재능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관료제의 붕괴는 사회 시스템의 유동성을 증가시켰고, 오늘날 현대 사회는 잠재능력 중심의 능력위주 무한 경쟁 소비 사회가 되었다. 그로 인해, 기존의 사회적 안전망과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근대적 장인정신(craftsmanship)은 현대 사회에서 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3장 “정치의 몰락”에서는 소비행태와 정치적 태도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면서, 시민들이 진보 정치에서 점점 등을 돌리면서 스스로 보수적이고 수동적으로 되어가는 이유를 해명하고 있다. 대중들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화 가운데서 소비자로 길들여지면서 정치적 실천마저도 소비행태와 유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4장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개인의 자질”에서는 개개인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문화적 닻’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세넷은 변화의 시대가 새롭게 요구하는 대안적 가치로 사건과 경험의 축적을 통한 서사적 삶의 회복,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로 느끼도록 해주는 개인 유용성의 발휘, 장인정신 등 세 가지를 든다. 덧붙여,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연금 관리 및 의료보험 가입을 대행하는 등 노동자들의 경험이 서사적으로 단절되지 않게 하는 ‘병렬 조직’의 설립, 일자리 나누기, 인생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초자본의 제공 등을 제도적 차원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대중적 염원을 포섭해 사로잡기보다는 끊임없이 대중을 배제하고 개체화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그 대중적 포섭의 토대가 취약하여 지속 가능성을 의심받아 오면서도, 동시에 페리 엔더슨(Perry Anderson)의 지적처럼 “종교개혁 이후 최초로 세계 사상계 내에서 의미심장한 반대파를 갖지 않은” 이데올로기라 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폐해가 큰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저항은 대중조직 차원에서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나 부재한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집중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수많은 전향과 절충, 그리고 다른 대안은 없다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세넷의 이 책은 일상의 구체적인 지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지를 제시해주는 훌륭한 지도의 역할을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6-06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