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시 반에 대책회의가 있는데 무조건 오셔야 합니다.”

“선생님, 특임교수제에 관한 공문 다시 만들어주셔야겠는데요. 급해서 그러는데 선생님이 월요일날 회의 소집 해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난 서울에서 일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안오면 안된다고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침통한 마음으로 학교에 왔고, 징그럽게 긴 회의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였다. 전화벨이 울린다.

“선생님, 저희 예과 수료여행 6월 3일부터 5일까지 갈 거거든요...”

알았다고 했다. 제주도, 2박 3일, 나 말고 갈 선생은 아무도 없다. “와 좋겠다.”라고 말하는 분이 반드시 있겠지만, 학생들을 따라가는 건 전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난 평소 그보다 훨씬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니까. 게다가 거기 가면 돈도 100만원 넘게 써야 하니까.


“선생님이 학과장이시잖아요. 월요일까지 이거 해서 주세요.”

학교에서는 학과장이라고 나만 찾는다. 다른 교수들은 학교일에 무관심하고, “니가 학과장이니 다 알아서 하라”고 한다. 학생들이 찾아와 고민을 토로하고, 학부형이 찾아와 자기 아이를 잘 봐달라고 부탁한다. 이 생활을 한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내 임기가 이번에 끝난다는 것. 하지만 군 생활도 마지막 두달이 지겹듯이, 학과장 생활도 3년을 채워가니 지긋지긋해 죽겠다. 머리가 아파 죽겠을 때마다 이런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달랜다. 학과장만 끝나면 학교도 마음대로 빼먹어 보자. 각 위원회 위원장에게 “이러이러해서 위원회에서 빠지겠다.”고 메일을 보낼 것이고, 다른 사람이 지금 그렇듯이 학교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 안하리라.


근데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 오늘 짜증나게 구는 직원과 통화를 하다가, 하도 짜증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저 한 달 후면 이 생활 끝입니다.”

그 직원, 놀라운 소리를 한다.

“선생님 다시 추천했던데요.”

인간이 가장 화를 많이 냈을 때를 10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 나의 ‘화 지수’는 11이었으리라. 전화를 끊고나서 혼자 부들부들 떨었다. 학장님은 어찌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나를 다시 추천했을까? 월요일에 담판을 지을 생각인데, 잘 안되면 내 길은 두 가지뿐이다. 휴직 아니면 사직. 하지만 교무과에 있는 선배한테 문의해 보니 휴직은 총장이 인정할 중대한 사안이 있어야 한단다. “남들이 괴롭혀서 돌아버릴 것 같다”는 그 중대한 사유에 포함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사직. 내 능력에 다른 일을 할 처지도 못되고, 교수만큼 좋은 일이 없는 걸 잘 알기에 아깝긴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 년, 아니 몇 달만 더 이 짓을 하고나면 미쳐 버릴 것 같은데. 학교에서 안잘리려고 연구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런 일로 그만둔다면 너무 아깝다. 더 아까운 건 오늘 내 연구실에 에어컨을 달았다는 거.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학과장 1년 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월요일, 난 자유와 사직의 갈림길에 선다. 전자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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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부리님 강경하게 말씀을 하세요. 월욜날. 이만큼 이면 할 만큼 했다고. 전자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꼭.

무스탕 2007-05-2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힘내세요!! 꼭 원하시는 대로 일이 풀리길 빌어드릴께요.
(부리님이 너무 착하신게 문제에요)

2007-05-25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5-2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말로만 쉬운 일입니다만 이런 일은 처음에 강경하게 `절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게 낫습니다. 아주 애매모호하게 답하는 건 여러모로 신경이 더 쓰이실테고, 모쪼록 전자쪽으로 결론 났으면 좋겠습니다.그러면 부리 님 페이퍼도 더 많이 볼 수 있을테고..그렇지요?

antitheme 2007-05-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쪼록 바라시는데로 일이 잘 정리되면 좋겠습니다.

Mephistopheles 2007-05-25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장이 미녀였다면 이런 고민은 아마 안하셨을 텐데....

꼬마요정 2007-05-2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 쪽으로 결론이 나면 좋겠어요~~
글고 저도 메피님께 한 표~^^

아영엄마 2007-05-2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라 학과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다고 의사를 강경하게 밝히심이... 저도 전자 쪽으로 결론 나기를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가을산 2007-05-2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부리님 글 중 가장 화가 많이 난 글 같네요.
ㅎㅎ, 학장님 본인도 속으로 그만두고 싶어 하실까요?
사직은 하지 마시구요..... 끝까지 안하겠다고 버티세요.


2007-05-25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5-2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하게 나가셔도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이니 반드시 붙잡을 거야요. 세게 나가시고 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파팅!(>_<)

모1 2007-05-2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하게 나가셔서 그 일 또다시 안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하네요. 성공하시길~~

클리오 2007-05-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 님을 멀리 보내는건 안타깝지만 연구년이나 포스트닥 과정을 신청하는건 어떨까요.. ^^; =3=3=3

부리 2007-05-27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신청하면 내년에나 가능한데요 전 당장 지금 쉬어야 해요
모1님/다른 일로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어요^^
마노아님/꼭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꾸벅
속삭님/네...감사합니다. 그전 결정으로 제가 행복해진 것처럼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가을산님/어쩌죠...사직하기로 했는데... 사직만이 살길이어요....!
아영엄마님/다들 사직은 말리시는군요 하지만 전...그길밖에 없어요
꼬마요정님/오랜만이군요!!! 전 님에게 한표!
별님/전 님에게도 한표를 던집니다^^
메피님/그러게 말입니다..
안티테마님/제가 뭘 원하는지 지금 알았어요
주드님/말씀 감사드려요 제가 원하는 걸 알게 된 이상 실천해야겠지요..

부리 2007-05-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제가 좀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그런지 님의 우려대로 할 것 같습니다..
무스탕님/다른 말로 하면 바보입니다^^
아프님/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moonnight 2007-05-2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주말에 인터넷을 떠나있었더니 이런 일이 -_-;;;; 학장님이 안 놓아주실 거 같긴 한데,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네요. 부리교수님을 더이상 학과장으로 부려먹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시게 좀 도와주셔야 할텐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