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서.예언서 연구 - 논문집 III
김정준 / 한국신학연구소 / 198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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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의 神學”

―김정준,「신학사상」23(1978)

 

 

I. 요약

 

1. 序論 - 아모스 神學의 根據

아모스 신학의 근거는 아모스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기록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한 자이다. 아모스 예언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하면 예언자적인 그의 사명이나 활동도 함께 사라진다. 아모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의 형식과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아모스와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갖게 될 ‘예언자로서’의 일반적인 요소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①야웨 말씀하신다, ②야웨 이렇게 말씀하신다, ③야웨 주가 말씀하신다, ④만군의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신다, ⑤이는 야웨 말씀이시다, ⑥이은 주 야웨 말씀이시다, ⑦야웨 만군의 하나님이 말씀하다. 이 중에서 ①~④까지는 예언 서두에 나오는 형식이고, ⑤~⑦은 대체로 예언의 대목이 끝났을 때 사용된 형식이다. 이로서 아모스 예언은 그 시작도 끝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모스는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서 돌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언자로서 부름 받은 인물로서(7:15),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강제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저항할 수 없어 대언의 활동을 했던 것이다. 8:11에 하나님이 아모스를 강요하신 이유가 잘 나온다. 기갈상태에 처한 인간에게 양식과 물이 필요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증, 즉 말씀의 기갈을 그 개인과 공동체가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야웨 하나님은 자기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아모스를 자신의 예언자(대언자)로 부르신 것이다.

 

2. 하나님 理解

1) 萬民의 하나님

마르시온과 같이 구약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만 보는 것은 구약성서에 대한 전적인 오해이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로 부른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의 범위를 벗어난 만국(萬國) 백성의 하나님으로서, 만국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역사에 간섭하시는 분이다. 아모스는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에게서 예언자 사명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으로 시작하지 않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신념으로 그의 예언을 시작하고 있다. 아모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역사에까지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만국의 하나님 야웨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아모스가 1-2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나라들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의 시리아,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은 작은 나라들이며, 그의 하나님은 이 나라들 하나 하나의 역사적 문제에 관심한다. 이러한 여러 나라들에 대한 관심은 6장 2절 이하에도 나타난다. 또한 6장 14절에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스라엘 밖까지 확대됨을 말한다. 다른 나라를 불러와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겠다는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외국의 권력과 그 통치권마자도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의 뜻에 좌우됨을 보여준다. 9장 7절에서도 이스라엘 밖의 여러 나라들이 열거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나라들의 역사 속에서 야웨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 역사 혹은 보편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 논의를 펼쳤던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t Pannerberg)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아모스의 이스라엘의 야웨는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 만민의 구원자 야웨인 것이다.

 

2) 審判의 하나님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인 것으로 말해진다. 공의는 선과 악, 불의와 의를 판별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다. 심판의 개념은 법정적 용법을 갖는다. 죄를 지은 사람을 심문하고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판단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의 법에 따라 행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의 실행인데, 인간은 누구나 이 의지 앞에서 그 공과(功過)를 심판받아야 한다. 구약성서의 아담의 실낙원 설화, 노아홍수 설화, 소돔ㆍ고모라의 설화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심판 사상을 알려주는 예이다. 아모스 1-2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예언은 그 나라들이 범한 죄를 규탄하는 심판의 하나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나라들의 죄는 하나님의 공의를 거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남과 북 모두를 포함한 전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남유다는 “율법을 거부한 죄”, “거짓 신들에게 미혹당한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고, 북이스라엘은 종교적, 사회적, 윤리적으로 온갖 죄를 범했으므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3:11, 3:14-15, 5:16-17, 5:19, 9:1-3, 9:8 등에 걸쳐 심판의 철저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아모tm는 '야웨의 날‘(5:18-20, 8:3-9)이 심판의 날이요, 일종의 종말적인 날임을 말하고 있다. 이 날에는 가종 재난, 즉 한발, 기근, 역병, 화재, 전쟁 등이 일어나 곤욕을 치를 것을 알고, 백성들이 이 날을 만날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날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날인 것이다. 이처럼 아모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하지 아니 하고 세계 만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선민(選民)으로서 의무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3) 正義의 하나님

아모스가 말하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상은 아모스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원칙이 하나님의 정의(正義)임을 알려준다. 정의 또는 공의의 문제 역시 심판의 문제와 같이 법정적인 용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과 그의 생활을 살피시고 심판하신다. 이 심판이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이 시편 7편, 9편, 85편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모스서에서는 주로 5:7, 6:12, 5:24 등에서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 및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부패상에 대한 아모스의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 구절에는 모두 공의(mishpat)와 정의(tsedaqa)가 나란히 언급된다. 백성의 지도자와 일반 백성이 공의와 정의를 불의와 부정으로 만들고(5:7), 국가의 사법 책임자들이 백성을 죽이는 독초와 독약 구실을 하고 있으며(6:12),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의와 정의는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법 자체가 부정과 불의함에 기울어지면, 국가 사회의 공공적인 법질서는 이미 무너진 것이고, 따라서 그런 법이 백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한 백성들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이 스스로 그의 삶을 바르게 산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아모스는 이러한 정의의 질서과 불법의 질서로 뒤바뀐 이스라엘의 현실을 6:12에서 그 백성들과 나라의 책임자들 앞에서 따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가데 하리라”(5:27).

 

4) 自然과 하나님

아모스서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리고 인간의 윤리 및 신앙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창조를 나타내는 기본 동사 세 개(4:13의 ‘야차르’와 ‘바라’, 5:8의 ‘아싸’)를 통해 우리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창조전승을 그대로 전수받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며, 4:9을 통해 아모스에게 있어 하나님만이 자연의 주권적인 지배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명세계와 관계된 자연 현상과 자연물들 그리고 자연의 이변과 재난마저도 모두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얻을 수도 있다(3:8; 4:7-9; 8:2). 끝으로 자연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우리에게 지시하고 전달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9:13-14).

 

3. 民族共同體에 對한 理解

1) 이스라엘 王國과 民族共同體

대다수의 구약학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한 공동체를 ‘Gemeinschaft'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Monarchy(왕국)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왕국‘의 개념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적절히 이해하기 어렵다.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이므로, 왕을 포함한 그 나라의 전체 구성원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 정착 이후 초기 지파 동맹에서 보이는 민족공동체의 개념을 왕을 중심으로 한 왕국과 구분해야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항상 왕의 주권이 성장함에 따라 백성들 위에 왕을 두도록 하나님의 주권이 왕권에 의하여 점차 위협을 받았고, 그 반발로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야웨 신앙으로 지파들이 결속된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흐름이 나란히 전개되었다.

 

2) 民族共同體에의 關心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왕국 즉 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결사체보다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맺고 그 구원과 은총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가 언급되는 대목(2:4; 2:6-8)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공동체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모스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보다도 옛 지파동맹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연상시키는 대명사들을 즐겨 사용한 것도 그러한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3:1의 ‘모든 지파들’이나 9:11의 ‘다윗의 천막’ 같은 단어에서 분단된 북왕국 이스라엘 보다는 “분열되지 아니 한 하나의 통일된 왕국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통일된 왕국이라는 것도 정치체제 보다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임이 분명하다.



3) 權力의 惡

아모스는 ‘왕국’이 얼마나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는 악의 집단인가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 여러 나라의 경우를 들어 보여준다. 아모스는 1-3장에서 ‘궁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왕국(9:8) 또한 이 궁궐과 관련된 ’창고‘ 또는 ’요새‘(3:10), 그리고 권력층과 결탁된 부유층의 ’겨울 집‘, ’여름 집‘, ’상아로 만든 집‘, ’대궐‘(3:15)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왕권이나 권력 또는 경제권을 가진 사람들이 불의와 죄를 범한 일과 그 심판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궁궐‘은 ’태워버릴 것,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1:4,7,10,12,14; 2:2,5), 또한 ’약탈당할 것‘(3:11),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6:8)이다. ’대궐‘ 역시 ’부숴질 것‘(3:15)이고, 특히 ’왕국‘도 심판당할 것이다(9:8).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 권력의 책임자들인 왕과 귀족들에게 임할 것이다. 아모스서는 이스라엘의 왕국의 죄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는데, 크게 세 가지의 죄가 지적된다. ①권력자들(왕, 주권자들, 귀족들)의 죄로서 3:10에 잘 나타나있다. ②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죄는 3:15, 5:11, 6:1, 6:11 등에 나타나는 사치와 안일의 생활이 있으며, 이는 결국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소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6:4-6). ③악덕 상인들의 죄는 8:4-6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아모스는 당시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던 악독한 부유층 상인들에게 “들으라! 이 말을”로 시작되는 가혹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악덕 상인들은 예배를 빙자하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월삭제와 안식일 같이 장사가 금지되어 있는 날을 이용하여 부정축재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4) 가난한 자의 受難

아모스는 그 민족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예언운동을 함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참된 종교는 권력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아모스가 변호하고 있는 이런 수난당하는 이들은 ‘궁핍한 자’(2:6; 4:1; 5:12; 8:4), ‘가난한 자’(2:7; 4:1; 5:11; 8:6), ‘겸손한 자’(2:7; 8:4) 등으로 표현된다. 아모스는 권력자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수난을 받는가를 밝히고 있다. ①‘가난한 자’의 연격적 존엄성을 무시하고 그들의 인권을 물질적인 것으로 가치절하시키는 죄인데, 2:6-7과 8:6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②그러므로 권력자와 부한 자들의 “죄가 중하고 허물이 많음”(5:12)은 그들이 의인을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억울케 함”에 있다(2:6). ③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실제로 죽이기도 한다(8:4). ④끝으로 그들은 때론 물질로서 매수하는 일, 즉 뇌물공세를 펴서 가난한 자들이 법에 의지할 수도 없게 만든다(5:12). 이는 결국 가난한 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이다.

 

4. 敬虔에 對하여

경건의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적 비판과 고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건을 문제 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들의 신앙행사에 대하는 태도를 문제 삼기 위함이다. 그것은 예언자 아모스가 고발하는 신앙의 문제의 본질이 그 신앙의 외형적 문제, 곧 절기를 지키고, 제물 및 십일조, 성소에 출입하는 문제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신학, 신앙, 경건 이 세 가지는 종교를 논하는 기본 요소로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종교를 비판한 것 역시 그들이 야웨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가 함과 또 그들의 신앙의 표현으로 생각하는 예배 행위가 진실된 것인가, 형식적인 것인가를 살핀 것이다.

 

1) 禮拜場所(벧엘, 단, 길갈)

아모스는 벧엘, 단, 길갈 이 세 성소가 중요한 것임을 지적하고 각 성소의 특징을 설명한다. 아모스는 이 성소들이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위선적인 종교적 행사와 온갖 우상숭배적인 이교의 의식들이 난무하는 죄악의 장소가 된 것을 고발한다.

 

2) 잘못된 敬虔

아모스는 잘못된 경건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①형식적인 종교로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종교의식이다(5:4-5, 21-25). 이는 형식적으로 관습화된 경건에 불과하며, 영(靈)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는 죽은 예배인 것이다. ②공의와 정의를 무시하는 삶, 불의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드리는 예배이다(5:7, 12, 24). 아무리 훌륭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올려도 그 예배자들의 성소 밖에서의 삶이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③마지막으로 잘못된 경건은 아마샤와 같이 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직업 종교인 혹은 어용(御用) 종교인들의 경건이다. 아모스가 보기에,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는 종교는 이미 경건을 포기한 거짓 종교인 것이다(7:10-13). 아모스는 이러한 거짓 종교인들에 의해 예언 금지를 당하고 심지어 국외로 추방당하기까지 하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해야 말을 해나갔다.

 

3) 참된 敬虔

아모스에게 있어 참된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있다. 시내산의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4:12). 또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5:4-5). 이것은 숨어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먼저 찾는 것을 의미한다. 아모스는 오직 이 길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살 길이라고 선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아모스가 참 경건의 표지로서 “야웨를 찾으라”고 촉구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신앙 전승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이 구하던 것들이 물질, 향락, 권력, 바알의 종교와 같은 기복신앙이었을 때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구원자 하나님을 찾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을 찾을 것을 명하시는 하나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5. 結論

1) 宗敎와 政治

아모스의 신학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밀착되어 있다. 그는 예언자로서 종교인의 사명을 다하려는 책임감 때문에 정치문제를 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인이 정치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로는 ①이스라엘 신앙에서(구약성서에 나타난) 정치가 취급하는 모든 분야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역사와는 다른 분야가 아니라, 역사 그것이 인간의 정치적 결단과 그 집행으로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종교인의 선 자리가 이 역사이고, 그 속에서 살고 활동하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이다. ②이스라엘이 고백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소, 그 지성소 안에만 계셔서 그 백성들의 예배와 예물을 받고 만족하는 신은 아니다. ③인간의 삶의 실제와 그 바탕이 되는 정치적 영향은 물론, 정치와 무관한 삶은 있을 수 없다. ④오늘날과 같이 국제적 교류가 잦고 세계의 공동체가 전자 미디어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개별적인 국가의 사건이 곧바로 국제적인 차원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구약성서의 시대에도 이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적 현실에서 종교와 정치 관계를 살펴 볼 때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펼친 북왕국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비판하고 또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나라들과 유다의 문제를 그의 예언 속에 언급한 것은 종교와 정치의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宗敎와 倫理

아모스의 윤리사상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보다도 민족공동체의 윤리를 관심함이 뚜렷한 사실이고 특히 그가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의 ‘서너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지적한 각 나라의 죄는 아모스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만 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인간 공동체 일반에 대해 갖고 있었던 윤리적 교훈과 경고라 할 수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이 세계의 인간 공동체가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원칙에 입각해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인간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 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착취와 반인륜적인 행태들을 아모스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윤리의식의 실종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포한 것이다. 아모스는 참된 종교의 실재와 실존을 그 백성들 앞에 밝히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윤리적이고 인권적인 실재나 실존을 강조했던 예언자이다. 윤리의식을 상실한 종교는 이미 그 본질에서부터 종교가 아닌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윤리적인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의 잘 차려진 예배의 단을 쌓는다 해도 공법을 물같이 쏟아 버리고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고서는 참된 경건의 종교라 할 수 없고 거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계약의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

 

 

II. 감상 및 비평

: 김정준의 아모스 신학의 현재적 의미

 

나는 아모스와 예수와 바울을 사랑한다. 이들의 메시지와 삶은 오늘 여기에서의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현실적 지표이다. 예언자와 메시야와 사도.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를,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δικαιοσνη)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 그리스도교의 사상사에 출현한 수많은 예언자적 설교자, 신학자들이 존재한다. 만수(晩穗) 김정준 (金正俊), 그 분도 그러한 예언자적 신학자의 전통에 서 계신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정준 박사님께서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었던 1970년대의 한국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왜 하필 ‘아모스’인가? 불의한 사회 현실, 수탈을 일삼는 억압적인 체제, 가난한 자의 궁핍을 폭로하며 한 사회의 현실적 좌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던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정의를 사회 속에 실현코자 갈망했던 하나님의 사자(使者). 그리고 그 예언자를 당대 한국 사회 가운데로 귀환시킨 신학자 김정준. 김정준 박사가 이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예언자 아모스는 왕정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주의의 모순을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의 반대급부로서 지파 공동체 즉 민중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극단적인 경제주의적 발전주의를 모토로 하여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고 있는 한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나는 아모스 예언자가 보여준 가난한 자에 대한 당파성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오늘 우리 시대의 신학 및 교회 현장에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정준 박사님이 박정희 개발독재의 폭압적인 권력 하에서 신음하던 한국 민중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아모스서를 주석하고 연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 김정준의 “아모스의 신학”은 더욱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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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없는 경제와 하느님 - 복음화에 도전하는 가난과 신자유주의
성정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1. 서론

“신학은 ‘물신’과 ‘성령’을 구별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는 주장에서 출발하여 저자 성정모는 신학적 관점에서 경제문제를 다룬다. 그는 Hugo Assmann이 근대 자본주의체제의 “숨은 신” 그리고 그 “내재적 신학”이라고 명명한 이 체제의 토대를 분석하기 전에, 경제신학의 작업에 대해 기존 신학계에서 제출하는 세 가지 유형의 비판에 관해 먼저 논평을 하고 있다. ① 경제신학은 사회과학을 활용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신학이 아닌 신학 이전의 작업이라는 견해인데, 이점에서 보면 해방신학의 사회 분석적 매개와 그 성찰은 고유한 의미에서 신학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경제신학자들이 행한 분석은 경제학이나 다른 사회과학 책에서 흔히 발견하는 그런 분석이 아니다. 경제신학의 관점은 소수에게 첨단 기술과 풍요를 안겨주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을 야기하는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 인식에 바탕해 이 논리의 토대와 그 정당화 과정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경제학에 내재한 신학, 즉 숨은 신의 존재를 체계적인 형태로 밝혀내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식별해 온 것이다. 신학은 하느님과 신들에 관한 논의이므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신들에 관해 식별하는 것이며, 이 식별을 위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경제신학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다. ② 우상숭배 개념처럼 경제(학)에 적용한 신학 언어는 단지 유추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 즉 우상숭배 개념은 단지 종교 의 영역에 고유한 방식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견해는 (신성하다고 여기는) 종교적 영역을 (세속적이라고 여기는) 다른 인간적 현실로부터 분리해 하느님을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에서 다시 분리하는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이는 신의 육화 신비(incarnation)에 거스르는 것임. 우상숭배 개념의 핵심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산물을 신성화하다는 데 있음. 현행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절대화는 우상숭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특징지울 수 없는 것이다. Karl Marx 역시『자본(론)』에서 상품이 갖고 있는 물신성을 지적하고 있다. ③ 교회나 신학에서 경제에 대한 논의가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윤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져 온 전통적인 견해인데, 이처럼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를 윤리의 차원으로 제한하게 되면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신학의 우상적 정체를 밝히는 데 무력해지고 만다.

 

2. “물신-우상숭배”와 “하느님의 영”

엔리케 듀셀(Enrique Dussel)은 물신과 물신 과정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특징짓는다.

① 물신화는 체제를 신성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식으로 권력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의 토대를 절대화하는 과정이다. ② “그러나 물신화는 단지 ‘절대화’만이 아니고 또한 행위와 예배의 바탕이다. 물신은 지배 체제의 실천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매개인 객체의 신성화다.” ③ 물신숭배는 설명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이고, 그 실천성에 있어서 마술적이다. ④ “제도적 실천”, 즉 현행 제도 안에 자리해 이 제도를 재생산하는 실천은 물신, 또는 신비적 마술적인 방식으로 신성화된 체제에 대한 현대적 예배 방식이다. ⑤ 물신화된 체제는 희생을 요구한다.

한편, 파블로 리처드는 성서 본문을 통해 우상숭배의 세 가지 특징을 분석한다.

①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되는 “금 송아지”.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야훼 부정이나 다른 신 숭배가 아니라 조작된 야훼임. 리차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죄는 “희망을 거스르는 죄”였음. 이 우상숭배의 결과는 해방과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고 억압적인 체제 안에서의 “안주”를 도모하는 것임. ②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하도록 불림을 받은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삶의 상실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이방인의 신을 택할 때, 야훼와 맺은 계약(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와 이방인을 위한 권리와 정의)대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백성임을 포기하는 것. ③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권력이라고 하는 특징. 억압자는 억누를 수 있고 죽일 수 있으나 한계가 있음.

요약하면 우상숭배는 억압적 체제가 제조한 신에 바탕한다. 이 체제는 체제의 토대를 신성화할 때 그리고 이 신성화와 함께 사람들에게서 현행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다.

 

3. 자본주의의 숨은 신

자본주의 사회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를 알기 위해 이들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믿음을 쏟으며 자신의 행위를 위한 동기 부여와 기준을 찾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시장 경제의 초인간적 조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이 우리 주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기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하는 새뮤얼슨이나 시장 경제체제는 오직 전적으로 자기 이해만 염려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의 비의도적 결과이고, 경제성장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자유라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기 때문에 번영과 자유의 “필요조건”을 이룬다고 말한 밀턴 프리드만의 진술에서 보건대, 시장 경제 옹호자들은 시장 경제체제 밖에는 번영과 자유를 위한 사회적 조건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회적 목표나 전략을 제안하면서 시장 경제의 무의식적인 조정 체제를 반대하는 것은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자유까지도 반대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포퍼 같은 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천국을 지상에서 실현하려고 할지라도 단지 지상을 지옥, 즉 오직 인간만이 자기 동료를 위해 준비하는 그 지옥을 만들 뿐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상가들에게 시장 경제는 인간 사회에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개개인의 상호 행위의 무의식적 결과로서 단순히 진화하고 발전했을 뿐이며, 인간의 그 어떤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도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기적 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장 경제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인데, 실상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잘 알고 있다. 칼 맑스가『자본(론)』제1권 제8편 “이른바 시초 축적” 장(章)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있듯이, 자본주의 출생의 역사는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역사는 더럽고 잔혹한 과정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출생의 역사는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이 전체과정의 토대”를 이루는 “수탈의 역사”이며 “피와 불의 문자로써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공유지에 대한 폭력적 약탈,”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수행된 교회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 및 씨족적 재산의 약탈과 그것의 근대적 사유재산으로의 전환,” “아메리카에서 금은산지의 발견, 원주민의 섬멸과 노예화 및 광산에의 생매장,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의 상업적 흑인수렵장으로의 전환”과 같은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과정으로서, “자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촌에서의 폭력적 수탈이 농민들을 도시로 몰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팔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재를 은폐함으로써, 시장 경제의 초월화는 가능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행위와 관계의 산물인 시장 경제를 흡사 자연의 범주로 승격시킨 것이고, 급기야는 단순히 경제적 관계를 넘어 자본주의를 인간적 실현의 최상 형태라는 식의 인간론적 주장과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까지 그 정당성을 비약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를 신성화하여 도저히 극복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의 유일한 초월성을 부인하고 자본주의 체제 밖에 존재하는 모든 희망까지도 부정하고 억압하는 우상숭배에 다름 아닌 것이다.

2) 공동선의 건설 :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주장대로, 만일 정말 시장 경제가 자기 이해에서 출발해 공동선을 기적적으로 생산한다면 역사의 진정한 주체는 더 이상이 인간이 아니라 시장 경제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며, 성서적 관점에서 역사의 주체는 하느님 나라의 제안을 충만하기 위해 ‘부활한 분’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의 공동체이다. 시장 경제의 범례는 이러한 복음서 및 성서적 관점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는 역사의 주체로서 의식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는 것, 또는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 등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서 진정한 역사의 주체는 자본 혹은 시장 경제제도 그 자체이므로, 능력이 없어 약자가 되어 버린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체의 행위를 중단하고 오로지 각자의 이해만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3) 시장 경제의 세계와 가난한 사람들의 삶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이들, 즉 가난한 자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작동되는 체제이다. 가난한 자들의 배제와 죽음이 시장 경제에 속한 자들의 조화와 풍요를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맬서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과 고통은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구원의 길과 동일시하는 우상숭배이다. 시장 경제는 귀가 있으나 단지 소비자 즉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만 귀 기울이고 소비자가 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과 탄성은 시장 경제 내부에 절대 닿지 못한다. 우상은 귀가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는 것(참고: 시편 115, 6; 왕상 18, 27)처럼 울부짖음을 듣지 못하는 가짜 신이다.

4) 숨은 신

시장 경제 우상숭배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살아 있는 참 하느님을 추구하고 선포하는 과정의 첫 단계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삼위일체” 분석이 요청된다. 즉 우리는 신성화된 자본주의에서 출발해 우상 숭배적 삼위일체를 엿볼 수 있다. 메시아적 주체와 구원의 길로서 시장 경제는 제2위 하느님인 성자이다. 성령은 시장 경제의 영, 즉 자신 안에 갇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순전히 내재적인 영, 이기심과 다른 이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영, “낙관적 비관주의”의 영과 대조할 수 있다. 우상숭배적 삼위일체의 제1위 성부는 시장 경제 논리 운동의 시작과 끝으로서 시장 경제와 그 영을 통해 찾아야 할 것인데, 시장 경제의 길이라면 이 운동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최종심급은 대체 무엇인가? 아스만은 “시장 경제 구조 안에서 그 자동 조절 기능의 시혜적인 방향을 보장하면서 활동하는 역동적인 신비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자본 신은 자본 축적이라는 아지랑이에 숨겨져 있는 신이다. 이 신비의 특징은 권력 구조의 이러 저러한 폭력과 마주할 때조차도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자본 신은 사물의 형태를 취하는 사회적 관계 즉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적 관계인 “계급”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아 삶을 영위하는,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그 결과 자본을 축적해가는 사회적 관계즉 계급 적대이다.



4. 자본주의적 인간관

자본주의에서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인간성의 원천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보기 위해 상품 물신(주의) 현상을 살펴보는데, 이는 시장 경제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가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교환 즉 매매를 수행하기 위해 상품을 소유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런 상품 소유자 간의 교환 관계가 반복되면 소유자로서의 사람도 사라지고 오로지 상품만 남게 되어 상품이 그 자체로서 교환가치가 되어 버린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중요하지 않고 그것의 교환가치만 중요시됨으로써 사람조차도 교환가치로 측정되는 상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이 자신의 창조물인 상품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고 상품이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을 가치화하는 상품 물신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참고



오늘날 경제 문제에 관한 신학적 성찰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먼저 특히 WCC와 서구 신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자본주의 경제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적 판단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윤리신학”이 있다. 둘째, 기존의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신학적 내용이나 종교적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마이칼 노박(Michael Novak)류의 “경제의 신학(Theology of Economics)”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제2세대적 흐름의 맥락에서, 특히 코스타리카의 DEI(Departamiento Ecuménico de Investigación)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학제적인 연구 형태로, 물신숭배적 또는 우상숭배적 경제 이론과 실천을 삶의 하느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경제신학(Economic Theology)”이 있다. 예컨대, Enrique Dussel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 또는 파괴로서, 사회적 관계에 있는 노동의 빵(산물)의 sacramentality의 신학이라는 의미에서 theology of economics를 말하는데("Theology of Liberation and Marxism", p.97) 이것이 바로 세 번째 형태의 경제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 비교한다면, “경제신학”은 특정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옹호하는 “경제의 신학”과 달리 인간과 자연의 삶을 죽음과 희생으로 내모는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적 경제 체제, 이론, 그리고 실천 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또한 일방의 자로 타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학제적 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 문제를 신학 외적인 주제가 아니라 내적인 주제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경제윤리신학”과도 다르다. 물론 삶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강조하는 점에서 경제윤리신학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교재에 실린 성정모와 파블로 리처드, 힌켈라메르트 등도 바로 대표적인 경제신학자들인데, 1976년 DEI연구소의 창립을 주도한 프란스 힌켈라메르트(Franz J. Hinkelammert), 우고 아스만(Hugo Assman), 파블로 리차드(Pablo Richard) 등은 칠레의 경험에서 출발해 경제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 출신으로 정치경제학박사인 프란스 힌켈라메르트는 63년 칠레로 이주해 칠레 가톨릭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경제학자로서 종속이론가,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하고 당시 고조되던 사회 변혁 열기 속에서 사회주의 이행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 와중에서 기존의 정치경제학적 분석으로는 자본주의의 본질 - 그는 영(spirit)이라 표현한다 - 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단순히 경제 논리에 바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를 신학적으로 치장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극복하려면 그러한 신학적 치장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적 기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맑스의 물신숭배 비판을 성서적 전통의 우상숭배 비판과 접목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한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질 출신으로 64년 군부쿠데타로 우르과이로 망명했다가 거기서 다시 군사쿠데타를 만나 칠레로 망명했고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후벵 알베스(Ruvem Alves) 등과 더불어 해방신학의 터를 닦았던 우고 아스만, 칠레 출신 성서학자로 민중적 성서해석학을 개척한 파블로 리차드는 신학적 관점에서 정치경제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들은 70년대 중남미의 억압적인 독재정권들이 대중들의 기본권 요구를 무참히 짓밟고 학살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스스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종교적 치장이 단순히 체제 이익을 위해 종교적 요소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활용함을 뛰어넘어서 자본주의 체제가 잉여나 사회계급만 생산 또는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체의 상징적 세계, 영성, 종교를 생산 또는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피상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잘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종교심, 고유한 신비와 덕, 윤리와 상벌을 갖는 국가 종교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선 맑스의 물신숭배 비판이 유용하다고 판단 아래 정치경제학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결국 서로 다른 두 개의 성찰 영역이 공통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함께 만나면서 이른바 경제신학이 태동한다. 한국계 브라질인으로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성정모 역시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 신학과 경제의 상관성에 관한 수많은 신학 강연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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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해설
J.M 로호만 지음, 오영석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84년 8월
평점 :
절판


 

Jan Milic Lochman,『사도신경 해설』

 

1. 사도신경의 기원

1) 생성의 기원

사도신경은 무엇인가? Lochman에 따르면, 고대전승을 파악할 때, 12사도들의 무리가 성령강림 이후, 선교하기 위해 온 세계로 파고 들어가야 할 것을 결단했을 때, 그들은 선교를 위한 신앙의 규범, 하나의 공동의 신앙 규범에 일치하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기초되었다. 12제자는 각자의 관심을 짧은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형식들은 전체를 따라서 구성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물론 하나의 전설이다. 그러나 각 사람이 각 부분을 나누어 맡아 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아마 초대 교회의 세례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세례받는 자에 의해 고백된 것이 아니라, 세례 베푸는 자가 질문의 형식으로 제의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례사건에서 지시한 바와 같이 구속력을 지니는 신앙의 결단에 일치한다. 3세기의 세례문답으로부터 신앙고백의 선언적인 형식이 생 겼다. 교회들은 상세한 부분에서 상이성을 갖는 세례고백들을 형식화 했다. 로마 교회에서 사용된 것이 가장 영향 력이 많은 고백으로 되었다. 4세기에 사도신경은 어느 정도 첨가와 변화가 있어나며, 6세기 서부 코오트 지역의 스페인과 갈리엔에서 작성된다. 이 텍스트는 오랫동안 서방교회에선 경전화가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정치 적 발전에 연결되어 있다.

 

2. 사도신경 해설의 문제점

1)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사도적인 케리그마가 아니라, 고대 교회의 교의적인 생성에 관계한다. 이것은 케리그마의 중요성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인 사신과 오늘날의 우리의 문제 설정에 관계하여 사도적인 케리그마를 상대화한다.

 

2) 기독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주제가 이 신경을 지배한다. 성서의 역사에서 보거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 또는 그의 창조물의 계약의 역사에서 보든지, 가장 극적으로 반사된 이 인간이란 주제가 하나님 신앙의 전체에서 보면 엷어진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주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체는 고백하는 인간에 관계되어 있다. 밑으로부터의 신학 대신에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ie von oben)이 제공된다. 그 길, 이 신앙과 사고의 행위의 방법은 높은 하늘에서부터 곧 바로(비변증법적으로) 나아간다.

 

3)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실제로 교의학 개요와 일치하지 않은가? 이 신경을 성서적─교의학적인 유산과 비교할 때 큰 간격이 있지 않은가? 모든 해석자는 이 문제를 제의해야 한다. 예로서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는 사도신경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게 한다. 신경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경, 창조, 구속, 피안,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그의 의의 나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올바른 고백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살아 움직이는 직접적인 증언이다. 교회는 신경을, 공동체는 나라를 고백한다(Das Glaubensbekenntnis, 2. Aufl., S.5).



3. 사도신경 해설의 방법론

Lochman의 『사도신경 해설』은 기독교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논하면서, 그 이면에 전통적 교의의 틀 내지는 전통적인 신앙내용을 깔고 있다. Lochman은 우선적으로 교리사의 흐름을 항상 의식하면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의 신학과 대화를 아끼지 않는다. 사도신경에 표현된 교의학의 여러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풍부한 성서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며, 아울러 교의학의 목적을 단순히 교회에 맞추지 않고 역사와 사회, 곧 세상으로 확대시킨다. 이와 같은 점에 입각해서 그는 ① 사도신경의 기원과 삶의 자리, ② 나는 믿는다 ........ 아멘, ③ 나는 주를 믿는다, ④ 전능하신 아버지를 ........ ⑤ 하늘과 땅의 창조자를 ........ ⑥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등의 사도신경의 각 조항들을 차례대로 논하되 이 각 조항 안에 많은 교의학적 주제들을 포괄시킬 뿐만 아니라, 신학사적 맥락에서 토론과 비판도 가하며, 반제들도 제시하고, 나아가 기독교의 역사적ㆍ사회적 프락시스를 계속 취급하였다.

 

4. 사도신경의 중심

Lochma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한 오스카 쿨만의 주장과 “둘째 조항은 첫째 조항을 뒤따르고, 셋째 조항을 선행한다. 이 둘째 조항은 다른 두 조항을 비추는 광원(Lightsquelle)이다. 그에 따르면, 초대 기독교 교인들의 신앙의 진술은 끈덕지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운명을 선회한다. 그 출발점은 동시에 기독교 운동의 중심점이고, 역사적인 근거이고, 교리적인 기초이다. 그리스도의 고백에서 사도적 신앙의 심장은 고동친다.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독론적인 집중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종교사의 전망에서 볼 때 하나의 도전이고 파결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거침돌(Argernis)이나 어리석음(Torhit)으로 간주한다. Lochman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역사에 있어서 신경의 역사에 있어서 철학적인 세 가지의 본질적인 면을 언급한다.

 

1) 거침돌과 어리석음으로서의 신경의 기독론적인 출발점과 중심점은 우연성과 특이성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우연성과 특이성에서 존재의 비밀은 열려지고, 세계의 구원이 일어난다. 우연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인간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고, 외부로부터 도래함으로써 내적인 것이 열린다.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익명 은 자유의 필요성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2) 두 번째 조항의 다른 거침돌과 어리석음은 하나님과 역사의 관계이자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이다. 고전적-이상주의적인 그리고 영지주의적-헬라적인 전승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은 바로 대립되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 밖의 참된 존재로서 엄격히 생각되었다. 그러나 신경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불쾌감을 일으키는 이 역사에서 하나님의 현재를 고백한다. 우리의 고난과 삶의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무감적인 박에서 개선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같이 고생하시고 투쟁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도래할 나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한다.

 

3) 세 번째 면에서, 기독교신앙과 하나님의 신앙이 결합된 이름 두 가지인 “그리스도”와 “예수”에 대해 논한다.

① 그리스도: 구약에서는 결정적인,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 야훼에 대한 전적인 경외와 헌신이 문제였다. 그러나 종교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는 명칭인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희망의 정치적인 구원론적인 차원,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의 기대와 연결된다. 메시아의 칭호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예수에게서 고난의 주제를 배제시키려고 할 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였다. 그의 사명은 정치적인 의미를 애당초 거부했다. 예수의 지배는 봉사에서 실현된 다. 해방을 시키는 사랑의 말과 행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했다. 그는 구속사적인 약속의 성취자였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의 사명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생활의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 지적된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형식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밀접한 연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② 예수: 한편,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가 희랍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는 정상적인 인간의 이름을 지닌 역사적인 인격에서 나타났다. 신앙의 고백의 근원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은 자의적인 구속력이 없는 개방된 가능성을 지향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예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구속력이 있는 삶을 형성해야 한다.

 

5. Lochman의 신학사상 정리

1) “나는 주를 믿는다”

여기에서 Lochman은 신앙의 대상지향성과 신앙의 주체지향성의 불가분리성을 주장함으로써 정통주의적 객관주와 실존주의적 주관주의를 넘어선다(p.37). 더욱이 “신 죽음의 신학” 이래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며, 현대의 기술문명과 이념들은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새로운 문제로 야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와 산업화된 사회가 “하나님” 주제를 변두리로 몰아내고 있는 이때에 “내가 주를 믿는다”고 하는 고백이 새롭게 그 의미를 획득해야 한다(p.48)고 주장한다.

 

2) “전능하신 아버지를 ........”

Lochman이 정립한 하나님은 성경적 하나님, 역사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야웨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이 야웨는 예수님의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사건 없이 이해될 수 없는 구약의 구속사적 하나님이시다(p.52). Lochman의 신앙은 “사랑을 추구하는 신앙”으로서 기독교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이 항상 신학적 사고의 목표로 작동한다. 따라서 단순히 케리그마와 도그마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적 프락시스가 항상 강조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Lochma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세계 안에, 시간 안에 오신 것은 보편적인 진리와 초시간적 세계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되었고, 출애굽 이래 미래적 종말을 향해 달려가면서 야웨만을 믿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다(p.73 이하)고 말한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 신학과 같이 구약의 구속사와 연속시킨다.

 

5)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

Lochman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기적 차원에서, 구원론적 차원에서 그리고 윤리적 혹은 정치적 차원에서 풀이해 나간다. 여기서 십자가의 윤리적-정치적 의미는 역시 기독교의 역사적-사회적 책임과 연관된 것이다.

 

6) “성령을 믿습니다.”

Lochman은 기독교 신학이 이미 영을 망각한지 오래되었다고 통탄한다. 그에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 성부와 성자를 우리 믿는 자들에게 현재화시키며 우리가 이 성부와 성자에 참여케 하시는 분이다(p.169). 성령은 그리스도의 삶과 운명에서 하나님을 현재화시키며 하나님을 나의 영혼과 밀착시킨다. Lochman은 성령을 내면적 갱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세계의 전망을 열어 주시는 분으로 진술한다.

 

6. 비평 및 소감

2000년 기독교회사에서 보편적으로 고백되어온 사도신경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사도신경에 대해 접근하지 않는 부분이 아쉬웠다. 예컨대, 사도신경이 아무리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능했을지라도 그것이 형성되던 당시에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기 위한 제국의 정치적 압력이 존재했었고,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국교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제도화되면서 ‘권력’의 수행 기관으로서 작동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영국 버밍엄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프란시스 영(Frances M. Young)은 사도신경의 발생 단계를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신앙의 규칙 단계, 세례문답 단계, 그리고 신앙의 선언 단계가 그것이다. 즉 ‘신앙의 규칙’은 확실히 신조들의 중요한 선구자가 되고, 이러한 신앙의 규칙의 전반적인 채택과 전통적 어구들의 사용을 통해 두 번째 세례문답으로 확장되었고, 세례문답의 상황에서 신앙의 ‘선언’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3세기 말경으로 알고 있는 신조들의 출현을 낳게 한 것은 바로 이런 요소들의 연합을 통해서였다.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들이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 영은 당시 교회의 통일성을 추구하기 위한 제국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공의회가 정통 신앙을 규정하는 신조들을 사용하기 전부터 그것들을 ‘정통의 척도’로 만들게 한 압력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즉 정통을 규정하는 데 신조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공의회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제국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주교들은 그들의 권위를 땅 위에서 수행하는 데서 더 큰 효율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신경은 제도화된 교회가 외부에 대하여 배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세우고, 내부적으로 통일된 체계를 완성해 가기 위한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써, 철저히 신앙의 수호를 위한 통일된 신앙의 표준을 세우고자 하던 상징권력의 수행 방법이었던 것이다.

신약학자 조태연은 사도신경의 핵심적 내용을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 구조 현상과 관련시켜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그리스도론 중심적 신앙고백, 둘째,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신앙 지상주의적’ 고백, 셋째, 묵시 종말론적 내세 신앙, 넷째,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로 표현되는 교회 제도(교권)에 대한 신앙 체계가 그것이다.

 

 

사도신경에 기반한 교회의 권력화 내지 제도화 과정이 교회의 배제주의 혹은 배타주의의 생리를 동반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교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수행하고, 지속시키고,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 장치 및 방법들을 고안해내기 시작했으며, 교회의 신자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교권 아래 복종시키기 위해 성직주의와 교리주의를 통해 위계 질서를 공고히 했으며, 교리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 정경화 작업이나 공동체적 고백문을 작성했다는 것은 교회사의 기본 상식이다. 교회가 자신의 권력을 수행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 바로 상징권력으로서의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문이었다.

사도신경이 갖고 있는 긍정적 의미와 더불어 사도신경을 둘러싼 권력의 작동의 측면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도신경을 고착화시키지 않고 그 의미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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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그 이후 매스터마인즈 3
돈 큐피트 지음, 이한우 옮김 / 해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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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 자발적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사랑한다. 아마도 신은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 Don Cupitt는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별 기대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 수록 "어! 이것 봐라! 이 친구 좀 하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Kaufman이나 Taylor, Geering 등과 비슷한 사유를 하면서도 훨씬 쉽고 간결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 같다. 
   


1. 신들의 도래
영혼, 정령 그리고 신들 / 왜 정신인가 / 최초의 신들 / 신의 도래 / 신과 그리스 철학 / 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큐피트는 미셸 푸코가 말년에 'Technologies of the Self', 곧 자아를 만들고 돌보는 수단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을 인용한다. 푸코는 후기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의 권력 메커니즘을 분석하고자 초기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훈련'과 테크닉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거기서 개인이 자신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를 문제 삼는다. 수도사가 자신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절대자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주체로서 '자신'이 발명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큐피트가 이 대목에서 푸코의 이러한 태도를 너무나 속좁은 판단이라고 비판하며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처음부터 신에게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이 신앙의 구성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가 푸코를 적절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왜 하필 푸코를 끌어들였는지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신학자로서 푸코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저서를 그가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큐피트는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도 다소 과감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따르자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법과 질서의 강력한 대변자이자 옹호자였으며, 세상 만물이 모든 수준에서 시계처럼 정확하고 준법 정신이 투철하며 자애롭고 조화롭게 운영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올바른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모든 것이 현명하고 자비로운 법률에 복종하는 것처럼 우주적 차원에서도 모든 것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며 국가나 개인의 영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건적인 '당위'로부터 현실적인 '존재'를 도출해 내고 다시 실제적인 당위 명제들로 복귀한다. 우리는 지상에서 법과 질서를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천상에도(아마도 이데아를 말하는 것일듯)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 지상에서도 효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큐피트는 이런 생각들은 전적으로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측면을 넘어서 계시적이기까지 하다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의 철학은 순수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리스 문화권에서 사용되던 종교적 언어를 자기들 수준에서 나름대로 탈신화화한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엉터리 학설이 기독교 신앙과 만나 그토록 오랫 동안 신학을 배후에서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신앙 언어가 작동된 맥락은 철저히 유대 종교적이지 그리스 철학적이지 않았음을 자세히 논증한다.
 
 
2. 신들의 떠남
신비주의 / 독단적 형이상학의 종말 / 역사와 휴머니즘 / 문화와 언어 / 천사들의 시대



"일반인을 위해 실재론은 나름의 필요성을 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함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신의 실재성은 인간의 정신과 대비되어 확립되어 왔다. 유한과 무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등이 대비되어 온 것이다. 이 모든 분열로부터 벗어나 있는 신은 자아와 달리 부드러운 흑대리석으로 만든 무한한 벽과 같은 것으로 모든 것을 차단해 버린다. 처음에 신에 관한 실재론적 교리를 성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분법적 대조 일체를 해체해 버리는 것 외에는 종교적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없다.
 
.......
 
특출난 신비적 '탈(脫)실재론자들'-예를 들면 유대인 스피노자, 아랍인 알-할라지, 그리스도인 에카르트 등과 같은 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로부터 단죄를 받았다. 옳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신비주의는 실재론의 허위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
 
종교의 마지막 아이러니는 결국 우리가 가장 열렬하게 갈망하는 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 자아, 세계 등의 관념을 구성할 때 사용한 주요한 구별과 대립 항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에게 남게되는 결과는...니힐리즘인가 지복인가?
물론 둘 다이다. 신의 해체와 신과의 완전한 합일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보기에 '신론의 계보학'적 탐구를 초보적이나마 시도하고 있는 책같다. 물론 북미의 수정주의신학 진영과 공명하는 재구성된 현대의 종교 개념을 제시하는데 최종 목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의 종교사와 문화사를 관통해온 神인식의 패러다임 전환 과정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결코 진화론적 역사주의의 사고를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관점에서 계열화된 역사의 궤적을 따라서 서구 신관의 변화 과정을 신의 '도래'와 신의 '떠남'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3. 신들이 떠나버린 이후의 종교
전통적 종교의 유산 / 자연주의 철학 그리고 종교 / 세계화와 타자의 종언 / 도덕의 종말과 윤리의 복권 / 순진한 종교 / 시적 신학 / 세계 종교

 

큐피트가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 개념은 이렇다.

1) 형이상학 없는 종교
큐피트는 과감하게 말한다. 고대의 유신론 신앙을 가능하게 했던 인식론적 토대로서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은 이제 모두 그 논리적 설득력을 상실했고 물질적 차원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정신적 차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음이 자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더 이상 신을 엄청난 크기의 비가시적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는 존립할 수 없으며, 차라리 우리는 신에 관한 신앙을 일정한 의식 형태 곧 우리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간접적이고 선택적인 의식 형태의 일종으로서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큐피트는 그것을 '신의 눈'이라고 명명하며, 이미 죽은 신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그의 눈이 때로 유의미함을 강조한다.

 

2)신조없는 종교

교리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철저하게 드러난 오늘날 과연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 체계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가를 진지하게 물었던 큐피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객관적인 가치나 기초를 갖고 있지 못하며 객관적으로 고정된 사물에 질서란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항구 불변적 성격을 지니고 독립된 절대적 인식의 권위를 누려왔던 기독교의 교리나 신조 역시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흡사 린드벡의 견해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3) 권위와 질서가 배제된 종교

-기독교는 감시와 처벌, 유혹과 자발적 순종의식 함양 등 모든 억압적 주체화의 동원들을 다 사용하여 그 통치성을 관철시켜온 대표적 이데올로기이다. 교회 생활, 영성, 경건, 교리 학습, 기도, 선교, 노동, 구제 등은 철저히 권력의 유지와 연계되어 작동되어온 장치들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제거된 종교를 큐피트는 희망한다.    

 

4) 인류 중에서 선민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명확한 경계선을 확신하는 군중들이 없는 종교

-별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구원 신앙에 근거한 자기 정체성 확보 노력과 그것에 자동적으로 동반되는 비기독교인에 대한 배타의 논리가 얼마나 왜곡된 인성과 행태를 조장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과연 이런 종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 큐피트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의 도구 세트로서의 종교 개념을 제시한다. 이러한 종교 개념은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우리가 자기 인식에서 성장할 수 있고(신의 눈), 우리 자신과 기타 만물의 무상(無常)과 허망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지복의 空),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일련의 태도들과 기법(태양의 삶)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바, 신들이 떠나 버린 이후의 종교 그 핵심에는 '시적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카우프만이 제시했던 상상적 언어로서 '재구성된 신학'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 같다. 큐피트에 따른다면, 시적 신학이 하나의 신학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각양각색의 가치관이 경합하는 다원주의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더 심각하게 명료한 도덕적 비젼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만물의 무상함에 대해 이제는 그저 담담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기독교 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온 탈신화화와 비실재론적 종교 개념화의 전통을 이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세계 가운데서 이미 죽어버린 신을 따라 같이 죽으러 가는 길 뿐이지 않을까?

 

신, 그 이후의 시대에서 신앙의 바다로 뛰어들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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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유
레온하르트 라가츠 지음, 류장현 옮김 / 다산글방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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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리신 새로운 현실

―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를 읽고


 

Ⅰ.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적 신학자, 레온하르트 라가츠


레온하르트 라가츠(Leonhard Ragaz)는 1868년 스위스의 산간 마을 타민스(Tamins)에서 가난한 소작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젤, 예나, 베를린을 거쳐 다시 바젤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 그는 결국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에는 바젤 대성당의 목사로 부름 받았다. 1908년부터 취리히 대학의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의 교수로 일하다가 1921년 53세의 나이에 교수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발적으로 교수직을 포기했다. 그 후로 라가츠는 노동자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특히 자신이 설립한 노동자 훈련원 가르텐호프(Gartenhof)에서 일평생 노동자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수많은 강연, 저술 (주기도문,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 - 예수의 사회적 복음, 예수의 산상설교, 성서의 하느님의 나라 등), 사회운동(노동운동, 반전운동, 반(反)나치스 운동, 평화운동, 사회교육 등)을 통하여 스위스의 울타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종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종교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하여 이끌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유럽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질 만큼 큰 추앙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길’(New Weg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말년까지 집필에 몰두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은 해인 1945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라가츠는 본인이 노동계급의 가정에서 출생하였을 뿐 아니라, 학자로서 성공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발견했고, 하느님의 현실성 속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았으며, 하느님의 자녀됨과 형제됨의 윤리 속에서 평화를 위해 투쟁했다. 또한 그는 모든 신학과 활동을 ‘아우서실’에서 노동자들과 실질적 연대를 통한 세계 변혁적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나타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진정으로 신학이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학문임을 삶으로 보여준 신학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가츠야말로 서구 제1세계의 한 가운데서 일찍이 가장 서구적인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을 삶으로 구현한 모범적 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쳐, F. W. 마르크바르트, 얀 밀리치 로흐만 등으로 이어지는 일단의 실천적인 정치신학자들이 유럽 대륙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특히 라가츠야말로 근대 교회사 및 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적 신학의 선구자였다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시대의 종교적 고난과 사회적 고난을 교회와 신학이라고 하는 제한된 종교적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느님과 이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극복을 위해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투쟁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는 데서 찾아진다. 그가 1921년 안락한 교수직을 포기하고 빈민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현장과 괴리되어 학문의 상아탑 속에서만 혁명을 외쳤던 관념적인 신학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예이다.

 

이러한 라가츠의 예언자적 사상은 성서의 중심 내용과 예수 사건의 핵심인 하느님과 그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예수의 비유』는 그의 하느님 나라 신학이 가장 잘 요약되어 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Ⅱ. 하느님 나라와 예수의 비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비유 해석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나는 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정리된 ‘예수 비유 연구사’를 간략하게 일별한 후, 이 연구사와 관련해 라가츠의 저작이 갖는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 연구는 신약 성서학의 발전과 맞물려 괄목한 말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율리허(A. Jülicher)는 근대 이후 성서학의 비유 해석사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마치 인류의 역사가 그리스도 이전(B. C. E)과 그리스도 이후(C. E)로 나뉘듯이 비유 해석의 역사도 “율리허 이전과 율리허 이후”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비유 해석사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그리고 그토록 강력하게 지배해 온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에 마지막 조종을 울린 것이 율리허이고, 또 이 점이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유 연구」(Die Gleichnisreden Jesu)가 출판된 1888년은 확실히 비유 해석사에서 기억되어야 할 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 해석사에 있어서 첫 번째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이 율리허였다면, 두 번째로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다드(C. H. Dodd)라고 말할 수 있다. 율리허가 고대 교부들에서 중세교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온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종식시키고 해석학적 관심을 비유의 한 가지 주제 혹은 요점으로 돌렸다면, 다드는 비유에서 그러한 한 가지의 요점을 일반적인 도덕적 진리에서 찾는 일에서 돌아서서 비유를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본래의 상황에 비추어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역사적 해석을 향해 나아갔다. 다드에 의하면 비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 비유들을 19세기나 20세기 청중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귀를 기울이던 1세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드의 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비유 연구서는 아마도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예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일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다드가 닦아 놓은 예수의 삶의 자리에 대한 관심을 더욱 철저히 추구하였다. 예레미아스에게 있어서 예수 비유 해석의 목적은 다른 시대와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시대 사람들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예수의 음성을 그대로 다시 듣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 책의 제2부에 포함된 비판적 분석의 목적은 예수 자신의 육성(ipsissima verba)으로 돌아가려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인자와 그의 말씀만이 우리의 메시지에 완전한 권위를 부여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의미로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밝히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예수의 실제의 살아 있는 음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려진 베일의 뒷편 여기저기서 인자의 모습들을 다시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면 얼마나 큰 소득일까? 그를 만나는 것만이 우리의 설교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다드와 예레미아스 이후에 와서 비유 해석은 또 한 번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새로운 경향의 독특한 특징은 비유를 과거의 것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것으로 연구하려는 경향이기 보다는 ‘본문’(text)으로서의 비유를 연구하려는 관심의 표현이다. 이런 경향의 대두를 우리는 아모스 와일더(Amos N. Wilder)와 제란트 존스(Geraint V. Jones) 그리고 소위 ‘신-해석학’(the New Hermeneutics)으로 유명해진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와 그의 제자들인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과 에베하르트 융엘(Eberhard Jngel) 그리고 북미대륙에서 예수 비유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한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 노만 페린(Norman Perrin),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단 오토 비아(Dan Otto Via),  버나드 브랜든 스캇(Bernard Brandon Scott) 등에서 계속 찾아볼 수 있다.

 

이상 살펴 본 비유 해석사 가운데서 레온하르트 라가츠가 학문적으로 공헌한 바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비유 본문 해석은 애초부터 성서학적으로 전문적인 주석방법론이나 비평학적 성과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상의 많은 부분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유 해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까지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의 비유 해석은 철저히 신학적 실천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라가츠와 함께 ‘예수의 비유’를 읽어 보자. 

  


Ⅲ. 라가츠와 함께 ‘예수의 비유’ 다시 읽기


라가츠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예수의 비유는 총 25개의 주제에 달하며, 이는 우리가 공관복음서에서 소위 비유라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본문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라가츠는 이러한 비유들을 다시 하느님 나라의 본질과 그것의 도래라는 두 개의 큰 테마로 각각 나누어서 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많은 비유 해석 가운데서도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나의 주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특히 내게 깊은 감명과 시사점을 제공한 동시에 라가츠의 통찰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비유 해석이라고 판단한 제3장 ‘현명을 요구함’(눅16:1-9)과 제8장 ‘이웃’(눅10:25-37)을 집중적으로 다시 살펴봄으로써 이 서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Q1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하느님의 나라는 현명함을 요구한다” (눅16:1-9)


이 비유는 흔히 불의한 청지기 혹은 현명한 청지기의 이야기로 일컬어진다.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비유인데, 주인이 자신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한다고 하는 파격적인 결말을 맺고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비유로 유명하다. 그래서 라가츠는 이 비유를 민담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익살의 요소가 섞여 있는 성스러운 풍자라고 전제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나간다. 즉 청지기를 계급투쟁의 위기에 직면한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사회적 실존과 사회적 과제를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임을 예수가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가츠는 사실상 모든 비유를 부르주아지 대(對)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적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이 비유의 해석 역시 물론 그러하다.

 

라가츠는 ‘세상의 아들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법에서 ‘빛의 아들들’ 보다 현명하다는 예수의 말씀을 하느님 나라를 간구하고 하느님 나라에 헌신해야 할 빛의 자녀들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세상 나라, 특히 자연의 나라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라가츠에 따르자면, 이것은 ‘종교’의 방식과 대립되는 하느님 나라의 ‘세상성’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의 최종적인 근거는 하느님이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라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라가츠가 도달하는 결론은 제도화되고 물신화된 ‘종교’를 넘어선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이처럼 라가츠는 이미 세속 대(對) 신성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필연적인 존재적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라가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현대적인 용법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신이 인간 문명에 대해 비평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른 방식이 아닌 ‘육화의 길’을 택한 것처럼,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제도화의 경로 자체를 문제시해야 하며, 그 귀결로서 형성된 제도적 실재인 종교문화, 교회, 신학 자체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反)신학/탈(脫)신학으로서의 신학하기’의 급진적 실천이 요청된다.”



Q2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무엇인가?”

    : “하느님의 나라는 네 이웃을 네 ‘자신’이라 여기는 것이다” (눅10:25-37)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로 알려진 너무나도 유명한 비유이다. 역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해 라가츠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주장을 다시 한 번 펼침으로써 해석을 시작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예수가 생면부지의 상황에서도 자비로운 구호를 행한 사마리아인의 헌신을 권유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버려야합니다.”

 

라가츠는 이 비유의 본질은 종교와 하느님 나라의 날카로운 대립에 있다고 주장한다. 제사장과 레위는 종교를 대표하고 강도를 만난 자는 사회적 문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기존 그리스도교 체제가 항상 강도만난 자로 상징되는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인 문제에 그동안 어떻게 대처해왔는가를 예수께서 폭로하였으며, 나아가 유대인들의 적이었던 곧 유대적 정통 종교의 외부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했다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구원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웃은 단순한 의미에서 인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을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서 대하지 않는 종교는 하느님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라가츠는 또 한 번 교회와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라가츠의 해석을 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더 철저히 급진화해보고 싶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어 온 율법교사가 예수 앞에서 스스로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강령의 핵심으로 요약하여 답변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것과 동일하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즉 네 이웃을 네 ‘자신’이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론과 윤리학을 포괄하는 유일한 영생의 행위(“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임을 역설했던 이가 바로 예수 자신이었으며, 또한 누구보다 그에 신앙적·윤리적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론과 윤리학은 결코 말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진리사건에 충실성으로 응답하는 존재 양식 그 자체였던 것이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구원론과 윤리학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정치적 지평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레위인이든 제사장이든 그토록 구원론과 윤리학의 이론에 정통한 유대인들이 정말 그 구원과 윤리를 실행해야 할 상황에서는 전혀 윤리적이지 못했으며 외려 한 사마리아인이 그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했다고 하는 반(反)-현실적 이야기를 예수께서는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구원론-윤리학 속에 명시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것, 바로 ‘이웃’이라고 하는 ‘타자성'을 드러내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이웃'을 통해서 말이다. 유대-이스라엘 세계의 무조건적 ‘이자’(異者)인 사마리아인을 그들의 현실 세계에 윤리적 행위의 대상으로 즉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예수는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기표를 불러들인 것만으로도 이미 유대 세계의 외상적 한계와도 같았던 인종적·지역적·계급적 적대를 폭로한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그러한 적대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의 수준에 존재하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던 ‘율법의 모든 행위'(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결합된 구원론 및 윤리학)를 본래의 의미 영역에 재위치시킨 것이다.

 

라가츠 식으로 ‘이웃’을 강도만난 유대인으로 해석하건 나와 같이 ‘사마리아인’으로 해석하건 결국 중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이 해명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교회와 신학이 역사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자폐적인 태도를 취해 왔고, 자신의 이해 관철을 위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기에, 이제 우리는 교회의 신학적·신앙적 도그마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신학적·신앙적 실존 양식’을 찾아야만 한다. 그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실존 양식이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이 두 비유 해석을 다시 살펴 본 것만으로도 나는 라가츠가 주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불의한 세계의 현실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세계의 현실에 무력하다 못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종교’와도 맞서며 하느님의 정의와 구원을 ‘실재’(the Real)적으로 이 땅에 구현해가는 사건이자 혁명운동이다.”



Ⅳ. 라가츠를 넘어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다시 그려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비유를 통해서 다시 그린 세상(re-imagined world)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더 나아가서 비유는 우리가 그 세상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단 하나의 수단이다. 예수께서는 그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사상에 관한 탐구는 결국 그분이 사용한 비유의 말씀들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라가츠의 『예수의 비유』를 읽고 내가 새롭게 갖게 된 신학적 과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그리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현실의 상징적 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라가츠가 그토록 강력히 주장했듯이, 예수께서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인간의 심성에만 내재하는 종교의 세계로나 현세 너머의 피안의 세계로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차안의 세계에 그대로 겹쳐지는 것만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라가츠와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지나차게 하느님 나라를 현실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현대사회의 계급적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과연 예수의 비유가 현실의 풍자나 모방적인 재현에 그치는 것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예수의 비유는 현실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바로 상상의 차원에서 말이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비전은 이미 상정된 세계를 교체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견지한 현실의 대안적 구상이 아니다. 차라리 그분의 비유는 하나의 반-현실(counter-reality)로서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 현실은 ‘상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인력 안에서 상상되기 때문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상황에 마주선 채 스스로를 지키고 균형을 이룬다. 예수님의 비유의 급진성은 희망이고 희망은 진리의 힘을 갖는다. 그것은 희망이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실행된 계획 혹은 청사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상정된 도덕적 세계에 반(反)-현실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갖고 있는 반(反)-현실성 혹은 탈(脫)-현실성 그리고 현실과의 평행성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평행한다는 것은 결코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균형을 이루는 관계를 의미한다. 감히 확신하건대, 하느님의 나라는 세계에 대한 부정(否定)으로서 존재할 때만이 그 전복적 혁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리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상상(imaginatio)이란 외부 물체의 본성보다 그에 자극받는 인간 신체의 현재 상태를 한층 더 많이 지시하기에 오류를 범하기 쉬운 그릇된 관념이라 했으나, 신학은 바로 그런 운명적인 제한적 조건─이를 알튀쎄르 이데올로기론의 용어로 바꾸면 ‘현실의 존재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쯤 될 것이다─에서 출발해 그것을 자아와 세계의 진실에 대한 통찰로 역전시키는 창조적 작업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 교회의 신앙담론 전반에 만연한 무력한 주체의 허무주의나 체념적 운명론을 그저 타매(唾罵)하거나 그것이 아니면 사회(학)적 상상력의 결여를 지적하며 개인의 삶의 문제보다 거대담론이나 사회적 의제, 사회구조 등의 문제로 눈을 돌릴 것을 주장하는 소위 진보적 신앙 진영의 요구는 적어도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공평하게 재고(再考)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현시점에서 초점을 달리해볼 때 현대신학에 또 다른 결여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아와 세계의 통합적 진실을 통찰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신학적 상상 자체에 내재한 가능성의 지평을 더욱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내가 현대신학에 기대하는 것은, 신학적 상상력의 극한에 도전함으로써 신학에는 그 자체로 외삽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까지도 필경 무색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비평'(Meta Critique)의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근본적 비평의 경지는 (라가츠와 함께 그러나 라가츠를 넘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신앙적·신학적 상상력을 회복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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