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 - 상 - 京城, 쇼우와 62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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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복거일의『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이런 줄거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중에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다시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김명석이 쓴 논문「SF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소설『비명을 찾아서』의 서사 비교>를 읽고 비로소 두 작품 간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김명석은 두 작품의 등장 인물의 성격과 서사 상의 시간 구조, 작품에 내재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 등을 꼼꼼하게 비교ㆍ분석하고 있다.

김명석도 지적하듯이 나 역시 대체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 영화라는 장르 상의 차이를 감안한다하더라도 영화는 소설에 비해 역사와 자아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상력이 현저하게 천박하고 통속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이 소설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재밌으며 무엇보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주의와 국사, 국가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작품이 드러내는 이 명확한 주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진리성과 자본주의체제의 공적(公的) ‘정의’(?)를 변호하는 데 헌신해온 자유주의 이데올로그 복거일1)의 그 유명한 소설 데뷔작을 드디어 이번 기회에 읽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보이지 않는 손』을 얼마 전에 서점에서 본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예전부터 우리 사회의 일상의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복거일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게 상당히 중요하고 또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알다시피 복거일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보수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고루한 근대적 사고의 산물인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과 시장의 무한경쟁을 보장하는 ‘자유’라는 이념 그 자체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무능한 보수주의 일반마저 강력히 비판해온 요즘 말로 소위 ‘New-Right’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2) 또 친일 행위의 평가와 단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존의 통념을 갖고는 ‘친일파’를 명확히 정의할 수도 없고, 오히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의 삶이 조선왕조 통치 하의 그것보다 훨씬 나았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친일파 옹호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탈-근대적’ 역사 감각을 소유한 자유주의자인 것이다.3) 게다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 설파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이 주도하는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사용하지 못해 입는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영어공용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국제적 감각을 지닌 ‘세계시민’(cosmopolitan)이기까지 하다.4) 

이렇듯 복거일은 자신이 신봉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탈근대적 자유주의자 곧 신자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가 최초로 쓴 87년의 장편 소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의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을 다시 본다면 스스로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까싶다.

 

다른 독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도 이 작품이 성취한 새로운 기법으로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를 소재로 한 점에 큰 흥미를 느꼈다.『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소설 속에 다시 다까노 다쯔기의『도오꼬우 쇼우와 61년』이라는 소설을 끼어 넣어 두어 실재하는 역사를 뒤집으면 소설의 세계가 성립되게 만들고, 그 소설의 세계를 뒤집으면서 ‘소설 속 소설’의 세계가 형성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소설의 세계를 빠져나온 소설 속 소설의 세계는 독자인 내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의 역사와 축을 같이 하는 세계임을 말한다.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백 년의 고독』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해독하던 멜퀴아데스의 양피지 원고가 결국 독자가 읽어 온 마르케스의 소설『백년의 고독』이었던 것처럼 환상의 역사와 실제의 역사, 소설과 현실, 소설과 소설 내의 세계 간에 존재하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에 대한, 또는 문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역사의 사실성은 문학의 허구성에 의해 문학의 허구성은 역사의 사실성에 의해 서로 허물어지고 해체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가, 문학 속으로 이입되는 역사와 함께 문학 속의 인물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과거/미래의 시간의 질서도 해체되고 독자들은 역사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설에서 기발한 점은 총 109개의 절마다 다 배치되어 있는 에피그람이다. 처음에는 이 에피그람이 각 절 본문의 내용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했으나 독서가 진행될수록 이것들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소설 내 역사적 사건을 의미해서 쓰인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 존재하는 저서들부터 작가가 창조한 저서들, 가상의 잡지, 실제 역사연표들까지 매우 다양한 장르의 에피그람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느 것 하나도 의미없이 사용된 것이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가령 작품 내부에서 조선인들에게 금서로 되어있는 것으로서 동서양 관계에서의 일본의 위치, 일본의 정치, 일본의 미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노 히사이찌라는 사상가의 '독사수필'이라고 하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작가 복거일이 소설 내에서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 지어낸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서 지식과 사회에 대한 평가의 시선과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5)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가 복거일이 이러한 대체역사의 기법을 통해 과연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실마리가 소설의 제목인 ‘비명(碑銘)’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가 찾는 ‘비명’(碑銘)이란 대체 무엇인가? 작품에서 이 ‘비명(碑銘)’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조선인이면서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가야마 미쓰로, 즉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 ‘여기 잠들다’이다. 이광수 및 이광수적인 선택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감옥에 갇혀 갱생교육을 받을 때 만난 조선 문단의 중견급 평론가이자 조선 평론가협회의 간사인 하꾸야마와를 통해 히데요에게 전달된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길은 ‘조선적인 것’ 즉 한용운이나 박은식의 길과 대비되어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6) 그에게 이광수적인 것은 “조선 민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독립을 선언하노라”고 주장하는 다이쇼(大正) 6년의 민족주의자 춘원 이광수에서 “하루라도 속히 황민화될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쇼와 4년의 배교자 가야마 미쓰로로 상반된 방식으로 호출된다. 가야마 미쓰로, 혹은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를 믿지 못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자신의 기원인 ‘민족’을 부정해 버린 역사의 ‘전범’으로 호출된다.7) 물론 히데요는 그러한 이광수의 길을 바로 잡기 위해 그의 비명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문제는 그가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한 이광수를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려든다는 것이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에 대한 불신, 절망, 비겁함 그리고 반(反)민족적 주체화를 의미하지만 박영세로의 거듭남은 민족적 각성을 통한 진정한 자기의 발견에 이르는 길로서 역사에 대한 믿음, 용기, 피의 정화의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그의 스승의 스승이기도 한 만해 선사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한용운은 민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님의 시학’에 담아낸 혁명적인 민족시인으로서, 민족을 배신한 ‘배교자’로 의미화되는 이광수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이광수의 절망과 대비되는 한용운의 ‘용기’는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행동주의적 결단에 이르는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이광수적인 길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동일시하는 한용운, 신채호, 박은식, 예이츠와 정반대에 놓여진다.8)

그런데 과연 식민성의 극복이 필연적으로 민족성의 회복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복거일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에게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을 소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다기보다 아예 처음부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의 열망을 내장시키고 있다. 물론 이때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식민치하에서든 해방된 독립국가에서든 제고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전제로 규정된다. 히데요가 일본 출장 중에 묵었던 집의 주인은 과격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그 역시 민족주의자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히데요는 비난한다. 히데요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사회체제로서 별로 신중하게 탐구할 만 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히데요 자신이 이미 한도우 경금속의 유능한 직원으로서, 자본의 노예로서 부를 향한 욕망을 뼛속 깊은 곳까지 내면화하고 그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노동에 중독 되다시피 한 삶을 사는 전형적인 기업가적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복거일이 현재 이상적으로 설파하는 인간의 모델이 이미 히데요를 통해 투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다시 민족주의 문제로 돌아와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제국주의에 대한 피식민지의 저항을 떠받치는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을 시야에서 가리기 일쑤이다. 결국 많은 경우 식민지의 해방운동은 스스로의 국가를 지향하면서 그 국가를 절대화하고 신비화한다. 그러나 절대화한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식민주의가 식민지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지점은 바로 이 곳, 즉 탈주와 전복이 완료된 그 순간에 여전한 옛 지배자의 얼굴을 혹은 그를 닮아버린 자기 얼굴을 대면하게 만드는 그 역설의 지점일 것이다.

민족주의ㆍ국가주의로 제국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저항 민족주의 자체에도 이미 권력의 담론이 해방의 담론 밑에 은폐된 형태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는 비단 민족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을 계급적 실체로 파악하여 노동계급을 역사변혁의 주체로 전면화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외쳤던 민중민주주의 역시 그 속에 ‘비(非)-민중’을 전제하고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민족이든 계급이든 국민이든 그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집단주체의 기획을 통해서도 역사 속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민족’이나 ‘계급’, ‘국민’을 신화화하는 모든 권력 운동이 위험한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같이 대중의 혼을 사로잡는 절대 신앙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의 권력 비판 능력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서 권력지향적인 정치 신학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패권을 열망하며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면서 다중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를 획일적인 집단적 주체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러한 기획의 결말은 결국 파시즘일 뿐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기어코 작가는 히데요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는 적군을 등장시키고 만다. 위대한 민족주의의 서사를 복원해나가는 ‘남자들의 역사’(his story)를 위해 '여성'과 '어린이'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것일까?


이 소설이 영원히 내게 불편한 것은 바로 식민성을 내면화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식민성에 의지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의 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한민족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백성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허락해주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적 욕망을 담지한 기업가적 주체가 부정되지 않는 국민이나 민족이라면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탁월한 형식적 미학을 갖춘 작품이고 서사 역시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재밌는 소설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차원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길을 시종일관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1) 복거일,『현실과 지향』, 문학과지성사, 1990

          ―,『진단과 처방』, 문학과지성사, 1994

          ―,『소수를 위한 변명』, 문학과지성사, 1997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기업센터(CFE), 1998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2002』, 자유기업센터(CFE), 2002

          ―,『민중주의를 막아내는 길』, 자유기업센터(CFE), 2002

          ―,『진화적 풍경』, 자유기업센터(CFE), 2005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삼성경제연구소, 2005

       ―,『조심스러운 낙관』, 자유기업원, 2005

          ―,『21세기 한국-자유, 진보 그리고 번영의 길』, 나남, 2005

 

   

2) 복거일,『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알음(들린아침), 2003


 

3) 복거일,「한국의 보수가 부진한 까닭」,『한국의 보수를 論한다-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바오, 2005


 

4)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문학과지성사, 2003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SERI 연구에세이 003』, 삼성경제연구소, 2003


 

5)김현숙,「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우와 62년』의 의미,『현대소설연구』, 한국현대소설학회, 1994, p396


 

6)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下), 문학과지성사, 1998, p219~234


 

7)권명아,국사 시대의 민족 이야기-복거일,『비명을 찾아서』,『실천문학』, 실천문학사, 2002년 겨울호, p37-38


 

8)같은 글,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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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유
레온하르트 라가츠 지음, 류장현 옮김 / 다산글방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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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리신 새로운 현실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를 읽고


 

Ⅰ.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적 신학자, 레온하르트 라가츠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는 1868년 스위스의 산간 마을 타민스(Tamins)에서 가난한 소작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 예나, 베를린을 거쳐 다시 바젤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결국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에는 바젤 대성당의 목사로 부름 받았다. 1908년부터 취리히 대학의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의 교수로 일하다가 1921년 53세의 나이에 교수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발적으로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 후로 라가츠는 노동자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자신이 설립한 노동자 훈련원 가르텐호프(Gartenhof)에서 일평생 노동자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수많은 강연, 저술 (주기도문,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 - 예수의 사회적 복음, 예수의 산상설교, 성서의 하느님의 나라 등), 사회운동(노동운동, 반전운동, 반(反)나치스 운동, 평화운동, 사회교육 등)을 통하여 스위스의 울타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종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종교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하여 이끌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유럽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질 만큼 큰 추앙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길’(New Weg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말년까지 집필에 몰두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은 해인 1945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라가츠는 본인이 노동계급의 가정에서 출생하였을 뿐 아니라, 학자로서 성공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발견했고, 하느님의 현실성 속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았으며, 하느님의 자녀됨과 형제됨의 윤리 속에서 평화를 위해 투쟁했다. 또한 그는 모든 신학과 활동을 ‘아우서실’에서 노동자들과 실질적 연대를 통한 세계 변혁적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나타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진정으로 신학이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학문임을 삶으로 보여준 신학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가츠야말로 서구 제1세계의 한 가운데서 일찍이 가장 서구적인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을 삶으로 구현한 모범적 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쳐, F. W. 마르크바르트, 얀 밀리치 로흐만 등으로 이어지는 일단의 실천적인 정치신학자들이 유럽 대륙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특히 라가츠야말로 근대 교회사 및 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적 신학의 선구자였다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시대의 종교적 고난과 사회적 고난을 교회와 신학이라고 하는 제한된 종교적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느님과 이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극복을 위해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투쟁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그가 1921년 안락한 교수직을 포기하고 빈민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현장과 괴리되어 학문의 상아탑 속에서만 혁명을 외쳤던 관념적인 신학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예이다.

 

이러한 라가츠의 예언자적 사상은 성서의 중심 내용과 예수 사건의 핵심인 하느님과 그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예수의 비유』는 그의 하느님 나라 신학이 가장 잘 요약되어 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Ⅱ. 하느님 나라와 예수의 비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비유 해석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나는 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정리된 ‘예수 비유 연구사’를 간략하게 일별한 후, 이 연구사와 관련해 라가츠의 저작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 연구는 신약 성서학의 발전과 맞물려 괄목한 말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율리허(A. Jülicher)는 근대 이후 성서학의 비유 해석사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마치 인류의 역사가 그리스도 이전(B. C. E)과 그리스도 이후(C. E)로 나뉘듯이 비유 해석의 역사도 “율리허 이전과 율리허 이후”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비유 해석사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그리고 그토록 강력하게 지배해 온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에 마지막 조종을 울린 것이 율리허이고, 또 이 점이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유 연구」(Die Gleichnisreden Jesu)가 출판된 1888년은 확실히 비유 해석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 해석사에 있어서 첫 번째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이 율리허였다면, 두 번째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다드(C. H. Dodd)라고 말할 수 있다. 율리허가 고대 교부들에서 중세교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온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종식시키고 해석학적 관심을 비유의 한 가지 주제 혹은 요점으로 돌렸다면, 다드는 비유에서 그러한 한 가지의 요점을 일반적인 도덕적 진리에서 찾는 일에서 돌아서서 비유를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본래의 상황에 비추어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역사적 해석을 향해 나아갔다. 다드에 의하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 비유들을 19세기나 20세기 청중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귀를 기울이던 1세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드의 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비유 연구서는 아마도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예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일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다드가 닦아 놓은 예수의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을 더욱 철저히 추구하였다. 예레미아스에게 있어서 예수 비유 해석의 목적은 다른 시대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시대 사람들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예수의 음성을 그대로 다시 듣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 책의 제2부에 포함된 비판적 분석의 목적은 예수 자신의 육성(ipsissima verba)으로 돌아가려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인자와 그의 말씀만이 우리의 메시지에 완전한 권위를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의미로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밝히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예수의 실제의 살아 있는 음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려진 베일의 뒷편 여기저기서 인자의 모습들을 다시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면 얼마나 큰 소득일까? 그를 만나는 것만이 우리의 설교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다드와 예레미아스 이후에 와서 비유 해석은 또 한 번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새로운 경향의 독특한 특징은 비유를 과거의 것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것으로 연구하려는 경향이기 보다는 ‘본문’(text)으로서의 비유를 연구하려는 관심의 표현이다. 이런 경향의 대두를 우리는 아모스 와일더(Amos N. Wilder)와 제란트 존스(Geraint V. Jones) 그리고 소위 ‘신-해석학’(the New Hermeneutics)으로 유명해진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와 그의 제자들인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과 에베하르트 융엘(Eberhard Jngel) 그리고 북미대륙에서 예수 비유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한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 노만 페린(Norman Perrin),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단 오토 비아(Dan Otto Via),  버나드 브랜든 스캇(Bernard Brandon Scott) 등에서 계속 찾아볼 수 있다.

 

이상 살펴 본 비유 해석사 가운데서 레온하르트 라가츠가 학문적으로 공헌한 바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비유 본문 해석은 애초부터 성서학적으로 전문적인 주석방법론이나 비평학적 성과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상의 많은 부분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유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까지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의 비유 해석은 철저히 신학적 실천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라가츠와 함께 ‘예수의 비유’를 읽어 보자. 

  


Ⅲ. 라가츠와 함께 ‘예수의 비유’ 다시 읽기


라가츠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예수의 비유는 총 25개의 주제에 달하며, 이는 우리가 공관복음서에서 소위 비유라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본문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라가츠는 이러한 비유들을 다시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그것의 도래라는 두 개의 큰 테마로 각각 나누어서 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많은 비유 해석 가운데서도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나의 주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특히 내게 깊은 감명과 시사점을 제공한 동시에 라가츠의 통찰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비유 해석이라고 판단한 제3장 ‘현명을 요구함’(눅16:1-9)과 제8장 ‘이웃’(눅10:25-37)을 집중적으로 다시 살펴봄으로써 이 서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Q1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하느님의 나라는 현명함을 요구한다” (눅16:1-9)


이 비유는 흔히 불의한 청지기 혹은 현명한 청지기의 이야기로 일컬어진다.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비유인데, 주인이 자신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한다고 하는 파격적인 결말을 맺고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비유로 유명하다. 그래서 라가츠는 이 비유를 민담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익살의 요소가 섞여 있는 성스러운 풍자라고 전제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나간다. 즉 청지기를 계급투쟁의 위기에 직면한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사회적 실존과 사회적 과제를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임을 예수가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가츠는 사실상 모든 비유를 부르주아지 대(對)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적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이 비유의 해석 역시 물론 그러하다.

 

라가츠는 ‘세상의 아들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법에서 ‘빛의 아들들’ 보다 현명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하느님 나라를 간구하고 하느님 나라에 헌신해야 할 빛의 자녀들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세상 나라, 특히 자연의 나라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라가츠에 따르자면, 이것은 ‘종교’의 방식과 대립되는 하느님 나라의 ‘세상성’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의 최종적인 근거는 하느님이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라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라가츠가 도달하는 결론은 제도화되고 물신화된 ‘종교’를 넘어선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이처럼 라가츠는 이미 세속 대(對) 신성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필연적인 존재적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라가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현대적인 용법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신이 인간 문명에 대해 비평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른 방식이 아닌 ‘육화의 길’을 택한 것처럼,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제도화의 경로 자체를 문제시해야 하며, 그 귀결로서 형성된 제도적 실재인 종교문화, 교회, 신학 자체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反)신학/탈(脫)신학으로서의 신학하기’의 급진적 실천이 요청된다.”



Q2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하느님의 나라는 네 이웃을 네 ‘자신’이라 여기는 것이다” (눅10:25-37)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로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비유이다. 역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해 라가츠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주장을 다시 한 번 펼침으로써 해석을 시작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예수가 생면부지의 상황에서도 자비로운 구호를 행한 사마리아인의 헌신을 권유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버려야합니다.”

 

라가츠는 이 비유의 본질은 종교와 하느님 나라의 날카로운 대립에 있다고 주장한다. 제사장과 레위는 종교를 대표하고 강도를 만난 자는 사회적 문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기존 그리스도교 체제가 항상 강도만난 자로 상징되는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인 문제에 그동안 어떻게 대처해왔는가를 예수께서 폭로하였으며, 나아가 유대인들의 적이었던 곧 유대적 정통 종교의 외부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했다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구원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웃은 단순한 의미에서 인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서 대하지 않는 종교는 하느님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라가츠는 또 한 번 교회와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라가츠의 해석을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더 철저히 급진화해보고 싶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어 온 율법교사가 예수 앞에서 스스로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강령의 핵심으로 요약하여 답변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과 동일하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즉 네 이웃을 네 ‘자신’이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론과 윤리학을 포괄하는 유일한 영생의 행위(“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임을 역설했던 이가 바로 예수 자신이었으며, 또한 누구보다 그에 신앙적·윤리적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론과 윤리학은 결코 말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진리사건에 충실성으로 응답하는 존재 양식 그 자체였던 것이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론과 윤리학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정치적 지평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레위인이든 제사장이든 그토록 구원론과 윤리학의 이론에 정통한 유대인들이 정말 그 구원과 윤리를 실행해야 할 상황에서는 전혀 윤리적이지 못했으며 외려 한 사마리아인이 그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했다고 하는 반(反)-현실적 이야기를 예수께서는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구원론-윤리학 속에 명시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것, 바로 ‘이웃’이라고 하는 ‘타자성'을 드러내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이웃'을 통해서 말이다. 유대-이스라엘 세계의 무조건적 ‘이자’(異者)인 사마리아인을 그들의 현실 세계에 윤리적 행위의 대상으로 즉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예수는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기표를 불러들인 것만으로도 이미 유대 세계의 외상적 한계와도 같았던 인종적·지역적·계급적 적대를 폭로한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그러한 적대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의 수준에 존재하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던 ‘율법의 모든 행위'(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결합된 구원론 및 윤리학)를 본래의 의미 영역에 재위치시킨 것이다.

 

라가츠 식으로 ‘이웃’을 강도만난 유대인으로 해석하건 나와 같이 ‘사마리아인’으로 해석하건 결국 중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이 해명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교회와 신학이 역사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자폐적인 태도를 취해 왔고, 자신의 이해 관철을 위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기에, 이제 우리는 교회의 신학적·신앙적 도그마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신학적·신앙적 실존 양식’을 찾아야만 한다. 그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실존 양식이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이 두 비유 해석을 다시 살펴 본 것만으로도 나는 라가츠가 주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불의한 세계의 현실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세계의 현실에 무력하다 못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종교’와도 맞서며 하느님의 정의와 구원을 ‘실재’(the Real)적으로 이 땅에 구현해가는 사건이자 혁명운동이다.”



Ⅳ. 라가츠를 넘어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다시 그려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비유를 통해서 다시 그린 세상(re-imagined world)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더 나아가서 비유는 우리가 그 세상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수단이다. 예수께서는 그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사상에 관한 탐구는 결국 그분이 사용한 비유의 말씀들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를 읽고 내가 새롭게 갖게 된 신학적 과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그리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현실의 상징적 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라가츠가 그토록 강력히 주장했듯이, 예수께서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인간의 심성에만 내재하는 종교의 세계로나 현세 너머의 피안의 세계로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차안의 세계에 그대로 겹쳐지는 것만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라가츠와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지나차게 하느님 나라를 현실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현대사회의 계급적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과연 예수의 비유가 현실의 풍자나 모방적인 재현에 그치는 것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예수의 비유는 현실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바로 상상의 차원에서 말이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비전은 이미 상정된 세계를 교체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견지한 현실의 대안적 구상이 아니다. 차라리 그분의 비유는 하나의 반-현실(counter-reality)로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 현실은 ‘상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인력 안에서 상상되기 때문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상황에 마주선 채 스스로를 지키고 균형을 이룬다. 예수님의 비유의 급진성은 희망이고 희망은 진리의 힘을 갖는다. 그것은 희망이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실행된 계획 혹은 청사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상정된 도덕적 세계에 반(反)-현실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갖고 있는 반(反)-현실성 혹은 탈(脫)-현실성 그리고 현실과의 평행성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행한다는 것은 결코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균형을 이루는 관계를 의미한다. 감히 확신하건대, 하느님의 나라는 세계에 대한 부정(否定)으로서 존재할 때만이 그 전복적 혁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리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상상(imaginatio)이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 그에 자극받는 인간 신체의 현재 상태를 한층 더 많이 지시하기에 오류를 범하기 쉬운 그릇된 관념이라 했으나, 신학은 바로 그런 운명적인 제한적 조건─이를 알튀쎄르 이데올로기론의 용어로 바꾸면 ‘현실의 존재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쯤 될 것이다─에서 출발해 그것을 자아와 세계의 진실에 대한 통찰로 역전시키는 창조적 작업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 교회의 신앙담론 전반에 만연한 무력한 주체의 허무주의나 체념적 운명론을 그저 타매(唾罵)하거나 그것이 아니면 사회(학)적 상상력의 결여를 지적하며 개인의 삶의 문제보다 거대담론이나 사회적 의제, 사회구조 등의 문제로 눈을 돌릴 것을 주장하는 소위 진보적 신앙 진영의 요구는 적어도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공평하게 재고(再考)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현시점에서 초점을 달리해볼 때 현대신학에 또 다른 결여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아와 세계의 통합적 진실을 통찰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신학적 상상 자체에 내재한 가능성의 지평을 더욱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내가 현대신학에 기대하는 것은, 신학적 상상력의 극한에 도전함으로써 신학에는 그 자체로 외삽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까지도 필경 무색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비평'(Meta Critique)의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근본적 비평의 경지는 (라가츠와 함께 그러나 라가츠를 넘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신앙적·신학적 상상력을 회복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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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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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금지된 죽음’ 앞에서

―김훈의 「화장」 읽기


1. 화장(火葬) 혹은 화장(化粧)


등단 이후 두 번째로 낸 장편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훈의 첫 단편인 「화장」(문학사상사, 2004)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찬 속에 2004년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200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언니의 폐경」을 통해 나는 김훈을 처음 접했었는데, 전부터 너무 읽어 보고 싶었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비로소 김훈에 대한 한국 문단의 평가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새삼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이 현대성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변화된 시대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작가 김훈이 소설을 통해 보이고 있는 죽음에 대한 묘사와 진술이 현대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라는 전제에 입각하여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총 여섯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소설 「화장」은 아내의 죽음을 맞은 작중 화자가 그 장례를 치르는 3일 간의 이야기를 커다란 틀로 한다. 그리고 그 틀 안에는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 근무하고 있는 화자 ‘나’(오상무)와 2년에 걸친 아내의 뇌종양 투병, 화자인 ‘나'가 살아가는 현실, 남몰래 짝사랑하는 부하 여직원 추은주를 향한 고백이 회상 등의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결국 아내는 생명의 줄을 놓고야 말고, 전립선염을 앓고 있는 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는 순간에도 방광의 무게에 고통스럽게 짓눌려 있어야 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암의 일종인 뇌종양 환자가 한 해 1만 명 정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다는 통계를 굳이 들춰보지 않더라도, 작품 속 아내와 비슷한 경우를 현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흔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뇌종양으로 수술을 두 차례 받고도 끝내는 죽음에 이른 아내와 그 장례를 치르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대중들의 신파를 자극하는 통속적인 TV 드라마가 그 주제를 다루던 것과는 반성의 질적인 차원에서 이미 깊이를 달리하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화장>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중의성(重義性)을 갖고 출발한다. 즉, 한자를 병기하지 않은 한글 ‘화장'은 장례의 한 절차인 ‘火葬'과 얼굴을 꾸미는 ‘化粧'을 동시에 뜻한다. 이같은 대극적 구조는 소설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러한 선명한 대비가 이끌어내는 효과와 주제가 작품 「화장」이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가 아닌 현대인들의 죽음을 둘러싼 문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소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미리 얘기한다면, 이 소설은 인간의 ‘몸’과 그것의 소멸인 죽음에 대한 고찰을 통해 모든 소멸해 가는 것들과 소생하는 것들 사이에서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의미를 치밀하고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기본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그것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작중 화자의 자기 독백에 따르자면, 소설의 주인공은 잡지사 여기자였던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해서 딸을 낳았고 단칸 전세방에서 시작해 10억짜리 단독주택을 장만하였으며, 재벌급 화장품회사 말단사원에서 출발하여 상무로까지 승진한 이 시대의 중년 남성이다. 이러한 그의 아내는 2년 전 뇌종양 판정을 받아 힘들게 투병생활을 하다 뼈만 앙상히 남은 상태에서 임종을 하게 되었고, 주인공은 이런 아내에게 미안함과 측은함을 느끼면서도 아내를 화장(火葬)시키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추은주의 젊고 매력적인 육체를 생각한다. 그는 전립선염 때문에 아내의 죽음에 제대로 슬퍼할 정신적 여유조차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내의 죽음에 대비하여 젊은 여자 추은주를 통해 몸에 대한 희망을 회복하려 하지만 그녀 역시 외국으로 떠나버린다.

죽어가는 아내의 몸과,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젊은 여자 추은주의 몸, 안락사해서 죽을 운명인 개 보리의 몸, 그리고 전립선염으로 날마다 병원에서 오줌을 빼야만 하는 주인공 오상무의 몸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이 소설 속에는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화장(火葬)과 아름다움과 소생을 의미하는 화장(化粧)이 서로 환치될 수 있는 이중의 의미 곧 타나토스(thanatos)와 에로스(eros)가 하나의 융합된 기표로 등장하고 있다. 즉 아내의 장례 절차와 화장터의 모습, 그리고 화장품 회사의 치열한 광고 전략. 즉 아내의 화장(火葬)과 여성들의 화장(化粧)의 이중적 소재가 적절히 배합되어 그려지고 있으며, 삶과 죽음의 운명적 변주를 죽어가는 아내와 추은주 두 여자를 사랑하는 중년 남성의 심리를 통해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1) 막대자석의 양극처럼 마주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상무는 시종일관 머뭇거리며 혼란스러워함을 우리는 소설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화장」의 오상무는 아내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아내의 삶과 죽음은 심전도 계기판의 1 혹은 0으로 수치화된다. 2년의 힘겨운 투병생활을 생각하면 삶보다 죽음이 도리어 일상적이고 사소하다. 일차적으로 여기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노련함이고 죽음을 처리하는 담담함이다. 또 어떠한 개별적인 죽음도 없이 1/0으로 환원되는 획일화된 죽음의 ‘하찮은’ 마지막 장면인 것이다. 질기고 치욕적인 생존과 단순하고 명료한 죽음의 사이의 거래. 자본으로 개시된 ‘시장성’의 시대가 아닌가. 이 장면이 만드는 생의 아이러니는 죽어가는 아내가 ‘개밥’을 챙겨주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부각된다. ‘나’가 바라보는 일상의 세부는 ‘죽어가기’와 ‘개밥 주기’를 동일한 위상에 올려놓는다. 이때 인간의 죽음이 가진 사소한 존재감은 아이러니한 대비효과를 자아내면서 무차별적으로 익명화되고 획일화되는 ‘삶’의 일면을 은유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수치로 ‘처분되는’ 인간의 삶을, 일상에서 인물이 견뎌야 하는 존재적 왜소함을 통해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칼의 노래』에서 보인 서정적 자의식이나 감정의 노출은 철저하게 삼가고 있다.2)

 


2. 현대적 ‘당신의 죽음’과 ‘금지된 죽음’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강연 원고인 『서구의 죽음에 대한 태도 : 중세에서 현대까지』에서 죽음에 대한 유형론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공시태와 통시태라는 관념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태도를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순치된 죽음’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죽음’, ‘멀고도 임박한 죽음’, ‘당신의 죽음’, ‘금지된 죽음’이다.3) 이 소설에는 주인공 ‘나’와 그의 아내를 통해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일반적인 네 가지 태도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던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 또 그것을 수용한다. 그것은 분명 인간 역사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죽음에 대한 ‘종의 집합적 운명에 대한 체념’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아내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단지’ 지연시켜 나갔다. 그 지연의 시간 동안 그녀는 언제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하루 하루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에 대한 자각에 가장 많이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죽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각각의 사람은 그의 개인성의 비밀을 발견하였”던 것이라는 아리에스의 해석은 이 소설 속의 ‘아내’에게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멀고도 임박한 그녀의 죽음은 화자인 남편에게도 ‘당신의 죽음’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그 태도는 프로이트가 치료해야 할 히스테리적 애도를 동반한 근대 초기에 나타난 애정적 가족을 향한 태도는 아니다. 여기서 변화된 우리 시대의 ‘당신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소설 본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1. ‘당신의 죽음’앞에서 : 아내의 죽음을 마주한 ‘나’의 태도


“운명하셨습니다.”(p.11)4)


소설은 아내의 죽음을 알리는 당직 수련의의 한 마디 말로 시작한다. 2년간 세 번의 수술을 받으며 뇌종양으로 괴로워하던 아내는 ‘스스로 잦아들듯' 임종을 맞는다. 누구도 그녀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미안해하고 수치와 고통을 힘겹게 견디던 아내는 “죽음을 향해 온순히 투항한다.” 하지만 아내의 임종을 지켜본 남편 ‘나(오상무)’의 시선은 건조하고 무덤덤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메말라 보이는 침이 한줄기 흘러나왔다. 죽은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뿐이었다. 엉덩이살이 모두 말라버려서 골반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간병인이 아내를 목욕시킬 때 보니까,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 가듯 말라붙어 있었다. 간병인이 사타구니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을 때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들뜬 음모가 부스러지듯이 빠져나왔다. 그때마다 간병인은 수건을 욕조 바닥에 탁탁 털어냈다.(p.11-12)


아내의 죽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 작중 화자인 '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의 표현이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단지 뼈와 가죽뿐인 아내의 몸만이 마치 타인의 시선으로 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성기', ‘대음순', ‘음모' 등의 명칭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과학실의 해부도를 보듯 그것은 아무런 감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아내의 죽음은 휴대폰의 죽음과 비교되기도 한다.


…휴대폰은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었다…(중략)…휴대폰이 죽는 소리는 사소했다. 새벽에, 맥박이 0으로 떨어지면서 아내가 숨을 거둘 때도 심전도 계기판에서 그런 하찮은 소리가 났었다.(p.13)


건조한 서술이 보이는 것은 아내의 임종 직후에서만이 아니다. 아내와 사별한 남편의 충격이 묘사되기도 전에, 장례 준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친척들에게 초상을 알리는 일은 딸이 알아서 할 것이고…(중략)…일간신문 미용담당 기자들에게 알리는 일은 회사 비서실에서 오전 중에 처리할 것이다. 육개장을 국물로 주는 접대용 식사와 음료수까지 모두 병원 영안실에 준비되어 있었고…(중략)…납골당의 자리를 교섭하는 일까지도 영안실 직원은 전화 몇 번으로 끝냈다.(p.18-19)


이것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까워 아내의 유골을 받는 장면에서도 다르지 않다. 단지 “나는 유골함을 받았다. 딸이 울었다”(p.47)라는 짧은 두 문장이 서술되고 바로 추은주의 퇴사로 장면이 넘어간다. 작중 화자인 ‘나'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내에는 아내에 대한 정보가 적지만, 아내와 남편인 ‘나' 사이에 어떠한 특별한 갈등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는 그러한 아내를 간호하며 “여보 울지마…… 내가 있잖아”(p.44)라고 위로한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부부로 살아왔고, 젊은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는 등(p.14)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해왔기에, 작품에 나타나는 ‘나'의 건조한 서술은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어째서 이토록 냉정할 수 있는가.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읽다 보면, ‘나'가 아내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마치 다른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처럼, 곳곳에 등장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내와 살아온 세월들, 잡지사 여기자인 젊은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해서 딸을 낳고, 단칸 전세방에서 시작해서 10억짜리 단독주택을 장만하고 재벌급 화장품회사 말단사원에서부터 상무로까지 승진한 세월들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사우나탕 증기 속에서 풀어졌다.(p.14)


아내의 임종을 덤덤한 듯 딸에게 알리고, 비뇨기과가 문을 열기 전까지 사우나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 하지만, 뜨거운 물속에서 ‘나'가 느끼는 것은 허탈감이다.


…오래고 또 가망 없는 병 수발의 피로감에 불과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중략)…터질 듯한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그 무거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p.18)


‘피로감'과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 아내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하는 ‘나'의 무거움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죽은 사람의 얼굴 표정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얼굴 위에서, 살아서 어른거리고 있었다”(p.18)라는 문장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나'의 심리적 혼란을 보여주며, 간병인이 오지 않은 “그날 밤 병실에 딸린 욕실에서 아내를 목욕시킨 것”(p.43)은 단순히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해 갖는 의무감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p.20)


“생명현상은 그 개별적 생명체 내부의 현상”이며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다”(p.21)는 것은 주치의의 말을 화자가 추측한 것이다.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아내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화자에게도 역시 고통이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고통 받는 아내의 모습일 뿐이다. 보고를 듣고 영업적 판단을 할 뿐 연구과정에 관여할 수는 없는 상무로서의 직책처럼(p.24) 아내의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는 화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내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감내하며 아내의 옆에서 그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걱정하는 아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주며 위로하는 정도(p.38)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자는 그 공포와 불안을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상쇄시키려 몸부림 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생명력 넘치는 젊은 육체를 소유한 추은주를 은밀히 욕망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금지된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변화된 태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리에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 “최근의 대략 1/3세기 동안 우리는 전통적인 관념과 감정상의 극히 혁명적인 변화를 목도하였다. 이 변화는 사회적 관찰자들이 그것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한 것이었다. 이 변화는 진정 전대미문의 현상이었다. 과거에는 도처에 널려 있고 친숙했던 죽음이 삭제되고 사라져갔다. 죽음은 부끄러워졌고, 금지되어갔다.”5) 죽음을 억압하는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2년 동안 아내를 간병하면서 시시각각 맞닥뜨려온 죽음에 공포와 무력감을 생명에 대한 본능적 충동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그것을 좀 더 살펴 보자.



2-2. ‘금지된 죽음’ 앞에서 : ‘아내의 몸’과 ‘추은주’의 몸


작품 안에서 아내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3장과 5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투의 고백적인 글이 삽입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사실을 그려내던 것과 달리 3, 5장에서 화자는 추은주를 향해 경어체를 사용하며 내면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p.25-26)


3장과 5장은 위와 같은 한 단락을 각각 처음과 끝으로 한다. 은(殷), 주(周)라는 지층 밑에 묻혀버린 먼 고대 국가처럼 추은주라는 존재는 '나'에게 닿을 수 없는 모호함이다. 3장의 첫머리에서는 위의 인용에 한 단락이 더 이어진다.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중략)…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중략)…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p.26)


작품에서 끝내 오상무는 추은주와 개인적인 교류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고백은 추은주에게 전해지지 않고 단지 ‘나의 마음속을 흘러갈 뿐'이다. 상무라는 직책에 있는 55세의 화자는 현실에서 추은주에게 경어체를 사용할 가능성이 적다. 즉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이 같은 경어체는 광고파트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추은주를 직접 향한 것이 아니라, 추은주가 연상케 하는 다른 무엇을 향한 것이다. 현실에서의 추은주는 ‘3인칭'이 되어 이름 속으로 사라지며, 그 이름 ‘추은주'는 삶 혹은 생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그 생명에서 점점 멀어지며 육체의 소멸로 향해 가고 있다. 노화현상인 전립선염을 앓고 있는 화자에게 ‘풋것의 시간'은 은(殷), 주(周)라는 고대 국가처럼 아득하고 모호한 것이며 동시에 이상적인 것이다.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대하는 화자는 경어체로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는데, 그것은 소멸을 향해 가는 자신의 몸과 아내의 몸이다. 작품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아내와 추은주. 두 여성의 몸은 대립적이다. 아내는 뇌종양으로 죽음에 가까워 있고, 추은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그리고 소멸해 가는 몸의 화자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다. 완연한 ‘추은주의 몸'을 목격한다는 것은, 점점 소멸을 향해 가는 ‘아내의 몸'을 바라보는 ‘나'를 더욱 초조하고 긴박하게 한다. 3장과 5장에는 생명의 이미지를 더욱 구체화한 상징이 다수 등장하는데, 먼저 추은주의 빗장뼈가 아내의 유골과 비교된다. 추은주의 빗장뼈를 바라보며 화자가 손으로 자신의 빗장뼈를 더듬는 것(p.27)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추은주의 ‘확실하고 가득찬 삶'에 비하면 자신은 다만 ’결핍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 분기 말의 저녁에도 오줌이 빠지지 않는 저의 몸은 무거웠고, 몸 전체가 설명되지 않는 결핍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신입사원인 당신이 상무인 내 자리로 찾아와 웃으면서 청첩장을 내밀고 결혼 휴가를 청할 때도 저의 몸은 그렇게 무거웠고, 결핍의 덩어리였습니다.(p.29)


음식을 넘기는 추은주의 턱 밑 살은 ‘노동자의 식욕’(p.28)이라는 살아 숨쉬는 역동성으로 표현되고 여기서 역시 화자는 자신의 턱 밑 살을 더듬어본다. 이 외에도, ‘젊은 어머니의 젖냄새’(p.28), ‘실핏줄 속을 흐르는 피’(p.29), ‘체액에 젖는 살’(p.29), ‘푸른 정맥’(p.30) 등은 아내의 몸과 대극에 서 있다. 장례가 진행되는 가운데 서술되는 추은주의 몸은 아내의 그것과 대조를 이루면서 죽음을 더욱 무거운 것으로 부각시킨다. 자신의 몸 역시 생명보다는 소멸로 향해 가는 화자는 아득하고 모호한 생명에 두려움과 조급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아,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싶어서, 저의 마음속에 조바심이 일었습니다.(p.26)


아기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츠린(p.43) 이유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적 의미를 안고 있는 <화장>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아내와 추은주, 죽음과 삶, 회색과 마린블루, 내면여행과 가벼움 등과 같은 두 개념의 대조로 진행된다. 아내의 죽음과 지나간 젊음에 대한 미련은 이중의 무거움으로 화자를 압박한다. 하지만 죽음과 삶이 가까워지고 연결되는 화장에 이르러 화자는 이윽고 가벼움으로, 마린블루로, 돌아섬으로써 다소 위안을 얻게 된다.



3. ‘당신의 금지된 죽음’ 앞에서 : ‘죽음의 무거움을 죽음의 가벼움으로’


현실에서 화자는 재벌급 화장품 회사의 상무이며 재고상품 여덟 가지 전체의 선전과 광고에 적용될 리딩 이미지와 문구를 결정해야 한다. 회의 끝에 좁혀진 두 선택지는 ‘여름에서 가을까지―여자의 내면여행'과 ‘여름에 여자는 가벼워진다'이다.(p.25) 그 결정은 발인해서 화장하는 날까지는 이루어져야 한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무거움과 현실은 별개이다. 아내가 죽은 후 첫 문상객이 찾아오기도 전에 걸려온 팔십 노인인 사장의 전화는 화자에게 ‘리딩 이미지'를 환기시켰고, 문상 온 박진수와 정철수는 ‘내면여행'과 ‘가벼움'을 두고 논의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 역시 모호하다. 추은주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모호하다. 추은주의 모호함이 화자에게 이상이자 경외의 대상이라면, 두 과장의 논의는 마치 ‘아내가 숨을 거두던 봄날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p.12) 스모키하다.


그들의 말은 그야말로 스모키하게 들렸다. 헛것들이 사나운 기세로 세상을 휘저으며 어디론지 몰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스모키한 헛것들의 대열 맨 앞에 있었다.(p.35)


자욱한 안개가 낀 회색의 풍경인 ‘스모키'는 작품에서 반복되는 ‘마린블루'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채이다. 화장을 하기 전 작품의 끝 무렵에서 화자는 추은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질퍽거리는, 마린블루의 여름이었지요.(p.42)


유난히 길고 끈끈한 장마가 있었고, 공기 속에 곤쟁이젓국 냄새가 자욱했던 그 여름에, “마린블루 계통의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는 대박이 터졌다”(p.41). 바스락거리고 가벼운, 존재의 전환을 강조하는 마린블루를 사람들은 원했던 것이다. 죽음과 삶은 한 인간이 감당해내기에 몹시 무겁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화자는 ‘방광'(전립선염)이라는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다.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스모키의 회색, 유골의 흰 색은 삶과 생명을 상징하는 역동적이고 바스락거리는 마린블루, 추은주의 산도(産道)가 띠는 분홍빛과 더불어 강렬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대극적인 색채의 배경은 아내와 추은주의 대비를 뚜렷하게 하고 긴장감을 주며 작품의 결말에 다가간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화장을 서술하기에 가까워, 화자는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고백한다.


…당신께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한다고, 시급히 자백하지 않으면 아내와 저와 그리고 이 병원과 울트라 마린블루의 화장품과 이미지들이 모두 일시에 증발해버리고 말 것 같은 조바심으로 발을 구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의 조바심을 아신다면, 여자인 당신의 가슴은 저를 안아주실 것만 같았습니다…(p.45)


적지 않은 장례에 참석했을 테고 몇몇의 죽음은 직접 목격했을 수도 있는 55세의 화자이지만, 아내의 죽음이란 역시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화자의 조바심과 불안, 혹은 두려움은 이 장면에서 최고치에 닿는다. 하지만 여전히 추은주는, 이제는 지층 밑에 묻혀버린 먼 고대국가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듯 보이던 죽음과 삶의 대립은 화장장에서 와해된다.


얼음과 불 사이는 가깝게 느껴졌다.(p.47)

뼛조각들은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를 알아볼 수 없이 흩어져 있었다. 대퇴부인지 두개골인지 알 수 없이 흩뿌려진 조각들이었다. 희고, 가벼워 보였다.(p.47)

오줌이 빠져나간 방광은 들판처럼 허허로웠다.(p.49)


얼음과 불은 상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내의 유골함을 기다리던 화자는 문득 얼음과 불 사이를 가깝게 느껴졌다. 이것은 양립할 수 없는 죽음과 삶이 화자의 인식 속에서 불현듯 가깝게 느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죽음과 삶은 대극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것이라는. 죽음은 무겁다. 투병 중에 신음하던 아내의 고통과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고통은 어둡고 무겁다. 하지만 오히려 소멸을 향해 다가가는 아내의 몸은 두 번째 수술이 끝나자 ‘30킬로그램으로 가벼워졌고’(p.39),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줌 재와 몇 조각의 뼈로 가벼워졌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화자를 짓누르던 ‘방광'의 무게는 아내의 화장 후에 역시 가벼워졌으며 그것은 ‘들판처럼 허허롭게' 느껴졌다. 죽음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다. 아내와 닮은 딸 오영미, 추은주와 닮아 있는 그녀의 딸은 하나의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종양은 생명 속에서만 발생하는 또 다른 생명이다…(중략)…생명 안에는 생명을 부정하는 신생물이 발생하고 서식하면서 영역을 넓혀나간다. 이 현상은 생명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종양과 생명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p.14-15)


작품의 초입에서 뇌종양을 판정하는 주치의의 이 말은 죽음과 삶이 가까움을 암시하고 있다. 인용문의 마지막 두 문장은 곧 “죽음은 삶의 일부인 것이다. 죽음과 삶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로 바꾸어볼 수 있다. 죽음이 삶의 일부인 동시에 또 다른 삶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불교의 윤회관과 닮아 있다. 이것은 아내가 개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 나타난다. 아내는 개를 불교 용어인 보리(菩提)라 이름 짓는다. 뜻은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개 이름이 뭡니까?”

“보리입니다.”

“보리라면?”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뜻이라고 우리 집사람이 그럽디다.”(p.49)


관심과 돌봄이 없으면 끼니를 굶어야 하는 보리를 아내는 자신과 동일시했다. 아내가 한 줌 재로 가벼워지고 화자는 오줌을 빼냄으로 가벼워졌으며 보리 역시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스토리상으로는 아내와 딸이 떠났고 자신도 사회생활로 바쁜 와중에 개의 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안락사시킨 것으로 표현되지만, 보리의 죽음은 곧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의 존재 전환 그리고 죽음과 삶의 연결과 맞닿아 있다. 아내의 화장 후에 보리를 안락사시키고 ‘가벼움'이라는 광고 문안을 결정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삶이라는 무거움을 벗은 화자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미 지나쳐버린 ‘젊은 날의 완연함'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된다. 모든 무거움에서 막 헤어난 그는 가까스로 아내의 죽음에 대해 다소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20여년을 함께 한 아내의 빈 공간은 아무래도 쉽게 채워질 수 없다. 아내와 딸 그리고 추은주까지 모두 떠난 후의 이 빈 공간을 견디어 내는 것은 그에게 남겨진 몫이다. 무거움을 막 벗어버린 그는 그간의 피로에 허물어지듯 잠들었다. “그날 밤,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내 모든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 버리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p.50)라는 마지막 두 문장은 쉼표에서 잠깐의 휴지를 두며 여운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 주체의 삶이 타자의 죽음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다는 점은 인간의 생존이 극단적인 소멸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실감 된다는 근본적인 허약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성찰적 태도는 죽음의 순간을 ‘리얼’하게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때문에 이때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물질(수치)로 환원할 수 없고 관념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죽음의 ‘구체성’이다. 그것은 ‘헛것’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며 때문에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일 수밖에 없다. 타자에게 노출된 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죽음이 도래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탕진해야 하는 비극의 서사를 닮아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김훈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죽음에 앞에서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화자가 그러했듯이, ‘죽음을 포함한 삶’을 견디는 인간은 기만적인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극히 윤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문화의 한 단면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적어도 우리 시대가 죽음에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그러한 침묵은 죽음 앞에서 결국 무의미한 현실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통을 내면화하는 성찰적 인물들의 지난한 노력가운데서 점점 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죽음이 근대 이전과 같이 낭만화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죽음이 더 이상은 배제되거나 침묵되지도 않는 가운데, 이제는 죽음 앞에서 삶과 죽음의 ‘사이’, 타자와 나 ‘사이’의 간극을 성찰하며 그 긴장을 동력으로 하여 현실을 견뎌내는 윤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1) “ ‘때로 유해를 흩뿌리는 일이 수반되는 화장이 이루어질 때, 그것의 대의는 기독교적 전통과 단절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계몽과 현대성의 현현이다. 화장의 심층적인 동기는 화장이 육체를 제거하고 망각하고 무화하는 가장 급진적인 수단, 진정으로 최종적(too final)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라는 점이다.’ (.....) 미국인들은 시신을 염할 때 동시에 화장(化粧)을 한다. 이런 장례는 분명 영국처럼 급진적인 전통과의 단절은 아니지만, 전통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아름답게 화장하고 부패의 냄새를 방향처리한 채 누워 접견객을 맞이하는 시신은 또 다른 방식의 죽음의 억압인 것이다.” 김종엽,「현대성과 죽음」, 계간 <문학동네> 4호, 1995년 가을호, p.452


2) 양윤의,「얼굴 없는 사제의 숭고한 문장들: 김훈論」,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2006년 9월 21일자)


3) 김종엽, 앞의 글, p.441


4) 이하 모든 소설 본문의 페이지 표시는 2004년도 제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刊行)의 페이지를 따른 것임.


5) 김종엽, 앞의 글,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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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생각 없음(thoughtlessness), 그것이 곧 악(惡)이며 죄(罪)인 것이다”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20세기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의 실질적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0년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받았던 재판을 취재하고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의 후기에서 아이히만의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히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91쪽)

 

아렌트에 따르자면,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돌리는 톱니바퀴 중 하나의 ‘톱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다른 일반적인 독일 국민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자신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의 그런 평범함이 그의 진정한 ‘죄명’이다. 즉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이성을 가진 인간답게 자신의 언어로써 현실을 말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또 자신의 판단력에 기초해 현실을 판단하지 못하는 ‘생각 없음의 평범함’이 그의 ‘죄악’이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넘어 근대성 혹은 서구적 근대문명에 대한 근원적 통찰로 일컬어지는 아렌트의 그 유명한 테제 곧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역시 아렌트의 저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 ‘삶의 방식으로서 철학하기(생각하기)’라는 주제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양철학사 전반에 적용하여 현실 사회와 정치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는 데 선구적 단초가 되어 준 철학적 화두 17개를 분석하고 있다. 아이히만과 같이 생각 없는 평범한 이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와 사회 세계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시민의 태도를 유지했던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현대의 다양한 철학자들이 품었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화두를 다시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독자들이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타자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좀 살펴보자. 제1부에서는 고대와 중세에 철학하는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물음들이라 할 수 있었던 것들, 예컨대 철학하기의 본위로서 진리라는 문제설정, 그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진리와 권력의 결합 문제,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 종교와 철학의 상관관계 등의 주제와 관련해서 소크라테스와 아렌트, 플라톤과 푸코, 아리스토와 아감벤 그리고 아렌트,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렌트가 호출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신들이 퇴장하고 인간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근대의 여명기를 다루면서, 마키아벨리와 그람시, 홉스와 투키디데스, 로크와 노직을 통해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는 역사적 기원에서부터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 과정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담론의 역사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근대성 탐구의 본격적인 기초를 놓은 대표적 철학자들인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계몽과 도덕 형이상학 그리고 이성적인 것의 현실성 등을 깊이 탐구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근대성에 내재한 위기와 비극을 예언했던 루소와 니체 그리고 맑스와 베버의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적 합리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계급 적대 및 인간 소외, 물화(物化) 등의 근대적 '실재'(實在, the Real)와의 대면을 주선하고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20세기 이후, 이성의 극단적 비이성화라는 근대성의 자화상과 이런 시대에 맞선 철학자들의 상이한 문제 해결 방식을 소개한다. 근대성은 끝나지 않은 계몽의 기획이라 외치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구축을 통해 체계의 생활세계 식민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하버마스, 인간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고 주장했던 아렌트, 기본적 자유의 동등한 보장을 통해 정치적 평등을 실현코자 했던 롤즈, 해체를 통해 한 사회가 새로운 개념ㆍ방법ㆍ사유 등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사회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리다가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은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기본적인 철학적 지식을 맛보면서 모든 학문하기의 출발점인 철학적 사유의 방법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사에 대한 일목요연한 개념 정리가 다시 한 번 필요한 재학생들도 정독하면 새로운 시각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성숙한 시각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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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성의 잠은 유령을 낳는다”
  
 

한 화가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희망과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삶을 살고자 했던 화가는 돈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민으로서 권력에 저항하는 이중적 삶을 영위했다. 그의 성격은 다소 수줍은 편이었으나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만큼 늘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재능이 있는 촌뜨기에 불과했던 화가는 프레스코, 테피스트리 밑그림, 초상화, 인물화, 판화로 스페인의 수석 궁정화가로 출세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갈림길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진실한 표현으로 불린다. 초상화, 종교화를 막론하고 현실을 그 근원까지 직시하면서 무의식적 상황 하에서 인간성의 번뇌 내지는 육체의 불건전한 상태를 풍자적이고 혁신적으로 그려 리얼리즘을 준비한 이 화가의 이름은 바로 프렌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이다.


고야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점에서 계몽주의 사고를 가졌던 18세기 화가에 속했지만, 앙드레 말로가 지적했듯이,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혔던”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그의 작품이 스페인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그 당시 절망적인 사회상을 직접 체험했고 이를 풍자하고 있어 인생과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사실로 인해 그의 그림과 일생은 소설이나 영화의 좋은 소재가 충분히 될 만하다. 그런 기대가 비로소 실현 되어 현대의 독자 혹은 관객과의 만남을 시작하였다. 영화 ‘아마데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 출신의 거장 밀로스 포만 감독과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세계적 작가들의 원작을 영상으로 옮겨 금세기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손꼽히는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리 직접 함께 집필한 소설 『고야의 유령Goya’s ghosts』이 작년 12월에 번역 출간되었다. (영화 ‘고야의 유령’ 역시 올해 상반기 중으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소설은 중세의 끝자락에서 저물어갔던 스페인 제국의 한 가운데서 반역과 혁명의 시대를 민중들과 함께 맞이했던 위대한 화가의 시선을 통해 두 남녀의 비극적 운명을 다루고 있다. 명석한 두뇌와 재주로 권력과 출세의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 로렌조 신부, 또 그 남자에게 순정을 빼앗긴 여자 이네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비극적인 재회가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진다. 또한 작가들은 어둡고 혼탁했던 고야의 그림에서처럼 단지 겉으로 드러난 역사의 현장 이외에도 핏빛으로 얼룩진 소시민들의 삶까지 조심스럽게 조명하며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갈등 구조는 이네스가 누명을 쓰고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로렌조는 감옥에 갇힌 이네스를 사랑하게 된다. 이네스의 아버지는 딸을 구하기 위해 성당 재건 비용을 부담키로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는 로렌조를 심문해 종교재판소를 모독하는 허위문서를 강제로 받아낸다. 결국 로렌조는 해외로 추방되고, 세월은 훌쩍 20여 년을 뛰어넘는다. 로렌조는 프랑스 나폴레옹 정권의 핵심 간부가 되어 스페인에 돌아온다. 그는 종교가 아닌 이성과 혁명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야망을 품는다. 한편 이네스는 감옥에서 로렌조의 딸을 낳아서 수녀원에 보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로렌조는 딸을 찾아다니지만, 수녀원을 뛰쳐나간 딸은 우여곡절 끝에 거리의 여자가 되고 만다. 로렌조는 딸의 존재가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마드리드의 모든 창녀들을 해외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화가 고야는 나이가 들어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지만, 엎치락 뒤치락하는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이네스와 그녀의 딸을 도우려는 수호천사가 된다.
 

고야의 작품 인생에 가공의 두 남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잘 연결시킨 이 소설은 그 자체로서 마치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고야의 수많은 그림들 중 하나가 실제로 그랬을 법하다는 상상을 갖게 한다. 고야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야가 살던 당대의 혼란과 중요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근 일세기에 달하는 스페인 및 유럽 역사에 관한 긴 안목이 함께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 역시 주인공들의 운명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역사적 문맥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 ‘고야의 유령’에서 ‘유령’은 궁정화가로서 누구보다도 상류층의 삶을 동경했던 고야로 하여금 끝내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나 나폴레옹 전쟁의 참상, 종교재판과 전체주의에 대한 조소와 분노, 민중의 빈곤 등을 본능적으로 그리게 한 ‘기억들’, 즉 상기되는 것을 거부하고 억압된 무의식을 가장하여 화가에게 돌아오려고 몸부림친 기억들을 의미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간의 안개로부터 엄습해오는 유령과 괴물들. 그것은 묻히고 감추어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돌아오는 어떤 것이다. 회상을 거부하게 만드는 기억이 바로 고야의 그림 속에 존재하는 유령이다. 철학자 리처드 커니가 트라우마적인 기억 혹은 “불가능한” 기억이라고 부른 그것이 결국은 고야의 그림들을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을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로 가득한 서사 전개의 기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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