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지음 .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 / 629쪽
-나중에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아프리카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영웅으로 세상에 알릴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민족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가 어떤 건지 난 잘 알고 있고, 아주 신물이 나네. 히틀러에서 나세르에 이르기까지......(중략) 하지만 자네가 그 일을 하길 원한다면 나는 동의해. 당신들이건 우리건, 황색 인종이건 흑인이건우익이건좌익이건, 왕당파이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나는 언제나 동의할 것이야.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왜냐하면 나한테는 중요한 것이 꼭 하나 있기 때문이야.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온통 노기를 띠었다.
-나는 사람들이 코끼리들을 존중해주기를 바라.
코끼리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고독이며 절망이고 인간의 존엄이다. 또한 거추장스럽고 낡은 무엇이다.
*
어렵게 하늘의 뿌리를 읽었다. 1997년 이 책을 소개 받은 뒤 10여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당시 그가 갖고 있던 전집에서 이 책을 복사하여 제본해 두었으나 읽지 못했다. 그 후에는 글자가 바래고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었다. 2007년 이 책이 출판되어 나왔을 때 몹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또 차일피일 미루다 최근에서야 읽게 되었는데 하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심란해 하던 중이어서......, 여하튼 힘들게 마무리 했다.
*
그는(내게 이 책을 처음 소개한 이) 언제나 이 책 읽기를 권했다. -어떤 면을 두고 권유했는지 읽다보니 짐작이 되었다. 여유가 없었음에도 이 책을 들었을 때는 [고독]과 [절망]이라는 말에 의존해서 였다. 읽는 동안 내내 고독했고 내내 절망했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저는 그 사람이 고독에 있어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멀리 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뒤에 나와 있는 '옮긴이의 말'을 옮겨 적는다.
수용소 시절, 견디기 힘든 극한 상황에 처한 모렐과 그의 수용소 동료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건 상상 속의 코끼리다. 좁디좁은 감방 안에서 그들은 자유로운 코끼리를 상상함으로써 절망에 빠지지 않고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다. (중략)
'상상의 코끼리'와 맥락을 같이하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로베르라는 친구가 '보이지 않는 여자'를 상상해내고 마치 감방 안에 그 숙녀가 있는 것처럼 예의를 갖춰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 '존재하지 않는 숙녀'로 인해 수용소 생활은 완전히 달라진다.
극한상황에서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투쟁은 '풍뎅이 사건'에서 한층 더 부각된다. 모렐은 자신이 생전에 치른 가장 힘든 투쟁이 풍뎅이 보호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허기진 배로 무거운 시멘트를 나르는 강제노동을 하던 중, 모렐은 발밑에 떨어진 풍뎅이 한 마리를 발견한다. 뒤로 나자빠져 몸을 뒤집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풍뎅이를 그는 지친 몸을 구부리고 뒤집어준다. 그렇게 시작된 '풍뎅이 구하기'에 다른 포로들까지 가담한다. 포로들은 심지어 휴가시간에도 쉬지 않고 풍뎅이 구조에 나선다.
작품을 읽는 동안 인용한 세 부분에 포스트 잍을 붙여 두었었다. 읽고 나서 '옮긴이의 말'을 보니 그 부분들이 언급되어 있었다.
여백없이 빽빽한 활자들로 뒤덮힌 629쪽의 녹록치 않은 분량. 거기다 툭 하면 책에서 눈을 떼고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게 했다. 위 인용한 부분을 읽고 나서는 오래 빈 공간을 서성거렸다. 두 번째 인용 부분은 작품에서 '뒤파르크 사건'으로 지칭되는데 그 기막힌 반전에 한동안 헤어나오질 못했다.
*
책을 읽으며 그어놓은 밑줄, 여백에 써놓은 단상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책장을 덮는다. 다음 기회에 하늘의 뿌리를 포함하여 그의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읽도록 하겠다. 이제 일로 돌아가자. 떠나있는 동안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스스로 자처한 일.


