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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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금지된 죽음’ 앞에서

―김훈의 「화장」 읽기


1. 화장(火葬) 혹은 화장(化粧)


등단 이후 두 번째로 낸 장편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훈의 첫 단편인 「화장」(문학사상사, 2004)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찬 속에 2004년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200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단편 「언니의 폐경」을 통해 나는 김훈을 처음 접했었는데, 전부터 너무 읽어 보고 싶었던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비로소 김훈에 대한 한국 문단의 평가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새삼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이 현대성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변화된 시대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작가 김훈이 소설을 통해 보이고 있는 죽음에 대한 묘사와 진술이 현대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라는 전제에 입각하여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총 여섯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소설 「화장」은 아내의 죽음을 맞은 작중 화자가 그 장례를 치르는 3일 간의 이야기를 커다란 틀로 한다. 그리고 그 틀 안에는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 근무하고 있는 화자 ‘나’(오상무)와 2년에 걸친 아내의 뇌종양 투병, 화자인 ‘나'가 살아가는 현실, 남몰래 짝사랑하는 부하 여직원 추은주를 향한 고백이 회상 등의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결국 아내는 생명의 줄을 놓고야 말고, 전립선염을 앓고 있는 나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는 순간에도 방광의 무게에 고통스럽게 짓눌려 있어야 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암의 일종인 뇌종양 환자가 한 해 1만 명 정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다는 통계를 굳이 들춰보지 않더라도, 작품 속 아내와 비슷한 경우를 현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흔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뇌종양으로 수술을 두 차례 받고도 끝내는 죽음에 이른 아내와 그 장례를 치르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대중들의 신파를 자극하는 통속적인 TV 드라마가 그 주제를 다루던 것과는 반성의 질적인 차원에서 이미 깊이를 달리하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화장>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중의성(重義性)을 갖고 출발한다. 즉, 한자를 병기하지 않은 한글 ‘화장'은 장례의 한 절차인 ‘火葬'과 얼굴을 꾸미는 ‘化粧'을 동시에 뜻한다. 이같은 대극적 구조는 소설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러한 선명한 대비가 이끌어내는 효과와 주제가 작품 「화장」이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가 아닌 현대인들의 죽음을 둘러싼 문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소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미리 얘기한다면, 이 소설은 인간의 ‘몸’과 그것의 소멸인 죽음에 대한 고찰을 통해 모든 소멸해 가는 것들과 소생하는 것들 사이에서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의미를 치밀하고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기본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그것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작중 화자의 자기 독백에 따르자면, 소설의 주인공은 잡지사 여기자였던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해서 딸을 낳았고 단칸 전세방에서 시작해 10억짜리 단독주택을 장만하였으며, 재벌급 화장품회사 말단사원에서 출발하여 상무로까지 승진한 이 시대의 중년 남성이다. 이러한 그의 아내는 2년 전 뇌종양 판정을 받아 힘들게 투병생활을 하다 뼈만 앙상히 남은 상태에서 임종을 하게 되었고, 주인공은 이런 아내에게 미안함과 측은함을 느끼면서도 아내를 화장(火葬)시키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추은주의 젊고 매력적인 육체를 생각한다. 그는 전립선염 때문에 아내의 죽음에 제대로 슬퍼할 정신적 여유조차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내의 죽음에 대비하여 젊은 여자 추은주를 통해 몸에 대한 희망을 회복하려 하지만 그녀 역시 외국으로 떠나버린다.

죽어가는 아내의 몸과,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젊은 여자 추은주의 몸, 안락사해서 죽을 운명인 개 보리의 몸, 그리고 전립선염으로 날마다 병원에서 오줌을 빼야만 하는 주인공 오상무의 몸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이 소설 속에는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화장(火葬)과 아름다움과 소생을 의미하는 화장(化粧)이 서로 환치될 수 있는 이중의 의미 곧 타나토스(thanatos)와 에로스(eros)가 하나의 융합된 기표로 등장하고 있다. 즉 아내의 장례 절차와 화장터의 모습, 그리고 화장품 회사의 치열한 광고 전략. 즉 아내의 화장(火葬)과 여성들의 화장(化粧)의 이중적 소재가 적절히 배합되어 그려지고 있으며, 삶과 죽음의 운명적 변주를 죽어가는 아내와 추은주 두 여자를 사랑하는 중년 남성의 심리를 통해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1) 막대자석의 양극처럼 마주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상무는 시종일관 머뭇거리며 혼란스러워함을 우리는 소설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화장」의 오상무는 아내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아내의 삶과 죽음은 심전도 계기판의 1 혹은 0으로 수치화된다. 2년의 힘겨운 투병생활을 생각하면 삶보다 죽음이 도리어 일상적이고 사소하다. 일차적으로 여기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노련함이고 죽음을 처리하는 담담함이다. 또 어떠한 개별적인 죽음도 없이 1/0으로 환원되는 획일화된 죽음의 ‘하찮은’ 마지막 장면인 것이다. 질기고 치욕적인 생존과 단순하고 명료한 죽음의 사이의 거래. 자본으로 개시된 ‘시장성’의 시대가 아닌가. 이 장면이 만드는 생의 아이러니는 죽어가는 아내가 ‘개밥’을 챙겨주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부각된다. ‘나’가 바라보는 일상의 세부는 ‘죽어가기’와 ‘개밥 주기’를 동일한 위상에 올려놓는다. 이때 인간의 죽음이 가진 사소한 존재감은 아이러니한 대비효과를 자아내면서 무차별적으로 익명화되고 획일화되는 ‘삶’의 일면을 은유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수치로 ‘처분되는’ 인간의 삶을, 일상에서 인물이 견뎌야 하는 존재적 왜소함을 통해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칼의 노래』에서 보인 서정적 자의식이나 감정의 노출은 철저하게 삼가고 있다.2)

 


2. 현대적 ‘당신의 죽음’과 ‘금지된 죽음’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강연 원고인 『서구의 죽음에 대한 태도 : 중세에서 현대까지』에서 죽음에 대한 유형론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공시태와 통시태라는 관념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태도를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순치된 죽음’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죽음’, ‘멀고도 임박한 죽음’, ‘당신의 죽음’, ‘금지된 죽음’이다.3) 이 소설에는 주인공 ‘나’와 그의 아내를 통해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일반적인 네 가지 태도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던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 또 그것을 수용한다. 그것은 분명 인간 역사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죽음에 대한 ‘종의 집합적 운명에 대한 체념’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아내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단지’ 지연시켜 나갔다. 그 지연의 시간 동안 그녀는 언제일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하루 하루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에 대한 자각에 가장 많이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죽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각각의 사람은 그의 개인성의 비밀을 발견하였”던 것이라는 아리에스의 해석은 이 소설 속의 ‘아내’에게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멀고도 임박한 그녀의 죽음은 화자인 남편에게도 ‘당신의 죽음’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그 태도는 프로이트가 치료해야 할 히스테리적 애도를 동반한 근대 초기에 나타난 애정적 가족을 향한 태도는 아니다. 여기서 변화된 우리 시대의 ‘당신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소설 본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1. ‘당신의 죽음’앞에서 : 아내의 죽음을 마주한 ‘나’의 태도


“운명하셨습니다.”(p.11)4)


소설은 아내의 죽음을 알리는 당직 수련의의 한 마디 말로 시작한다. 2년간 세 번의 수술을 받으며 뇌종양으로 괴로워하던 아내는 ‘스스로 잦아들듯' 임종을 맞는다. 누구도 그녀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미안해하고 수치와 고통을 힘겹게 견디던 아내는 “죽음을 향해 온순히 투항한다.” 하지만 아내의 임종을 지켜본 남편 ‘나(오상무)’의 시선은 건조하고 무덤덤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메말라 보이는 침이 한줄기 흘러나왔다. 죽은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뿐이었다. 엉덩이살이 모두 말라버려서 골반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간병인이 아내를 목욕시킬 때 보니까,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 가듯 말라붙어 있었다. 간병인이 사타구니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을 때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들뜬 음모가 부스러지듯이 빠져나왔다. 그때마다 간병인은 수건을 욕조 바닥에 탁탁 털어냈다.(p.11-12)


아내의 죽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 작중 화자인 '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의 표현이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단지 뼈와 가죽뿐인 아내의 몸만이 마치 타인의 시선으로 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성기', ‘대음순', ‘음모' 등의 명칭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과학실의 해부도를 보듯 그것은 아무런 감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아내의 죽음은 휴대폰의 죽음과 비교되기도 한다.


…휴대폰은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었다…(중략)…휴대폰이 죽는 소리는 사소했다. 새벽에, 맥박이 0으로 떨어지면서 아내가 숨을 거둘 때도 심전도 계기판에서 그런 하찮은 소리가 났었다.(p.13)


건조한 서술이 보이는 것은 아내의 임종 직후에서만이 아니다. 아내와 사별한 남편의 충격이 묘사되기도 전에, 장례 준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친척들에게 초상을 알리는 일은 딸이 알아서 할 것이고…(중략)…일간신문 미용담당 기자들에게 알리는 일은 회사 비서실에서 오전 중에 처리할 것이다. 육개장을 국물로 주는 접대용 식사와 음료수까지 모두 병원 영안실에 준비되어 있었고…(중략)…납골당의 자리를 교섭하는 일까지도 영안실 직원은 전화 몇 번으로 끝냈다.(p.18-19)


이것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까워 아내의 유골을 받는 장면에서도 다르지 않다. 단지 “나는 유골함을 받았다. 딸이 울었다”(p.47)라는 짧은 두 문장이 서술되고 바로 추은주의 퇴사로 장면이 넘어간다. 작중 화자인 ‘나'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내에는 아내에 대한 정보가 적지만, 아내와 남편인 ‘나' 사이에 어떠한 특별한 갈등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는 그러한 아내를 간호하며 “여보 울지마…… 내가 있잖아”(p.44)라고 위로한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부부로 살아왔고, 젊은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는 등(p.14)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해왔기에, 작품에 나타나는 ‘나'의 건조한 서술은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어째서 이토록 냉정할 수 있는가.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읽다 보면, ‘나'가 아내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마치 다른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처럼, 곳곳에 등장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내와 살아온 세월들, 잡지사 여기자인 젊은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해서 딸을 낳고, 단칸 전세방에서 시작해서 10억짜리 단독주택을 장만하고 재벌급 화장품회사 말단사원에서부터 상무로까지 승진한 세월들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사우나탕 증기 속에서 풀어졌다.(p.14)


아내의 임종을 덤덤한 듯 딸에게 알리고, 비뇨기과가 문을 열기 전까지 사우나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 하지만, 뜨거운 물속에서 ‘나'가 느끼는 것은 허탈감이다.


…오래고 또 가망 없는 병 수발의 피로감에 불과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중략)…터질 듯한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그 무거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p.18)


‘피로감'과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 아내의 죽음을 몸으로 감당하는 ‘나'의 무거움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죽은 사람의 얼굴 표정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얼굴 위에서, 살아서 어른거리고 있었다”(p.18)라는 문장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나'의 심리적 혼란을 보여주며, 간병인이 오지 않은 “그날 밤 병실에 딸린 욕실에서 아내를 목욕시킨 것”(p.43)은 단순히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해 갖는 의무감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p.20)


“생명현상은 그 개별적 생명체 내부의 현상”이며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다”(p.21)는 것은 주치의의 말을 화자가 추측한 것이다.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아내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화자에게도 역시 고통이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고통 받는 아내의 모습일 뿐이다. 보고를 듣고 영업적 판단을 할 뿐 연구과정에 관여할 수는 없는 상무로서의 직책처럼(p.24) 아내의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는 화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내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감내하며 아내의 옆에서 그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걱정하는 아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주며 위로하는 정도(p.38)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자는 그 공포와 불안을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상쇄시키려 몸부림 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생명력 넘치는 젊은 육체를 소유한 추은주를 은밀히 욕망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금지된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변화된 태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리에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 “최근의 대략 1/3세기 동안 우리는 전통적인 관념과 감정상의 극히 혁명적인 변화를 목도하였다. 이 변화는 사회적 관찰자들이 그것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한 것이었다. 이 변화는 진정 전대미문의 현상이었다. 과거에는 도처에 널려 있고 친숙했던 죽음이 삭제되고 사라져갔다. 죽음은 부끄러워졌고, 금지되어갔다.”5) 죽음을 억압하는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2년 동안 아내를 간병하면서 시시각각 맞닥뜨려온 죽음에 공포와 무력감을 생명에 대한 본능적 충동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서 그것을 좀 더 살펴 보자.



2-2. ‘금지된 죽음’ 앞에서 : ‘아내의 몸’과 ‘추은주’의 몸


작품 안에서 아내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3장과 5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투의 고백적인 글이 삽입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사실을 그려내던 것과 달리 3, 5장에서 화자는 추은주를 향해 경어체를 사용하며 내면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p.25-26)


3장과 5장은 위와 같은 한 단락을 각각 처음과 끝으로 한다. 은(殷), 주(周)라는 지층 밑에 묻혀버린 먼 고대 국가처럼 추은주라는 존재는 '나'에게 닿을 수 없는 모호함이다. 3장의 첫머리에서는 위의 인용에 한 단락이 더 이어진다.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중략)…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중략)…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p.26)


작품에서 끝내 오상무는 추은주와 개인적인 교류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고백은 추은주에게 전해지지 않고 단지 ‘나의 마음속을 흘러갈 뿐'이다. 상무라는 직책에 있는 55세의 화자는 현실에서 추은주에게 경어체를 사용할 가능성이 적다. 즉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이 같은 경어체는 광고파트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추은주를 직접 향한 것이 아니라, 추은주가 연상케 하는 다른 무엇을 향한 것이다. 현실에서의 추은주는 ‘3인칭'이 되어 이름 속으로 사라지며, 그 이름 ‘추은주'는 삶 혹은 생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그 생명에서 점점 멀어지며 육체의 소멸로 향해 가고 있다. 노화현상인 전립선염을 앓고 있는 화자에게 ‘풋것의 시간'은 은(殷), 주(周)라는 고대 국가처럼 아득하고 모호한 것이며 동시에 이상적인 것이다.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대하는 화자는 경어체로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는데, 그것은 소멸을 향해 가는 자신의 몸과 아내의 몸이다. 작품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아내와 추은주. 두 여성의 몸은 대립적이다. 아내는 뇌종양으로 죽음에 가까워 있고, 추은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그리고 소멸해 가는 몸의 화자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다. 완연한 ‘추은주의 몸'을 목격한다는 것은, 점점 소멸을 향해 가는 ‘아내의 몸'을 바라보는 ‘나'를 더욱 초조하고 긴박하게 한다. 3장과 5장에는 생명의 이미지를 더욱 구체화한 상징이 다수 등장하는데, 먼저 추은주의 빗장뼈가 아내의 유골과 비교된다. 추은주의 빗장뼈를 바라보며 화자가 손으로 자신의 빗장뼈를 더듬는 것(p.27)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추은주의 ‘확실하고 가득찬 삶'에 비하면 자신은 다만 ’결핍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 분기 말의 저녁에도 오줌이 빠지지 않는 저의 몸은 무거웠고, 몸 전체가 설명되지 않는 결핍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신입사원인 당신이 상무인 내 자리로 찾아와 웃으면서 청첩장을 내밀고 결혼 휴가를 청할 때도 저의 몸은 그렇게 무거웠고, 결핍의 덩어리였습니다.(p.29)


음식을 넘기는 추은주의 턱 밑 살은 ‘노동자의 식욕’(p.28)이라는 살아 숨쉬는 역동성으로 표현되고 여기서 역시 화자는 자신의 턱 밑 살을 더듬어본다. 이 외에도, ‘젊은 어머니의 젖냄새’(p.28), ‘실핏줄 속을 흐르는 피’(p.29), ‘체액에 젖는 살’(p.29), ‘푸른 정맥’(p.30) 등은 아내의 몸과 대극에 서 있다. 장례가 진행되는 가운데 서술되는 추은주의 몸은 아내의 그것과 대조를 이루면서 죽음을 더욱 무거운 것으로 부각시킨다. 자신의 몸 역시 생명보다는 소멸로 향해 가는 화자는 아득하고 모호한 생명에 두려움과 조급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아,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싶어서, 저의 마음속에 조바심이 일었습니다.(p.26)


아기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츠린(p.43) 이유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적 의미를 안고 있는 <화장>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아내와 추은주, 죽음과 삶, 회색과 마린블루, 내면여행과 가벼움 등과 같은 두 개념의 대조로 진행된다. 아내의 죽음과 지나간 젊음에 대한 미련은 이중의 무거움으로 화자를 압박한다. 하지만 죽음과 삶이 가까워지고 연결되는 화장에 이르러 화자는 이윽고 가벼움으로, 마린블루로, 돌아섬으로써 다소 위안을 얻게 된다.



3. ‘당신의 금지된 죽음’ 앞에서 : ‘죽음의 무거움을 죽음의 가벼움으로’


현실에서 화자는 재벌급 화장품 회사의 상무이며 재고상품 여덟 가지 전체의 선전과 광고에 적용될 리딩 이미지와 문구를 결정해야 한다. 회의 끝에 좁혀진 두 선택지는 ‘여름에서 가을까지―여자의 내면여행'과 ‘여름에 여자는 가벼워진다'이다.(p.25) 그 결정은 발인해서 화장하는 날까지는 이루어져야 한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무거움과 현실은 별개이다. 아내가 죽은 후 첫 문상객이 찾아오기도 전에 걸려온 팔십 노인인 사장의 전화는 화자에게 ‘리딩 이미지'를 환기시켰고, 문상 온 박진수와 정철수는 ‘내면여행'과 ‘가벼움'을 두고 논의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 역시 모호하다. 추은주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모호하다. 추은주의 모호함이 화자에게 이상이자 경외의 대상이라면, 두 과장의 논의는 마치 ‘아내가 숨을 거두던 봄날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p.12) 스모키하다.


그들의 말은 그야말로 스모키하게 들렸다. 헛것들이 사나운 기세로 세상을 휘저으며 어디론지 몰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스모키한 헛것들의 대열 맨 앞에 있었다.(p.35)


자욱한 안개가 낀 회색의 풍경인 ‘스모키'는 작품에서 반복되는 ‘마린블루'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채이다. 화장을 하기 전 작품의 끝 무렵에서 화자는 추은주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질퍽거리는, 마린블루의 여름이었지요.(p.42)


유난히 길고 끈끈한 장마가 있었고, 공기 속에 곤쟁이젓국 냄새가 자욱했던 그 여름에, “마린블루 계통의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는 대박이 터졌다”(p.41). 바스락거리고 가벼운, 존재의 전환을 강조하는 마린블루를 사람들은 원했던 것이다. 죽음과 삶은 한 인간이 감당해내기에 몹시 무겁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화자는 ‘방광'(전립선염)이라는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다.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스모키의 회색, 유골의 흰 색은 삶과 생명을 상징하는 역동적이고 바스락거리는 마린블루, 추은주의 산도(産道)가 띠는 분홍빛과 더불어 강렬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대극적인 색채의 배경은 아내와 추은주의 대비를 뚜렷하게 하고 긴장감을 주며 작품의 결말에 다가간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화장을 서술하기에 가까워, 화자는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고백한다.


…당신께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한다고, 시급히 자백하지 않으면 아내와 저와 그리고 이 병원과 울트라 마린블루의 화장품과 이미지들이 모두 일시에 증발해버리고 말 것 같은 조바심으로 발을 구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의 조바심을 아신다면, 여자인 당신의 가슴은 저를 안아주실 것만 같았습니다…(p.45)


적지 않은 장례에 참석했을 테고 몇몇의 죽음은 직접 목격했을 수도 있는 55세의 화자이지만, 아내의 죽음이란 역시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화자의 조바심과 불안, 혹은 두려움은 이 장면에서 최고치에 닿는다. 하지만 여전히 추은주는, 이제는 지층 밑에 묻혀버린 먼 고대국가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듯 보이던 죽음과 삶의 대립은 화장장에서 와해된다.


얼음과 불 사이는 가깝게 느껴졌다.(p.47)

뼛조각들은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를 알아볼 수 없이 흩어져 있었다. 대퇴부인지 두개골인지 알 수 없이 흩뿌려진 조각들이었다. 희고, 가벼워 보였다.(p.47)

오줌이 빠져나간 방광은 들판처럼 허허로웠다.(p.49)


얼음과 불은 상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내의 유골함을 기다리던 화자는 문득 얼음과 불 사이를 가깝게 느껴졌다. 이것은 양립할 수 없는 죽음과 삶이 화자의 인식 속에서 불현듯 가깝게 느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죽음과 삶은 대극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것이라는. 죽음은 무겁다. 투병 중에 신음하던 아내의 고통과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고통은 어둡고 무겁다. 하지만 오히려 소멸을 향해 다가가는 아내의 몸은 두 번째 수술이 끝나자 ‘30킬로그램으로 가벼워졌고’(p.39),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줌 재와 몇 조각의 뼈로 가벼워졌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화자를 짓누르던 ‘방광'의 무게는 아내의 화장 후에 역시 가벼워졌으며 그것은 ‘들판처럼 허허롭게' 느껴졌다. 죽음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연결되어 있다. 아내와 닮은 딸 오영미, 추은주와 닮아 있는 그녀의 딸은 하나의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종양은 생명 속에서만 발생하는 또 다른 생명이다…(중략)…생명 안에는 생명을 부정하는 신생물이 발생하고 서식하면서 영역을 넓혀나간다. 이 현상은 생명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종양과 생명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p.14-15)


작품의 초입에서 뇌종양을 판정하는 주치의의 이 말은 죽음과 삶이 가까움을 암시하고 있다. 인용문의 마지막 두 문장은 곧 “죽음은 삶의 일부인 것이다. 죽음과 삶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로 바꾸어볼 수 있다. 죽음이 삶의 일부인 동시에 또 다른 삶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불교의 윤회관과 닮아 있다. 이것은 아내가 개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 나타난다. 아내는 개를 불교 용어인 보리(菩提)라 이름 짓는다. 뜻은 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개 이름이 뭡니까?”

“보리입니다.”

“보리라면?”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뜻이라고 우리 집사람이 그럽디다.”(p.49)


관심과 돌봄이 없으면 끼니를 굶어야 하는 보리를 아내는 자신과 동일시했다. 아내가 한 줌 재로 가벼워지고 화자는 오줌을 빼냄으로 가벼워졌으며 보리 역시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스토리상으로는 아내와 딸이 떠났고 자신도 사회생활로 바쁜 와중에 개의 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안락사시킨 것으로 표현되지만, 보리의 죽음은 곧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의 존재 전환 그리고 죽음과 삶의 연결과 맞닿아 있다. 아내의 화장 후에 보리를 안락사시키고 ‘가벼움'이라는 광고 문안을 결정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삶이라는 무거움을 벗은 화자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미 지나쳐버린 ‘젊은 날의 완연함'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된다. 모든 무거움에서 막 헤어난 그는 가까스로 아내의 죽음에 대해 다소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20여년을 함께 한 아내의 빈 공간은 아무래도 쉽게 채워질 수 없다. 아내와 딸 그리고 추은주까지 모두 떠난 후의 이 빈 공간을 견디어 내는 것은 그에게 남겨진 몫이다. 무거움을 막 벗어버린 그는 그간의 피로에 허물어지듯 잠들었다. “그날 밤, 나는 모처럼 깊이 잠들었다. 내 모든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 버리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p.50)라는 마지막 두 문장은 쉼표에서 잠깐의 휴지를 두며 여운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 주체의 삶이 타자의 죽음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다는 점은 인간의 생존이 극단적인 소멸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실감 된다는 근본적인 허약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성찰적 태도는 죽음의 순간을 ‘리얼’하게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때문에 이때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물질(수치)로 환원할 수 없고 관념으로 개념화할 수 없는 죽음의 ‘구체성’이다. 그것은 ‘헛것’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며 때문에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일 수밖에 없다. 타자에게 노출된 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죽음이 도래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탕진해야 하는 비극의 서사를 닮아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김훈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죽음에 앞에서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화자가 그러했듯이, ‘죽음을 포함한 삶’을 견디는 인간은 기만적인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극히 윤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문화의 한 단면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적어도 우리 시대가 죽음에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과 오히려 그러한 침묵은 죽음 앞에서 결국 무의미한 현실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통을 내면화하는 성찰적 인물들의 지난한 노력가운데서 점점 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죽음이 근대 이전과 같이 낭만화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죽음이 더 이상은 배제되거나 침묵되지도 않는 가운데, 이제는 죽음 앞에서 삶과 죽음의 ‘사이’, 타자와 나 ‘사이’의 간극을 성찰하며 그 긴장을 동력으로 하여 현실을 견뎌내는 윤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1) “ ‘때로 유해를 흩뿌리는 일이 수반되는 화장이 이루어질 때, 그것의 대의는 기독교적 전통과 단절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계몽과 현대성의 현현이다. 화장의 심층적인 동기는 화장이 육체를 제거하고 망각하고 무화하는 가장 급진적인 수단, 진정으로 최종적(too final)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라는 점이다.’ (.....) 미국인들은 시신을 염할 때 동시에 화장(化粧)을 한다. 이런 장례는 분명 영국처럼 급진적인 전통과의 단절은 아니지만, 전통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아름답게 화장하고 부패의 냄새를 방향처리한 채 누워 접견객을 맞이하는 시신은 또 다른 방식의 죽음의 억압인 것이다.” 김종엽,「현대성과 죽음」, 계간 <문학동네> 4호, 1995년 가을호, p.452


2) 양윤의,「얼굴 없는 사제의 숭고한 문장들: 김훈論」,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2006년 9월 21일자)


3) 김종엽, 앞의 글, p.441


4) 이하 모든 소설 본문의 페이지 표시는 2004년도 제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刊行)의 페이지를 따른 것임.


5) 김종엽, 앞의 글,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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