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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서.예언서 연구 - 논문집 III
김정준 / 한국신학연구소 / 1988년 5월
평점 :
품절
“아모스의 神學”
―김정준,「신학사상」23(1978)
I. 요약
1. 序論 - 아모스 神學의 根據
아모스 신학의 근거는 아모스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기록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한 자이다. 아모스 예언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면 예언자적인 그의 사명이나 활동도 함께 사라진다. 아모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의 형식과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아모스와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갖게 될 ‘예언자로서’의 일반적인 요소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①야웨 말씀하신다, ②야웨 이렇게 말씀하신다, ③야웨 주가 말씀하신다, ④만군의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신다, ⑤이는 야웨 말씀이시다, ⑥이은 주 야웨 말씀이시다, ⑦야웨 만군의 하나님이 말씀하다. 이 중에서 ①~④까지는 예언 서두에 나오는 형식이고, ⑤~⑦은 대체로 예언의 대목이 끝났을 때 사용된 형식이다. 이로서 아모스 예언은 그 시작도 끝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모스는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서 돌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언자로서 부름 받은 인물로서(7:15),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강제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저항할 수 없어 대언의 활동을 했던 것이다. 8:11에 하나님이 아모스를 강요하신 이유가 잘 나온다. 기갈상태에 처한 인간에게 양식과 물이 필요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증, 즉 말씀의 기갈을 그 개인과 공동체가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야웨 하나님은 자기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아모스를 자신의 예언자(대언자)로 부르신 것이다.
2. 하나님 理解
1) 萬民의 하나님
마르시온과 같이 구약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만 보는 것은 구약성서에 대한 전적인 오해이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로 부른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의 범위를 벗어난 만국(萬國) 백성의 하나님으로서, 만국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역사에 간섭하시는 분이다. 아모스는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에게서 예언자 사명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으로 시작하지 않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신념으로 그의 예언을 시작하고 있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역사에까지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만국의 하나님 야웨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아모스가 1-2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나라들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의 시리아,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은 작은 나라들이며, 그의 하나님은 이 나라들 하나 하나의 역사적 문제에 관심한다. 이러한 여러 나라들에 대한 관심은 6장 2절 이하에도 나타난다. 또한 6장 14절에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스라엘 밖까지 확대됨을 말한다. 다른 나라를 불러와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겠다는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외국의 권력과 그 통치권마자도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의 뜻에 좌우됨을 보여준다. 9장 7절에서도 이스라엘 밖의 여러 나라들이 열거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나라들의 역사 속에서 야웨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 역사 혹은 보편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 논의를 펼쳤던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t Pannerberg)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아모스의 이스라엘의 야웨는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 만민의 구원자 야웨인 것이다.
2) 審判의 하나님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인 것으로 말해진다. 공의는 선과 악, 불의와 의를 판별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다. 심판의 개념은 법정적 용법을 갖는다. 죄를 지은 사람을 심문하고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의 법에 따라 행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의 실행인데, 인간은 누구나 이 의지 앞에서 그 공과(功過)를 심판받아야 한다. 구약성서의 아담의 실낙원 설화, 노아홍수 설화, 소돔ㆍ고모라의 설화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심판 사상을 알려주는 예이다. 아모스 1-2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예언은 그 나라들이 범한 죄를 규탄하는 심판의 하나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나라들의 죄는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남과 북 모두를 포함한 전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남유다는 “율법을 거부한 죄”, “거짓 신들에게 미혹당한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고, 북이스라엘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온갖 죄를 범했으므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3:11, 3:14-15, 5:16-17, 5:19, 9:1-3, 9:8 등에 걸쳐 심판의 철저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아모tm는 '야웨의 날‘(5:18-20, 8:3-9)이 심판의 날이요, 일종의 종말적인 날임을 말하고 있다. 이 날에는 가종 재난, 즉 한발, 기근, 역병, 화재, 전쟁 등이 일어나 곤욕을 치를 것을 알고, 백성들이 이 날을 만날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날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날인 것이다. 이처럼 아모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하지 아니 하고 세계 만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선민(選民)으로서 의무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3) 正義의 하나님
아모스가 말하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상은 아모스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원칙이 하나님의 정의(正義)임을 알려준다. 정의 또는 공의의 문제 역시 심판의 문제와 같이 법정적인 용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과 그의 생활을 살피시고 심판하신다. 이 심판이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이 시편 7편, 9편, 85편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모스서에서는 주로 5:7, 6:12, 5:24 등에서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 및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부패상에 대한 아모스의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 구절에는 모두 공의(mishpat)와 정의(tsedaqa)가 나란히 언급된다. 백성의 지도자와 일반 백성이 공의와 정의를 불의와 부정으로 만들고(5:7), 국가의 사법 책임자들이 백성을 죽이는 독초와 독약 구실을 하고 있으며(6:12),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의와 정의는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법 자체가 부정과 불의함에 기울어지면, 국가 사회의 공공적인 법질서는 이미 무너진 것이고, 따라서 그런 법이 백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한 백성들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이 스스로 그의 삶을 바르게 산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러한 정의의 질서과 불법의 질서로 뒤바뀐 이스라엘의 현실을 6:12에서 그 백성들과 나라의 책임자들 앞에서 따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가데 하리라”(5:27).
4) 自然과 하나님
아모스서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고 인간의 윤리 및 신앙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창조를 나타내는 기본 동사 세 개(4:13의 ‘야차르’와 ‘바라’, 5:8의 ‘아싸’)를 통해 우리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창조전승을 그대로 전수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며, 4:9을 통해 아모스에게 있어 하나님만이 자연의 주권적인 지배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명세계와 관계된 자연 현상과 자연물들 그리고 자연의 이변과 재난마저도 모두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얻을 수도 있다(3:8; 4:7-9; 8:2). 끝으로 자연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우리에게 지시하고 전달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9:13-14).
3. 民族共同體에 對한 理解
1) 이스라엘 王國과 民族共同體
대다수의 구약학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한 공동체를 ‘Gemeinschaft'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Monarchy(왕국)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왕국‘의 개념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적절히 이해하기 어렵다.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이므로, 왕을 포함한 그 나라의 전체 구성원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 정착 이후 초기 지파 동맹에서 보이는 민족공동체의 개념을 왕을 중심으로 한 왕국과 구분해야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항상 왕의 주권이 성장함에 따라 백성들 위에 왕을 두도록 하나님의 주권이 왕권에 의하여 점차 위협을 받았고, 그 반발로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야웨 신앙으로 지파들이 결속된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흐름이 나란히 전개되었다.
2) 民族共同體에의 關心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왕국 즉 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결사체보다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맺고 그 구원과 은총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가 언급되는 대목(2:4; 2:6-8)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공동체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모스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보다도 옛 지파동맹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연상시키는 대명사들을 즐겨 사용한 것도 그러한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3:1의 ‘모든 지파들’이나 9:11의 ‘다윗의 천막’ 같은 단어에서 분단된 북왕국 이스라엘 보다는 “분열되지 아니 한 하나의 통일된 왕국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통일된 왕국이라는 것도 정치체제 보다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하다.
3) 權力의 惡
아모스는 ‘왕국’이 얼마나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는 악의 집단인가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 여러 나라의 경우를 들어 보여준다. 아모스는 1-3장에서 ‘궁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왕국(9:8) 또한 이 궁궐과 관련된 ’창고‘ 또는 ’요새‘(3:10), 그리고 권력층과 결탁된 부유층의 ’겨울 집‘, ’여름 집‘, ’상아로 만든 집‘, ’대궐‘(3:15)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왕권이나 권력 또는 경제권을 가진 사람들이 불의와 죄를 범한 일과 그 심판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궁궐‘은 ’태워버릴 것,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1:4,7,10,12,14; 2:2,5), 또한 ’약탈당할 것‘(3:11),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6:8)이다. ’대궐‘ 역시 ’부숴질 것‘(3:15)이고, 특히 ’왕국‘도 심판당할 것이다(9:8).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 권력의 책임자들인 왕과 귀족들에게 임할 것이다. 아모스서는 이스라엘의 왕국의 죄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는데, 크게 세 가지의 죄가 지적된다. ①권력자들(왕, 주권자들, 귀족들)의 죄로서 3:10에 잘 나타나있다. ②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죄는 3:15, 5:11, 6:1, 6:11 등에 나타나는 사치와 안일의 생활이 있으며, 이는 결국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소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6:4-6). ③악덕 상인들의 죄는 8:4-6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아모스는 당시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던 악독한 부유층 상인들에게 “들으라! 이 말을”로 시작되는 가혹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악덕 상인들은 예배를 빙자하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월삭제와 안식일 같이 장사가 금지되어 있는 날을 이용하여 부정축재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4) 가난한 자의 受難
아모스는 그 민족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예언운동을 함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참된 종교는 권력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아모스가 변호하고 있는 이런 수난당하는 이들은 ‘궁핍한 자’(2:6; 4:1; 5:12; 8:4), ‘가난한 자’(2:7; 4:1; 5:11; 8:6), ‘겸손한 자’(2:7; 8:4) 등으로 표현된다. 아모스는 권력자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수난을 받는가를 밝히고 있다. ①‘가난한 자’의 연격적 존엄성을 무시하고 그들의 인권을 물질적인 것으로 가치절하시키는 죄인데, 2:6-7과 8:6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②그러므로 권력자와 부한 자들의 “죄가 중하고 허물이 많음”(5:12)은 그들이 의인을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억울케 함”에 있다(2:6). ③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실제로 죽이기도 한다(8:4). ④끝으로 그들은 때론 물질로서 매수하는 일, 즉 뇌물공세를 펴서 가난한 자들이 법에 의지할 수도 없게 만든다(5:12). 이는 결국 가난한 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이다.
4. 敬虔에 對하여
경건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적 비판과 고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건을 문제 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들의 신앙행사에 대하는 태도를 문제 삼기 위함이다. 그것은 예언자 아모스가 고발하는 신앙의 문제의 본질이 그 신앙의 외형적 문제, 곧 절기를 지키고, 제물 및 십일조, 성소에 출입하는 문제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신학, 신앙, 경건 이 세 가지는 종교를 논하는 기본 요소로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종교를 비판한 것 역시 그들이 야웨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가 함과 또 그들의 신앙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예배 행위가 진실된 것인가, 형식적인 것인가를 살핀 것이다.
1) 禮拜場所(벧엘, 단, 길갈)
아모스는 벧엘, 단, 길갈 이 세 성소가 중요한 것임을 지적하고 각 성소의 특징을 설명한다. 아모스는 이 성소들이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위선적인 종교적 행사와 온갖 우상숭배적인 이교의 의식들이 난무하는 죄악의 장소가 된 것을 고발한다.
2) 잘못된 敬虔
아모스는 잘못된 경건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①형식적인 종교로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종교의식이다(5:4-5, 21-25). 이는 형식적으로 관습화된 경건에 불과하며, 영(靈)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는 죽은 예배인 것이다. ②공의와 정의를 무시하는 삶, 불의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드리는 예배이다(5:7, 12, 24). 아무리 훌륭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올려도 그 예배자들의 성소 밖에서의 삶이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③마지막으로 잘못된 경건은 아마샤와 같이 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직업 종교인 혹은 어용(御用) 종교인들의 경건이다. 아모스가 보기에,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는 종교는 이미 경건을 포기한 거짓 종교인 것이다(7:10-13). 아모스는 이러한 거짓 종교인들에 의해 예언 금지를 당하고 심지어 국외로 추방당하기까지 하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해야 말을 해나갔다.
3) 참된 敬虔
아모스에게 있어 참된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있다. 시내산의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12). 또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5:4-5). 이것은 숨어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먼저 찾는 것을 의미한다. 아모스는 오직 이 길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살 길이라고 선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아모스가 참 경건의 표지로서 “야웨를 찾으라”고 촉구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신앙 전승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이 구하던 것들이 물질, 향락, 권력, 바알의 종교와 같은 기복신앙이었을 때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을 찾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을 찾을 것을 명하시는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5. 結論
1) 宗敎와 政治
아모스의 신학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밀착되어 있다. 그는 예언자로서 종교인의 사명을 다하려는 책임감 때문에 정치문제를 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인이 정치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로는 ①이스라엘 신앙에서(구약성서에 나타난) 정치가 취급하는 모든 분야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역사와는 다른 분야가 아니라, 역사 그것이 인간의 정치적 결단과 그 집행으로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종교인의 선 자리가 이 역사이고, 그 속에서 살고 활동하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이다. ②이스라엘이 고백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소, 그 지성소 안에만 계셔서 그 백성들의 예배와 예물을 받고 만족하는 신은 아니다. ③인간의 삶의 실제와 그 바탕이 되는 정치적 영향은 물론, 정치와 무관한 삶은 있을 수 없다. ④오늘날과 같이 국제적 교류가 잦고 세계의 공동체가 전자 미디어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개별적인 국가의 사건이 곧바로 국제적인 차원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구약성서의 시대에도 이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적 현실에서 종교와 정치 관계를 살펴 볼 때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펼친 북왕국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비판하고 또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나라들과 유다의 문제를 그의 예언 속에 언급한 것은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宗敎와 倫理
아모스의 윤리사상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보다도 민족공동체의 윤리를 관심함이 뚜렷한 사실이고 특히 그가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서너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지적한 각 나라의 죄는 아모스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만 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인간 공동체 일반에 대해 갖고 있었던 윤리적 교훈과 경고라 할 수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이 세계의 인간 공동체가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원칙에 입각해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인간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 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착취와 반인륜적인 행태들을 아모스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윤리의식의 실종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포한 것이다. 아모스는 참된 종교의 실재와 실존을 그 백성들 앞에 밝히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윤리적이고 인권적인 실재나 실존을 강조했던 예언자이다. 윤리의식을 상실한 종교는 이미 그 본질에서부터 종교가 아닌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윤리적인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의 잘 차려진 예배의 단을 쌓는다 해도 공법을 물같이 쏟아 버리고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고서는 참된 경건의 종교라 할 수 없고 거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계약의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
II. 감상 및 비평
: 김정준의 아모스 신학의 현재적 의미
나는 아모스와 예수와 바울을 사랑한다. 이들의 메시지와 삶은 오늘 여기에서의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현실적 지표이다. 예언자와 메시야와 사도.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를,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δικαιοσνη)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 그리스도교의 사상사에 출현한 수많은 예언자적 설교자, 신학자들이 존재한다. 만수(晩穗) 김정준 (金正俊), 그 분도 그러한 예언자적 신학자의 전통에 서 계신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정준 박사님께서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었던 1970년대의 한국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왜 하필 ‘아모스’인가? 불의한 사회 현실, 수탈을 일삼는 억압적인 체제, 가난한 자의 궁핍을 폭로하며 한 사회의 현실적 좌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던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정의를 사회 속에 실현코자 갈망했던 하나님의 사자(使者). 그리고 그 예언자를 당대 한국 사회 가운데로 귀환시킨 신학자 김정준. 김정준 박사가 이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예언자 아모스는 왕정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주의의 모순을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의 반대급부로서 지파 공동체 즉 민중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극단적인 경제주의적 발전주의를 모토로 하여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고 있는 한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나는 아모스 예언자가 보여준 가난한 자에 대한 당파성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오늘 우리 시대의 신학 및 교회 현장에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정준 박사님이 박정희 개발독재의 폭압적인 권력 하에서 신음하던 한국 민중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아모스서를 주석하고 연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 김정준의 “아모스의 신학”은 더욱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