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비유
레온하르트 라가츠 지음, 류장현 옮김 / 다산글방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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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리신 새로운 현실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를 읽고


 

Ⅰ.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적 신학자, 레온하르트 라가츠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는 1868년 스위스의 산간 마을 타민스(Tamins)에서 가난한 소작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 예나, 베를린을 거쳐 다시 바젤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결국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에는 바젤 대성당의 목사로 부름 받았다. 1908년부터 취리히 대학의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의 교수로 일하다가 1921년 53세의 나이에 교수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발적으로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 후로 라가츠는 노동자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자신이 설립한 노동자 훈련원 가르텐호프(Gartenhof)에서 일평생 노동자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수많은 강연, 저술 (주기도문,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 - 예수의 사회적 복음, 예수의 산상설교, 성서의 하느님의 나라 등), 사회운동(노동운동, 반전운동, 반(反)나치스 운동, 평화운동, 사회교육 등)을 통하여 스위스의 울타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종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종교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하여 이끌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유럽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질 만큼 큰 추앙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길’(New Weg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말년까지 집필에 몰두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은 해인 1945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라가츠는 본인이 노동계급의 가정에서 출생하였을 뿐 아니라, 학자로서 성공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발견했고, 하느님의 현실성 속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았으며, 하느님의 자녀됨과 형제됨의 윤리 속에서 평화를 위해 투쟁했다. 또한 그는 모든 신학과 활동을 ‘아우서실’에서 노동자들과 실질적 연대를 통한 세계 변혁적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나타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진정으로 신학이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학문임을 삶으로 보여준 신학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가츠야말로 서구 제1세계의 한 가운데서 일찍이 가장 서구적인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을 삶으로 구현한 모범적 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쳐, F. W. 마르크바르트, 얀 밀리치 로흐만 등으로 이어지는 일단의 실천적인 정치신학자들이 유럽 대륙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특히 라가츠야말로 근대 교회사 및 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적 신학의 선구자였다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시대의 종교적 고난과 사회적 고난을 교회와 신학이라고 하는 제한된 종교적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느님과 이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극복을 위해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투쟁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그가 1921년 안락한 교수직을 포기하고 빈민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현장과 괴리되어 학문의 상아탑 속에서만 혁명을 외쳤던 관념적인 신학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예이다.

 

이러한 라가츠의 예언자적 사상은 성서의 중심 내용과 예수 사건의 핵심인 하느님과 그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예수의 비유』는 그의 하느님 나라 신학이 가장 잘 요약되어 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Ⅱ. 하느님 나라와 예수의 비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비유 해석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나는 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정리된 ‘예수 비유 연구사’를 간략하게 일별한 후, 이 연구사와 관련해 라가츠의 저작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 연구는 신약 성서학의 발전과 맞물려 괄목한 말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율리허(A. Jülicher)는 근대 이후 성서학의 비유 해석사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마치 인류의 역사가 그리스도 이전(B. C. E)과 그리스도 이후(C. E)로 나뉘듯이 비유 해석의 역사도 “율리허 이전과 율리허 이후”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비유 해석사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그리고 그토록 강력하게 지배해 온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에 마지막 조종을 울린 것이 율리허이고, 또 이 점이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유 연구」(Die Gleichnisreden Jesu)가 출판된 1888년은 확실히 비유 해석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 해석사에 있어서 첫 번째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이 율리허였다면, 두 번째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다드(C. H. Dodd)라고 말할 수 있다. 율리허가 고대 교부들에서 중세교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온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종식시키고 해석학적 관심을 비유의 한 가지 주제 혹은 요점으로 돌렸다면, 다드는 비유에서 그러한 한 가지의 요점을 일반적인 도덕적 진리에서 찾는 일에서 돌아서서 비유를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본래의 상황에 비추어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역사적 해석을 향해 나아갔다. 다드에 의하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 비유들을 19세기나 20세기 청중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귀를 기울이던 1세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드의 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비유 연구서는 아마도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예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일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다드가 닦아 놓은 예수의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을 더욱 철저히 추구하였다. 예레미아스에게 있어서 예수 비유 해석의 목적은 다른 시대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시대 사람들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예수의 음성을 그대로 다시 듣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 책의 제2부에 포함된 비판적 분석의 목적은 예수 자신의 육성(ipsissima verba)으로 돌아가려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인자와 그의 말씀만이 우리의 메시지에 완전한 권위를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의미로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밝히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예수의 실제의 살아 있는 음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려진 베일의 뒷편 여기저기서 인자의 모습들을 다시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면 얼마나 큰 소득일까? 그를 만나는 것만이 우리의 설교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다드와 예레미아스 이후에 와서 비유 해석은 또 한 번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새로운 경향의 독특한 특징은 비유를 과거의 것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것으로 연구하려는 경향이기 보다는 ‘본문’(text)으로서의 비유를 연구하려는 관심의 표현이다. 이런 경향의 대두를 우리는 아모스 와일더(Amos N. Wilder)와 제란트 존스(Geraint V. Jones) 그리고 소위 ‘신-해석학’(the New Hermeneutics)으로 유명해진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와 그의 제자들인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과 에베하르트 융엘(Eberhard Jngel) 그리고 북미대륙에서 예수 비유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한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 노만 페린(Norman Perrin),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단 오토 비아(Dan Otto Via),  버나드 브랜든 스캇(Bernard Brandon Scott) 등에서 계속 찾아볼 수 있다.

 

이상 살펴 본 비유 해석사 가운데서 레온하르트 라가츠가 학문적으로 공헌한 바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비유 본문 해석은 애초부터 성서학적으로 전문적인 주석방법론이나 비평학적 성과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상의 많은 부분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유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까지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의 비유 해석은 철저히 신학적 실천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라가츠와 함께 ‘예수의 비유’를 읽어 보자. 

  


Ⅲ. 라가츠와 함께 ‘예수의 비유’ 다시 읽기


라가츠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예수의 비유는 총 25개의 주제에 달하며, 이는 우리가 공관복음서에서 소위 비유라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본문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라가츠는 이러한 비유들을 다시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그것의 도래라는 두 개의 큰 테마로 각각 나누어서 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많은 비유 해석 가운데서도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나의 주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특히 내게 깊은 감명과 시사점을 제공한 동시에 라가츠의 통찰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비유 해석이라고 판단한 제3장 ‘현명을 요구함’(눅16:1-9)과 제8장 ‘이웃’(눅10:25-37)을 집중적으로 다시 살펴봄으로써 이 서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Q1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하느님의 나라는 현명함을 요구한다” (눅16:1-9)


이 비유는 흔히 불의한 청지기 혹은 현명한 청지기의 이야기로 일컬어진다.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비유인데, 주인이 자신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한다고 하는 파격적인 결말을 맺고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비유로 유명하다. 그래서 라가츠는 이 비유를 민담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익살의 요소가 섞여 있는 성스러운 풍자라고 전제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나간다. 즉 청지기를 계급투쟁의 위기에 직면한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사회적 실존과 사회적 과제를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임을 예수가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가츠는 사실상 모든 비유를 부르주아지 대(對)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적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이 비유의 해석 역시 물론 그러하다.

 

라가츠는 ‘세상의 아들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법에서 ‘빛의 아들들’ 보다 현명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하느님 나라를 간구하고 하느님 나라에 헌신해야 할 빛의 자녀들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세상 나라, 특히 자연의 나라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라가츠에 따르자면, 이것은 ‘종교’의 방식과 대립되는 하느님 나라의 ‘세상성’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의 최종적인 근거는 하느님이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라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라가츠가 도달하는 결론은 제도화되고 물신화된 ‘종교’를 넘어선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이처럼 라가츠는 이미 세속 대(對) 신성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필연적인 존재적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라가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현대적인 용법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신이 인간 문명에 대해 비평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른 방식이 아닌 ‘육화의 길’을 택한 것처럼,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제도화의 경로 자체를 문제시해야 하며, 그 귀결로서 형성된 제도적 실재인 종교문화, 교회, 신학 자체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反)신학/탈(脫)신학으로서의 신학하기’의 급진적 실천이 요청된다.”



Q2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하느님의 나라는 네 이웃을 네 ‘자신’이라 여기는 것이다” (눅10:25-37)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로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비유이다. 역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해 라가츠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주장을 다시 한 번 펼침으로써 해석을 시작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예수가 생면부지의 상황에서도 자비로운 구호를 행한 사마리아인의 헌신을 권유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버려야합니다.”

 

라가츠는 이 비유의 본질은 종교와 하느님 나라의 날카로운 대립에 있다고 주장한다. 제사장과 레위는 종교를 대표하고 강도를 만난 자는 사회적 문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기존 그리스도교 체제가 항상 강도만난 자로 상징되는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인 문제에 그동안 어떻게 대처해왔는가를 예수께서 폭로하였으며, 나아가 유대인들의 적이었던 곧 유대적 정통 종교의 외부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했다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구원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웃은 단순한 의미에서 인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서 대하지 않는 종교는 하느님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라가츠는 또 한 번 교회와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라가츠의 해석을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더 철저히 급진화해보고 싶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어 온 율법교사가 예수 앞에서 스스로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강령의 핵심으로 요약하여 답변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과 동일하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즉 네 이웃을 네 ‘자신’이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론과 윤리학을 포괄하는 유일한 영생의 행위(“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임을 역설했던 이가 바로 예수 자신이었으며, 또한 누구보다 그에 신앙적·윤리적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론과 윤리학은 결코 말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진리사건에 충실성으로 응답하는 존재 양식 그 자체였던 것이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론과 윤리학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정치적 지평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레위인이든 제사장이든 그토록 구원론과 윤리학의 이론에 정통한 유대인들이 정말 그 구원과 윤리를 실행해야 할 상황에서는 전혀 윤리적이지 못했으며 외려 한 사마리아인이 그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했다고 하는 반(反)-현실적 이야기를 예수께서는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구원론-윤리학 속에 명시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것, 바로 ‘이웃’이라고 하는 ‘타자성'을 드러내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이웃'을 통해서 말이다. 유대-이스라엘 세계의 무조건적 ‘이자’(異者)인 사마리아인을 그들의 현실 세계에 윤리적 행위의 대상으로 즉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예수는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기표를 불러들인 것만으로도 이미 유대 세계의 외상적 한계와도 같았던 인종적·지역적·계급적 적대를 폭로한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그러한 적대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의 수준에 존재하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던 ‘율법의 모든 행위'(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결합된 구원론 및 윤리학)를 본래의 의미 영역에 재위치시킨 것이다.

 

라가츠 식으로 ‘이웃’을 강도만난 유대인으로 해석하건 나와 같이 ‘사마리아인’으로 해석하건 결국 중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이 해명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교회와 신학이 역사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자폐적인 태도를 취해 왔고, 자신의 이해 관철을 위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기에, 이제 우리는 교회의 신학적·신앙적 도그마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신학적·신앙적 실존 양식’을 찾아야만 한다. 그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실존 양식이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이 두 비유 해석을 다시 살펴 본 것만으로도 나는 라가츠가 주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불의한 세계의 현실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세계의 현실에 무력하다 못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종교’와도 맞서며 하느님의 정의와 구원을 ‘실재’(the Real)적으로 이 땅에 구현해가는 사건이자 혁명운동이다.”



Ⅳ. 라가츠를 넘어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다시 그려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비유를 통해서 다시 그린 세상(re-imagined world)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더 나아가서 비유는 우리가 그 세상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수단이다. 예수께서는 그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사상에 관한 탐구는 결국 그분이 사용한 비유의 말씀들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를 읽고 내가 새롭게 갖게 된 신학적 과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그리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현실의 상징적 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라가츠가 그토록 강력히 주장했듯이, 예수께서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인간의 심성에만 내재하는 종교의 세계로나 현세 너머의 피안의 세계로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차안의 세계에 그대로 겹쳐지는 것만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라가츠와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지나차게 하느님 나라를 현실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현대사회의 계급적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과연 예수의 비유가 현실의 풍자나 모방적인 재현에 그치는 것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예수의 비유는 현실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바로 상상의 차원에서 말이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비전은 이미 상정된 세계를 교체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견지한 현실의 대안적 구상이 아니다. 차라리 그분의 비유는 하나의 반-현실(counter-reality)로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 현실은 ‘상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인력 안에서 상상되기 때문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상황에 마주선 채 스스로를 지키고 균형을 이룬다. 예수님의 비유의 급진성은 희망이고 희망은 진리의 힘을 갖는다. 그것은 희망이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실행된 계획 혹은 청사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상정된 도덕적 세계에 반(反)-현실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갖고 있는 반(反)-현실성 혹은 탈(脫)-현실성 그리고 현실과의 평행성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행한다는 것은 결코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균형을 이루는 관계를 의미한다. 감히 확신하건대, 하느님의 나라는 세계에 대한 부정(否定)으로서 존재할 때만이 그 전복적 혁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리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상상(imaginatio)이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 그에 자극받는 인간 신체의 현재 상태를 한층 더 많이 지시하기에 오류를 범하기 쉬운 그릇된 관념이라 했으나, 신학은 바로 그런 운명적인 제한적 조건─이를 알튀쎄르 이데올로기론의 용어로 바꾸면 ‘현실의 존재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쯤 될 것이다─에서 출발해 그것을 자아와 세계의 진실에 대한 통찰로 역전시키는 창조적 작업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 교회의 신앙담론 전반에 만연한 무력한 주체의 허무주의나 체념적 운명론을 그저 타매(唾罵)하거나 그것이 아니면 사회(학)적 상상력의 결여를 지적하며 개인의 삶의 문제보다 거대담론이나 사회적 의제, 사회구조 등의 문제로 눈을 돌릴 것을 주장하는 소위 진보적 신앙 진영의 요구는 적어도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공평하게 재고(再考)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현시점에서 초점을 달리해볼 때 현대신학에 또 다른 결여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아와 세계의 통합적 진실을 통찰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신학적 상상 자체에 내재한 가능성의 지평을 더욱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내가 현대신학에 기대하는 것은, 신학적 상상력의 극한에 도전함으로써 신학에는 그 자체로 외삽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까지도 필경 무색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비평'(Meta Critique)의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근본적 비평의 경지는 (라가츠와 함께 그러나 라가츠를 넘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신앙적·신학적 상상력을 회복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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